https://hygall.com/544014575
view 1687
2023.05.21 17:26
컬러버스 세계관임
스크롤 주의
어울리는 지는 모르겠지만 쓰면서 퀸의 Under/Pressure 들었음...






여름은 이미 5월부터 여러 감각으로 소란스럽게 시작을 알린다. 겨울에는 하루에 몇 분정도 간신히 해가 드는 창문으로 새벽녘부터 쏟아지는 햇살. 덕분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달려도 피부에 감겨드는 공기는 이미 미지근하다. 며칠 전보다 더 바삭한 햇볕에 바닥의 그림자는 더 선명하고, 학교 캠퍼스를 크게 도는 러닝 코스를 따라 만개한 장미꽃이 가득하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기에 잠시 뛰던 걸 멈추고 탐스럽게 핀 장미꽃 중에서도 유난히 더 검은 한송이를 조심스럽게 붙잡아 향기를 맡는다. 일년 중 가장 오지 않았으면 하는 여름은 성큼 다가오고 검은 장미향은 올해도 여전히 달콤하다. 





학기가 끝나 러닝 이후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은 한산했다. 이제 기숙사를 비워야하는 날짜는 불과 며칠 뒤로 다가왔다. 부쩍 조용해진 기숙사 복도를 걸어 태섭은 “Jason & Song” 명패가 달린 기숙사 문을 열었다. 샤워를 하고 늘 먹던 대로 시리얼이나 사과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하려다 냉장고 한쪽 구석에 언제 사놓은 건지 기억도 가물한 고기 한덩이가 눈에 띄었다. 오늘 저녁은 약속이 있고 내일은 멀리 떠나는 일정을 잠시 생각하다 고기를 꺼내들었다. 익숙한 동작으로 팬을 예열하고 고기를 올린 후 고기가 익는 걸 기다리는 동안 식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리포트와 책들을 정리했다. 대학 농구 선수들은 ‘대학’과 ‘농구’ 둘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기에 디비전 1 토너먼트가 끝난 4월은 밀린 과제와 테스트, 보강으로 정신 없이 지나갔다. 어제로 숨가빴던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더이상 머리 아픈 과제는 없어 속이 시원하면서도 갑자기 많아진 자유 시간에 막막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식탁이 정리되었다 싶은 순간 탄내가 올라와 태섭은 시계를 확인하며 황급히 불을 껐다. 검은 팬 위에서는 탔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던 고기를 흰 접시에 올리니 그제야 몇군데 탄 곳이 보였다. 태섭은 적당히 탄 부분을 잘라내고 소금간도 하지 않은채 오버쿡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한 쪽이 푹 꺼진, 때가 탄 소파 앞에 어지럽게 놓인 이삿짐 상자들을 바라보는데 입안이 썼다. 요리는 몰라도 고기 하나는 정말 잘 굽는 정우성이 그리울 때도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제이슨이 하품을 하며 주방으로 나왔다. 

“굿모닝. 아침부터 고기?”
“굿모닝. 빨리 먹어치워야 해서.”
“근데 다 탔는데?”
“그렇게 심해?” 

탄 부분은 얼추 잘라낸 줄 알았는데 부족했나보다. 태섭은 조각난 검은 고기를 내려보다 개중 가장 큼직한 조각을 입에 우겨 넣었다. 어차피 벌크업을 위한 단백질 섭취일 뿐이라 맛은 별 상관이 없었다. “looks  yummy.” 커피를 내리며 제이슨은 괜히 태섭을 놀렸고 태섭은 어깨만 으쓱했다. 

“오늘 몇시에 나가?”
“곧. 조이랑 점심 먹기로 했어.”
“짐 옮기는 거 도와줄까?”
“그럼 좋지.” 

제이슨은 여자친구인 조이와 오늘부터 국립공원으로 캠핑을 간다. 5월의 국립공원은 온통 초록색이라 특히 아름답다며 몇주전부터 태섭에게 계속 자랑했었다. 고등학교 때 조이를 만난 이후로 색을 보게된 제이슨은 종종 color blind인 태섭에게 색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공대생인 제이슨은 안타깝게도 말재주가 별로 없었고 태섭은 제이슨이 말하는 아름다움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 어쨌든 제이슨은 그 특별한 캠핑을 위해 일찍 방을 비우기로 했고 지난 학기 동안 정들었던 제이슨과는 오늘 안녕이었다. 

