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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9 19:23
중에 생긴 일.

내려쬐는 햇살에 대만은 눈을 떴다. 벌써 한참 전에 깨어나 있었지만 굳이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기에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고 있었다.
준호는 몇 시간 전에 나갔다. 어제도 함께 저녁을 먹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 일을 하더니, 꼭두새벽부터 출근했다.
그의 집은 마치 주인의 심성처럼 밝았다. 화사한 톤의 벽지와 채광이 좋은 창문, 깔끔히 정돈된 거실과 방.
한 달 넘게 이곳에서 무상으로 취식하는 자신과는 많이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프로 농구선수, 특히 대만처럼 뛰어난 선수라면 제아무리 대형 로펌 변호사라고 하더라도 연봉으로 쉽게 견줄 수 없다. 더구나 준호처럼 초년차라면. 
그러나 번 돈 대부분을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수십억 빚을 갚는 데 쓴 대만은 달랐다. 모은 돈이고 뭐고 전부 아버지 뒷바라지에 들어갔고, 겨우 가세가 무너지는 걸 막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게다가 잊고 있던 무릎 부상까지 재발한 상황이라 부상 전 더 좋은 팀에 이적하려고 받았던 계약금까지 물어줘야 했다. 
사정은 딱하고, 대만선수 실력 다 아는데. 우리가 올해는 꼭 성과를 내야 해서. 선수는 몸이 곧 돈이잖아. 관리 잘 하지 그랬어.
한 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왔다. 비참했다.
괜히 심술이 난 대만이 입을 삐죽대며 옷을 챙겨 입었다. 어쨌든 재활센터로 가야 하니 부지런히 외출을 준비해야 한다.
탁상 위에 놓인 준호의 카드가 보였다. 아 맞다, 재활비도 권준호가 대 주고 있지. 비참함이 한층 심해졌다.
택시를 부르라고 두고 간 카드인데 애써 외면하고 집을 나섰다.

오늘치 재활을 마치고 돌아와도 준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종종 이렇게 7시가 넘어도 들어오지 않는 일이 잦았다.
배가 고파서 냉장고를 열려던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왔구나.
-어, 왔냐?
-대만아. 재활센터는 다녀왔어? 배 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나 회 사왔으니까 씻고 같이 먹자. 
아, 배고프면 먼저 먹어도 돼.

피곤의 기색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맑은 얼굴로 준호가 말했다.

결국 배고픈 자신을 위해 손만 씻고 함께 회를 먹는 권준호. 
얘는 도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정성인 걸까. 물론 나도 얘가 공부할 때 종종 치킨 기프티콘 보내주고 북산 애들이랑 찾아가서 밥 사주곤 했지만.
한 달째 대만을 재워 주고 먹여 주는 것도 모자라 마치 수발 들 듯 최선을 다하는 준호의 모습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정이 많아서 그런가.

역시나, 일이 또 바쁜지 몇 점 먹지도 않고 바로 후다닥 방으로 들어간다. 와중에 와사비 향이 강하면 잘 먹지 못하는 대만을 위해 간장의 비율은 꼼꼼히 맞추었다.
대만은 회를 씹으며 준호가 들어간 방문을 응시했다. 잠시 후, 다시 방문을 열고 나와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래, 일도 일인데 사람이 씻어야 개운하겠지. 
준호처럼 깔끔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무료함에 저도 모르게 티비를 켰다. 혼자서 밥을 먹는 건 예나 지금이나 익숙치 않았다. 적적함에 취향이 아닌 프로그램이라도 선뜻 보게 될 정도로.
틀자마자 나온 채널은 뉴스였다. A로펌에서 변호사가 과로사했다는 소식. 준호가 다니는 회사인데 저거.
변호사 바쁜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요즘 시대에 과로사라니.

