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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7 11:10

잔뜩 노장 분위기 나는 철대만으로 보고싶음.....


이번달 갚을 돈이다. 철이는 대만이가 내미는 봉투에서 돈뭉치를 꺼내 한장씩 세어보고 장수 맞다며 고개를 끄덕거렸어. 옆에선 정대만씨 다음달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꼭 밀리지 않고 따박따박 갚으세요ㅋㅋ 이러면서 깝죽거리고 있고.. 철이는 옆에 따라온 놈 배를 돈봉투로 퍽 치면서 이거 들고 가서 차나 가져오라 시켰어. 철이 부하 하나는 차 빼러 가고 철이는 주먹 쥐고 서서 자기 노려보고 있는 대만이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다가 "갈게." 하면서 뒤돌겠지. 현관문 열면서 "너 살이 좀 빠졌다" 이러는 철이 말에 대만은 주먹을 더 세게 쥐었고 철이가 집을 나가자 이마를 싸매며 주저앉았어. 이때 집전화가 울리고 비척비척 걸으면서 수화기를 든 대만인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활짝 웃을 수 있었지. "아빠!" 대만인 두손으로 수화기 잡고서 발음도 부정확한 애보다 조잘조잘 수다를 떨어댔음. 응 빈아. 밥은 꼭꼭 씹어서 먹었어? 안 남겼지? 공주님 자꾸 밥 남기면 아빠가 속상해~ 

별명이 불꽃남자라더니 정대만은 진짜 불꽃같은 선수였어. 프로팀에서 뛸 때 실력도 좋아 팬서비스도 쩔어 팬층이 탄탄했고 어느 구단에서도 대만을 엄청 탐내서 연봉들 높게 부르며 채가려고 안달이었음. 결혼도 일찍 한 편인데 엄청 사랑꾼에 딸바보로 유명했고. 한창 주가 올리고 있어서 팬들은 정대만이 평생 농구선수를 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돌연 은퇴를 선언한거야.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맞는거 같다라며 인터뷰를 한 대만이 은퇴를 결심한 이유는 다름 아닌 누적된 부상 때문이었음. 그렇게 농구판에서 전설적인 스타 선수로 이름 날린 정대만은 은퇴 후 코치 될 거란 팬들의 기대를 깨부수고 어린이 농구교실을 차렸지. 그 이유도 다름 아닌 딸 때문이었음. 애 낳고 키워보니까 애들이 그렇게 이쁘데. 그리고 자기 딸이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공놀이를 그렇게 좋아했다면서.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가던 정대만이었는데, 이런 사람한테도 거짓말처럼 불행은 찾아오고야 말았지.. 와이프가 사업 준비를 하면서 사기를 크게 당하고 도박에까지 손을 대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거야. 선수 때 벌어놓은 돈으로도 다 메꿀 수도 없었음. 딸이 병에 걸렸거든. 그 작은 몸으로 몇번의 큰 수술을 받고도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된거야. 그래도 포모남 정대만 이혼하자고 울면서 얘기하는 와이프 손 꼭 붙잡고 어떻게든 이 사태 우리 둘이 해결해보자, 안 될 거 없다, 돈이야 또 벌면 되고 빚은 갚으면 되지 않냐. 우리 빈이 위해서라도 마음 다잡고 노력해보자고 설득했어. 마음 고쳐먹은 와이프도 그러자고 대만에게 사과하고 노력해보자 했는데, 불행은 꼭 몰아서 온다고 와이프마저 교통사고로 사망해버렸지

세상에 혼자 남겨진거 같은데 그렇다고 포기를 할 순 없잖아. 대만은 급한대로 낮에는 어린이 농구교실 하고 밤에는 배달 일 하고 그러면서 다시 농구로 할만한 일이 있을까 이것저것 생각도 해보는데... 이 돈 빌렸던 사채업자들이 진짜 개 양아치 쓰레기깡패들이라 대만일 가만 놔두질 않았음. 이자는 말도 안 되게 쌓이는데 주먹질하고 깽판을 쳐놔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

그냥 참고 해내야한다. 딸이 아프잖아. 딸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독하게 맘 먹고 저 쓰레기들한테서 벗어나겠다는 대만이었는데... 늘 수금하러 오던 놈이 사라지고, 약속된 날짜에 자기 집을 찾아온 사람이 박철인거 보고 또 한 번 무너질 뻔한거야. 철아. 이름을 불렀는데 박철은 자기 얼굴 한 번 쳐다보고는 이번달 갚아야 할 돈에 대해서만 얘길 했어.