“아, 이제 정에게 내 방 쓰라고 해.”
“됐어. 필요 없어.”
“왜? 너희 헤어졌어? 어쩐지 요새 정이 안보이더라.”
“토너먼트 때문에 바빠서 못 온거야.”
“이제 사귄다는 건 부정 안해?” 
“... 오늘 조이랑 여행 가기 싫어?”

태섭이 조용히 주먹을 들어올리자 제이슨은 장난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해도 제이슨은 항상 저렇게 장난을 치지 않고 정우성의 얘기를 넘긴 적이 없었다. 계속된 제이슨의 놀림에 정우성이랑 정말 커플처럼 보이는지 태섭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어쩌면 같은 농구팀원을 제외하고 친구라고 할 만한 유일한 사람이 정우성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정우성이 운전만 1시간을 해야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주말마다 태섭의 기숙사를 찾아오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정우성이 태섭을 찾아오는 이유는 태섭이 보기에 명확했다. 태섭의 기숙사에서 야외 농구코트가 가까웠고, 이 동네에서는 드물게 아시안 식재료가 있는 큰 마트가 근처에 있는데다 기숙사에는 큰 냉장고가 있는 제법 번듯한 주방이 있었다. 무엇보다 주말이면 조이네 집에 가는 제이슨 덕분에 제이슨의 게임기를 주말 동안 둘이 독차지 할 수 있었다. 

“근데 진지하게 내방 써도 돼.”

제이슨이 커피 두 잔을 내려 한 잔을 태섭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도 어디 가기로 했거든.”
“그래? 어디?”

커피를 마시면서 태섭이 대답 대신 눈짓으로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여 있는 엽서를 가리켰다. 기숙사에 살지도 않으면서 뻔뻔한 정우성이 “Jason & Song & Jeong”이라고 큼직하게 써놓은 종이, 토너먼트 경기 일정표, 게임 승패를 기록한 표 등이 빽빽하게 붙어 있는 와중에 정우성이 눈에 잘 띄도록 가장 큰 자석으로 붙여놓은 엽서에는 근방에서 유명하다는 해변 사진이 담겨있었다. 

“바다? 재밌겠네.”
“글쎄”
“왜? 바다 안 좋아해?”

마치 컵 안의 커피처럼 검은색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떠올리다 태섭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냥 우성이가 우겨서 가는 거라서.”
“뭐든 안 그랬나.”

태섭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조이네 집에 대부분의 물건이 있기 때문에 옮겨야 할 짐이 많지는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이삿짐을 제이슨의 차로 옮기고 나니 벌써 점심 시간이 가까워졌다. 마지막으로 놓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러 제이슨은 방으로 들어갔고, 태섭은 넓어진 주방과 거실을 낯설어하는 중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태섭을 찾는 전화가 왔다고 알려주려 온 RA였다. 

“여보세요.”
“태섭아!”
“왜.”

또 정이구나 그런 표정으로 미소짓는 RA를 보는게 괜히 민망해서 태섭은 퉁명한 목소리로 전화선만 꼬아댔다.

“시험은 잘 끝났어?”
“그냥, 뭐…”
“망했구나?”
“아니거든.”
“공부한다고 나도 안 만나줬는데 이번에는 잘 봐야지 태섭아.”
“왜 전화했어?”
“오랜만에 통화하는건데 너무 차가운거 아니야?”
“나 지금 뭐 하던 중이었어.”
“뭔데? 원래 아무것도 없는 시간이잖아.”
“제이슨 이삿짐 나르는거 도와주는 중.”
“아 제이슨. 안부 전해줘.”
“알았어. 그래서 왜 전화 했는데.”

RA가 통화를 짧게 하라고 하진 않았지만 괜시리 시계만 쳐다보면서 눈치를 보게되는 건 어쩔 수 없어서 길어지려는 우성이의 말을 끊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자고.”
“선약있어.”
“너무해. 나에게 얘기한 적 없었잖아.”
“너도 오늘 온다고 한 적 없잖아.” 
“근데 태섭아, 네가 저녁 같이 먹을 친구가 있었어?”
“끊는다.”
“아아아, 잠깐만 태섭아”

정우성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수화기 밖으로 새어나가 분명히 RA에게도 들렸을 것이었다. 손으로 수화기를 살짝 막았다가 징징거리는 소리가 줄어들을 때 태섭이 급하게 말했다. 

“암튼 저녁은 같이 못 먹어.”
“칫… 그럼 빨리 끝내고 와. 나 오늘 저녁 때 갈 거야.”
“내일 출발한다며 왜 오늘 와?”
“아침 일찍 출발해야지! 내일 아침에 너 픽업해서 가면 늦어.”
“...알았어.”
“그럼 일찍 돌아오는거다?”
“알았다니까.”

