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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4 05:21
사쿠라기 하나미치.
벚꽃이 화려하게 깔린 꽃길이란 제 이름과 달리 지금까지 수 년은 봄이 너무 싫었다.
혼자 쓸쓸히 넘겨야 하는 생일과 새학기 첫 날도.
남들은 부모님께 실컷 어리광부리는 어린이날도.
그런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어버이날도.
학교에서 또다른 부모님이 되어 주시는 선생님께 감사를 표하는 스승의날도.
전부 꼴보기싫었다.

하지만 올해는, 올해만은.

"응, 백호 군. 갑자기 웬 노래지? 아, 오늘 주말이니 태웅 군 오는 날인가?"
"아아, 선생님!!"

재활센터의 복도에서 마주친 담당 간호사를 본 백호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비이밀입니다아아!!"
"아하핫, 그래그래. 기운차서 좋네. 우리 이따 운동도 지금만큼 기운차게 하고 집에 가자?"
"당연하죠!!"

사실 오늘은 태웅 뿐만이 아니라 다른 손님이 더 있다.
며칠 전 어버이날 태웅을 통해 손편지와 꽃 한 송이를 전해 드렸더니, 태웅의 부모님이 직접 전화를 걸어 오셨다.

- 우리 작은아들이.. 너어무 잘 컸네... 자랑스럽게.
- 주말에 우리 막내 보러 아빠랑 엄마랑 집에 들렀다 가마. 태웅인 필요 없지? 그래도 덤으로 데려는 갈까?

태웅과의 교제 사실을 아시자마자 아무런 거부감 없이 우리 아들, 우리 막내 하며 예뻐해 주시던 두 분은 이런 작은 성의 표시에도 너무니 큰 반응을 돌려 주신다.

낮엔 시끌벅적했지만 밤엔 혼자 외로웠던 생일도 올해는 타칭 바보트리오라 불리는 무리 중 두 명인 태섭과 대만에, 갓 사귄 따끈한 연인인 태웅에다 어지간하면 외박같은 거 잘 안 하는 무서운 엄마아빠같은 치수에 준호까지, 좁은 백호의 집에 우르르 몰려와 케이크를 자른다 폭죽을 터뜨린다 난리를 치다 결국 전부 하룻밤 묵고 가는 바람에 방이 좁아 서로 겹쳐져 끙끙대며 잠을 잤었다.

한 달 즈음 뒤의 어린이날 부근에도.

'잘 먹어야 낫는다'는 무뚝뚝한 현철의 쪽지와 함께 도착한 각종 식재료들과, 집에서 엄마가 직접 쌀가루를 빻아다 와서 쪄 주셨다는, 꽁꽁 포장해 둔 덕에 아직도 온기가 남은 떡.
여전히 수줍지만 애교 넘치는 현필의 전화는 덤이었다.

- 우리 엄마가 백호 너 생각난다고, 뭐 해 주고 싶다셔서.
- 응, 백호 학생? 잘 지내지? 우리 현필이랑 쭉 잘 지내 줘서 고맙네. 그거 다 우리가 농사지은 거라 그냥 바로 먹어도 돼요. 떡도 나랑 현필이랑 같이 찐 거야.

새벽부터 도착한 택배 상자며 전화에 얼떨떨한 채 도착한 학교에선 느닷없이 태웅이 또다른 박스를 던졌다.

"뭐야?"
"열어 봐. 너 주라더라."
"뭔데..."

바리바리 든 파스며 테이핑용 도구. 근력보조제. 영양제. 비타민. 진통제 등등.
같이 든 작은 노트엔 깔끔한 글씨로 정리된 스트레칭이며 재활운동법들이 직접 그린 손그림과 함께 들어 있었다.

"노트는 강동준, 테이프랑 약은 남훈이."
"...화가 해도 되겠네.."

시중에서 판대도 믿을 것 같은 정교한 그림에 혀를 차는 사이 어디선가 시끄러운 우당탕 소리가 났다.

"백호야아!"
"아 또.. 섭섭, 만만, 왜?"
"짜아식, 형이 뭐 주워 왔게?"
"오오~~"

학교 매점에서만 진짜 드물게 볼 수 있는 브랜드의 메론소다.
심지어 둘 다 하나씩 내밀고 있다.

"정대만 저거 산다고 오늘 새벽 3시에 줄 서자며 나 깨웠다."
"허? 송태섭 지는 알람 맞춰 놨으면서? 아라한테 다 들었다?"

