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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0 00:03
우태우 댐뿅댐 있음




송태섭은 강단있는 남자다. 남들 다 겪는 세상 풍파가 걔 위를 수십 번 휘몰아쳐도 송태섭은 자신을 잃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방황하고 길을 잃어도 결국은 송태섭이 선택한 길. 송태섭을 아는 사람들은 다 그를 걱정하지 않는다. 어디 서도 잘 해낼 놈이니까. 잠시 휘청이더라도 결국 다시 서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송태섭이 산왕 전 주장에게서 들은 조언은 색다른 것이었다. 산왕 전 4번, 태섭 미국 메이트의 애인, 최근 정대만과 동거를 결정한 이명헌. 수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모두 송태섭과 한 다리 떨어진 것이었다. 이명헌과는 딱 그 정도 어색함이 있었다. 그런 이명헌이 송태섭에게 먼저 말을 붙여왔다.

정우성과 송태섭의 애인이 같은 학교, 같은 팀, 같은 방에 살게 되었다는 점이 둘의 신경점을 자극했기에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본행이었다. 들이닥친 정대만과 이명헌의 자취방은 방 세 개 짜리 가정집이었고 둘의 방은 한 칸 떨어져 있었다. 그 건조한 우정에 송태섭과 정우성은 안심하고 곧바로 애인과의 며칠을 즐겼다. 송태섭 앞에서 야, 이명헌 공 주는 거 진짜 신기하다. 너랑 비슷한데 달라. 눈빛도 사인도 안 줘서 딴 데 보고 있다가 갑자기 손에 공 들어와있다니까. 하고 다른 포스트가드 얘기에 꽃을 피우는 정대만. 오랜만에 보는 애인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에 거리낌이 없는 바보 정대만. 하지만 절대 걱정할 일이 없기에, 질투조차 못 내도록 무한한 신뢰를 주는 송태섭의 애인. 사랑스러운 정대만의 단단한 무릎에 송태섭이 짧게 키스했다.

송태섭의 유학 학교가 바뀌며 송태섭과 정우성은 30분도 안되는 거리에 머물게 됐다. 한 땅에서만 5시간 시차가 나는 곳에서 이 정도면 옆집 이웃이다. 안 그래도 유학 생활의 외로움으로 송태섭과 정우성은 자주 연락했고 꽤 친해진 참이었다. 송태섭의 전학 소식을 듣자마자 정우성은 활짝 반색했다. 거기 완전 우리 학교 옆이잖아. 안 그래도 기숙사 살기 힘들었는데. 우리도 집 합칠까? 형이랑 정대만처럼.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잠깐 머릿속에 이명헌과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으나 금세 사라졌다. 이건 송태섭에게도 이득인 걸.





-이 방 어떰? (사진)
-ㅇㅋ



“야... 놀리지 말고. 오늘 하루만 같이 자면 안되냐?”
“너 설마 아까 본 영화 때문에 이러는 거냐?”
“...”
“오늘만 이다.”



명허니형 보고 시퍼…
시이발, 나도…
니가 왜 명헌이형이 보고 싶어!?
말고 병신아, 정대만 보고 싶다고!
아하.
에휴…


오늘 하루만 같이 자자…
징그러죽겠네.
아 옆에 누워만 있자고!



그러므로 결국 어느 순간 침대에서 흔들리는 정우성과 눈이 마주칠 때, 송태섭은 이명헌의 조언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약점이라곤 없을 것 같은 남자가 밀랍인형 같은 얼굴로 하던 말. 송태섭.

“정우성한테 너무 휘둘리지마.”



걘 사람을 그렇게 만들거든.






송태섭은 애인을 배신할 사람이 아니다. 흔히 나오는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렇다. 정대만과 수 천 키로를 떨어지게 되었을 때 의무적으로 하는 수음에서 단 한 번도 저보다 큰 키, 마른 근육이 붙은 길쭉한 팔다리, 달뜬 피부 밑에서 떨리는 턱의 흉터 외의 것을 떠올린 적 없다. 송태섭은 신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고 이런 면에서 고지식했다. 송태섭은 걱정하지 않았고 정대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송태섭이 정대만의 수많은 친구들을 경계하느라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정대만의 곁엔 늘 사람이 넘치니까.

