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hygall.com/540530362



편전 궁인들이 눈만 굴려 무엇인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한 군데, 소복차림으로 뜰에 꿇어 앉은 귀비였다. 오늘 아침 두 개의 파격적인 소식이 있었다. 하나는 숙비전이 참혹하게 뒤집혔다는 것, 또 하나는 지금 목격하는 것처럼 귀비가 불명예스러운 벌을 받게 된 것. 


귀비는 급하게 태후전에 호출되었다. 숙비전이 뒤집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모두들 뻔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태후전 방향으로 고개만 돌려도 내쫓긴 귀비가 숙비가 그 꼴을 당하자마자 호출되었으면, 합방의 사후처리를 의논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처음 얻은 알현 기회라는 것이 고작 걸레짝이 된 몸을 낫게 하는 방법을 보고하기 위해서라니 아랫것들의 마음에도 딱해서 혀를 찰 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상은 훨씬 잔인하고 냉엄했다. 추가로 전해진 소식에서, 귀비가 내명부 기강을 무너트린 죄로 종아리를 맞은 사실이 밝혀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황제에게 용서를 구하라는 명목으로 편전 한가운데에 돗자리도 없이 무릎이 꿇렸다.


아무도 말은 못했지만, 태후의 처사가 너무 과하다는 것이 궁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내명부 기강은 오래 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결코 귀비의 탓이 아니다. 품계에 따른 질서를 유지하기엔 힘의 불균형이 너무나 자명하였기 때문이지. 비틀린 질서는 손쓰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점차 악화되었다. 안타깝지만 법도 상 잘못이 있으면 누군가는 책임을 지게 되어있다. 내명부가 엉망이 될 때는 조용하던 법도가 이럴 때만 철저하니 참 부조리하나, 그래도 어제는 안 지키던 법도를 오늘 지키라 하면 지켜야 하는 곳이 또 황궁이다. 태후는 황제나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귀비에게 떠넘기는 쪽을 택했다. 가장 만만하고, 근거도 있으니까. 


"귀비마마. 어찌 이러시옵니까..! 중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폐하께서 크게 노하십니다. 어서 귀비전으로 돌아가시옵소서."


날카로운 돌마당에 귀비가 무릎을 꿇었다는 보고를 듣고 까무러칠 뻔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내관이다. 내관은 버선발로 달려나왔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귀비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귀비는 꿈쩍 않고 웅크려 있었다. 무릎이 갈리는 한이 있어도 꿇어 있겠다고 태후께 이미 약조드린 뒤였으므로 마음대로 앉았다 일어났다 할 수 없었다.


"폐하께서 죄를 사해주기 전까지는 말라 죽더라도 이 자리에 꿇어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태후마마의 명이셨습니다."
"아아, 그래도..."


마치다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자세를 조금 고쳤다. 그때, 내관은 보고 말았다. 꿇어있느라 접힌 치맛자락에 비쳐 보이는 피얼룩... 


"세상에."


내관은 탄식했다. 그도 소식은 들었다. 전후사정으로 미루어보아 필시 회초리질에 배어나온 피일 터. 아직 뜰에 나오지도 않은 황제가 벌써부터 천지를 무너뜨릴 기세로 역정을 내시는 것 같아 내관은 마음 깊이 절박해졌다. 


"아악!"


별안간 문틀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가냘픈 궁인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내관은 깜짝 놀라 뒤돌았다. 황제가 성큼성큼 지나간 마루 위로 반쯤 뜯긴 문짝이 종이연 마냥 달랑거렸다. 급히 문짝을 수습하는 궁인들과 황제의 뒤를 따르는 궁인들이 일사분란하게 나뉘었다. 황제를 따르는 궁인들 뒤로는 난리통에 따라 나온 대신들이 흙빛 얼굴로 사태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황제는 순식간에 귀비 앞에 당도하였다. 마치다는 황제의 발치를 덮은 용포 끝단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움으로 애간장을 다 녹인 분이니 조금만 보면 안 될까. 하지만,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 여기가 어디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인지 되새긴다. 마치다는 푹 수그린 채로 인사올렸다. 


"폐하.."
"이게 무슨 짓거리야."


낮게 읊조리는 황제의 음성이 스산하다. 분기로 번들거리는 눈길이 귀비의 창백한 피부, 흰 소복, 그 위에 얼룩진 피를 차례로 훑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엎드린 자세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배에 안착하였다. 황금 용포가 파르르 떨렸다. 


