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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5 15:03
슬램덩크 하나후지 현준수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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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이라도 일어났나 싶게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수겸이 어렵사리 눈을 떠 보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현준의 모습이 흐릿하게 잡혔다.
언제 일어난 건지 옷까지 다 갈아입은 모습에 수겸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보통 자신이 자고 있으면 사방을 수면에 최적화된 상태로 바꿔 놓을지언정 깨울 일은 절대 하지 않는 현준이니, 지금은 반드시 일어나야 할 타이밍이다.

"왜애..."
"빵 사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아니면 나 혼자 다녀올 테니 좀 더 잘래. 아마 한 시간 정도면 다녀올 텐데."
".....지금 몇 신데."
"7시 반."

그렇다면 대략 5시간 조금 넘게 잤으니 필요수면시간은 충분히 취했다.
기지개를 한 번 쭉 펴니 등뼈에서 우두두두둑 하는 소리가 무섭게 들렸다.
목을 움직이고, 어깨를 돌리고, 손목을 털고 하는 등의 기상 루틴같은 전신 스트레칭을 마친 뒤 수겸은 침대 밖으로 기어나와 현준의 등을 탁 쳤다.

"나 금방 씻고 나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같이 가자."

욕실로 들어가나 싶더니 입에 치약 거품을 묻힌 채 칫솔을 물고 나온 수겸이 현준에게 제가 입고 있는 후드 티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어 아이 어이어?(이거 바지 어딨어?)"
"옷장 안 서랍. 꺼내 줘? 그거 입게? 그거 내 거잖아. 안 불편해?"

그러나 수겸의 대답은 말이 아니라 단호하게 방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고, 명령에 따라 현준이 꺼내다 준 바지를 다리에 꿰고는 허리의 스트링을 조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준이 결국 못살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수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너 양치나 해라. 이거 바짓단이랑 옷소매 내가 접어 줄게."

현준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끝단의 시보리 부분을 착착 접는 사이 거실 한복판에 서서 양치를 마친 수겸은 욕실이 아니라 그보다 가까운 싱크대 쪽으로 가서 입 안의 거품을 뱉어내고 손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군 다음 그 기세 그대로 거기서 세안까지 마친 뒤 손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옆엔 어느 사이엔가 현준이 수건을 들고 와 있었다.

"닦아라."
"내버려 두면 말라."
"바깥에 추워. 동상 걸린다."

예쁘장하게 생긴 주제에 예전부터 하는 짓은 아저씨 버금가던 수겸의 성격은 나이가 먹고도 변함이 없다.
결국 들고 있던 수건으로 현준이 대신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아 주자, 수겸은 겉옷을 찾으려는 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수겸이 걸치고 나온 상양의 저지에 현준은 다시 한 번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아니 그건 또 무슨..."
"그냥. 안 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아니다, 됐다. 가자. 늦을라."

멜란지그레이 컬러의 트레이너 위에 그제 수겸이 입었었던 짙은 감색 야상을 걸친 현준과 한참 큰 검녹색 트레이너세트에 누가봐도 운동부임을 알리는 저지 자켓을 걸친 수겸은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누구라도 아침운동을 나가는 동네 주민이라 볼 것 같았다.

현준의 손을 잡은 채 지난 번 동네 구경을 할 당시 갔던 방향이 아닌 영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딘지 이국적 느낌이 나는 벽돌담이 쭉 이어진 언덕길이 나타났다.
벽돌 틈새로 얼기설기 말라붙은 담쟁이덩굴에서 아직 떨어지지 않은 이파리들이 마치 현대미술이나 추상화를 보는 느낌이다.

"여기 언덕이 좀 가팔라서 운동은 잘 될 거다."
"이 정도쯤이야 매일 하던 건데."

현준의 말대로 조금 숨이 차긴 했지만, 해외에 나와 있는 것만 같은 풍광 덕에 눈이 즐거워 힘들다는 느낌은 없었다.
언덕길의 거의 꼭대기 즈음 올라갔을 무렵, 현준이 수겸의 손을 당겨 세웠다.

"여기."

현준이 가리킨 곳은 언덕을 올라오는 내내 보았던 집들과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2층짜리 주택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이 집만은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단 정도랄까.
익숙하다는 것처럼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준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수겸의 머릿속은 이게 맞나? 란 의구심으로 가득했다.

1층의 입구가 아니라 마당 끄트머리에 위치한 외부 계단을 올라 2층에 닿자, 포인세티아로 만든 리스가 걸린 육중한 나무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문 위쪽의 김서린 유리창 너머로 빵 바구니를 들고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딱 맞춰 왔다. 여기 8시부터인데 지금 8시 5분이네."

시계를 확인한 현준이 나무문을 똑똑 두드렸다.