시작은 언제나 사소하다. 무서우니까 같이 자자는 부탁. 사람이랑 같이 자니까 좋다는 물꼬. 그렇게 몇 번을 같은 침대에서 자다, 알코올이라는 솔직함과 함께 몸을 섞는 일. 마비된 이성으로 송태섭은 정대만을 떠올렸다. 정우성은 정대만과 체형도, 습관도 포지션도 달랐다. 하지만 단단하고 딱딱한 손이 여자를 사서 안는 것보다 죄책감을 덜었다. 농구공과 수천 번을 마주한 두텁고 까슬한 손은 정대만을 떠올리게 했다.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 있는 송태섭의 사랑, 송태섭을 살아 숨쉬게 했던 사람. 지금은 한 뼘 거리에 닿을 것만 같다. 물론 눈 앞의 정대만은 이명헌의 이름을 부르긴 했지만.



다음 날 눈을 뜨기도 전에 좆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벌떡 일어나 걷은 이불 아래, 송태섭의 성기는 엉망으로 축축했고 허리에는 누군가의 팔이 감겨 있었다. 이런 씨발.

“…야. 일어나.”
“우웅… 형… 좀만…”
“씨발, 일어나라고!”

소리치며 이불을 확 걷어내자 정우성의 매끈한 나신이 드러났다. 시발. 송태섭이 곧바로 다시 이불을 던졌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정우성이 눈을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 송태섭?”
“그래. 이 새끼야.”

평소처럼 아침 인사를 하려던 우성이 송태섭의 얼굴 아래를 보고 입을 굳혔다. 햇볕의 요람 아래 잘 그을린 피부에는 검을 지경의 울혈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어, 이거, 내가.

“내가 한 거냐?”
“그럼 나겠냐?”

지독한 적요가 내려 앉았다. 위 아래로 바쁘게 움직이는 정우성의 눈과 시선이 마주친다. 진동하는 동공에 대답해준다. 우성아. 우리 좆됐어 개새끼야.





송태섭은 사람의 목소리가 그립다는 감각을 미국에서 처음 느꼈다. 국내에선 당연하던 전화 한 통이 아쉽기 짝이 없다. 혹시라도 길을 가다 익숙한 한국어가 들리면 한참을 그 쪽을 바라보게 됐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그런 것이다. 망망대해 속 발만 간신히 디딜 수 있는 섬에 서있는 기분. 그러므로 이 모든 사태를 정우성에게 온전히 돌릴 수 없었다. 같은 침대에서 엉망인 몸으로 일어나는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었을때는 더 그랬다.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지독한 외로움이 정우성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가끔은 저 멀리의 연인을 생각하다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눈물을 위로하는 것도 울게 만든 정우성이다. 빌어먹을. 송태섭이 제 눈가를 닦는 정우성의 뒷목을 잡아 키스했다. 말랑한 살갗과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몸을 울리는 사람의 온기를.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양심은 세모난 모양이라 굴리고 굴릴 수록 닳는다고. 행위가 반복될 수록 죄책감은 무뎌졌다. 첫 날 덜덜 떨며 정대만에게 전화도 못하던 송태섭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정우성과 집을 합치고 함께 장을 보고 몸을 겹쳤다. 송태섭의 일상이 정우성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둘 다 제 애인에게는 착실했다. 정우성은 이명헌의 전화가 오면 꼬리를 흔들듯이 달려나갔고, 송태섭은 밥 값을 아껴 국제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다시 서로가 남았다. 누구보다 가족처럼 굴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은 한국에, 정대만과 이명헌에게 두고 온 것처럼.