잔뜩 들뜬 정우성을 말릴 자신이 없어서 태섭은 그냥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조금 있다 봐” 마지막 정우성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살가웠다. 





“제이슨.”
“잘 지내.”

마지막 확인이 끝났는지 방을 나오던 제이슨과 마주쳤고 제이슨이 내민 손을 맞잡아 서로 가볍게 포옹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장난이 짓궂긴 했지만 그래도 이별에 익숙해진 태섭도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여태까지 만났던 룸메이트 중에서 가장 좋은 애였다. 

“게임기 놓고 간다. 마지막 날에 찾으러 올게. 정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줘.”

냉장고에 붙어 있는 격투게임 승패지를 가리키며 제이슨이 눈을 찡끗했다. 게임을 할 때마다 집요하게 정우성이 그어 놓은 수십개의 작대기를 세보진 않았지만 근소하게 정우성이 앞서고 있을 것이었다.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이럴 땐 괜한 거절이 오히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든다는 걸 힘들게 배웠기에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우성이가 안부 전해달래.”
“나도 항상 응원한다고 전해줘.”
“응원?”
“그런 게 있어.”

농구는 물론이고 모든 스포츠에 관심 없는 제이슨이었다. 의아했지만 별 말 없이 제이슨을 배웅했다. 

“즐거운 방학 보내고 다음에 또 보자.”
“응 너도.”

적지 않은 살림살이를 실은 제이슨의 차가 점이 될 때까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태섭은 과연 다음 학기에도 이 곳에 제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하지 않은 무거운 속내를 힘겹게 삼키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감상에 젖기에는 오늘도 바쁜 하루가 태섭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 여름 방학 동안 거주할 집을 찾느라 오후 내내 모터바이크를 타고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다. 사람이 살라고 내놓은 집인지 창고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매물이 대부분이었으나 코치가 소개해준 지인이 세를 내놓은 마지막 집은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항상 갖고 싶어했던 정우성도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큰 욕조가 있는 화장실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욕심이 났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예산이어서 월세를 내고 나면 수중에 남을 돈과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선 얼만큼의 시급을 주는 파트타임 잡을 몇개나 늘려야 하는지를 계산하다 머리가 아파와 그만뒀다. 그 집을 제외하고 태섭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형편 없는 선택지를 생각하면 그냥 자신의 집에 들어오라던 정우성의 제안이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태섭은 그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역 컨퍼런스에서 떨어진 태섭의 팀과 달리 우성이 속한 농구팀은 이번 토너먼트에서 Sweet Sixteen까지 올라갔다. 팀원들과 함께 TV를 통해 토너먼트를 지켜보던 태섭의 눈에도 흑백 중계 화면 속 정우성은 주변의 빛을 모두 흡수한듯 반짝반짝 빛났다. 이번에야 말로 우성이 드래프트에서 지명될지도 몰랐다. 그날 밤은 더더욱 손에 과제도 잡히지 않아 애꿎은 종이만 구겼더란다.


기숙사에 들를 시간이 없어 약속 장소 바깥에 바이크를 세우고 이미 시끌벅적한 술집으로 들어섰다. 태섭이를 보고 손짓하는 팀원들에게 다가가며 맥주를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비록 March Madness에 진출하진 못했지만 팀원 대부분이 태섭과 비슷하게 디비전 2, 3에서부터 여기까지 치열한 경쟁의 사다리를 기어올라온 선수들이었다. 목전에서 떨어진 건 아쉽지만 내년에는 갈 수 있을거라는 다짐을 나누고, 이번 시즌에 있었던 다사다난한 에피소드를 곁들이니 술은 끝도 없이 계속 들어갔다. 파티나 술을 즐기진 않아도 이런 모임에서 어울리며 배운 영어가 또 도움이 된 것도 맞아서 가급적 초대는 거절하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악착같이 노력하며 버틴 결과 언젠가부터 꿈도 영어로 꾸기 시작했다. 의사소통의 문제는 많이 해소되었지만 그래도 영어를 쓸 때의 태섭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술자리가 마냥 편하지 만은 않았다. 농구를 할 때 팀원과 잘 소통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였지만 목소리도 더 크고 더 많이 웃는 태섭의 모습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정우성과 함께 술을 마실 때보다 훨씬 빠르게 피로가 몰려와 태섭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송! 우리랑 노는거 재미없어?”
“아냐 그런거.”
“아니긴. 아까부터 시계만 보던데.”
“정우성이 오늘 온다고 해서 너무 늦지 않게는 돌아가야 해.”
“맨날 정이야? 우리랑도 좀 놀아줘.”
“정? 걔네 학교는 오늘 파티한다던데?”
“또? 역시 Sweet Sixteen이라 이건가?”

