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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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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이라기보다는 그날 태섭이랑 명헌이 시점으로ㅇㅇ

둘째가 꽃밭에 가자고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태섭은 그냥 그대로 아이랑 놀다가 오자 그런 생각뿐이었음. 그러다 아이랑 한참 놀고 돌아갈 때가 오자 자기가 지금 아무 구속도 없는 자유로운 상태란 걸 깨달은 거임.

그걸 깨닫자마자 바로 아이한테 숨바꼭질을 하자며 따돌렸고 그냥 무조건 앞만 보고 미친듯이 달렸음.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든 이명헌 흔적이 없는 곳으로 가자며 숨도 고르지 않고 달렸음.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뭐에 걸린 듯이 멈춰섬. 이대로 어딜 갈 수 있는데? 자기 부족은 이미 이명헌한테 정벌 당해서 자길 빌미로 먹고 살고 있는데 돌아가봤자 다시 갖다 바쳐질 거고.

내 새끼들은? 원치 않았지만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들인데. 그동안 행복한 일들도 많았잖아. 내가 만약 없어진다면 아이들은 무사할까? 첫째 낳고 도망 갔을 때 이명헌이 잡으러 와서 안 돌아오면 아이를 죽여버린다고 했잖아. 그건 정말 죽일 수 있는 눈이었다고. 오만 가지 생각과 망설임에 멈춰 있던 태섭이 문득 깨달았음. 아. 송태섭 너 뼛속까지 이명헌한테 길들여졌구나.


실소하고 있던 태섭의 뒤로 말발굽 소리가 들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태섭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달림. 안돼. 이제 잡히면 두번 다시 못 도망가. 너 스스로 익숙해져서 주저 앉아 버릴 거야. 간절함이 무색하게 달린 지 얼마 안돼서 태섭은 바로 명헌한테 낚아채져버렸음


안돼
놔 좀 놔 나 좀 놔주라고 제발!!!
안돼
제발 놔줘 제발.. 부탁이에요 놔주세요
안돼
......
못 가
......
여기 있어라 제발
......
내 옆에 있어줘 태섭아. 부인. 우리 애들이 울고 있어. 돌아가야지.
.....흡

차라리 강압적으로 대하면 더 발악이라도 했을 텐데 핏줄이 돋은 손으로 태섭을 으스러지게 껴안은 이명헌의 첫마디는 애절했음. 내 모든 걸 가져갔으면서 뭐가 그리 부족한지 날 안 놔주는 건데. 어차피 못 간다고. 니가 나를 벗어날 수 없게 묶어버렸잖아. 결국 다 네 뜻대로 되어버렸잖아. 이제 다시 기회가 올까? 난 영영 여기서 나갈 수 없는 걸까? 눈물이 터지고 오열하는 태섭을 명헌은 계속 꼭 안고 있었지만 눈은 분노로 가득차있었음


숨도 고르지 않고 풀숲을 헤쳐 달리느라 흙투성이에 울다 지쳐 잠든 태섭을 앞에 태우고 마을로 돌아가는 명헌은 주체 할 수 없는 화를 가라앉히느라 애쓰고 있었음. 아직도, 아직도 다른 마음이 있었다고. 계속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아이 셋도 충분하지 않단 말이지. 어떡하지. 정말 다리를 잘라야 하나. 아냐. 기어서라도 도망갈 사람이 송태섭이다. 신중해야 해. 차라리 내 다리를 자를까. 송태섭은 약자한테 더 약하니깐.

난폭하게 구는 것보다 다정하게 약한 척 애정을 구걸하는 게 송태섭을 더 흔들리게 만든다는 건 다년간의 경험으로 얻은 이명헌의 비법이었음.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강제로 억눌렀을 때보다 너 없으면 죽어버릴 거라고 세상에서 제일 약한 사람인 양 애정을 구걸하는 게 송태섭을 더 주저앉힐 수 있는 방법이란 걸 알게되고 이명헌은 얼마든지 연기를 할 수 있게 되었음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못하는 태섭을 익숙하게 보살피며 별채 밖을 나간 명헌은 울타리 옆에서 빼꼼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둘째랑 눈이 마주쳤음

무슨 일이니?
어머니는요?
자고 있어. 어제 많이 놀랐지? 이제 다 괜찮아.
지금 어머니 볼 수 있어요?
안돼
왜요?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쉬어야 해.
그래도..
ㅇㅇ야.

아버지 말 들어야지. 어르는 말투였지만 눈은 경고의 기색을 담으며 아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아이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도망치듯이 돌아갔음. 달리는 게 송태섭이랑 똑같네. 혹시 정말 둘이 같이 떠났을까봐 철렁했었는데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명헌이 다시 별채 안으로 들어갔음




명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