그런 식으로 재회를 하게 되어버린 박철과 정대만... 철이는 대만이가 자기네 건달 조직에 돈을 빌렸다는걸 둘이 재회하기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겠지. 대만이 담당으로 돈 받으러 가던 일수꾼이 사고를 쳐서 형님들에게 뭔가 짤리고... 그 다음 담당으로 철이가 맡게 된 거였어. 철이는 형님들한테 정대만 이름을 듣게 된 날 줄담배를 피우면서 저 나름대로 고민을 했겠지. 이거 어떡하냐. 반가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전혀 반갑지 않는데...



돈을 갚아야 할 날이 돌아오고 철이는 대만이 집으로 찾아갔어. 문을 두들겼는데 대만이가 안 나오는거야. 전화를 걸어도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받진 않아. 따라온 부하는 아 정대만 이새끼 어디로 튄거 아닙니까? 하면서 성질내고 있고. 철이는 통화연결음이 끊길 때까지 핸드폰을 들고 있다가 내려놓으며 너 좀 닥쳐라... 읊조렸어. 부하놈은 바로 형님한테 보고했고 정대만새끼 잡으러 가자 해. 철이는 난 나대로 찾아보겠다고 부하놈 먼저 보내고. 그냥 대만이 집 앞에서 하루종일 서서 기다렸지

저녁쯤에 대만이는 집으로 돌아왔어. 반바지에 후드티 차림새로. 심지어 신발은 짝짝이야. 얼굴은 저번달에 봤을 때보다 더 수척해져있고... 복도에서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던 철이를 본 대만은 아 맞다. 오늘 빚 갚는 날이었지... 생각을 해. 그래서 철이가 왔구나. 인사하기엔 뭣하니까 그냥 철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뭐라고 해야하나 이로 애먼 자기 입술만 뜯고 있는데 역시나 철이는 돈은? 이라고 얘기하지. 대만인 힘없이 문을 열고서 일단 있는 현금들 다 철이한테 건네줬어 돈봉투도 없이 꾸깃꾸깃한 지폐들 그대로.

대만은 지폐를 세어보던 철이를 보며 긴장하고 있었어. 돈이 한참이나 모자랐으니까. 근데 철이가 당연히 부족하잖아, 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간다."

그냥 간다고 이러는거야. 자켓 안주머니에 돈을 구겨 넣은 철이가 현관문을 잡자 대만이는 철이를 불렀지. "철아." 하고

"밥은..."

"..."
"밥 먹고 가라 철아."

나도 안 먹어서 배고파... 대만인 머리를 긁적이면서 철이를 잡았고 철인 문고리에서 손을 뗐지. 구두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두리번거리다 냉장고를 벌컥 열어젖혀. 뭘 먹으라는거냐 정대만... 혀를 끌끌 차면서.

남자 혼자 지내는데 반찬이 뭐가 있겠어 그냥 계란 후라이에 스팸 구워서 영양가 전혀 없이 대충 밥을 먹는데 철이는 밥숟가락 크게 퍼서 군말없이 우적우적 잘 먹어. 대만이도 마찬가지고. 뭐 하루종일 굶었냐고 철이가 스팸 물면서 툭 던지듯이 말하는데 대만이가 거기다 대고 응... 이러는거야.

"새벽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빈이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져서..."
"애를 또 응급실로 옮겼거든... 그래도 일단 급한 불은 꺼졌대. 애가 괜찮...은지는 모르겠는데."
"애가 눈도 못 뜨고 끙끙 앓다가 겨우 눈을 떴어. 그 작은 애가 밥도 못 먹고 고생을 해서... 빈이 좋아하는 케이크 사주고 싶었는데, 먹으면 안 된다길래..."

