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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와 장군의 아이겠지, 아무리 성미가 괄괄하고 고향에선 사내도 이길지라도 열여섯 살 계집애가 그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갓난아기를 안아 드는 손길에 그저 곤룡포 자락을 붙잡고 덜덜 떨며 울었지 너의 것이 될 게... 다시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을게... 네 곁에 있을게..... 그 후로는 죽지 못해서 살았지 궁녀를 물린 백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어 신이 내린 땅, 푸르른 대지와 사시사철 살기 좋은 날씨.. 따뜻한 햇빛과 비옥한 땅의 정기를 머금은 바람이 백호의 붉은 머리를 간질였지만 황량한 설산, 말발굽 소리와 함께 광활한 고원에서 불어오던 살을 에는 바람이 왜 그렇게 그리울까.. 굶는 날이 밥 먹는 날보다 많았던 고향에서의 삶, 열한 살의 백호는 약혼을 했지 고향에선 다 그랬기에 딸 가진 집은 입 하나라도 덜고 싶어하고 아들 가진 집은 거친 초원의 삶에 목숨을 잃기 전 손이라도 받아 놓고 싶어했으니까 그러니 신랑이라고 해봤자 비슷한 형편에 겨우 한 두어 살 더 많았나 저보다 키가 작던 꼬마 여우 녀석을 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하냐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얼마나 웃으셨는지 몰라 보통은 혼례를 올려도 초경을 하기 전까지 친정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 대게 백호는 아픈 어머니를 챙기며 가축을 치러 간 아버지를 기다렸는데 매일 와서 야 멍청이, 혼자 돌아다니지 마라 다른 애랑 놀지 말라는 둥 노상 시비를 걸길래 싫어하는 줄만 알고 집을 떠나게 되는 날엔 어쩌나 했는데 알고 보니 신랑 집이 내를 하나 건너고 굽이굽이 언덕을 두 개나 넘어야 하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지 야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말을 해! 가엾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말하니 그때 너의 얼굴이 어땠더라.... 기억이 나지 않아 백호는 웃었어 추운 건 싫지만 눈은 보고 싶네.....



오래 산 노인들도 이런 건 처음 봤다는 혹독한 겨울이었어 먹을 것이라곤 없었지 결국 어머닌 일어나지 못하셨고 험한 시기에 얼마 남지 않은 양을 지키려던 아버진 영영 돌아오지 않았지 떠나자, 피골이 상접한 태웅은 아 싫다고 너나 먹으라고 왁왁대는 백호의 입에 억지로 육포를 물려주고 웁웁 입을 막고 말을 몰았지 ...꼭 돌아 올 거지? 엄마 무덤도 손 봐야 하고 아빠 제사도 드려야 하는데.. 한참을 말이 없다 내뱉는 백호의 망설임에 어느새 저보다 한참 자란 태웅은 자신했어



그럼 우리 고향이잖아



이젠 더 이상 너를 구해 줄 수 없겠다... 다음 생애에서나 만나자.. 백호는 사경을 헤매는 2황자의 침상을 지키며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처음으로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어 방해도 하지 않았지 다만 두 가지만 약속해달라 그 애를 데려가지 말라고 시신을 능욕하지 말고 꼭 북쪽을 향해 묻어달라 대협은 체념한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보다 그러겠노라고 진심으로 맹세했지 그러니 출정 정지 명령에 황태자의 화는 극에 달했어 빌어먹을 반역 세력이 감히 동생을 먼저 치다니...... 그 애가 저렇게 사력을 다한 덕에 토벌한 시간을 번 거라 더 애가 끓었어 사이가 각별했기에 당장 그 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지 어머니도 이민족이라 할 말은 없지만 오래 전 흉년으로 그들이 국경을 넘었을 때 황제께선 그들을 사회에 통합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지 과연 성군께선 출신 성분이 어떻든 능력만 있다면 곁에 두셨다지만 하필 그런 배은망덕한 자식을... 화나기는 형제 중 가장 성질이 사나운 3황자도 마찬가지였지 그 애는 고작 열세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제들 중 가장 기골이 장대했기에 한참 클 나이를 고려하면 더욱 대단했지 힘은 또 얼마나 장사인지 검을 잡는데 있어도 움직임은 서툴지만 여러모로 장래가 기대되는 아이였지 아버진 그 점을 귀여워했던 것 같지만 형들은 수시로 성질 좀 죽이라 나무랐었는데 그러나 이번엔 황태자도 그 애가 날뛰는 걸 말리지 않았어 아악!! 아 형! 형! ..형님 가만히 있을 거야? 섭정, 황태자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지만 고작 열여섯, 한창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싶어 할 나이, 동경하던 무협지의 영웅들처럼 형제의 복수를 위해서 나서는 건 얼마나 멋있어 보이는지 철없는 아우의 꾀임에 못 이긴 척 몰래 갑옷을 챙겨입고 각자 선물 받은 말을 타고 슬며시 대열에 합류했을 거야