제 책상에 걸터앉아서 투닥대는 두 사람 대신 태웅이 캔을 따서 내밀었다.

"자. 너 이거 좋아하잖아."
"으응..."

톡 쏘는 탄산에 목이 따가워서겠지.
눈가도 따끔해졌다.

다음 날 경태가 찾아와 전해 준 건 우성이 직접 찍어 보낸 현역 유명 선수들의 경기 영상과 축하 메시지였고, 오후에 훌쩍 찾아온 대협은 태웅과의 1 on 1이라며 백호의 눈 앞에서 새로운 기술을 선보여 주었다.

그리고 저녁에 찾아온 두 사람까지.

"응, 우리 빨간 애기 잘 지냈냐."

자기보다 한참 작으면서도 매번 애기야 애기야 부르는 수겸의 말에 백호가 웃음을 삼켰다.

"보결, 그쪽이 더 작거든?"
"애기 버르장머리 여전한 거 보니 금방 낫겠다. 그치?"

킥킥 웃는 수겸의 옆에서 웃음을 참던 정환이 블레이저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건넨다.

"너 요즘 야위었다고 김수겸 얘가 성화더라. 근육 좀 붙이자. 너 이제 나랑 붙으면 저만치 나가떨어진다?"
"웃기시네, 애늙은이."

정환이 건넨 호텔 레스토랑 4인 식사권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제 일 주일밖에 안 남은 기한에 백호가 인상을 찌푸리자, 수겸이 멋쩍게 웃음을 흘린다.

"아, 돌려막기 해서 미안. 그거 내가 작년 어버이날에 우리 애들한테 받은 거라 기한이 좀 간당간당하다. 그러니 얼른 가서 써라?"
"어버이날?"
"그래. 독한 놈들, 어버이날 스승의날 다 날 챙기더라. 나 이러다 조만간 불법뇌물수수로 잡혀들어갈 거야."
"뭐, 어찌됐건 감독님이시니."
"아, 됐다고."
"...아 참, 보결이, 저 팀 감독이었었지...."

식사권을 받아든 백호가 손 안의 봉투를 만지며 중얼대는 걸 들은 태웅이 잠시 눈썹을 들썩 했지만, 백호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은 채 둘을 배웅했다.

"야, 여우. 너희 부모님 주말에 시간 비시지?"

이거, 같이 쓰러 가자.
씩 웃는 백호의 이마에 태웅이 다정하게 키스를 남겼다.

"없어도 만들어서 오실 걸. 네가 초대하는 거면."
"하핫, 그거 기분 좋은데?"

그렇게 만나기로 한 게 오늘이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예약 시간이며 인원수를 또다시 확인한 백호가 다시 한 번 전화기를 끄집어냈다.

- 어, 애기. 왜 그러지?
"보결, 뭐 좀 묻자."
- 뭔데.
"스승의날에 받은 거 중 뭐가 제일 좋았어?"
- 으응??

뜬금없는 물음에 말문이 막힌 수겸 대신 백호가 입을 열었다.

"우리 영감님 선물 주고 싶은데 뭐가 좋은지 몰라서. 보결은 받은 거 중 뭐가 제일 기분 좋았냐고."
-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봐도.. 나랑 안감독님이 위치가, 아니 나이가, 아니 어쨌든 하나부터 열까지 비교할 수준이 아니잖아... 어휴.... 야, 현준아, 성현준! 너 이리 와 봐! 노트북 켜!! 아, 시끄럽고 그냥 좀 하라면 해 너는!! 넌 왜 항상 그렇게 말이 많냐...

전화기 너머로 뭐가 부서지는가 싶은 부산한 소리가 들린다.

- 백호야, 애기야, 형이 금방 찾아서 보내줄게, 알았지? 일단 끊자. 안선생님 좋아하실 만한 거 말이지? 알았다.

허둥대는 목소리긴 했지만 수겸이 지금까지 헛발질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백호는 마음을 놓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꽃도 사야 되나? 스승의날에 무슨 꽃을 드리더라?"

생각해 보니 스승의날이란 것 자체를 챙긴 적이 없는 것 같다.
챙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영감님이 내 첫 스승이네."

훗 하고 웃는 사이 딩동 하고 휴대전화가 울린다.

[애기야 급한 대로 이거라도 써라 형 받은 건데 형은 이거 없어도 안 죽는다]

수겸이 다급하게 누구에게서 받은 듯한 상품권 쿠폰을 보내 온 걸 확인한 백호가 크하핫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올해는 봄이 참 따뜻하다.




슬램덩크 루하나 태웅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