"소첩, 죄를 고하러 나왔습니다."
"무슨 죄?"
"소첩은 귀한 품계를 받고도 마땅히 소임을 다하지 못하여 내명부에 불화를 일으키고 끝내 기강을 흐트렸사옵니다. 그로 인해 숙비는 크게 몸져 누웠고, 다른 후궁들도 상심이 크옵니다. 소첩의 부덕함으로 내명부 전체가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사오니 크게 책임을 통감하옵니다. 폐하께서 소첩의 죄를 엄중히 다스려 주시옵소서.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그 따위 말 하려고 여기 앉았나? 귀비는 정녕... 이,"


황제는 눈을 감고, 쏟아내고 싶은 폭언을 간신히 참았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한참이나 열리지 않자, 마치다는 조용히 아뢰었다.


"소첩을 벌하는 대신 내명부에 더 이상의 고통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결국 황제도 참았던 폭언이 터졌다. 


"장난해! 무슨 벌을 내릴 줄 알고! 아직도 나를 모르겠소? 그대를 발가벗겨 호숫가 나무에 매다는 수가 있어!! 못할 것 같아?"
"무슨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소첩을 벌하시고, 내명부를 보듬어 주시옵소서."


웅성거리던 대신들이 조용해졌다. 바람조차 그쳤다. 좌중이 고요한 가운데, 황제가 귀비 앞에 쭈그렸다. 고개 숙인 귀비의 뒤통수 머리채를 꽉 움켜쥔 황제는 세게 잡아내겨 얼굴을 쳐들게 했다. 여기저기서 기겁하는 새된 소리가 났다. 너무 험악한 광경에 지켜보던 누군가가 놀라 실수로 소리친 것이다. 황제와 귀비는 그것을 무시하고 오로지 서로를 향한 시선 안에 갇혀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 그들만 남은 것처럼. 황제가 작게 뇌까렸다. 


"태후마마께서 시켰나. 응?"


마치다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답답해진 황제가 다시 같은 질문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묻질 않아. 태후마마꼐서 이리 하라고 시켰느냐는 말이오."
"저지른 죄에 대하여 벌을 받는데 태후마마의 하명이 무슨 상관이겠사옵니까."
"...."


황제의 모든 것이, 심지어 속눈썹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다는 황제의 투명한 눈동자 너머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솟았다가 꺼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진노라기보다는 고통이었다. 







"귀비는 작금의 사태를 접하고 생각해둔 계획이 있는가."


긴 덕담 끝에 태후가 진지하게 물었다. 마치다는 너무 방자하게 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아뢰었다. 


"부끄러우나, 고민만 많고 무엇하나 결론지어진 것은 없사옵니다."
"무슨 고민을 하였는지 어디 들어보세."


시험관처럼 돌변한 목소리, 그리고 압박질문이었다. 말실수라도 했다간 경을 칠 것 같아 절로 웃음기가 가셨다. 마치다는 다시 긴장감을 높이고는, 우선 편전으로 가 황제를 설득하려고 했던 계획을 말씀드렸다. 물론, 이익보다 손해가 클 것 같아 그만두었다는 점도. 태감은 곰곰이 생각에 빠지더니 되물었다.


"편전으로 가 황상을 설득하신다 말씀하셨지요. 황상의 마음을 돌릴 자신이 있다는 뜻이옵니까? 폐하께서는 한번 고집하시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시는 분입니다. 이미 다른 후궁들을 벌주고자 마음을 정하셨으면 귀비마마께서 말리신들 소용이 없을 수도 있사옵니다."


맞는 말씀이시다. 황제가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 사실 그분이 내명부에 있는 모든 음인들을 무참히 안으시겠다고 작정하셨으면, 마치다도 말리거나 설득해 낼 자신은 없었다. 다만, 설득한 것과 비슷한 결과를 얻어내는 요령 정도는...


"태감의 말씀이 맞습니다. 합방... 그러니까 어느 후궁이 어떤 시침을 드느냐는 내명부 음인들이 결정할 수 없지요. 허나 소첩은 폐하를 말리는 작은 요령을 익혀 꼭 필요한 순간에만 쓰고 있었사옵니다."
"그 요령이 무엇이옵니까?"


