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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3 02:00
가장 가까운 소도시가 300마일 정도 떨어진 촌구석의 다이너에 낯선 이방인 둘이 들어가자 시선이 쏠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음. 아직 시대는 20세기였고 미합중국의 중부 지방에서 동양인을 둘이나 보는 건 허리케인에 소 떼가 날아가는 것보다 희귀한 일이었거든. 게다가 한 명은 강렬한 빨간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한 명은 푸들털처럼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에 동그란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으니 눈길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음.
40줄은 훌쩍 넘어보이는듯한 웨이트리스가 두 사람을 힐긋거리며 자리로 안내해줬음. 키가 2미터에 육박할 듯한 빨간 머리카락의 청년은 덩치에 비해 의외로 숫기가 없는 지 메뉴판을 소심하게 뒤적거렸음. 50년 전통의 다이너에 처음으로 영어가 아닌 외국어가 울려퍼졌음.

"섭섭이, 나 밀크셰이크..."
"밥부터 골라."
"별로 배 안 고픈데."
"습."

미니 푸들같은 소년같은 사내가 눈을 홉뜨자 빨간 머리 청년이 덩치값을 못하고 어깨를 떨었음. 눗...하는 처음 들어보는 말버릇은 아마도 그들 고향의 의성어겠거니 하고 다이너에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생각했음. 메뉴판을 뒤적이던 곱슬머리의 남자가 웨이트리스를 불렀음.

[실례합니다, 부인. 주문을 하고 싶은데요.]

다소 투박한 발음과 목소리에 비해 상당히 정중하고 교과서적인 말씨였음. 웨이트리스는 씹고 있던 껌을 윗 잇몸에 붙이고 앞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음.

[밀크셰이크 하나와 레모네이드 하나, 그리고 팬케이크 두 개랑 소시지를 곁들인 오믈렛도 두 개 주세요. 또 칠면조 샌드위치 세트 하나에 단품으로 두 개 추가해주시구요, 호박 파이와 수프도 두 개씩 주세요.]

돌도 씹어먹을 나이로 보였지만 꽤 많은 주문량에 웨이트리스가 눈썹을 씰룩거렸음. 수첩에 아무렇게나 주문을 휘갈겨 쓴(실제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웨이트리스가 잇몸에 붙여둔 껌을 다시 짝짝 씹으며 물었음.

[더 필요한 건 없어?]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푸들 청년이 빨간 머리 청년의 메뉴판까지 걷어 웨이트리스에게 건넸음. 웨이트리스는 겨드랑이에 메뉴판을 끼우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주방으로 사라졌음. 다시 다이너의 한 쪽에서 낯선 외국어 대화가 시작되었음.

"샌드위치는 포장 되려나? 괜찮으면 가져가고 싶은데. 또 언제 마을이 있을지도 모르고."
"날씨가 더워서 상하지 않을까?"
"그것도 그래."

잿빛 브라운관에 등장하던 눈이 찢어진 형태의 동양인이 아니라 다소 동글동글한 외모의 사내와 미국의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강렬한 빨간 머리카락의 사내의 등장에 다이너의 손님들은 무례하게도 그들을 대놓고 주시했음. 두 사람은 그런 시선이 익숙한 지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대화를 이어나갔음.

"요즘 아기 여우 태동이 좀 심해진거 같아. 무슨 문제가 있진 않겠지?"

빨간 머리의 청년, 강백호가 널럴한 후드티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배를 어루만졌음. 도톰하게 튀어나온 배는 다행히 아직까진 박스핏의 후드티에 가려지는 편이었음. 푸들털같은 머리카락의 소년같은 청년, 송태섭은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팜플렛을 꺼내들었음.

"네가 지금 몇 주더라?"

백호가 손가락을 각 손가락으로 한 번씩 꼽았음.

"21주?"
"지금쯤 태동이 본격적으로 느껴진대. 걱정 할 필요는 없을거같아. 오히려......"

백호와 마찬가지로 박스핏인 셔츠 위로 태섭이 손을 올렸음.

"...태동이 없는 쪽이 무섭지."

조금 불안해보이는 태섭의 표정에 백호가 쩔쩔맸음.

"어젯밤엔 우지가 너무 움직여서 잠도 못 잤잖아."
"...중간이 없어, 중간이. 누굴 닮았는지......"

태섭이 피식 웃으며 배를 어루만졌음. 낮동안엔 죽은듯이 조용히 있는 뱃속의 아기는 밤이면 천하의 송태섭이 앓는 소리를 낼 정도로 움직여댔음. 고향의 말에서 따온 달콤한 태명에 비해 상당히 태섭의 속을 썩이는 아기얐음. 저만 힘들면 괜찮은데 같은 방을 쓰는 백호도 제 버거움에 같이 밤잠을 설치게 만드니 그 점이 못내 미안했음.