- Entrez!(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고리버들을 엮어 만든 크기도 모양도 각기 다른 바구니 위에 갓 구운 빵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는 중이다.
벽면엔 손뜨개질로 만든 듯한 각종 동물 인형과 도자기를 구워 만든 유럽 전통 복장의 어린아이들이 놓여 있고, 그 사이사이로 빨간 제라늄 화분이 몇 개 보인다.
벽면마저 따로 마감을 하지 않은 벽돌 그 자체라, 마치 피터 래빗이나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사는 세계에 떨어진 것만 같다.

"Bonjour, ça va?"(안녕하세요, 잘 지냈나요?)

아마도 가게 주인인 듯한, 빵을 바구니에 담던 백발에 푸른 눈의 나이 지긋한 여인이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느닷없이 나온 외국어에 현실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수겸은 이어지는 상황에 아예 울고 싶어졌다.

"Tres bien."(잘 지냈습니다.)

꽤나 능숙한 프랑스어로 대답한 현준은 수겸을 돌아보며 굳어버린 어깨를 툭툭 쳤다.

"주문 내가 할 테니 넌 구경이나 해. 보다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그나마 있던 식욕도 달아날 지경이다..."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는 수겸을 두고 카운터로 다가간 현준이 주문을 하는 동안, 수겸은 아직도 적응하기 힘든 동화나라같은 가게 내부를 찬찬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Deux campagne, et trois pain au chocolat, et(캄파뉴 두 개, 뺑 오 쇼콜라 세 개, 그리고).... 김수겸, 잠도 깰 겸 커피 마실래? 우유 넣은 걸로."
"어? 어, 어. 마실래."
"Et deux café au lait, s'il vous plaît."(그리고 카페오레 두 잔요.)
"Bien. Et, qui c'est?"(알겠어요. 그런데 저 분은 누구시죠?)

빵을 종이 봉투에 담으며 묻는 가게 주인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돌려 수겸을 보고 웃었다.

"Époux moi."(제 배우자요.)




따뜻한 카페오레는 예상보다도 훨씬 부드러운 맛이었다.
여전히 손을 잡은 채 왔던 길을 돌아오며 슬슬 현실감각을 찾은 수겸이 입을 열었다.

"난 이제 네가 뭘 못 하는지도 못 찾겠다."
"뭐가."
"간판도 없는 집을 잘도 찾아냈겠다, 난 알아듣지도 못할 말까지 유창하게 하겠다."
"아침에 러닝코스 잡다가 우연히 발견한 데야. 동네선 유명한 모양이더라. 보통은 오픈런 있는데 오늘은 운이 좋았던 거고. 그리고 나도 프랑스어 못 해. 그냥 아는 단어만 막 늘어놓는 수준인 거지."
"그럼 이건 뭔데."

수겸이 커스터드 푸딩이 든 자그마한 종이 박스와, 그 위에 앉은 손바닥만한 손뜨개 토끼인형을 들이밀자 현준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너 예쁘다고 주신단다. 나 주문하는 내내 그거 쳐다보고 있었다며."
"그랬나...?"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굴리는 수겸의 손을 현준이 고쳐 쥐었다.

"일단 들어가서 얼른 밥 먹자."




단단하고 둥근 빵의 위를 잘라낸 뒤 속을 파내고 그릇처럼 만든 빵 안에 스튜를 담아 내는 건 수겸의 어머니가 겨울만 되면 자주 만들어 주는 레시피였다.
오늘도 둘이 포개 앉은 채 시작된 식사 시간.
과거의 추억이 그리워지게 만드는 레시피 덕분이었을까,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려 할 때 수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제 전화기를 들고 왔다.

"너희 집에다 전화 해 볼까?"
"갑자기?"
"나도 그렇긴 한데 너도 집에 어지간히 연락 안 하잖아. 오죽하면 너희 부모님이 네 생사여부를 나한테 물어보시겠어."
"그건 그랬지..."
"그러니 밥 먹고 집 생각 난 김에 겸사겸사 인사나 드리자고. 그럼 지금 건다?"

뭐라 말릴 새도 없이 냅다 영상통화를 걸어 버린 수겸의 행동에 돌처럼 굳어 버린 현준의 눈 앞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 아아, 수겸이, 무슨..? 어머, 현준이도 있구나?
"네, 어머니. 잘 지내시죠?"
- 우리야 늘 똑같지. 그런데 거긴 언제 간 거니?
"며칠 전에요. 아버지는요?"
- 오늘 오프라 주무시는데... 어머나, 여보?

화면 저쪽 뒤에서 파자마 차림에 머리는 잔뜩 흐트러진 현준의 아버지가 다가왔다.

- ...잘 지내지?

조금 쉰 목소리에 수겸이 현준의 손을 잡아당기자 현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잘 지냅니다."
- 아프지 말고.
"아픈 데 없어요."
- 그럼 됐다.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 뒤로 한동안 조용하던 전화기 너머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래도 가끔은 좀 오고.
"....네."
- 수겸이는 현준이가 속상하게 하면 바로 말해라.
"에이~ 그럴 일 없다니까요."