간단한 원리였다. 일종의 육참골단. 내 살을 베어주고 상대방의 뼈를 취하는 방법으로, 쉽게 말해 얻으려면 먼저 버리는 전략이다. 마치다는 황제가 귀비를 무한정 탐닉하게 두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힘든 시간이지만, 어떻게든 버텼다. 그러다가 탐닉의 수위가 너무 높아져 황제가 못내 죄책감을 느낄 수준이 되면, 그 때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 황제는 웬만한 소원은 예외없이 들어주었다. 하늘에 맹세코, 의도적으로 황제를 이용한 건 아니다. 결과적으로 늘 그랬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방법으로 마치다는 황제의 마음도, 햇살정책도, 아름답던 금소리도 얻어냈다. 이 정도면 훌륭한 요령이 아닌가. 그러나 침상에서 벌어지는 연인놀음에 빚진 거래를 어른들께 설명드리자니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니까... 큼..." 
"마마. 큰일을 도모해야 하는 시점이옵니다. 한시가 급하니, 신이 황제폐하와 귀비마마께 힘을 보태드릴 수 있도록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지요. "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다. 지금은 조정이 혼란한 틈을 타 먼저 승기를 잡아야 할 때. 태감의 정치력은 검증되어 있었다. 이 만큼 믿을만한 아군도 없으니, 마치다는 부끄러워 말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과하게 들어드리면, 반드시 그 넘치는 것이 잉여로 남습니다. 그 잉여를 소첩의 원으로 바꾸어 청하면 폐하께서는 곧잘 들어주셨..."


탁—!


찻잔이 깨질 듯이 탁자에 부딪혔다. 태후였다. 눈썹은 심히 일그러지고 주름 하나하나에 혐오감이 그득했다. 마치다는 태후의 고까운 기분을 감지챘다. 황제의 기괴한 밤생활을 탐탁치 않아 하신다는 건, 소문으로도 듣고 눈치도 많이 받아 알고 있었다. 그 밤에 어울리는 귀비도 당연히 달갑지 않으실테고. 마치다는 아직 자신이 태후께 온전히 받아들여지지는 못하였음을 깨닫고 심적 거리감을 조정하였다. 


"확실하옵니까?"
"예? 예.. 지금까지는 백이면 백 그러하였습니다."


잠시 태후께 정신이 팔렸던 마치다는 다시 태감과의 담론으로 돌아갔다. 태감은 뱀같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신이 생각하기에도 폐하께서는 귀비마마의 상흔에 마음이 약해지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


조금 놀랐다. 마치다는 눈을 깜빡이며, '귀비의 상흔에 마음이 약해지는' 황제의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마치다조차 어물쩡 간과하고 있었다. 그렇다. 황제가 진짜 신경을 곤두세우는 부분은, 침대에서 입힌 상처가 아니라, 그냥 귀비의 상처였다. 생각해보면 미오산에서 다쳐온 귀비를 황제는 직접 치료하며 몹시 애처로이 매달리셨다. 설마 자신이 반만 맞는 오답을 말하고, 태감이 정답을 정정할 줄이야. 어쩐지 태감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기회입니다."
"무슨 기회.. 말씀이신지요?"
"판서와 다른 대신들을 이간질할 기회 말이옵니다."


뭐라고? 방금까지 황상을 설득할 방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게다가 이간질이라고? 마치다는 이판과 대신들이 연합할 걱정을 하였는데 태감의 생각은 반대로 간다. 


"편전으로 가셔서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폐하를 설득하시옵소서. 피 같은 자식의 몸과 마음이 난도질 당할 위기에 처한 대신들이옵니다. 귀비마마께서 대신 고초를 당하겠다 호소하시면, 대신들은 자식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황상을 귀비전으로 드시게 할 것이옵니다. 그리되면 이미 피해를 본 이판만 고립되겠지요."


...일리가 있었다. 단 대신들이 이판을 배신한다는 전제 하에.


"소첩은 반대로 생각하였습니다. 소첩이 나서면 눈에 띄는 표적이 나타나는 셈이고, 대신들이 공동의 적을 처단하기 위해 더욱 똘똘 뭉치지 않겠사옵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만에 하나 대신들이 합심하여 역모를 일으키면 피로 강을 이루어서라도 숙청해야지요."
"...!"


괜히 황제와 한 핏줄이 아니다. 황제도 '역모'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셔서 주위 사람들을 얼어붙게 하시더니 태감도 똑같다. 황상께서는 말씀하실 때 경각심이라도 배어 있었지, 태감은 너무 고요하고 담담한 어조로 '피의 강'이라 하니 더 살벌했다. 은연중에 깨닫는다. 지금껏 태후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사람은 태감이었다. 적이 아니어서 다행일 정도로.  