한인 마트에서 대충 장을 봐와 불고기를 해먹었다. 간장 구하기가 힘들 줄이야. 정우성은 보기와 다르게 요리를 잘했고 송태섭은 그걸 받아먹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밥 다 됐어. 부르는 목소리에도 보던 영화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지금이 하이라이트였다.
다 됐다니까. 찾아온 정우성도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사각 바보상자에서 두 명 분의 살색이 얽히고 있었다. 정우성이 픽 웃는다. 그 소리에 송태섭이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입술이 맞닿았다.

밥 식는데. 데우면 되지.

맞는 말이었다. 이제 혀를 섞는 일은 대단치도 않았다. 불고기, 정대만이 자주 먹는다고 했던 건데. 이명헌이 좋아한다고 삼시세끼 불고기만 먹는다고 울던 소리가 생생하다. 송태섭이 혀를 움직이며 작게 웃었다. 하지도 않는 이명헌 생각이 든 건 무언가의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질척하게 붙어먹으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허리를 흔들 때, 위에 올라타있던 송태섭은 질척이는 마찰음 사이에 무언가를 들었다. 아주 작아서 잘못 들었나 착각한 소리. 쾌락에 달뜬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든다. 슬쩍 열린 방문 틈 사이로 현관문이 보였다.그 앞에 서있는 거대한 인영도.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이명헌이었다. 송태섭이 숨을 헉, 들이켰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우성은 그런 송태섭을 눈치채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뜨거워 녹을 것 같던 아래가 차갑게 굳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완전히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이명헌은 송태섭을 쳐다봤다. 아주 분명히.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까지 송태섭은 숨을 쉬지 못했다. 순식간에 죽어버린 송태섭에 정우성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야, 왜 그래. 씨발 비켜 봐.

몸을 추스리고 옷을 챙겨입은 송태섭이 급하게 집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엔 아무도 없었다.

정우성을 만나고 몇번이나 했던 생각이 다시 든다. 인터하이에서 이 자식이 넣는 골을 봤을 때, 미국에서 다시 조우했을 때,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뇌를 울리던 경종 중 지금이 가장 크다. 좆됐다.





그 날 저녁,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이상하게 시작하는 번호는 아마 여행용 일회성 유심같았다. 문자는 간결했다. '얘기 좀 할까.'





자취방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곳의 테라스 카페는 정우성이 커피가 맛없다고 질색하던 곳이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정우성에게 이명헌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까. 약속 장소를 통보한 이명헌은 먼저 도착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입에 맞는지 계속해 홀짝거린다. 묘하게 편해보이는 그 모습이 더 양심을 괴롭게 했다. 송태섭이 주먹을 꽉 쥐었다. 조심스럽게 테이블로 다가가자 눈썹을 들어올린 이명헌과 시선이 마주쳤다. 2년 전 고등학교 때도, 6개월 전 마지막 배웅 때도 무저갱처럼 한없이 새카맣던 눈. 그 고요한 검정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어 숨이 막혔다.

정말 이명헌을 마주하자 범람하는 죄책감에 형체가 녹는 것 같았다. 이명헌은 조심히 자리에 앉는 송태섭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카페의 컨트리 음악만이 감돌았다. 그 침묵에 숨이 죄이는 것 같던 송태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로, 미안해요.”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문다. 사과하는 것조차 염치없게 느껴졌다. 이명헌은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떨리는 주먹에 힘을 꾹 주며 송태섭이 말을 이었다.

“실수라고 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로 그래요. 저도 걔도 서로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그게 더, 싫을 수도 있지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송태섭이 다급하게 입을 움직였다. 횡설수설 내뱉는 말들이 원하는 종착지는 하나였다.

정대만에게 비밀로 해줘요.

송태섭은 정대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삶을 뒤흔들고 무너트리다 다시 세운 사람. 정대만을 잃어도 송태섭은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다. 농구도 인생도. 하지만, 결코 지금과 같을 수는 없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정대만은 송태섭에게 그랬다. 감히 필요로 하게 되는 사람. 욕심을 부리게 하는 사람. 송태섭이 멈추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정대만의 소중함을 떠올릴 수록 자신이 저지른 짓이 심장 위로 꾹꾹 쌓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지금이라도 다 놓으며 빌고 싶었다. 원하는 대로 할게요. 까지 들은 이명헌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자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내가 원하는 게 뭘 줄 알고.”