잠깐 잦아 들었던 토너먼트 얘기가 재점화되어 팀원들은 다시 아까 했던 얘기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취한 사람들의 빙빙 도는 대화를 가만히 듣던 태섭은 나가기에 적당한 타이밍을 노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이크는 술집 앞에 세워두고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우성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나초칩이 다 떨어진 게 기억이나 빙 돌아 마트에 들렸다. 군것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성이지만 유독 태섭이 기숙사 근처에서 파는 특정 나초칩만은 사족을 못쓰고 좋아했다. 없다고 하면 그게 뭐라고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칭얼거릴 정우성의 얼굴을 떠올리다 키득거리면서 태섭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당초 예상했던 귀가 시간보다 늦어져 서둘러 돌아온 보람도 없이 기숙사는 조용했다. 금방 올거라 생각했는데 씻고 나온 뒤에도 정우성이 올 기미는 없었다. 시계와 창 밖을 번갈아보던 태섭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엇갈릴까 싶어 차도를 따라 걸으며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 박스로 향했다. 정우성의 집 번호를 누르고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으며 신호음을 듣다가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기본 안내 음성이 흘러나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쩌면 정우성은 파티에 참석했을지도 몰랐다. 토너먼트의 성과를 축하하며 노느라 태섭과의 약속을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방적인 정우성의 약속이라는 게 억울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태섭이 만약 꿈의 March Madness 무대에 오르고 거기에서 16강까지 진출했다면 아직까지도 꿈 속을 떠다니는 듯 했을 거였다. 혹시라도 술취한 행인에게 시비라도 걸릴까 두꺼운 후드를 뒤집어 쓰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길었다. 학기가 끝난 캠퍼스는, 그리고 기숙사는 고요했다. 유학 온 직후 첫 몇 개월 이후 이렇게 조용한 밤은 처음이라 정우성이 없어 넓어진 침대 위에 누워서도 잠이 안왔다. 어두운 천장이 마치 검은 바다처럼 태섭을 집어 삼킬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떠도 어둠이었다. 내일은 아득했다.





오랜 시간을 뒤척이다 간신히 잠들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단잠에서 깼다. 태섭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비척이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태섭아~”

어제 그토록 기다렸던 정우성이 짐을 잔뜩 든 채 울먹이며 문 앞에 서있었다. 

“...뭔데”
“태섭아… 나 어제 너무 힘들었어.”

현관에 짐을 내팽개치고 태섭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정우성이 과장된 울음 소리를 냈다. 태섭은 익숙하게 정우성의 머리를 밀어내며 빠져나오려 했는데 평소에는 밀려나주는 정우성이 지금만큼은 완강했다. 

“왜인지 이유는 안 물어봐?”
“...지금 몇시야?”
“네가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인데 어제 늦게 잤어?”
“어. 더 잘래.”
“안돼, 잠깐만 태섭아~나 어제 힘들었다니깐?”

침대로 가려했지만 태섭에게 안긴 우성이 태섭을 소파로 밀어내 태섭은 강제로 우성을 껴안은채 소파에 어정쩡한 자세로 눕게 됐다. 소파의 가장 푹 꺼진 부분에 정우성의 몸이 딱 들어 맞았다.

“아니 어제 저녁에 갑자기 차가 고장나서 견인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간단한 문제인줄 알았는데 아니래. 뭐가 문제인지 뜯어봐야 아는데 언제 수리될지 모른다는 거야. 빠르면 일주일, 길면 몇 주 걸릴거라는데 말이돼? 몇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문제가 뭔지 모른대. 차도 없어서 집에 걸어갔는데 도착하니까 엄청 늦은 시간이었어. 못갈 것 같다고 전화하려고 했는데 너무 늦어서 전화도 못했어. 그래서 아침에 첫차 시간 되자마자 바로 온거야 태섭아. 어제 나 없어서 많이 외로웠어?” 

눈을 반쯤 감은 채 품 안에서 비비적거리는 정우성의 머리를 밀어내다가 나중에는 그냥 포기한 태섭이 긴 설명이 끝나자 하품을 하면서 물었다. 

