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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20:19
어렸을적엔 분명히 작았는데 나이들면 더 커지는 소꿉친구클리셰 맛있는데...

달재태섭







이달재가 처음 송태섭을 봤을 때,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반창고였다. 새로 농구부에 들어왔다며 선생님이 소개하는 와중에도, 송태섭은 부원들이 아닌 체육관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쟤가 이번에 갑자기 전학해 온 애 맞지? 상처 봐, 싸우고 다닌다는데. 문제아야? 말썽 피우면 어쩌지. 동급생 몇몇 사람이 말하는 이야기가 귀에 스쳤다.

그러나 송태섭의 화려한 드리블과 패스에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이러나 저러나 해도 다 같이 농구를 좋아하는 애들이었다. 너 멋지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몇몇이 송태섭에게 말을 걸었다. 방금까지의 평가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송태섭은 몰려든 아이들에 잠깐 움찔거렸다.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한마디만 툭 내뱉었다. ...연습했어. 억양이 독특했다. 아이들이 이것저것 말을 걸었지만, 송태섭은 대부분 짧게 대답하거나 몸짓으로만 답했다. 그게 며칠이 지나도록 반복되고 나니,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던 아이들조차 데면데면해졌다. 

그 녀석은 우리랑 대화하기 싫은 건가? 말 걸지 말라는 분위기야. 대화란 주고 받아야 하는데, 송태섭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관계는 진전되지 않았다. 또한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상처를 하나씩 달고 나타나니, 아이들은 더 말 붙이기 어려워했다. 선생님이 송태섭에게 따로 뭐라 이야기하는 건 몇 번이고 보았으나 그뿐이었다.

그래도 송태섭은 농구를 잘했으며, 포인트가드의 역할을 멋지게 해냈다. 재빠른 스피드는 큰 신장 차를 뚫고 파고들었으며, 아차 한 사이에 정확하게 들어오는 노룩패스는 짜릿했다. 특히 받은 패스를 골로 연결할 때,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입꼬리가 올라가는 그 모호한 표정 변화가 무척 보기 좋았다. 그렇기에 다들 송태섭과 한 팀이 되어 패스받기를 원했다. 다만 그뿐이었다. 부 활동이 끝나면, 다들 친구들끼리 돌아갔다. 송태섭은 언제나 혼자 옷을 갈아입고, 농구화 끈을 풀었다. 

이달재는 어느 아이들과 똑같이 소심했다. 폭력을 무서워하고, 용기를 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해야 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렇기에 송태섭에게 먼저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송태섭의 모습을 좋아했다. 넓은 코트를 바라보는 눈빛, 낮춘 자세로 달려가는 발끝, 손 아래에서 화려하게 움직이는 공, 달재는 그 모습을 언제나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눈을 빛내며 머리에 새기기도 했으며,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물어보면, 이것저것 알려줄까?

그러나 소심한 성격은 언제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달재는 몇 번이고 태섭이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가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정작 건네는 건 하도 꽉 잡고 있어 구깃구깃해진 수건을 건네주거나, 비어 보이는 물통에 대신 제 것을 넘겨주는 것뿐이었다. 하는 말도 저기, 이거.. 하면서 말끝을 흐리니, 송태섭 또한 고마워,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조금 기쁜 건, 송태섭은 언제나 고맙다는 말로 대답해주며 이달재가 건네는 것들을 

그 모습 때문인지, 농구부원들은 이달재와 송태섭을 친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보다는 네가 낫지, 였다. 그렇게까지 친한 건 아닌데, 물론 친해지고 싶지만, 생각만 하며 침만 삼키고 있자면 송태섭의 눈길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친해 보이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달재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어쨌든 그렇게 되어 이달재는 송태섭과 짝을 자주 맺었다. 그건 스트레칭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체육관 뒷정리 당번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송태섭은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고, 달재 또한 힐끗힐끗 눈치만 보았기에, 둘 사이는 어색한 침묵만이 돌았다. 이걸 보고 누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달재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날도 태섭이와 함께 뒷정리하는 날이었다. 창고에 카트 트레이를 밀어 넣으려는데, 안쪽이 어수선했다. 어라, 맹한 소리를 내자 태섭이도 따라 고개를 쭉 내뺐다. 아무래도 배구부가 정리하다 말고 간 것 같았다. 여기저기 바닥에 흩어져있는 비품들이 눈에 띄었다.

잠깐만, 내가 치울게.

달재가 허리를 숙였다. 기다란 깃발 철봉을 주워 들고 있자, 어느새 태섭이가 다가와 같이 허리를 숙였다. 앗, 괜찮은데. 그 말에 태섭이가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같이 해. 그게 더 빠르잖아.

초반에 들었던 독특한 억양은 사라지고, 짧았던 말은 꽤 길어졌다. 그러고 보니 얼굴의 상처도 저번보다는 적어졌다. 그러나 거리감은 여전했다. 태섭이가 드는 깃발 수가 더 많아지기 전에, 달재 또한 허겁지겁 주웠다. 다만 너무 마음이 급했던 걸까, 기다란 깃발 철봉은 옆의 철제 선반을 건드렸고, 안 그래도 어설프게 쌓여있던 박스를 건드렸다.