"태감. 소첩이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황상께선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고자 오래 수고를 들이셨습니다. 소첩 또한 최선을 다해 조력하였지요. 이제와서 폐하의 뜻을 져버리고 대신들을 숙청할 수는 없사옵니다."


간곡함에 목소리가 아주 조금 높아진다. 정말로, 피는 그만 보고 싶었다. 왜 이 황궁은 평화로울 수 없는지, 언제가 되어야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제는 조급해지려고 한다. 태감은 흥분하는 귀비에게 손바닥으로 진정하라는 표시를 하였다. 


"걱정마시옵소서. 역모는 아무나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판은 역모를 성공시켜 본 경험이 있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압니다. 허니 더 조심스럽겠지요. 다른 대신들은 쭉정이와 다름없어 역모를 꾀할 배포도 없사옵니다. 신의 계책을 믿어보시옵소서. 귀비마마께서 다른 후궁들을 대신하여 값을 치르겠다고 선언하시면, 대신들에겐 분명 솔깃한 미끼가 될 것이옵니다. 황상을 귀비전으로 보내 다른 후궁마마들을 지킬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대신들은 결코 이판과 규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정치적 의리를 지키지 못한 무안함으로 이판을 불편히 여기겠지요. 귀비마마의 말씀 한 마디로 분열을 일으킬 수 있사옵니다."
"...."


삼자대면의 장. 하나의 결론. 답은 나왔다. 실행만 남았다. 편전에 대신들이 모이려면 한 시진 남짓 걸린다. 마치다는 마지막으로 마음에 걸리는 점을 상의했다.


"태감의 말씀대로 해보겠습니다. 헌데 여전히 걱정이 됩니다.. 소첩이 자진하여 편전으로 나서면, 어찌되었든 존재감을 과시려는 의도로 비춰지지 않겠사옵니까."
"우리도 같은 우려를 하였네. 걱정 말게. 대안이 있으니."


태후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상궁에게 손짓했다. 상궁은 미리 준비한 것 같은 쟁반을 태후께 건넸다. 쟁반은 헝겊으로 덮여 있었다.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피는 크지 않았다. 마치다가 헝겊 속 물건의 정체를 추리하는 사이, 태후가 말했다.


"자네가 자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자네를 보낸 것으로 하세."
"태후마마께서 저를 보내셨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라는 뜻이옵니까?"
"아니. 그러면 내가 자네를 지지한다고 천하에 알리는 꼴 아닌가."
"허면.."
"그들이 스스로 오해하게 해야지."


쟁반을 덮은 헝겊이 거침없이 벗겨진다. 목침과 여러 대의 회초리, 깨끗하게 접힌 흰 천이 드러났다. 마치다는 할말을 잃고 그것들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나에게 단단히 밉보였다는 사실은 세상물정에 어두운 애기 나인들도 알지. 자네도 여기 앉아 담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는가."
"송, 송구하옵니다.."
"내가 자네의 종아리를 때려 훈계하였고, 그 벌의 연장선으로 편전에 보냈다고 하면 아무도 내막을 의심하지 못할 걸세. 자네의 살을 베어내 대신들의 뼈를 취할 기회네. 어떠한가. 조금 더 살을 내어주겠는가?"


아. 다 계획된 것이었구나...


마치다는 회초리를 집어든 태후에게서, 여전히 평온하게 찻물을 들이키는 태감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분은 이미 알고 계셨다. 황제가 귀비에게 상처를 내어 느끼는 유희 만큼, 그 상처를 보고 느끼는 정신적 고통도 크다는 사실을. 다 알고 세운 계획이 이것이다. 정말 냉혹하다. 귀비의 몸과 황제의 마음을 도륙하여 목적을 이루려고 하다니. 태감의 계획에 전혀 연연치 않는 태후도 잔인하기는 마찬가지다. 황상의 가족과 친지는 이런 분들이셨구나. 정치적 동료로는 이보다 믿음직스러울 수 없지만 가족으로서는... 


'폐하께서는 너무 죄책감이 깊은 나머지 가죽주머니에 숨을 의지할 때도 있다고 하셨다. 헌데 이분들은 가죽주머니가 없어도 아주 편해 보이시는구나.'