대충 얘기 들어보니 어떤 상황인지는 알 거 같았지. 대만도 놀랐던 모양인지 말도 횡설수설 버벅이는데 철이는 즉섭밥만 꾸역꾸역 먹으면서 다 들어주고 있고. 결국은 그래서 이번달은 돈이 그 정도밖에 없다. 여기까지 닿았고.

잘 먹었다. 수저 내려놓은 철이가 먼저 일어났어. 대만이 다 먹지도 못 했는데 일어나서 "간다." 이러는거야. 대만인 뭐 철이 배웅하러 나가기도 그렇고.. 그냥 멍하니 가는 뒷모습 보고만 있었지. 밥상엔 지폐 한 장이 올려져 있었어. 밥값이라고 철이가 남겨놓은건데 그걸 보니까 비참해져서 숟가락을 잡은 손에 힘이 절로 실렸지. 주먹을 쥐고 자꾸만 울고 싶어서 떨리는 눈꺼풀을 애써 진정시켰어

그 다음 약속한 날짜에 철이는 늘 달고 오던 부하도 없이 혼자 대만이 집을 찾아왔지. 이번에도 돈이 모자랐는데 세어보고는 자켓 안에 돈을 넣으면서 "밥은" 이러는거야. 밥 차려라 정대만아, 나 밥 안 먹고 왔다. 하면서. 대만인 얼떨떨해서 어... 집에 먹을게 없는데... 이러고. 철이는 당당하게 식탁에 앉으면서 다리를 꼬고 턱짓을 해. 저번에도 먹을거 드럽게 없었더구먼 뭘. 대만인 그때처럼 철이한테 즉섭밥이랑 계란후라이 스팸 몇 조각을 내어줬고 철이는 밥 먹던 대만이 볼 툭툭 치면서 "살 더 빠졌네." 하는거야.

철이가 대만이 집에서 밥 얻어먹고 만원짜리 한 장 두고 가면서도 대만이 모자란 돈을 메꿔주진 않았어. 그대로 형님들한테 가져가고 정대만이가 돈 모자라서 다음에 갚겠답디다, 하고. 근데 사채업자들이 대만일 가만 놔두겠어 아니지... 대만이가 딸 보러 병원에 간 날 그 양아치 새끼들이 애 병원까지 찾아간거야. 병실에 들어오는 사채업자들 보면서 눈 돌아간 대만이는 멱살 잡고 복도로 끌어내면서 "애 있는데서 뭐 하는 짓이야." 이 악물고 말하고. 사채업자들은 곧 치시겠다 정대만 선수? 아니지 ㅋㅋ 이제 선수 아닌데 내가 말실수를 했네 ㅋㅋ 이러면서 성질 긁고 있고.

비상계단에서 요즘 왜 돈을 따박따박 안 갚냐고 대만이 머리 툭툭 치는 사채업자가 대만이 무릎을 퍽 찼어. 정대만씨 여기 다리 안 좋다고 했었지? 다리 더 망가지기 싫으면 해이해지지 말고 열심히 살자! 열심히 갚아서 응? 딸내미도 안 아프게 해줘야할거 아니냐고. 주저앉아서 고개 숙인채 무릎 싸맨 대만이 머리를 꾹꾹 누르고 침을 퉤 뱉은 사채업자들은 그렇게 비상계단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그러다 말고 아 맞다, 하면서 한 마디를 툭 던졌지

"다음엔 우리 형님이 식사나 같이 하자고 하시네?"



다음 약속 날짜에 철이는 오지 않았어. 대만인 처음 보는 일수꾼들 차에 타서 사채업자 대가리를 만나러 갔지. 고급진 중식당 룸에 들어가는데, 거기에 다른 어깨 형님들과 함께 철이가 서 있는거야. 대만인 철이 보고 아는체하며 눈짓하는데 철이는 무표정으로 정면만 보고 있어.

"앉아요 정대만씨."