어, 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전에 박스들이 쏟아졌고, 그 전에 무언가가 팔뚝을 잡아당겼다. 들고 있던 깃발 철봉들이 품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고, 뒤통수를 단단한 무언가가 감쌌으며, 그리고 따뜻한 품이 감싸 안았고, 등에 닿는 바닥이 날카롭게 피부를 때렸으나, 머리는 아프지 않았다.

우당탕, 거칠게 물건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뽀얗게 먼지도 일어나 절로 기침이 나올 것 같은데, 달재는 숨을 참은 채 그대로 굳어있었다.

괜찮아?

자기 위에 엎어져 있던 송태섭이 옅은 한숨을 내었다. 뜨거운 숨이 이마에 닿자, 달재의 얼굴은 붉어졌다. 가까이서 보는 송태섭의 얼굴은 생각한 것보다 덜 무서웠다. 오히려 더 어려 보였다. 눈꼬리, 살짝 올라가 있구나..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어, 나는, 나는.. 그런 얼빠진 소리를 내자 태섭이가 그제야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달재도 벌떡 일어났다.

소, 송태섭! 괜찮아?

괜찮아.

미안해. 내가 선반을 건드려서... 내 잘못이야.

달재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태섭이의 앞머리 아래로 덮인 짝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야, 하고 말 걸자 달재가 쫄아서 어깨를 잔뜩 구부렸다. 그 모습에 태섭이가 얕게 한숨을 내었다.

배구부 녀석들이 제대로 정리 안 해서 그런 거야. 정리만 잘했으면 이런 일 없었지. 네 잘못 아니야.

생각 외로 다정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달재는 그제야 구부렸던 어깨를 폈다. 조심스럽게 바라보자, 태섭이가 픽 웃었다.

그러니까 선생님께 제대로 일러바쳐야 해, 알겠어?

으, 응..!

달재는 목이 떨어질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깨가 아픈지 손으로 꾹꾹 누르며 태섭이가 혀를 찼다. 손등이 잔뜩 까여있었다.

상, 상처 났어!

달재가 비명 질렀다. 아, 이거, 괜찮... 이번만큼은 송태섭의 말이 잘렸다. 치료해야 해! 하며 달재가 태섭의 손을 냅다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라커룸에 있는 구급상자를 꺼내 태섭이의 손등에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일 때까지, 달재는 울상이었다. 야, 괜찮다니까. 하지만 손이... 손등만 까진 거잖아. 그래도... 등은 괜찮아? 어깨는? 아예 태섭이를 벗길 상태로 이곳저곳을 살펴보자, 오히려 태섭이가 당황스러워했다. 아, 됐어. 괜찮다니까! 태섭이가 가녀린 자세로 티셔츠를 붙잡으며 빽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달재가 아차 했다.

미, 미안해!

미안해할 것도 많다, 너는.

진짜, 진짜 미안해.

아예 무릎을 꿇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았다. 괜찮다니까... 몇 번을 말해도 달재는 푹 수그린 고개를 들 줄 몰랐다. 송태섭은 손등의 반창고를 만지작거리다 중얼거렸다.

...소심한 줄 알았더니 남의 옷 벗기려고 하고.

아, 아니, 난...!

순식간에 변태가 된 달재가 화들짝 놀라며 경악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고 바라본 태섭이의 얼굴은 장난스럽게 휘어져 있었다. 저런 얼굴을 할 수 있구나. 달재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변태되고 싶지 않으면 그만 사과해.

응, 미안.. 앗, 또 해버렸다.

혼자 말하고 혼자 손으로 입으로 막고 있자니, 태섭이가 피식 웃었다. 그제야 달재도 머쓱하게 웃었다.

그건 그거고.. 저거 치우는 건 우리가 해야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두 사람은 비척비척 일어났다. 엉망이 된 창고를 정리하는 건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달재는 태섭이와 그날 많은 이야기를 했다. 태섭이 또한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체육관 문을 잠그고 나오는 태섭이에게,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나, 나 좋아해.

....뭐?

갑작스러운 고백에 송태섭이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그제야 달재가 아차 하는 얼굴로 외쳤다.

아, 그러니까, 나는 네 농구를 좋아해!

한 번 용기를 내자 말문이 터져 나왔다. 이달재는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쏟아내었다. 송태섭의 양손 드리블을, 그의 빠른 발놀림을, 튀어 오르는 높은 점프를, 하나하나 말을 이어갈수록 송태섭의 얼굴은 황당에서 당황으로, 이내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그, 그래서, 그래서 있잖아...

숨이 차서 달재가 헐떡였다. 얼굴이 새빨간 게 부끄러워선지 호흡이 가빠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너, 너랑 농구 이야기.. 앞으로도 계속해도 될까?

송태섭의 동그란 눈은 정말로 처음 보는 것이어서, 이 와중에 이달재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태섭이는 고개를 돌렸다가, 긴 앞머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그리고 입을 열어 웅얼거렸다.

...그래.

그 이후로 이달재는 송태섭과 친구가 되었다. 학년이 바뀌어서 같은 반이 되면서 더 자주 붙어 다녔다. 송태섭 또한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장난스럽게 웃고, 대화가 늘어났으며, 여느 또래처럼 대했다. 이달재와 송태섭은 친구가 되었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농구 잡지를 함께 읽고, 길거리 농구 코트에서 같이 공을 던졌으며, 신상 농구화를 보러 같이 시내에 나가기도 했다. 이 라인 진짜 멋지다. 그러게. 두 중학생이 유리창에 서서 구경하고 있는데, 뒤에 기다린 그림자가 내려왔다.