“그래 고생했네. 근데 진작에 정비한다고 하지 않았어?”
“주말에 운전해야하는데 정비할 시간이 어딨어. 지난 달에는 토너먼트 때문에 안썼고 오랜만에 시동 거는데 불길한 소리 나더니 펑하고 퍼지더라. 태섭아, 나 무서웠어. 소리 진짜 컸다고.”
“아 그래. 그럼 오늘 바다는 취소네?”

적당히 대답해주며 하품을 하던 태섭은 갑자기 고개를 확 든 우성 때문에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야. 가야지.”
“차도 없는데 무슨 수로.”
“네 오토바이 있잖아.”
“장난이지?”
“아니 나 진심인데.”

말도 안되는 제안을 한 정우성은 정작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태섭은 정신이 확 들어서 정우성을 밀쳐냈다. 

“차로 운전을 해도 몇 시간인데 오토바이로 어떻게 가?”
“잘.”
“농담 아니야.” 
“나도 농담 아니야.” 
“넌 몸이 재산인 애가. 위험해.”
“너는 타잖아.”
“그냥 동네 돌아다니는 거랑 이거랑 같냐? 그리고 오토바이 뒤에 타는 거 되게 불편해. 너 몇시간 씩 절대 못 타.” 
“탈 수 있어. 힘들면 중간에 쉬면서 천천히 가면 되잖아.”
“안돼. 그냥 다음에 가.”

체온이 높은 정우성이 딱 달라 붙어 있어서 아침부터 땀이 날 것 같아 태섭은 발로 우성의 옆구리를 밀어냈지만 우성은 태섭의 허벅지를 자신의 옆구리에 바짝 붙이며 더 엉겨왔다. 삐그덕 거리는 낡은 소파에서 솟아오른 먼지가 아침 햇살이 가득한 거실 위를 부유했다. 정우성은 잔뜩 울상을 지어보였다.

“다음에 언제? 지난 번에도 결국 못가서 이번에 학기 끝나면 꼭 가기로 했잖아.”
“근데 지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고집 부리지 마.”
“싫어. 난 지금 가고 싶어. 갈래.”
“하아… 정우성.”
“내 생일 선물로 내가 원하는 거 해주겠다며. 이걸로 할래.”
“진심?”
“생일 선물도 안 챙겨줬잖아. 이건 꼭 해줘.” 

인상을 쓰느라 호두턱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정우성의 가짜 눈물 정도는 간파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진심인 모양이라 태섭은 한숨을 쉬었다. 이 상태의 정우성은 말릴 수 없었다. 지난번에는 일하던 식당에 갑작스레 결원이 발생해서 태섭이 대타를 뛰느라 못 지켰던 약속에, 생일 얘기까지 꺼내니 태섭도 할 말이 없었다. 생일 얘기는 억울하긴 했다. 아닌게 아니라 정우성 생일에 정우성은 March Madness가 한창이라 저 멀리 떨어진 동부에 있었다. 아마도 22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생일이었을텐데 뭐가 아쉬운지 장거리 시외 전화를 걸어 송태섭을 한참 동안 붙들고는 나중에 원하는 걸 해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무얼 요구할지 조금 두렵기는 했으나 맨날 생일도 느리고 뭐든지 다 자기보다 느리다고 놀려대서 기껏해야 형님이라고 불러보라는 소리나 할 줄 알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린 소원권을 이런 곳에서 쓸 줄이야. 눈물로 반짝이는 정우성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결국 태섭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너 힘들어도 난 모른다.”
“당연하지! 태섭아, 역시 넌 최고야.” 





정우성이 힘들다고 칭얼거릴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시끄러울 줄은 몰랐다. 출발부터 정우성이 집에서 챙겨온 그 많은 짐을 다 못 싣는다고 했더니 사탕 뺏긴 아이처럼 울상이다가 겨우 달래서 최소한의 짐으로 출발하려니까 헬멧이 너무 작다, 뒷좌석이 너무 좁다 난리였다. 처음 타는 오토바이가 무섭다고 천천히 가라고 호들갑을 떨 때는 언제고 (“지금 시속 30km야. 내가 허리 잡으라고 했지 터뜨리라고 안했어.” “자동차 앞유리도 없이 맨 몸으로 달리니까 체감은 더 빨라서 무섭단 말이야.” “이래서 바다 언제 갈래?” “원래 가는 과정도 여행이래. 태섭이는 너무 즐길 줄 모르는 것 같아.”) 출발한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허리가 아프다, 엉덩이가 아프다 얼만큼 왔냐 난리였다. 결국 눈에 보이는 적당한 식당에 들러서 조금 늦은 아침을 먹으며 쉬기로 했다. 