2황자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빨강머리, 얼마나 잠을 못 이뤘는지 새빨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품에 안아주는 어머니라니 이게 웬 호사인지 보통 가운데 낀 아이의 숙명은 어염이나 황실이나 비슷했기에 지금 궁인들도 마다하고 멀건 국물을 손수 먹여주는 손길에 완전히 만족해 이 멍청이,,, 앞서 나서긴 왜 나서.. 나무람에도 그저 좋아서 하하 죄송해요 아버님은요? ...토벌을 지휘하고 있을 거야 덤덤하게 답해주는 백호의 여윈 얼굴을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한참을 응시하다 그랬지


나는 하나쨩이 형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니었나 봐요 좋네요


아이의 말에 백호는 저 애를 가진 걸 알았을 때 너랑 나랑 그냥 죽자며 배를 미친 듯이 때렸던 날이 생각나 숨이 턱 막혔지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있어... 어머니 정말 단 한순간도 행복해 본 적이 없어요..? 나는 너무 행복했어요 형이랑... 동생들이랑... 떠나지 마요.... 영원히 우리 곁에 있어줘요... 그런 아이를 밀어내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야 백호는 그러겠노라고 아이의 하얀 뺨에 살짝 키스하며 약속했지 그리고 네가 깨어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애들이 있다고 연통했을까 황자들께서 사라지셨다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지 어머니? 어머니? 연신 불러대는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 아니겠지... 아니야.....




황태자도 처음 경험해 보는 전쟁이었어.. 생각보다 세력이 컸어 수세에 몰려 전열은 흩어져 그저 눈앞의 적을 썰고 또 썰며 그 애는 애타게 동생을 불렀어 목에서 피맛이 났어 그 애는 겨우 열세 살인데.. 내가 형인데... 때려서라도 말렸어야 하는데 멍청하게 휘말렸다고 황태자 자격도 없다고 얼마나 자책했을까 익숙한 투구와 그 목을 겨누려던 칼을 겨우 쳐 냈어 무게가 달랐지 ... 이 자식이 루카와구나.... 파악할 새도 없이 바로 칼이 날아오는 걸 겨우 받아냈지 손이 얼얼할 정도의 힘이라 황태자는 이를 악물었어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지 저 남자와 나는 상대가 안 된다 여기서 나는 죽는다 그래도 저 애는 살려서 보내야지... 칼을 쥐었지 패기가 좋구나 그는 피식 웃더니 바로 칼을 겨누었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검무였지 사실 늘 수련을 해왔던 그 애가 아니라 일반 장수였으면 몇 초도 못 버티고 나가떨어졌을 거야 결국 바닥에 넘어져 그 반동에 투구가 날아갔지 도망가 간절한 외침이 저 바보한테 닿았는지...



아까운 실력이군, 조금만 더 컸으면 대단한 장수가 됐겠지만 여기까지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어? 피맛나는 침을 탁 뱉자 패기가 맘에 든다며 자비롭게 바로 보내준다던 남자는 벌어진 갑옷 사이로 보이는 무언가에 그대로 동작이 굳어버렸지 이 목걸이.... 대단할 것도 없는 가죽끈을 꼬아 만든 장신구를 왜... 다만 어머니가 고향에서 직접 만들었다기에 특별했지 어머니.. 엄마... 하나쨩 미안해... 그러나 칼이 박히는 감각 대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뭐야...? 황급히 일어나 바로 반격했을까 아이 바보 안 갔어? 형님 너 혼자서는 안 돼! 이 천재가 있어야지! 3황자와의 호흡 아래 남자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는데 성공했어 적장이 죽자 우세했던 세력은 금방 오합지졸이 되어 금방 일망타진됐지 황명을 어긴 황자들은 황제의 앞에 불려가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3황자도 역시 센도라 형들만 바보라지 똑똑해서 금방 분위기를 잃고 먼저 읍소했지



아바마마 형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형님된 자의 도리로 소자를 말리러 온 것입니다.. 또한 적장을 죽인 공을 인정하여 용서를 구하오니..



차분한 목소리가 사실을 물었어 네가 적장을 죽였느냐 황태자는 사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어 그 남자의 마지막 눈빛.... 뭔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가득 담고 있어 아.. 어깨를 잡아오는 따뜻한 손길에 송구합니다.... 소자 불충을 용서해주시라고.. 황제께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역시 내 아들들이구나 자랑스럽구나, 그냥 토닥일 뿐이었지 용서 받은 거 맞지? 3황자는 신이 난 얼굴로 동의를 구했지만 황태자는 뭔가 목이 탁 막힌 것 같았어 어쨌든 반란을 진압하고 역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의기양양 궁으로 입성했지 어머니 소자가 엄청난 공을 세웠어요! 그랬니...




공허한 눈으로 3황자를 치하하던 백호의 시선이 황태자의 목을 타고 내려왔어 저 애의 아버지가 첫 아이를 그리며 하나하나 꼬았던 목걸이.... ..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잖아...... 데려다 준다며.. 아니 우리 같이 가야지... 멍청한 여우녀석...






센하나
루하나 태웅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