동생들, 농구화 살 돈 있어? 그거 형들한테 빌려주면 안 되나? 껄렁한 목소리와 어깨에 묵직한 팔이 둘렸다. 목이 반쯤 졸리자 달재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내었다. 딱 봐도 성격 나빠 보이는 양아치 무리가 유리창에 비쳤다. 달재가 히익, 소리 내며 바들바들 떨었다. 저도 모르게 옆의 태섭이를 바라보았다. 태섭이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짝 눈썹 한쪽을 비죽 올렸다.

너 같은 놈들에게 빌려줄 바에야 불우이웃에게 적선하겠어.

태, 태섭아...!

달재가 팔짝 놀라 팔을 붙잡았다. 양아치들에게 시비 걸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이제껏 무시하거나 달재가 날래게 선생님을 불러서 학교 내에서는 괴롭힘이 적어졌다. 이제야 괜찮아졌네, 하며 가볍고 심드렁하게 말했던 태섭이였다. 그런데 지금 달재가 붙잡고 있는 태섭이의 팔은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이 자식이, 건방지게! 양아치가 태섭이의 목을 조른 팔을 더 옥죄었다. 으윽, 아픈 소리를 내는 태섭이가 주먹을 꽉 쥐어 들었다. 당장에라도 양아치의 얼굴에 날리기 전, 달재는 명치에서부터 힘을 끌어모으고 있는 힘껏, 외쳤다.

사장님! 여기 농구화 훔쳐 가는 도둑이 있어요!

뭐야! 쿵쿵거리며 거구의 사장이 골프채를 들고 뛰쳐나왔다. 양아치들이어봤자 학생들이었고, 커다란 어른이 나타나자 놀랐는지 팔에 힘이 풀렸다. 그 틈을 타서 달재는 태섭이의 주먹 쥔 손을 덥썩 잡고 뛰쳐나왔다. 놀란 얼굴의 송태섭이 따라 달렸다. 매번 함께 러닝 연습을 한 보람이 있는지 재빠른 발놀림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달재, 잠깐만.. 멈춰, 달재야!

차오르는 숨 때문에 목이 아플 때까지 달리고, 태섭이가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달재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멈췄다. 흐억, 헉, 헐떡이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푸시식 쓰러졌다. 무, 무서웠어... 하며 앓는 소리를 내자, 같이 헉헉거리던 태섭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것치고는 잘 뛰던데.

나보다 더 빠르던걸. 그 농담에 달재도 웃었다. 그럴 리가. 진짜야, 엄청 빨랐다고. 시시덕거리다가 아직도 잡은 손이 보였다. 그제야 아차, 하고 손을 놓아주었다. 살짝 뻐근했는지 팔목을 매만지는 모습에 미안하다고 말하자 별걸 다 미안해한다는 소리나 들었다.

설마 그 녀석들, 찾아오지는 않겠지? 7대 1이라 좀 버거울 것 같기도... 중얼거리는 태섭이의 소리에 달재가 화들짝 놀랐다.

설, 설마! 우리 얼굴도 제대로 못 봤고, 그리고 왜 싸울 생각을 하는 거야? 오늘처럼 그냥 도망쳐야지!

...도망치면 피하는 것뿐이잖아.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야.

달재가 붙잡은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떨고 있었으면서 맞설 생각을 한다니, 태섭이가 겁이 없는 건지 많은 건지 헷갈렸다. 동그래진 태섭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 그 사람들의 얼빠진 모습 봤어? 제대로 한 방 먹여줬잖아. 꼭 주먹으로 아니어도 말이야...

그리고 왜 7대 1이야. 7대 2겠지.. 중얼거리는 달재의 마지막 말에, 태섭이가 그제야 크게 웃었다.

그러네, 웃기는 꼴이었지. 그런데 너도 같이 싸워줄 거야? 우, 우선 어른을 부르고... 하하, 든든하네. 태섭이가 웃는 모습에 달재도 따라 웃었다.

그래도 자꾸 시비 걸리는 건 짜증 나. 아예 나도 그 양아치들처럼 험악하게 하고 다니면 덜 건드리려나. 음, 빡빡이는 별로인데.

으음... 달재는 속으로 리젠트 머리를 한 태섭이를 상상했다. 더 시비가 걸릴 것 같은데... 그것만큼은.. 달재는 상상을 내쫓듯 고개를 휙휙, 내젓다가, 어느 미용실을 발견했다.

태섭아, 저 머리는 어때?

송태섭이 따라 고개를 돌렸다. 미용실 창문에 붙어있는 포스터에는, 뒤통수만 깔끔하게 밀고 윗머리는 남겨둔 독특한 헤어스타일이었다. 으음, 그것보다는 역시 리젠트 머리가 더 세 보이지 않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달재가 열심히 설득했다. 아니야, 저, 저것도 멋지고, 세 보이고, 강해 보여! 나, 나도 하고 싶어질 정도로! 그래? 그러면 같이하자. 어, 어...?

얼결에 달재도 같이 미용실에 앉게 되었다. 뒷머리가 밀리는 건 생각보다 시원하고 어색했다. 태섭이 또한 어색한지 뒷머리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으음, 하며 무언가 생각하듯 앞머리 끝을 꼬았다. 그러더니 점원에게 왁스도 팔아요? 하고 질문했고, 태섭이는 왁스도 샀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이 달재의 머리를 보고 놀라워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멋쟁이가 되었네, 하며 놀리는 말에는 그저 부끄러워 고개만 숙였다.