잠시후, 웨이트리스가 양 손 가득 음식을 실은 쟁반을 들고 나타났음. 4인용 식탁이 음식으로 가득 찼음. 레토르트 제품이 반 절 이상이었지만 이틀 내내 차갑게 식다 못해 슬슬 시큼한 맛이 나기 시작하는 샌드위치와 햄버거를 먹었던 두 사람에겐 정찬이나 다름없어 보였음. 크림이 올라간 밀크셰이크의 빨간 빨대를 물어채려던 백호를 태섭이 잽싸게 저지했음.

"따뜻한 음식 먼저."
"눗....!"
"찬거 바로 먹으면 아기가 놀라잖아."

걱정 섞인 타박에 백호가 순순히 수긍하고 숟가락을 들어올렸음. 건조 채소가 뜨거운 물에 급하게 불어나느라 버석버석했지만 백호는 나름 입맛에 맞는지 요란한 후루룩 소리가 나기 시작했음. 숟가락질이 빨라지는 걸 다정한 눈으로 지켜보던 태섭도 숟가락을 들어올렸음. 하지만 게걸스러운 섭취 소리 위로 욱 하고 식탁에 어울리지않는 소리가 끼얹어졌음.
태섭이 숟가락을 떨어트리고 입을 틀어막은 채 찐득한 의자에 몸을 기댔음. 비위가 상하는 소리가 다이너 전체에 울려퍼지자늙은 남자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났음. 웨이트리스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태섭에게 다가와 물었음.

[우리 음식에 무슨 문제 있어?]

시비를 거는듯한 말투에 태섭이 당황해 변명하려 했지만 자꾸만 올라오는 속에 신물을 삼키기도 벅찼음. 태섭이 창백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자 백호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배를 가리켰음.

[아, 아기! 배에 아기 있어요!]

당황이 섞인 커다란 목소리에 더 당황스러운 내용이라 웨이트리스가 권태와 짜증 섞인 표정을 슬그머니 감췄음.

[오..... 임신했어?]

태섭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웨이트리스가 머쓱한 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음.

[미지근한 물이라도 가져다 줄까?]

아이를 낳은 적은 없지만 네 살 터울의 언니가 조카를 가졌을 때 입덧으로 고생한 기억이 있던 웨이트리스가 최대한 친절한 어투로 태섭에게 물었음. 태섭이 간신히 신물을 삼키고 입을 열었음.

[감사..합니다...]

웨이트리스가 가져다 준 물을 단숨에 삼킨 태섭은 제 몫의 수프를 백호 앞으로 밀었음.

"너 먹어."
"우지는 너무 편식쟁이야."

백호가 툴툴거리며 어느새 비운 제 수프 그릇을 치우고 태섭의 수프를 먹으며 말했음.

"다른거라도 먹어봐. 섭섭이 너무 말랐어."

백호에게 잔소리한 게 무색하게 태섭은 차가운 얼음이 든 레모네이드를 쪽쪽 빨아먹었음. 음식은 많은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건 새콤한 레모네이드가 전부였음. 그래도 책임져야 할 목숨이 셋인지라 태섭은 시럽을 뿌린 팬케이크 반 쪽과 감자튀김을 끼적끼적 삼켰음. 소시지와 베이컨, 오믈렛은 가까이만 해도 속이 뒤집혀 모조리 백호의 몫이 되었음. 그나마 다행인 건 백호는 입덧이라곤 없이 쌩쌩하다는 거였음. 백호까지 입덧이 심했으면...아마 이 여행은 중도 포기해야했을거야. 태섭이 부푼 티가 나지 않는 배에 손을 얹고 한숨을 길게 쉬었음.

샌드위치까지 모조리 먹어치운 뒤 백호와 태섭은 자리에서 일어났음. 구역질을 하긴 했으나 동행인이 접시를 싹싹 비워주자 웨이트리스는 나름 기분이 좋아보였음. 웨이트리스에게 현금을 건네며 태섭이 물었음.

[여기서 다음 마을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되나요?]
[다음 마을?]

웨이트리스가 턱을 긁었음.

[주유소가 있는 마을은 230마일, 숙박이 가능한 마을은 400마일 정도 떨어져있지.]