웃으며 손을 내젓는 수겸의 얼굴을 보자 현준의 아버지 얼굴에도 푸근한 미소가 감돌았다.
따뜻한 분위기로 가족 간의 온라인 상봉이 끝나고, 현준의 품에 끌어안겨 기분 좋은 듯 쿡쿡대고 웃고 있던 수겸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아, 나 그거."
"응?"
"어제 너희 선배가 그랬잖아. 집 뒤져서 스크랩북 찾아보라고. 내가 뒤져서 찾기 전에 네 손으로 갖다 바치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뾰족히 날선 눈빛에 잠시 멈칫 하던 현준은 수겸을 들어안은 채 그대로 일어나 벽면을 채운 책장 앞으로 향했다.
책장 한구석에서 뽑아낸 파일은 일반인보다 훨씬 큰 현준의 한 손에조차 쥐기 힘들 양이었다.
뽑아들고 온 파일을 책상 위에 던지듯 올린 현준이 작은 한숨과 함께 제게 안겨 있던 수겸의 허리를 잡고 반대 방향으로 돌려 앉혔다.

"저거야. 순서대로."
"허어..."

제일 첫 기사 타이틀은 [상양의 전설, 김수겸]이란 낯뜨거운 것이었다.
졸업할 때 즈음의 인터뷰였던 것 같은데 저런 제목이 붙을 줄이야.
사진의 저 뒤편에 초점이 흐릿하긴 하지만 현준의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 김수겸 수많은 러브콜 중 해남대가 아닌 ㅇㅇ대 선택.
- 천재 강백호의 부활은 머지 않았나. 현 NBA 선수 송태섭, 서태웅에 도내 스타플레이어 이정환, 김수겸, 윤대협까지!
- 올해의 대학 리그 MVP 김수겸, 라이벌 이정환과 진한 포옹.

메이저 신문의 기사는 그나마 저정도로 온건했는데, 황색신문의 낚시성 기사들은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 이정환과 김수겸, 심야의 데이트?
- 오사카 에이스 남훈과 카나가와 에이스 김수겸의 데이트 장면.
- 김수겸을 둘러싼 남자들 특집.

스크랩북을 보다보다 못한 수겸은 저런 자극적인 제목을 단 낚시 기사마저 죄다 모아 둔 현준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저거 보면서도 용케 제정신으로 살았다? 난 너한테 저런 기사 났으면 네 멱살을 잡던 언론을 뒤집어엎건 했을텐데."
"네 커리어에 지장 가니까. 난 이제 선수가 아닌 일반인이야. 저런 데 입 대서 무슨 좋은 일이 있겠어."
"억울하잖아. 나랑 결혼한 건 넌데 죄다 딴 사람이랑 스캔들 터지면."
"스캔들은 스캔들이지 현실이 아니잖아. 그리고 넌 나 두고 그런 파렴치한 짓 벌일 인간이 못 돼. 그거 아니까 괜찮은 거야. 너 언제나 나만 보고 살잖아. 안 그래?"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손을 쥐었다 놨다 하는 현준을 본 수겸은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불안하구나.
18살 겨울, 제게 느닷없이 청혼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수겸이 딴생각에 골몰한 사이, 현준은 바닥에 널린 스크랩북을 다시 정리해 책장에 꽂은 다음 수겸의 뒤로 다가와 조용히 작은 등을 끌어안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너 잡을 생각."

부루퉁한 말에 현준이 큭큭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잡혀 있는데 뭘 얼마나 더 잡게."

네가 불안한 만큼 나도 불안한 마음을 모르겠지.
난 이제 더 이상 네가 없으면 안 되는데.

"나 너무 피곤하다. 잘래. 너도 들어와."
"어? 나도?"
"너 없으면 잠이 안 와. 들어와서 안아 줘. 쉬고 싶다. 나 어제 밤새 내내 무리했잖아."
"가자, 가서 자자."

어젯밤 일을 언급하는 순간 안색을 싹 굳힌 현준은 수겸을 안아들고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 아무 짓도 안 할게. 그냥 팔베개만 해 줄게. 자. 편하게 자."
"그래, 고오맙다아."

어깨 안쪽의 움푹 패인 자리에 편안하게 머리를 괴고 누운 수겸이 팔을 뻗어 현준의 등을 끌어안았다.
숨을 크게 들이키자 온 몸이 노곤하게 풀린다.

"졸려어..."
"응, 그래. 잘 자."

하지만 제 품 안에서 금방 안정적인 숨을 내쉬며 잠든 제 배우자가 지금 무슨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못 하는 현준이었다.




오타 수정은 천천히 쭉 계속 진행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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