그리고 다음 날, 송태섭을 보자마자 이달재는 입을 떡 벌렸다. 매번 얼굴을 가리듯 길게 내려왔던 앞머리는 깔끔하게 왁스로 넘겼고, 삐뚜름한 짝 눈썹이 한층 더 잘 보였다. 그러니까 정말로.. 어제의 양아치들보다 더 쎄보였다. 같은 반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건 달재도 마찬가지였다.

음.. 별로인가?

아, 아니, 아니야!

엄청 멋있어서, 할 말을 잃었어... 달재는 멍하니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태섭이가 비죽 웃었다. 뭐, 고마워어... 끝이 이어지는 애매한 말투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뭐야, 귀여워... 부끄러울 때는 짝 눈썹을 저렇게 움직이는구나. 꼭꼭 숨겼던 얼굴이 드러나자, 어쩐지 마음이 술렁였다.


분명히 송태섭과는 같은 키었는데, 어느새 태섭이는 달재보다 더 키가 커졌다. 팔다리가 아프더니, 성장통이었나 봐. 진짜? 지금은 괜찮아? 이 정도는 뭐. 농구 하는 데에는 지장 없어. 송태섭은 시원하게 웃었다. 첫날 눈을 피하며 표정을 짓지 않았던 모습과는 달랐다. 이 모습이 훨씬 좋았으므로, 달재는 따라 웃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너무 기뻤다. 앞으로도 태섭이와 함께 있다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농구부에 들어간 태섭이의 낯선 얼굴을 보았을 때는, 기분이 무척이나 이상했다. 바보같이 헤헤 풀린 얼굴,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 송태섭의 그 얼굴을 본 날, 이달재는 몸이 아팠다.

어머니는 끙끙 앓는 달재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열도 없는데. 어디가 아프니? 그냥, 팔다리가... 그러면 성장통인가 보다. 달재가 키 크려나? 교복을 여유 있게 사길 잘했네. 어디 또 아픈 덴 없고? 그 말에 달재가 입을 뻐끔거렸다.

가슴이 답답해요.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달재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성장통과 관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아픔을 꾹 참았다. 몸이 삐걱거리는 성장통은 꽤 오래 이어진 거에 비교해서, 달재의 키는 크게 자라지 않았다. 여전히 이달재는 송태섭보다 작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달재는 더 커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을 꾹 눌러 작게 만들었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이달재는 많은 게 바뀌었다. 농구부 부주장에서 부원으로 내려왔다. 3학년이 되었으니 이제 학업에 집중할 때이기도 했다. 주장과 부주장을 정하는 데에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어쨌든 2학년 후배들에게 넘겨주었다. 송태섭 또한 2학년 윈터컵이 끝나고 이야기가 오갔던 재단의 후원을 준비하고자 주장을 내려놓았다. 다시 7번이 된 유니폼을 입고는 만족한 얼굴이었다. 달재는 여전히 6번이었으나, 유니폼 사이즈가 달라졌다.

키가 컸잖냐!

강백호의 말에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쑥쑥 크는 키에 관절 마디마디가 무척이나 아팠고, 교복은 애매하게 짧아져 부끄러웠지만, 키가 큰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벌써 송태섭을 넘어섰는걸. 어쩌면 더 클지도? 강백호가 머리 위로 키를 재듯 손날을 휘휘 둘렀다. 달재 또한 태섭이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위를 올려보아야 했던 시선은 이제 아래로 향했다. 어느 순간 시선이 똑같이 맞는다고 했는데, 눈 깜빡할 사이 위치가 변했다.

시선의 위치가 바뀌자 많은 게 새로워졌다. 예전 올려다보던 태섭이의 얼굴은 턱선이 도드라졌고, 도톰한 입술에 눈이 갔다. 이제 그러나 내려다보는 태섭이의 얼굴은 반듯한 이마와 내리 깐 속눈썹, 아직 빠지지 못한 볼살, 톡 튀어나온 입술이 다른 각도로 보이자 자꾸만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 상태에서 태섭이가 고개를 들고 올려다볼 때면, 밝은색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바라보자면, 달재는 괜히 주먹만 꽉 쥐었다가 풀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건 송태섭에게 배운 습관이었다. 아무리 떨려도 표정만큼은 침착하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표시 내지 않고. 달재는 여전히 소심했지만, 침착함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건 달재 스스로가 생각하는 장점이었다.

같이 몸 키우자고 한 건 난데, 오히려 달재가 더 효과 있네.

태섭이가 투덜거리며 괜히 달재의 어깨를 툭, 쳤다. 지금도 그런데 미국에 가면 덩치에 밀릴 텐데 송태섭은 몸을 키우겠다 선언했고 달재는 응원하다가 어쩌다 보니 함께 하게 되었다. 그야 교실에서도 체육실에서도 매번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훈련을 같이하게 되고, 구역질하며 꾸역꾸역 먹는 식사를 같이 챙기다 보니 남은 음식을 달재가 먹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같이 화장실 변기를 잡고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힘이 쭉 빠진 태섭이가 달재의 어깨에 기대면서 닭가슴살을 더 맛있게 먹는 법이 뭐가 있지, 하고 고민하면 달재는 열심히 엄마의 요리 잡지에서 읽었던 레시피를 알려주며 태섭이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같이 고생한 보람이 있는지 둘 다 커지긴 했지만, 더 극적인 변화가 있는 건 달재였다.