살짝 쉰 목소리는 지독하게 지쳐보였다. 자괴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눈도 마주칠 수 없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냥…”

됐어. 쇳기가 섞인 목소리가 끝을 잃고 흩어졌다. 허탈감이나 우울 같은 것은 이명헌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게 송태섭을 괴롭게 했다.

“정대만한텐 어쩌려고.”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섞인 찰나 이명헌의 눈빛이 빠르게 변했다. 송태섭이 작은 위화감을 느꼈지만 광대한 자책감 앞에 잊혀지고 말았다. 다시 본 이명헌은 여전히 공허하고 지쳐보였다.

“정대만한테는, 말하지 않아줬으면…”
“너무 뻔뻔하네.”

송태섭이 낮은 피고인의 자세를 잃고 요구하자 이명헌이 곧바로 눈을 시퍼렇게 떴다. 아니, 그렇, 죠. 송태섭이 다시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 안의 땀이 축축하다.

“…정대만이 실망할거야. 정말로. 나도 너한테 실망했고.”
“죄송합니다.”
“나 미국 간다니까 너 전해주라고 캐리어 하나를 따로 쥐어주던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씨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 잘못으로 정대만과 헤어질 줄은, 그것도 비참하게 헤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송태섭은 언제나 정면돌파를 선호했다. 비굴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질색이다. 그러나 지조를 잃는 것보다 정대만을 잃는 일이 더 무서웠다. 저, 아직 정대만 사랑해요. 정말로.
이명헌이 아무 말 없이 응시한다. 그 눈이 부담스러워 송태섭이 무의식적으로 이명헌이 약한 주제를 입에 올렸다.

“정우성도 그 쪽 아직 사랑해요.”

그 순간 덤덤하던 이명헌의 표정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송태섭이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지금 내가 본 게 맞나? 지금 이 사람…

“말해.”

웃었잖아. 방금.

기묘한 소름이 태섭의 전신을 쓸고 지나간다.

송태섭은 감이 좋다. 그리고 잘 틀리지 않았다. 그건 계산이라기보다 동물적 촉각에 가까웠다. 생존을 위해 세우는 신경 같은 것들. 그 신경이 모여 경고한다. 송태섭의 도착 전 여유로워보이던 이명헌, 송태섭을 보고서야 어깨를 떨던 이명헌, 정우성이 아니라, 송태섭에게 초점을 맞춘 눈빛을.

이 사람. 설마...



갈무리 할 틈도 없이 성대를 타고 생각이 나간다.

“…알고 있었어요?”

이명헌이 눈썹을 까닥한다. 여전히 비참한 표정이다. 분명히 피해자는 이명헌이었다. 그런데도 아까와는 달라보였다. 송태섭은 여전한 소름을 느낀다. 자신이 큰 소리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분명한 확신이 송태섭을 움직였다.
무슨 소리냐는 듯한 이명헌의 눈빛에도 송태섭이 주눅들지 않자, 이명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길다란 손이 톡, 톡 의자의 나무 손잡이를 일정하게 건드린다. 이명헌은 송태섭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손가락이 뚝 멈춘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두터운 입술이 느릿하게 열린다.

“파악이… 정말 빠르네.”

이명헌이 표정에 힘을 풀고 몸을 뒤로 뉘였다. 금세 송태섭이 잘 아는 이명헌으로 돌아왔다. 힘 없는 눈썹과 잘 다물린 표정. 감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 그러나 여전히 미지의 공포가 남아 있었다. 새카맣게 어두운 눈은 아직도 읽을 수가 없다. 알고 있었다고, 그리고 모르는 척을 했다고.

내 반응을 본건가? 왜?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송태섭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긴장으로 떨리던 손이 당황으로 축축해졌다. 알고, 있었다고요.