점심시간을 넘겼으니 숙박 가능 마을에 도착할 때는 이미 새벽일 게 뻔했음. 꽤나 고되겠구만.
웨이트리스가 영수증과 함께 오렌지 사탕 세 개를 태섭에게 건넸음. 태섭이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흘려보냈음.

[감사합니다, 부인]
[그맘때는 좀 고생한댔어. 나야 모르지만...]
[좋은 하루 보내세요.]
[좋은 하루...보내세요.]

백호와 태섭이 고개를 꾸벅이고 다이너를 나섰음. 미국 촌구석의 주민들은 동양인들의 퇴장을 끝까지 주시했음. 바람 부는 소리만 나던 도로에 라임색 지프차가 휙 하고 지나가는 걸 보고 웨이트리스는 접시가 널부러진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음.
다이너의 터줏대감들은 그제야 본격적으로 낯선 손님들을 화두이 올렸음. 희귀한 동양인 오메가에 대한 음탕한 농담과 영주권에 대한 다소 불쾌한 대화가 오고갔지만 이목을 끌었다해도 존재가 사라지니 관심 또한 옅어져 점차 다른 주제가 오고갔음. 어느새 주제는 지방 선거로 옮겨갔고 정치적 견해가 섞인 대화는 다이너 한 켠을 뜨겁기 달구었음.
바에 앉아 한참동안 신문을 읽는 척 다이너의 대소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중년의 백인도 슬그머니 대화에 참석하기 위해 신문을 착착 접었음. 그러고보니 아까 그 동양인, 어디서 봤는데...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남자는 제가 지지하는 주지사의 험담에 금세 낯선 이방인들을 잊고 논쟁에 끼어들었음.

그가 읽던 신문의 1면에는 nba의 몇 없는 동양인 스타의 시즌 아웃이 대서특필 되어있었지만 이 다이너의 주민들의 시선을 끌만한 주제는 아니었음.




과속방지턱도 없이 쭉 뻗은 도로에는 거슬릴 게 하나 없었음. 그런데 이 망할 지프는 왜이렇게 흔들리는거냐고. 태섭이 멀미를 참으며 창문에 뺨을 기댔음. 운전자인 백호는 이 정도 흔들림은 요람의 흔들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지 아무렇지 않아보였음. 태섭은 어떻게든 참으려 했지만 결국 한숨처럼 말을 토해냈음.

"백호야, 여기 사람 넷이 타 있다. 사고 나면 넷이 죽는거야..."
"헉...! 너무 빨라?"
"좀만 천천히 가자..."
"아, 알았어..."

차의 속도가 줄었지만 흔들림은 여전해서 태섭은 이 거지같은 차를 산 과거의 자신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었음. 태섭은 땀이 찔끔찔끔 흐르는 등을 가죽 시트에 뭉개며 아까 웨이트리스에게 받은 사탕을 입에 넣었음. 새콤달콤한 맛이 입에 퍼지자 조금 나은 것 같기도... 기분이 한결 나아진 태섭은 손을 뻗어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음. 지지직거리던 라디오가 뉴스를 흘려보냈음. 의회에서 일어난 개짓거리와 어딘가의 시위 소식, 핫한 지방 선거와 기후 위기 모금 광고 하나가 지나가고 스포츠 뉴스가 시작되었음. 농구의 나라 아닐까봐 시작하자마자 오늘의 nba 경기를 주르륵 읊어대자 사탕으로 좋아졌던 기분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음. 그건 태섭 뿐만이 아니라 백호도 마찬가지였는지 차의 속도가 미묘하게 빨라졌음.
태섭은 글로브 박스를 열어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골랐음. 신이 난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뚝 끊기고 격렬한 랩이 오디오에서 흘러나왔음.

"...섭섭군."
"어엉."
"......이 노래 태교에 안 좋겠는데."

귀를 기울이니 들리는 저급한 단어들의 행렬에 태섭이 후다닥 몸을 일으켜 테이프를 꺼냈음. 다시 차 안은 조용해졌지만 태섭은 더이상 테이프를 고를 기력도 라디오 주파수를 맞출 집중력도 남지않아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음. 텁텁한 에어컨 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지만 태섭은 뒷좌석에서 담요를 꺼내는 대신 멍하니 창 밖을 응시했음. 중부의 고속도로 옆 황무지는 정말 책에서나 보던 미국의 풍경이었음. 처음 며칠이야 신기했지만 그림처럼 정지한듯한 황량한 풍경은 이제 지긋지긋했음. 이 빌어먹을 아메리카 대륙은 가뭄이라도 온 것인지 물이라곤 보이질 않았음. 보이는 푸른색이라곤 하늘이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종종 부는 황무지의 바람이 가려 누렇게 보였음.
평생 푸른 바다를 끼고 살았던, 심지어 미국에서 계약한 구단의 홈조차 바다를 낀 도시였던 태섭에게 황무지는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공간이었음. 몇 달째 그 황무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정신이 어떻게 될 것 같았음. 파란색이 그립다. 태섭이 눈을 질끈 감았음.