포지션 변경은 어때? 센터 자리 비는데 딱 맞네.

그 정도까지는 안 클걸...

왜 그래, 야스. 꿈을 크게 가져! 혹시 모르잖아, 이 천재와 같은 키가 될지도!

백호가 거칠게 헤드락을 걸어왔다. 으아, 앓는 소리를 낸 달재가 꿋꿋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내 포지션이 좋아. 그 말에 백호가 아쉽다는 듯 혀를 치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좋아하는 걸 하는 게 맞지. 태섭이가 마주 웃으면서 손에 달랑거리는 영어 단어장을 넘겼다. 휴식 시간마다 들여다봤더니 끝이 너덜거렸다. 그 송태섭이 체육관에서까지 공부를 할 줄이야. 강백호가 중얼거렸고, 달재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는 거야, 잘 공부하고 있는데 응원해주지 못할망정! 어느새 나타난 한나가 펜을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한나! 나 잘하고 있어? 헤헤 풀린 태섭이의 얼굴은 여전했다. 그럼, 물론이지. 멋지다, 송태섭! 이한나가 엄지를 척 올리며 칭찬까지 해주자 어깨를 으쓱여댔다. 자, 쉬었으면 훈련해야지! 깔끔하게 정리한 하나가 모두에게 소리쳤다. 한나에게 영어 단어장을 맡기는 태섭이가 보였다.

한나에게 고백하고 거절 받았는데도 태섭이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진심을 털어내고 난 이후여서 그럴까, 둘은 친구와 동료 사이로 선을 그으면서도 친밀해졌다. 달재는 이제 그들의 사이는 동료애이자 전우애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달재의 성장통은 그때 다시 시작되었다.

마치 이때를 노린 듯 커지는 모습에 난처해졌다. 누군가 그 이유를 알까 괜히 눈치가 보였다. 팔다리가 욱신거리는 성장통은 이내 가슴까지 옮아갔다. 그렇지만 이달재는 언제나처럼, 가슴을 꾹 눌러 작게 만들었다.



오늘의 당번은 이달재와 송태섭이었다. 이제 너무 익숙한 체육관 정리는 알아서 역할을 나눠 딱딱 해치웠다. 송태섭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아, 알아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자주 부르는 노래는 달재에게도 익숙했다. 그렇게나 내가 나쁜 거야, 하고 뒤이어 이어 부르면 태섭이가 익숙하게 다음 가사로 받아친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가사는 두 사람의 관계와 같았다. 익숙하고 편안한, 정해져 있고 변함없는 그런 관계.

같은 노래를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청소 정리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카트 트레이를 창고로 돌돌 밀었다. 창고는 왜 매번 정리해도 더러워질까? 알아서 정리되었으면 좋겠다. 실없는 소리를 하며 카트 트레이를 미는데, 헐거운 철봉 사이로 농구공 몇 개가 퉁퉁, 데구르르 굴렀다. 이런! 달재가 놀라 소리 내자 태섭이가 가볍게 손짓을 휘휘 내젓고는 주우러 갔다. 다만 그 농구공이 아슬아슬하게 쌓인 박스들에 퉁, 부딪혔으며, 그 앞까지 따라온 태섭이를 향해 쓰러질 줄은 몰랐다.

태섭아!

송태섭이 바로 발을 비틀어 빠져나오기 전, 뜨거운 손이 덥썩 팔목을 잡았다. 잡아당겨지는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뒤통수를 단단한 무언가가 감쌌으며, 그리고 따뜻한 품이 감싸 안았고, 등에 닿는 바닥이 날카롭게 피부를 때렸으나, 머리는 아프지 않았다.

우당탕, 거칠게 물건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뽀얗게 먼지도 일어나 절로 기침이 나올 것 같은데, 송태섭은 숨을 참은 채 그대로 굳어있었다.

괜찮아, 태섭아?

위에 엎어져 있던 이달재가 옅은 한숨을 내었다. 놀라 동그래진 송태섭의 얼굴은 마치 중학생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랐다. 이달재의 한 손으로도 송태섭의 뒤통수가 다 잡혔다. 이달재가 크게 헐떡이는 가슴팍이 맞닿자 송태섭은 답답한지 숨을 삼켰다. 선이 굵어진 턱선과 도드라지는 목젖과 넓어진 어깨가 천장을 가려서 어두웠다. 크게 헐떡이는 가슴팍이 맞닿을 때마다 압박이 되고, 한 손으로 뒤통수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엇갈린 다리 사이로 느껴지는 허벅지가 눌렸다.

태섭이가 이렇게 작았나? 순간 달재는 그 생각이 들었다. 송태섭은 매번 이달재보다 크고, 빠르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송태섭은 제 품에 들어왔다. 끌어안으면 안겨지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안길 것 같았다. 아,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걸 송태섭이 모를 리가 없었다. 밝은 눈동자가 더 동그랗게 커졌다.

쿵, 떨어지지 않은 박스 하나가 이달재의 뒤통수를 퍽 쳤다. 으억, 소리 내며 달재가 태섭이의 목덜미에 쓰러졌다. 이달재! 송태섭이 놀라 외쳤다. 끙끙거리는 달재의 뒤통수에 태섭이가 농구공 만지듯 손바닥으로 막 문질렀다. 너 혹 났어! 아, 어쩐지 아프더라... 중얼거리는 달재를 이끌고 태섭이가 일으켰다. 어질어질한 새에 정신 차려보니 라커룸에 앉아있었다.