“우리 어디까지 왔어? 한 여기쯤?”

언제 튀긴 건지 의심스러운 눅눅한 감자튀김을 집어먹던 손으로 지도를 펼쳐 한 곳을 가르켰다. 지도에는 정우성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마다 점점이 기름자국이 남았다. 태섭은 한참 앞서 있는 정우성의 검지 손가락을 잡아 현재 위치로 원위치 시켜주었다. 

“에게? 겨우 여기?”
“속도 좀 내려고 하면 무섭다고 꽥꽥거리던 사람이 누구더라?”
“이젠 안그래. 완전 적응했어.”
“퍽이나. 나 아직도 허리가 얼얼해. 멍들겠어.”

태섭은 슬쩍 티셔츠를 들어 정우성이 터뜨릴 기세로 꽉 잡았던 허리를 확인했다. 다행히 자국은 안남은 것 같았는데 우성이 황급히 티셔츠를 내리라고 손을 휘젓길래 아끼는 옷에 기름이 묻을까봐 티셔츠를 내렸다. 

“태섭아. 농구 코트에서도 그렇고 너 노출 너무 좋아하는거 아니야?”

어이 없는 소리에 태섭의 미간이 좁아졌다. 태섭의 기숙사에서 옷 좀 입고 다니라고 해도 훌러덩 벗고다니던게 누군데 저런 소리를 했다. 태섭이 대꾸 없이 눈만 가늘게 뜨자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우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표정 좀 펴.”
“되게 재미 없는 농담이다.”
“난 재밌는데. 너 표정 진짜 웃겨.”

정우성이 주름진 태섭의 미간을 꾹 누르며 “못난이”라고 놀렸다. 태섭이 짜증스럽게 정우성의 손을 쳐냈다.

“아 기름 묻은 손가락 더럽다고!”
“더러워? 그럼 닦아줘야지.” 

뭐가 정우성을 자극한 건지 ‘달칵’하고 스위치가 켜진 표정으로 손가락을 쭙 빨더니 다시 태섭을 붙잡아 미간을 문질렀다. 

“아 진짜 그만하라고!” 

태섭이 질색하고 정우성을 밀어내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자 식탁이 크게 덜컥였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둘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자리에 앉아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를 죽인채 짜증을 내며 송태섭은 정우성의 발을 밟았고 정우성은 태섭에게 감자튀김 하나를 던졌다. 다시 한번 소리가 높아지려던 차에 웨이트리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은 둘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계속 웃는 정우성의 얄미운 얼굴을 노려보며 태섭은 휴지로 이마를 벅벅 닦았다. “야야 빨개진다 그만해.” 그러면서 정우성은 여전히 장난치며 닦아주겠다고 손을 내밀어서 태섭은 다시 한번 정우성을 걷어찼다. 이번에는 꽤 아플텐데도 정강이를 붙잡으면서 엄살 부리는 정우성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자동차로 운전했으면 이미 도착했을 시간인데 천천히 달리다보니 이제 반 조금 넘은 지점이었다. 태섭 역시도 오랜 운전으로 허리가 아파서 다음 gas station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뻐근한 골반을 툭툭 두드리는데 가게에서 사온 차가운 콜라캔을 건네면서 우성이 물었다.

“내가 운전할까?”
“네가?”
“응. 앞으로 쭉 직진인데. 할만 하지 않을까?”

태섭은 차 한대 보이지 않는 직선도로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바꿔 우성을 앞에 두고 뒤에서 끌어 안은 자세로 태섭은 우성에게 바이크를 조작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앉은 키도 얼마나 큰지 어깨 너머로 보기도 힘들어 그냥 정우성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시동을 켜니 정지된 바이크가 덜덜거리며 묵직하게 진동했다. 스로틀을 잡은 우성의 손 위로 태섭은 자신의 손을 겹쳤다. 

“좀 앞으로 가봐. 손이 잘 안 닿잖아.”
“태섭아 그건 네 팔이 짧은-”

태섭이 콩하고 박치기를 해서 쓸데 없는 소리를 차단했다. 둘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 소리만 요란했지 아프진 않을텐데도 우성은 습관처럼 울상을 지었다. 

“천천히 당겨. 생각보다 예민해서 확 당기면 급발진해서 위험해. 이게 브레이크. … 너 손 커서 브레이크 잡기는 편하겠다.” 

