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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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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견디는 천년의 세월은 고단하다.
기억해낼만한 추억도 없다면 더더욱.

그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그는 판단하지 않고 오로지 지켜볼 뿐이고, 그렇게 천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낯익은 사람을 만났다. 아무리 기억해내려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누구지....? 넌.


"넌 누구야?"

"지금 이름을 묻는거면 공준."

"공준...."

도무지 떠오르는게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냥無였다.

"그런가...."

그냥 체념을 하고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예전 이름은 온객행이었어. 어떤 사람에게 '로온'이라고 불렸었던 적이 있어."

"....온객행."

장철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름을 읊었다. 가슴 아래서 낯선 고동이 느껴졌다. 장철한은 자기도 모르게 심장에 손을 대고는 그 움직임을 느꼈다.

"....로온."

아!

가슴을 치는 고통에 몸이 반으로 접혔다. 장철한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자 공준이 바로 다가와 그를 안았다.

".....로온."

"응."

"로온이 누구지?"

감히 허락도 없이 자신을 붙잡고 있는 이에게 분노가 일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알고자 하면 깨달았고 쥐고자 하면 가득 담을 수 있었다.

장철한이 뜻을 담고 손을 들자 남자의 몸이 마치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기는 것마냥 끌려갔다.

심장은 여전히 아프다. 기억저편의 습기習氣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일까. 장철한은 멍하니 떨어져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하고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저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알고싶지 않다.

"나는 재래인再來人이 되어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한번의 윤회를 마치면 이곳에 되돌아 올 일은 없을거야."

수행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들었으나, 아직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 윤회한다는 것이다.
잠시 잊지만 다시 되찾을 수 있다. 아니 더 위로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럴 수 없다. 장철한이 불환과不還果에 들면 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생을 살아감에 있어 우연이란 없다. 그렇다면...이 남자와는 이미 연이 닿은 사이라는 말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분명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을 열게 되면 후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열지 않아도 후회하는 마음은 같다.

장철한은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수천수만 가지를 생각했다.
등 뒤에는 우주가 있지만 앞을 바라보면 그가 있다.

"너는 나를 알고 있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장철한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너를 알고 있고?"

"응."

"우린 무슨 사이였지."

"...연인."

연인이라고?

장철한은 커진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우리가 연인...."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장철한의 곁으로 남자가 다가왔다. 여전히 쥐고 있는 심장이 아팠다. 장철한의 몸은 마치 그를 알아본 것처럼 반응했다. 남자는 말을 아꼈다. 장철한이 질문을 하면 짧게 대답했다.

마지막이 어땠는지 묻고 싶지는 않았다. 두사람은 분명 슬픈 결말을 맞이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두 눈에 담긴 감정이 그랬다. 이 사람은...왜 아까부터 울고 있는거지.

자신에게는 이제 딱 한번의 생이 남았다. 어쩌면 그를 간절히 부른 건 눈 앞의 남자일지도 몰랐다.

장철한이 남자의 가슴에 손을 댔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장철한은 남자의 눈을 보며 말했다.

"너는 나를 만나 기쁜가?"

눈물이 가득 담긴 눈이 접히며 남자가 웃었다. 그러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뻐. 너무 기뻐서...꿈일까봐 두려워."

그의 심장이 동시에 대답하고 있었다. 장철한은 손을 떼고 남자의 눈물을 닦아봤다. 흐르는 눈물은 따뜻했다.
손 끝에 맺힌 눈물의 온도.

"나는 가야 해."

"어디로?"

장철한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급박해졌다. 자신의 얼굴을 만지고 있는 장철한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 느낌.

처음이 아닌 것 같다.

이 눈물을 만지는 것도.....분명 처음이 아니야.

장철한은 잡힌 손을 쳐다보고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나는 다시 태어날 거야. 그리고 너를 만나러 갈게."

기다려 준다면 조금 더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갈게. 그럼 너의 눈물의 의미도 알 수 있겠지.

"난 이미 오래 기다렸는데. 이제 가지 마."

"그건 내가 정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다시 태어나 생을 얻는다면 그 유한한 생은 너에게 준다고 약속할게. 너는 내 번뇌가 되겠지만....잠시나마 우린 함께 있을 수 있어. 싫다면 거절해도 좋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철한은 그가 거절하지 않기를 바랬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생각이 많은 듯한 남자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는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긴 속눈썹이 눈가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곧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 그 때도 우린 연인일까?"

남자는 간절했다. 신중한 표정으로 장철한을 쳐다봤다.

그래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싫다고.

장철한이 대답했다.

"응. 지난 생을 이어서 사랑해볼게."

너를.

그 말을 한 순간, 갑자기 마음 속에서 수천마리의 나비가 날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파득거리는 날개짓에 바람이 일고 모든 것을 하늘로 띄운다. 장철한의 동공이 커지며 묻혀진 기억들이 거쎈 파도처럼 그를 뒤덮는 것을 망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은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가며 기억들을 몸과 혈관에
새겼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불어오는 바람은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장철한의 몸이 강한 바람에 밀려 공준에게 부딪혔다. 공준은 바로 장철한을 끌어안고 몸을 돌려 감싸고는 제 몸으로 바람을 맞았다.

흐려질대로 흐려진 낡은 기억의 파편.

해가 끝이 걸린 산 너머, 아지랭이처럼 피어오르는 기억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악한 사람도 칼을 놓으면 성불할 수 있다는데, 좋은 사람이 나쁜 일을 했다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그저 살아가면서, 햇볕을 쐬고, 이렇게 부를 누군가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 정말 좋은 것 같아.




"아....."

장철한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틀어막은 입 사이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바람은 잠잠해졌지만 공준은 장철한을 품에 안은채 놓지 않고 떨고 있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잊고 있었던 기억 저편 그리운 그의 목소리.



너에게 빛이 있어, 내가 잡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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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행자서
준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