피는 안 나는데... 혹시 모르니까 병원 가.

뒤통수를 쓰다듬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달재가 민망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태섭이의 입술이 비죽 나왔다. 뭘 잘했다고 웃어. 등에도 멍 든 거 아니야? 벗어, 이달재. 자, 잠깐. 태섭아... 벗으라고! 흐아악! 달재는 가녀리게 티셔츠가 벗겨졌다. 역시나 등에 얼룩덜룩한 멍이 올라오는 모습에 태섭이가 혀를 찼다. 구석에 박힌 구급상자를 꺼내 약을 바라는 동안, 태섭이는 조용했다. 그래서 달재 또한 눈치 보듯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

...네가 왜 미안해해? 내가 미안해해야지.

태섭이 너는 잘못한 거 없는데.

그러면 너도 잘못한 거 없어.

하지만 공이...

거기에 박스를 그렇게 쌓아둔 놈이 잘못이라니까?

주거니 받거니 말을 받던 두 사람은 짧은 침묵 후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때랑 똑같은데 반대네. 기억하고 있어? 

당연하지, 우리 처음 대화했을 때잖아.

그 말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기억하고 있구나... 손을 꼬물거리고 있자, 다 끝났다는 듯 태섭이가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어우, 등짝도 넓어져서 바를 것도 많네. 아하하... 머쓱하게 웃으면서 몸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태섭이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응..? 아무 생각 없이 달재가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받고는 휙, 뒤집자 까진 손등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어, 하고 한 소리 하자 달재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약을 바르는 태섭이의 손은 섬세하고도 익숙했다. 중학생 때에는 반대였는데. 매번 상처를 달고 오는 태섭이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달재가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간지러움과 따가움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그러게 왜 네가 끼어들어, 몸도 약한 게.

...몸이 약한 거랑은 관계없지 않아?

나는 튼튼하니까 괜찮다고. 너도 알잖아.

튼튼해도 아프잖아...

너도 아프잖아, 너도!

내가 아픈 게 낫지. 나는 네가 더는 안 다쳤으면 좋겠어.

그리고 안 아팠으면 더 좋고. 달재가 중얼거렸다. 중학생 때부터 송태섭에게 남는 상처를 볼 때마다 이달재는 익숙하면서도 슬펐다. 린치당했다는 소리에 놀라고, 오토바이 사고가 났을 때는 울었다. 그래서 농구부의 그날에 이달재는 용기를 냈다. 덜덜 떨면서도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 달재는 웃으며 말했다.

너는 계속 농구 할 거잖아. 미국도 가야하고.

...우와, 이 기대에 부응하려면 진짜 힘내야겠는데.

너는 할 수 있어.

부끄러운 건지, 민망한 건지 송태섭은 고개를 숙인 채로 손등의 상처에 반창고만 붙였다. 아, 이건 좀 아쉽다. 키가 작았을 때는 태섭이가 고개를 숙여도 언뜻 표정을 훔쳐볼 수 있었는데, 키가 커지니 동글한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는다. 태섭이가 우물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 농구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좋아하지.

그래서 달재는 순간 방심했다. 보이지 않는 태섭이를 향해 침착한 낯을 지우고, 솔직하게 떠오르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건 목소리에도 마찬가지였다. 꾹꾹 눌러온 애정이 땀 한 방울처럼 떨어졌다. 달재는 눈을 감고 말했다.

많이 좋아해. 정말로.

입으로 내뱉고 나서야 달재는 아차 했다. 눈을 번뜩 떴다. 그러나 어느새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한 태섭이의 얼굴을 보고, 달재의 얼굴이 희게 질렀다. 이달재와 송태섭은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오래 지낸 덕분에 둘의 사소한 버릇도, 행동도, 말투도 알고 있다. 특히 눈이 좋은 포인트가드인 송태섭이 이달재의 그 틈을 모를 리가 없었다. 흔들리는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술.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이달재는 흘린 땀방울을 닦아내듯 바로 뒷말을 이었다.

네 농구.. 멋지잖아.

이미 땀은 옷에 젖어서 자국이 남았는데,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듯 눌렀다.

어디를 가더라도, 나는 계속 널 응원할 거야.

침착한 얼굴로, 차분하게.

나는 네 농구 좋아하니까.

언제 땀 흘렸냐는 듯 자국을 정리했다. 왜냐하면 태섭이가 바라지 않았으니까. 제대로 된 고백도 하지 못하고 거절당한 건 성장통보다 무척이나 아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치료해줘서 고마워, 하고 웃으며 잡혔던 손을 빼내었다. 힘없이 떨어지는 손에 송태섭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그제야 지웠다. 평소와 같은 얼굴로 송태섭이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그런데 저거, 우리가 치워야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예전에 했었던 대화를 비슷하게 따라 하며 다시 창고 정리를 하러 일어났다. 창고 먼지에 욕하면서 체육관 정리를 다시 하고,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갈림길에서 평소와 같은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이달재의 성장통은 그날 끝났다.