우성은 힘을 빼고 스로틀을 잡고만 있고 그 위로 우성의 손을 잡은 태섭이 부드럽게 스로틀을 당겼다. 바이크가 출발하자 우성은 뒤늦게 땅을 딛고 있던 발을 집어 넣었다. 어느 정도 우성이 익숙해지도록 대신 운전하다가 태섭이 천천히 손을 뗐다. 우성이 조작하자마자 일정하던 바이크의 속도가 뚝 떨어지며 바이크가 덜거덕거렸다. 

“이거 넘어지는거 아니야?”
“이렇게 달리면 넘어지겠지.”
“으아 이거 느낌 이상해.”
“잠깐 그렇게 확 틀지마.”

다시 황급히 태섭이 스로틀을 잡았다. 그 뒤로 몇 번 태섭이 도와주니까 우성은 금방 감을 잡았다. 우성이 늘 말하는 대로 우성은 뭐든 빨리 배웠다. 운전면허도 한 번에 땄다고 했다. “내가 면허 따는거 도와줄까?” 언젠가 우성이 그렇게 물었는데 태섭은 미래와 중고차 가격 사이를 저울질하다 결국 거절했다. 우성이 운전을 가르칠 땐 얼마나 놀릴지 상상만 해도 속이 터질 것 같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반대로 우성에게 바이크를 가르치는 건 쉬웠다. 우성이 운전하던 걸 긴장하며 지켜보다 곧잘 하는 모습에 됐다는 판단이 들어 겹치고 있던 손을 떼서 우성의 허리를 붙잡았다. 

“어때? 나 운전 잘해?”
“까불지 말고 집중해.”
“넌 칭찬에 너무 인색해.”
“그만큼 네가 스스로 칭찬하잖아.”

정우성이 크게 웃었다. 밀착한 몸을 통해 웃음소리가 진동으로 전달되었다. 태섭도 조용히 미소지었다. 잘한다고 해주려고 했는데 정우성이 한발 앞서가는 걸 어떡하란 말인지. 그래도 칭찬하려고 했다는 말은 안하기로 했다. 어느새 하루 중 제일 해가 높게 떠있는 시간이었다. 둘의 그림자가 바이크의 타이어 바로 옆에 짧게 따라 붙었다. 앞에 앉은 우성이 대부분의 바람을 막아주었지만 그래도 세찬 바람에 그림자 속 태섭의 옷이 세게 나부꼈다. 옆으로 지나가는 도로 위의 선들이 지나치게 빨라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운전할 땐 몰랐는데 뒤에서 남이 운전하는 걸 타니까 빠른 속도감이 와닿아 태섭은 저도 모르게 우성의 허리를 더 꽉 잡았다. 뜨끈한 몸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시내와는 확연히 다른 도로 풍광을 바라봤다. 뭐가 뭔지 구분이 되진 않았지만 바람에 물결치는 나뭇잎들이 만들어내는 검은 파도만은 똑똑히 보였다. 나뭇잎은 초록색. 제이슨에 따르면 5월의 초록은 더 아름답다고 했다. 태섭은 따뜻한 우성의 등에 기대 초록이 무엇일까 상상해보았다. 





길어진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에야 둘은 목적지인 바다에 도착했다. 솔직히 반신반의하면서 출발했는데 이렇게 도착하니 얼떨떨했다. 바이크에 내려서 기지개를 피며 오랜 시간 구겨져있던 몸을 폈다. 천천히 해변가를 걷다가 적당한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해가 지기 시작해서 태섭이 만류해도 우성이 기어코 챙겼던 스노클링 마스크는 쓸 일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바다에 오자고 고집한 것치고 우성은 별다른 반응 없이 태섭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태섭은 예상했던 것과 똑같은 바다를 바라봤다. 고향에서 보던 것과는 반대편의 바다였지만 여기도 태평양이라고 했다. 똑같이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세상의 끝. 매일 바다를 바라보던 익숙한 뒷모습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더 이상 바다가 파랗지 않았을 텐데 태섭이 보는 것과 똑같이 검기만 한 바다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매일 바라보던 건지 태섭은 반대편 바다에 와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나 옷 사이로 파고드는 깔깔한 모래, 짠내가 섞인 바람까지 바다는 어딜가나 똑같았다. 소원권을 쓸 만큼 정우성이 오고 싶어 했던 그런 환상 속의 바다는 여기 없었다. 아마 우성도 실망했을 터였다. 

“태섭아.” 
“응”
“너랑 오니까 진짜 좋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우성은 태섭의 예상과 정반대의 소리를 했다. 태섭은 우성을 돌아보았다. 

“우리 다음에도 또 오자.”