“그래.”
“왜, 모르는 척 했어요?”
“말해봤자 아수라장이니까.”

너도 그래서 정우성한테 말 안하고 나온 거 아냐? 이명헌이 무감하게 말한다. 그 모습에선 어떤 흔들림도 느낄 수 없었다. 죽고 못 사는 애인과 타인의 성관계를 봤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괴리감에 송태섭이 습기 찬 손을 바지춤에 닦아냈다.

“나한테도 모르는 척할 필요가 있나.”
“달라지는게 없지…”

이명헌이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잔은 거의 비어있었다. 그리고 몸을 의자에 뉘이고 무릎에 깍지를 낀다. 그 특유의 느릿한 행동이 이명헌을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게 했다. 이미 잡은 먹이를 앞에 둔 포식자마냥.

“…네 반응을 보고 싶었거든.”
“왜, 요?”
“너한테 맞춰주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이명헌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반응해주려고. 네가 화내길 원하면 화내주고, 슬퍼하길 원하면 슬퍼해주려고. 이어지는 말은 외계어처럼 들려서 송태섭을 완전히 미치게 만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데. 송태섭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한다고, 왜?

“그 편이 널 더 힘들게 할 것 같아서.”
“…그냥은 화가 나거나 슬프지 않았다는 소리잖아요.”
“그래.”
“진심이에요?”

이 기묘한 일련의 행동에, 발작하던 죄책감이 잠잠해졌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쾌감과 조종당한 것 같은 감각이 온 몸을 휩쓴다. 이명헌이 잠시 생각하듯이 천장 한 구석으로 시선을 올렸다. 글쎄…

“난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거든.”

뭘요. 나랑, 정우성이 잘 거라고? 송태섭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크게 감쌌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과한 스트레스 상황에 하루종일 긴장하던 신경에 더 황당한 일이 벌어지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무슨 소리에요. 무슨.”
“말 그대로야.”

대화를 할수록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인건데. 대체, 어쩌고 싶은 건데.

“대체… 뭘 원하는 거에요.”

나오는 목소리는 거의 꺼질 것 같았다. 판 위에 놓인 말이 된 기분이다. 속이 울렁거렸다. 넘을 수 없는 상대 앞에선 속이 울렁거려도 센 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링 위에 올라서지 않는, 판을 만든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명헌이 그제야 작게 웃었다. 뭘 원하냐고?

“그냥 하던대로 해. 걔가 자길 원하면 자고, 사랑을 원하면 해주고.”
“…진짜 미쳤어요?”
“왜? 내가 몰랐다면 계속 그랬을 거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랑은, 사랑은. 안했을거란 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다. 송태섭이 입술을 꾹 깨문다. 이유를 원하는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자 이명헌이 친절하게 입을 연다.

“어차피 니가 아니어도, 정우성은 그랬을거야.”

니가 아니었으면 팀메이트, 클럽에서 다가오는 하룻밤 상대들, 어쩌다 마주친 여자까지. 잠깐 죄책감 느끼고 머리에서 날 지워버릴걸. 그러니까 차라리 네가 낫지. 통제가 되잖아. 이명헌은 잘 알아듣길 바라는 것처럼 조곤조곤 설명했다.

“처음부터, 걔가 그럴 줄 알았단 거에요?”
“그래도 네가 미쳐서 정대만까지 차버릴까봐 많이 휘둘리진 않았으면 했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당신 애인이 당연히 바람필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게 당연한 것처럼. 송태섭이 말을 잇지 못하자 이명헌이 차분하게 눈을 맞췄다.
검은 눈이 드디어 말하는 것 같다. 믿으면 뭐가 바뀌는데, 송태섭. 너도 널 믿는 정대만을 저버렸잖아. 정우성과 몸을 섞은 순간부터 죄라는 족쇄가 발에 무겁게 달려 있었다.

“대신...”

이제는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두렵기까지 했다. 송태섭의 마음을 모르는 듯 도톰한 입술은 움직인다.

“나도 정대만이랑 자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