다행인지 아닌지, 3학년은 바쁘고 정신없었다. 특히 태섭이가 그랬다. 공부하랴 농구 하랴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매번 빠른 발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달재는 그럴 때마다 태섭이의 옆에서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농구하고, 또 같이 알아주려 돌아다녔다. 너도 입시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 하고 태섭이가 말하면 달재는 그저 웃었다. 지나가던 한나가 누구 입시 걱정을 하는 건지, 하고 한 소리하면 알아서 잘하는 달재 걱정을 괜히 해줬다며 툴툴거리는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가끔 송태섭은 말없이 이달재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기만 할 때가 있었다. 힘들다, 지친다, 그런 말은 하지 않지만 힘 빠진 눈썹을 보자면 누가 봐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그럴 때면 이달재는 조용히 어깨를 빌려주었다. 둘 사이에 침묵은 익숙해서 조용한 바람 소리마저도 편안했다. 침착한 얼굴과 목소리는 어떻게든 할 수 있는데, 어깨에 닿는 간지러움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숨길 수 없는 건 좀 부끄러웠다. 하지만 태섭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달재도 가만히 있었다. 어느 정도 태섭이의 머리가 정리된 것 같다 싶으면, 그제야 달재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태섭아.

응?

주말에 신상 농구화 보러갈래?

우리 단골집 있잖아. 거기 사장님네 딸이 초등학교 입학한다고 세일한다더라. 옆에 있는 분식집은 또 가격 올랐어. 알아? 그런데 우리한테는 예전 가격으로 해주겠대. 이건 비밀이라고 하시더라고. 그리고 미용실네 초코는 꾀병이었대. 간식 먹으려고 그랬다나. 조용한 이달재의 목소리가 평범한 일상을 속삭였다. 그러면 가만히 듣고 있던 태섭이도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 사장님은 매번 세일하더라. 그러다 가게 접겠어. 뭐, 우리야 좋지만... 분식집이 단골 장사할 줄 아네, 괜히 10년 전통 맛집이 아니다. 초코 그 녀석, 엄청 걱정했는데 그런 이유였어? 내가 사다 받친 간식도 얼만데, 하여간 욕심쟁이라니까. 나른했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붙었다. 그때가 되면 송태섭은 기댔던 얼굴을 떼어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 쭉 기지개를 켜서 평소대로 돌아왔다.

쉬었으니까 이제 할 일 해야지.

송태섭은 다시 일어났다. 달재도 웃으며 따라 일어났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예전의 태섭이라면 좀 더 어리광 부리듯 미적거렸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 달재가 아주 조금의 진심을 내뱉은 이후로.

이달재는 침착한 얼굴로 그날을 숨겼고, 송태섭은 삐딱한 짝 눈썹으로 그날에 언급하지 않았다. 스스럼없이 부딪히던 어깨는 이제 미묘한 거리감이 생겼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달재는 괜찮았다. 그저 평소와 똑같이, 묵묵하게 송태섭의 옆을 지켰다. 가끔 와닿는 송태섭의 시선은 느꼈지만, 그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총 6년의 세월 동안 계속 함께였다. 같은 반 옆자리로 서로 쪽지를 주고받았고, 주말에 집에 놀러 가기도 했으며, 같은 시간에 외운 전화번호로 통화하는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이제는 어려워졌다. 미국은 편지를 보내기 위해 우표 여러 개를 붙여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고,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만날 수 있으며, 국제전화는 낮과 밤이 달랐다. 그렇기에 이달재는 송태섭이 무척 그리울 것이다. 그래도 웃는 얼굴로 배웅하러 공항에 왔다. 정확히는 북산의 모든 사람이 와글와글 모였다.

이렇게까지 안 와도 된다니까요. 

송태섭은 민망한 얼굴로 캐리어만 만지작거렸다. 료칭, 그래 놓고 비행기에서 울려고? 강백호가 어깨를 퉁, 치자 캐리어와 함께 태섭이가 비틀거렸다. 송아라가 밝게 웃었다. 채치수와 권준호는 마치 친형처럼 몇 번이고 확인했고, 정작 태섭이네 어머니께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정대만은 거기서는 성질 좀 죽이라며 한 소리를 하고 있고, 서태웅은 얌전히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채소연과 이한나가 한 번씩 태섭이의 팔을 두드려주었다. 모두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모습은, 중학생 때 처음 만났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출국 시간이 가까워지자 너도나도 송태섭을 꽉 끌어안았다. 달재가 머뭇거리자, 오히려 태섭이가 먼저 끌어안아 주었다. 그날 이후로 이렇게 가까운 건 처음이었다. 이 와중에 설레면 너무 못난 사람이겠지... 달재는 머뭇거리면서도, 그래도 품 안의 태섭이가 좋아서, 그래서 따라 꽉 끌어안았다. 제 어깨에 턱을 올리고, 귀가 볼에 눌렸으며, 쿵쿵거리는 가슴이 맞닿았다. 오래도록 안고 싶었으나, 울컥한 채치수가 갑자기 그 둘을 확 끌어안으면서 몸이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너도나도 달라붙어, 아예 한 덩어리가 되어 꽉 끌어안겨졌다. 가운데에 낀 태섭이가 존 프레스 당한 사람처럼 아악 소리 질렀으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잘 다녀 와, 미국놈들 코를 납작 눌러주라고, 나도 곧 갈 테니까 기다려, 몸조심하고, 힘내! 여러 응원의 소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건네주었다. 이달재도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욕심은, 아주 조금은, 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언제까지고 계속 응원할게. 네 농구 정말 좋아하니까.