TV 속에서 봤을 때처럼 정우성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태섭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꽉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다음에. 우성은 항상 미래를 말했다. 우성에겐 태섭에게 없는 다음이 있었다. 태섭은 퉁명스럽게 나가는 말을 막을 수 없었다.

“우리가 언제 또 오겠냐. 지금 실컷 봐둬라.”
“방학 때 차 고쳐지면 또 와도 되고 내년 여름 방학도 있고 시간은 많지.”
“없을 거야.”
“왜에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해?”
“너는 성공할 테니까.”

말을 뱉자마자 아차 싶었다. 우성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었고 이렇게 말하려던 건 더 아니었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태섭의 손을 잡는 우성이 더 빨랐다.

“맞아. 우린 성공할꺼야.” 

우성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장난끼 하나 없이 100% 진심인 표정이었다. 항상 힘을 주던 태섭의 얼굴 근육에 힘이 탁 풀렸다. 웃는 우성의 얼굴 뒤로 펼쳐진 바다가 파랗게 물들어갔다. 떨리는 태섭의 눈동자가 닿는 모든 곳마다 모든 것들이 흑백의 옷을 벗고 파랗고, 빨갛고, 노란 가지각색의 빛깔로 변했다. 태섭의 세상은 순식간에 뒤집어졌는데 마치 원래 그랬다는듯 그렇게 찬란하게. 다들 바다는 파란색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파란색이 이렇게 벅찬 색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충격적으로 강렬한 붉은 빛으로 물든 하늘의 가장자리와 맞닿은 먼 바다는 검정에 가까운 짙은 색이고 가까운 바다는 투명에 가까운 청명한 파랑, 그리고 파도가 칠 때마다 이는 포말은 두꺼운 하얀색. 그 모든 빛깔이 멀어졌다가 뭉쳤다가 산산히 부서지는 반복적인 과정은 다시 흑백의 세상으로 돌아가도 영원히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홀린듯 바다를 바라보는 태섭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던 우성이 앉은 자리에서 반쯤 몸이 들릴 정도로 세게 태섭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감히 눈도 감지 못하던 태섭이 뒤늦게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으스러질 정도로 태섭을 꽉 껴안던 우성이 한참만에 손을 풀었다. 

“태섭아. 넌 정말 느리다니까.” 

볼을 쓰다듬다가 피어싱을 한 귀를 만지작거리는 우성이의 손길은 다정했지만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변함 없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우성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날만을 오래 기다렸어.” 

이번에는 태섭이 우성을 끌어안았다. 그대로인 따뜻한 눈동자를 조금이라도 더 마주했다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허리를 꽉 둘러 안았다가 목덜미를 쓰다듬는, 우성의 손이 지나가는 몸의 모든 세포가 소리를 질렀다. 형용할 수 없는, 생전 처음 겪는 감각이었다. 평생을 궁금해했던 파랑과 빨강과 그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색들이 눈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지만 온 우주는 이미 태섭의 품안에 있었다. 태양이 바다 뒤로 저물고 금세 어두워졌지만 태섭에게 바다는 더이상 검은 바다가 아니었다. 밤바다가 똑같은 검은색이더라도 파랑은 그대로임을 이제는 안다. 끝이 아니었다. 우성이 항상 말하던 미래도, 믿지 않던 영원도 함께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힘겹던 내일은 완전히 새로운 하루일 것이다. 










바이크는 북산의 색이었다. 현재 유니폼 색은 상상했던 이미지와 달리 노란색이고 우성의 유니폼은 산왕 때나 지금이나 흰색이었다. 우성과 잘 어울렸다. 바람결에 넘실거리는 나뭇잎은 사랑스러운 연두색, 그 뒤 상록수는 진한 초록색이었다. 캠퍼스 주위에 만개한 5월의 장미는 향기만큼이나 달콤한 가지각색의 붉은 빛을 띄었고, 우성의 차는 은빛이 섞인 연한 파랑색, 밤하늘은 사람들의 말처럼 검지만은 않고 파랑이 한방울 섞인 아주 진한 군청색이었다. 밤바다에서 피워올린 작은 폭죽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흰빛이 섞인 노랑. 마이클 조던의 유니폼은 열정의 빨강. 게임 속 주인공들은 현실보다는 저채도의 색. 늘 먹던 후르츠링 시리얼은 여러가지 형광색. 아침의 모래사장은 정우성이 가장 좋아하는 나초와 비슷한 빛나는 황금색. 농구공은 지는 석양의 오렌지 빛깔. 그 수많은 색 중에서도 내 우주의 원점인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
우성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