대만은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권준호- 하고 크게 불러볼 심산이었다. 물소리가 크게 나서 목소리 톤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한 그 때.
보이스톡 소리가 울렸다. 울림이 겹치는 걸 보니 휴대폰과 더불어 노트북에서도 나는 것 같았다. 
대만은 닫혀 있던 준호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켜진 화면의 노트북과 물 밀듯 오는 메신저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노트북부터 끄자는 심산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메신저의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동료가 죽었는데 장례식에서도 얼굴만 비추고 가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는 말.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송무팀 전부 밤 새는데 매번 재택마냥 일찍 집에 기어들어가냐는 나무람.
그러다가 잘린다는 좀 터프해 보이는 말투의 꾸짖음.
불타오르는 단톡방을 저도 모르게 클릭해서 위로 올렸다. 다 비슷한 말들이었다. 다들 바빠서 밤 새는데 왜 너만 일찍 들어가냐고. 결혼도 안 했는데 와이프랑 같이 저녁 먹으려는 새 신랑이냐고.
처음에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사무실 지박령같이 굴던 녀석이 근 한달간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간간히 준호가 답장한 내용들이 보였다. 집에 일이 있어서요. 당분간은 저녁에 시간 못 내요. 그래도 일은 다 마쳐올게요.

호기심이 돋아 채팅방을 더 클릭해본 건 잘못이었다.
이 미친놈. 어머니가 마련해 주신 맞선 자리도 저녁 일정을 핑계대고 전부 나가지 않았네. 
소개팅녀에게서 온 저녁 약속도 다 거절했고. 
대만은 기억한다. 저때 준호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모처럼 여유가 생겼다고 싱글벙글 웃으며 대만과 함께 티비로 영화를 본 밤. 대만이 좋아하는 소고기를 사왔다며 손수 구워주던 저녁 어느 날.
밤공기를 쐬자고 손을 이끌고 집 앞 공원을 산책하곤 하던 날들.
근 한달 간의 준호의 행보를 대만은 생생히 기억했다.

미친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어떤 놈도 친구한테 이 정도까지 하지는 않는다. 
이건 다정이 아니라 동정이다. 돈도 건강도 일도 전부 잃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거다.
권준호는 선수로서 내 최고의 순간들을 전부 지켜봤으니까. 내가 얼마나 농구에 진심인지 아니까.

대만은 준호가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준호의 눈 앞에 조용히 노트북을 들이댄다.
열려 있는 카톡창. 지금 이 순간까지도 쏟아져 나오는 동료들의 질책. 이제 울리다 못해 꺼진 보이스톡 알림.
눈치가 빠른 준호는 상황을 바로 파악했다. 

-나 내일 나갈게. 동정 같은 거 필요 없어. 

자존심이 긁혔지만, 이제 이런 거로 성질을 부리지 않는다. 서른의 정대만은 인내했고 단단해졌다.
끝이 늘어난 면 티가 애처로왔다.

-정대만.
이름 세 글자로 부르는 소리에 멈칫했다.
-좋아해.
계산에 들어 있지 않던 또 다른 세 글자에 멈춰 섰다.

-좋아해. 네가 아는 것보다 한참 전부터.
좋아해서 그랬어. 동정 같은 얕은 감정이 아니야.
이렇게라도 도와주는 게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너와 나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농구를 하지 않는 너도 사랑하지만.
역시 농구를 하는 네가 보고 싶었어.
농구하는 너를 보기 위해 고작 내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줄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에 답은 안 해줘도 돼. 처음 들어올 때 말했던 것처럼, 원하는 모든 걸 다 써도 되고 내 카드도 마음껏 사용해.
대신 최선을 다해 재활해서 나아. 행복하게 웃으면서 농구해줘. 
만약 낫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건 기억에 남을 만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다시 한 번 말할게. 농구를 못 하는 너라도 사랑해.

써 놓고 읽는 듯한 유려하고 달콤한 말들이 귀로 흘러들어와 고였다. 얼마나 연습했을지 외운 시를 읊는 것마냥 줄줄 흘러나왔다.
갑자기 들이닥친, 십 몇년 묵은 마음의 기세에 대만은 어쩔 줄 몰랐다.
그때 가장 현실적인 고민이 머릿속에서 번뜩 빛났다.

-너 잘..잘리면 어떡해.

-이직하면 돼. 개업해도 되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걱정보다 너랑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는 대만을 제치고 싱긋 웃어보인 준호가 방으로 돌어갔다.
대만은 프리였고, 준호는 쐈고, 슛은 들어갔다. 
깔끔한 스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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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