어쩌면 두 분 어른과 황상은 다른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친다. 그러나 지금 고찰할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분의 심성이 고약하든 말든, 계책 만큼은 훌륭하다는 사실이다. 


두 어른께 의지할 수 있어 기뻤던 감정은 메말라버렸다. 마치다는 일어서서 치맛자락을 걷었다. 상궁이 목침을 놓아주었다. 


"...."
"...."


목침에 올라서며 잠시 상궁과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예전에 비해 온건하고 안타까운 기운이... 연민이 서려있는 듯도 하다. 감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시각을 상실시키는 매서운 회초리가 종아리를 후려갈겼다. 









"원하는 게 뭐야."
"내명부의 평화입니다."
"순 바보 아냐?"


마치다는 바윗돌 같은 손에 밀쳐져 휘청거렸다. 실수로 배를 감쌀 뻔 했다가, 얼른 주먹을 쥐었다. 다시 자세를 정돈하고 반쯤 엎드렸다. 용안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다는 일부러 화난 표정을 꾸며내는 황제의 안면근육을 읽었다. 연기중이셨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 중신들의 의견을 심사숙고하여 기껏 처소를 피해주었더니 왜 자진해서 제 무덤을 파시오?"
"소첩을 벌하시고 내명부는 보듬어주시옵소서."
"할 줄 아는 말이 그것 밖에 없소?"
"...."


황제는 앉은 채로 조금 더 귀비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라도 귀비를 그리워한 마음을 달래시는 것이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웃어드리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다. 더 황상을 바라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 마치다는 저 멀리 대신들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대신들의 이름과 얼굴은 잘 모르지만, 한 명은 누구인지 알겠다. 저기 저 피가 거꾸로 솟은 듯 얼굴이 붉어진 자는 이조판서겠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쭉정이 대신들은, 태감의 예언대로 이판을 외면하거나 노려보며 불편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태감의 예언이 적중하여 다행이다. 살갗이 뜯기는 고통을 감수했는데 보람이 있어야지.


"대신들은 보고 있는가!! 귀비가 태후마마께 매를 맞고 와 내명부의 평화를 간청하고 있다."
"...."
"태후마마께서는 내명부의 평화를 위해 귀비와 합방을 추진하시는 듯 한데, 대신들의 의견을 어떠한가! 아까의 열띤 논의를 계속해 보라. 누가 다음 합방의 부담을 지겠는가! 병판! 자네인가!"


지목을 당한 대신은 질겁하여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병판일 것으로 추정되는 대신이 더듬거리며 고하였다.


"소, 소신의 여식은 아직 부족하여... 아, 아니, 영빈마마께서는 아직...!"


대신들은 바삐 자기에게 유리한 패를 골랐다. 그 중에 이판과 협조하는 패는 없었다. 그들은 이판과 숙비야 어찌됐든 하루빨리 황제를 귀비전으로 보내고 싶었다. 할 수만 있으면 귀비전에 가두고 싶은 심정이다. 조금 전 황제가 귀비를 어찌 대하는지 목격하였기 때문에 더 간절했다. 그 손찌검을 제 자식이 당한다고 상상하자, 아무리 황은을 입는 영광스러운 일이어도 역겨웠다. 대신들은 수군거렸다.


"폐하께 귀비전에 드시라 합시다."
"아니, 이 양반아. 그럼 이판 대감은 어쩌고. 우리가 힘을 합쳐야 귀비마마를 찍어낼 수 있소."
"자네는 여식을 입궁시키지 않았으니 그런 말이 태연하게 나오지!!!"
"쉿! 목소리 낮추시오. 이판 대감이 듣겠소."
"그만 됐소. 귀비마마의 간택을 막을 방법은 합방 말고도 많소. 급한 불부터 끕시다. 그게 싫으면 오늘 합방은 영빈마마로 하시던지."
"뭐? 내 딸을..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시전판 말다툼에 가까운 논의였다. 마치다가 있는 곳에선 선명히 들리지 않았으나, 그래도 뜨문뜨문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안심했다. 계획이 성공했다. 결국 대신들의 뼈를 취하고야 말았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지. 그래도 한가지는 좋았다. 이처럼 가까이에서 황상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 비록 저 투명한 눈동자 너머로 올가미에 걸린 들짐승의 몸부림 같은 것이 비치기는 하지만... 마치다는 황상의 마음에 작은 기쁨이나마 드리고 싶어 조그맣게 속삭였다.


"보고싶었어요, 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