그때의 송태섭의 얼굴은, 그 이달재에게도 낯설었다. 순간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달재가 움찔거렸으나, 방송이 나오기 시작하자 아까의 그 얼굴은 사라졌다. 모두의 배웅 속에 송태섭이 손을 흔들며 캐리어를 끌었다. 저 너머로 나아가는 모습을 이달재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경기 코트 위의 모습 같았다. 송태섭은 경기 코트 위에서 땀을 빛내며 뛰고, 이달재는 벤치에 앉아 응원한다. 이달재는 그거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멋진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지금은, 같이 하고 싶다는 염치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송태섭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마치 이달재의 생각을 들은 사람처럼. 캐리어를 꽉 쥐고는 몸을 빙글 돌려, 다시 반대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야, 료칭 왜 다시 와? 뭐 놓고 왔어? 주변에서 대화하는 소리에 달재도 따라 말을 얹을 수 없었다. 송태섭은 엄청나게 찌푸린 얼굴로, 그러니까 마치 양아치에게 시비 걸린 얼굴로 달재만 바라보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왜, 왜.. 왜? 이달재는 쫄아서 어깨를 잔뜩 구부렸다. 내, 내가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잘못했던가? 아니, 아닌데, 혹시 내가 생각으로 안 하고 말로 했나? 어어, 하는 사이에 송태섭은 바로 이달재의 앞으로 다가왔고, 그리고 멱살이 잡혔다. 쭉 딸려내려 간 이달재가 벌벌 떨면서도 용케 눈을 감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송태섭은 단 한 번도 이달재를 때린 적은 없었으니까.

다음에 만날 때는 제대로 말해.

작게 속삭이는 말에 떨림이 멈췄다. 가깝게 빛나는 송태섭의 밝은 눈이 모르는 빛으로 빛났다. 그렇게 함께했는데도 이달재가 모르는 눈이었다.

내가 좋은 건지, 내 농구가 좋은 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르는 눈이 아니라 아는 눈이 되었다. 이달재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송태섭의 짝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가, 구겨진 티셔츠를 툭툭 펼쳐주었다. 진짜로 갑니다, 하며 무슨 용건이 있었냐는 듯 다시 캐리어를 끌고 가던 길을 갔다. 뭐야,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옆에서 쿡쿡 찌르는 손길이 느껴지는 데도, 달재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용기를 내었다. 이달재는 명치에서부터 힘을 끌어모으고 있는 힘껏, 외쳤다. 

태섭아! 널 정말 좋아해!

우렁찬 목소리는 공항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다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이달재를 바라보았다. 송태섭도 마찬가지였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 목소리도 커졌네. 강백호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라가 질 수 없다는 듯 따라 외쳤다.

오빠! 나도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오빠가 제일 좋아! 어엉? 뭐야, 고백 타임이야? 료칭, 나도 좋아해! 뭐냐,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나 하고... 잘하고 오기나 해라! 넌 할 수 있다! 이달재의 고백은 순식간에 칭찬 세례에 묻혀버렸다. 그 수많은 말을 들으면서도 송태섭은 오로지 이달재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달재 또한 손을 달달 떨리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송태섭의 얼굴은 황당에서 당황으로, 이내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마치 중학생 때 네 농구를 좋아한다 고백했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마지막에 송태섭은 한껏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크게 웃었다.

이건 빠른 거야, 느린 거야?

그 의미 모를 말에 이달재만 따라 크게 웃었다. 







여기저기서 하얗게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까만 카메라 렌즈, 그리고 커다란 방송국 마이크. 수많은 환호 속에서 송태섭 선수의 인터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의 경기에 관해 묻는 리포터의 질문에 송태섭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다른 인터뷰 때와 달리 안정적인 모습에 새로 온 신입 카메라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리포터가 송태섭 전문 리포터라고 그랬나. 팬이라고도 했고, 아무래도 익숙하니까 그런가. 대화가 오갈 때마다 카메라 렌즈보다도 리포터와 더 자주 눈을 마주했다. 송태섭 선수, 렌즈 봐주셔야죠. 카메라맨이 몇 번 손짓하여도, 송태섭의 눈은 마치 자석처럼 리포터에게만 콕 박혔다. 여러 질문이 오가고, 슬슬 끝내려는 분위기인지 가벼운 질문이 오갔다. 리포터가 질문했다.

마지막으로, 시즌이 끝나면 어떤 휴가를 보내실 예정이신가요?

으음, 글쎄요...

송태섭은 눈을 데굴 굴렸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고, 한쪽 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마치 경기 코트 위에서 악동처럼 볼을 스틸하는 얼굴이었다. 이럴 때의 송태섭은 재치 있는 답변을 내주었으므로, 카메라맨은 조금 기대했다.

리포터분이랑 같이 데이트나 할까 싶은데, 어때요?

카메라를 떨어트릴 뻔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따라서 놀란 리포터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확히는 불타오르는 얼굴로 부끄럽게 웃었다. 잠깐, 이 반응 뭐지? 그러는 사이 송태섭의 손가락이 리포터의 가슴팍에 달랑거리는 명찰을 건드리자 이달재라는 이름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설마 싫어?

그러더니 협박하듯 이달재의 넥타이를 콱 잡아 끌어당기는데, 카메라맨은 순간 빨리 카메라를 꺼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끄지 않은 이유는,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도 행복한 연인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달재가 수줍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정말 좋아.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