끽해야 깡패새끼 주제에 쓰리피스 정장 갖춰입은 중년의 조폭 두목에게 대만인 인사도 안 하고 그냥 말없이 노려보면서 앉고. 어이쿠 ㅋㅋ 눈빛 좀 봐. 나 곧 죽이겠네? 낄낄대며 웃는 사이 음식들 서빙되고. 대만인 젓가락 안 들고 있는데 모브두목이 드세요 하는거야. 대만인 "밥 먹고 왔는데." 이러면서 우리 할 얘기는 없지 않냐고, 오늘 돈 가져왔으니까 그거 먹고 떨어지라면서 돈봉투를 테이블 위로 툭 던졌지.

옆에 있던 쫄따구들이 돈 세어보는데 달마다 갚아야 할 액수가 맞기는 해. 근데 잊고 있진 않았을거 아니야. 몇 번 빵꾸난 적이 있던데... 하면서 모브두목이 슬며시 운을 떼

"요즘 딸내미 많이 안 좋아졌다면서? 힘들겠네... 이름이 뭐였더라. 뭔 빈이었는데. 수빈이었나 다빈이었나..."
"너 이 시발새끼야 애 얘기는 꺼내지 말랬지."
"아 정대만씨 입 되게 거치시네. 너가 여기서 지금 쌍욕 내뱉을 처지세요?"

보고 있던 쫄따구가 대만이 뒤통수를 퍽 때리는데 모브두목이 손짓하면서 가만히 있으라 해. 그럼 다른 모브들 그냥 뒷짐 지고 서 있고... "원래 운동하시는 분들이 거친데 그걸 모르니? 미안해 정대만씨. 내가 잘 알거든. 이해해요."

"이해는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녹록지가 않아. 인정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거든? 그럴 때일수록 여러가지 가능성을 염두하고, 또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을 고려해야해. 그게 바로 현명하게 사는 길이란 말이야. 내 말 알아듣지 응?"

정대만씨 머리 그렇게 나쁜거 아니잖아.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못 했다는건 흠도 안 돼. 내가 정대만씨 플레이를 얼마나 오래 지켜봤는데. 당신 머리 좋다니까. 내가 알지...

모브두목이 하는 헛소리 듣고 나온 대만은 깡패들 차에 탔어. "우리 정대만씨 다리도 안 좋은데 걸어가게 둘 순 없지. 잘 모셔다 드려라. 그럼 우리 다음에 또 봅시다?" 창 밖 쳐다도 안 보고 고개 숙인 대만이의 손에는 ㅇㅇ물산 대표 모브... 명함이 쥐여져 있었어.

대만이 옆에 앉은 철이는 창을 내리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그냥 창 밖으로 불도 안 붙인 연초를 하나 던져버렸지. 버릴 거 있냐. 작은 목소리로 대만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는데, 대만은 철이 손을 멍하니 내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지. 그래라. 철이는 더 권유하지 않고 창을 올렸어.

악질 모브두목은 취향이 운동선수들이었고, 애초부터 대만인 그 레이더망에 걸렸었는데 워낙 잘나가는 선수라 감히 손도 못 대고 있었던거야. 근데 참 운이 좋게 걸려들었던거지. 모브 입장에서는...

대만이네 아파트 근처에 도착한 철이는 조수석에서 내리는 부하한테 걍 기다리고 있으라고 손짓하고는 자기가 내려서 대만일 데리고 나와.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타고 가는 내내 대만인 말이 없고, 철이는 현관 앞까지 대만이 팔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가 어깨 툭툭 두들기면서 "간다." 하겠지.

"철아."

대만이가 또 철아, 하고 부르면 박철은 멈춰설 수밖에 없고...

"너... 밥, 아니... 자고 갈래."

우리 고딩 때 종종 그랬잖아... 서로 좆같은 일 있으면 누구네 집에 모여서 술 퍼마시고 놀고... 그랬잖아. 이번에도 그럴 수 있는 거잖아 그치.

대만이가 좆같은 일이 있어서 열받는다는 티를 내는데, 거기다 대고 철이가 뭐라 할 수 있겠어. 그때처럼 또 "도와줄까" 할 수밖에 없었겠지. 철이는 먼저들 퇴근하라고 기다리고 있을 부하들한테 전화를 했고, 복도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대만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