두 사람이 이 빌어먹을 로드 트립을 결심한 건 순전히 충동에 기인한 일이었음. 시작은 태섭이었음.


태섭은 고등학교 선배인 대만과 비밀연애를 6년째 이어가고 있었음. 제 인생에 몇 없는 기적같은 순간이라 태섭에겐 아직도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이 생생했음. 심지어 그의 이빨을 털었던 때마저도.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태섭은 대만에게 비밀 연애를 제안했음. 공통 지인들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보여주기 멋쩍다는 이유를 겉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그가 자신과 헤어진 뒤에 좀 더 깔끔하게 재출발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였음. 게다가 두 사람은 연인 관계를 정립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롱디가 되었으니 태섭은 언제든지 그가 저를 떠나도 괜찮도록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음. 대만이 들으면 펄펄 날 뛸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 또한 사랑의 일종이었음. 겁쟁이인 태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
태섭은 연인의 앞에서 늘 쿨한 태도를 고수하려 노력했고 거리가 멀어지니 더욱 쉬워졌음. 그래서 태섭은 자국 프로 리그에서 뛰고 있는 연인의 스캔들을 가급적 모른 체 했음.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다지만 21세기를 앞둔 지금, 동떨어진 대륙의 한 켠에서 연인의 스캔들과 루머는 싫어도 눈에 들어왔음. 거지같은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의 발전 덕분이었음. 익숙한 모국어 기사를 읽어내릴 때마다 태섭은 이곳이 태평양 너머의 미국이라 다행이다 생각하며 떨리는 손으로 뉴스 홈페이지를 닫았음.
하지만 그의 연인은 그의 입으로 말하길 포기를 모르는 남자라 6년째 연애중인 태섭에게 한없이 충실해서 비싼 국제 전화며 인터넷 메신저며 가리지 않고 불같이 연락을 해왔음. 절대 오해하지말라며 펄펄 뛰는 전화와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태섭은 비참하게도 안도하고 말았음. 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되는데. 하지만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은 목젖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나오질 않았음. 대신 그런 루머 따위 믿지 않는다는 허세로 전화를 마치고 나면 태섭은 전화기의 앞에 한참을 주저앉아있았음. 대만의 전화에 안도해버리고 마는 스스로가 증오스러웠음. 이 사람의 사랑에 익숙해지면 안되는데. 이러다 그 사람을 붙잡아버리면... 그 사람은 다정하니 날 떠나지 못할거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절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거라고 태섭은 생각했음.
하지만 그런 결심과 다르게 태섭은 착실히 대만의 사랑에 젖어가고 있었음.


안 좋은 일은 늘 연이어 터지곤 했음.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지나지않아 바로 형이 떠나버렸던 것처럼, 정대만과 옥상에서 쌈박질을 하고 바로 오토바이 사고가 났던 것처럼 태섭의 사람에서 불행은 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음. 지금도 그랬음.
오랜만에 미국에 찾아온 연인과의 만남이 싸움으로 끝난 지 한 달 만에 고국에서 연인의 스캔들이 터졌음. 평소 터지던 루머와 달리 빼도 박도 못하게 늦은 시간 호텔로 함께 들어가는 사진까지 찍혀있었음. 몇 백번이고 생각했던 이별이었지만 코 앞까지 다가오자 태섭의 손은 사정없이 떨렸음. 스캔들이 터지고 24시간 동안 태섭은 컴퓨터를 끄지도 않고 휴대폰을 손에 쥐고 살았음. 대만은 늦어도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항상 해명 연락을 했거든. 하지만 24시간이 지나고 48시간이 지나도 연락은 오질않았음. 스캔들이 터진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태섭은 속에 있던 모든 걸 게워냈음. 그 증상은 꽤 오래가서 기어이 식도염이라는 병증마저 얻어냈음.
처방받은 약을 제조하는 동안 약국의 진열대를 구경하고 있던 태섭은 어딘가 눈에 익은 영양제를 발견했음. 엄마가 아주 가끔 사오던 영양제인데 곰모양의 젤리 형태 영양제였음. 새콤달콤해서 삼남매가 착한 일을 할 때면 사탕 대신 엄마가 상으로 주던 영양제였음. 십여년이 흘러도 똑같은 포장을 보자 그리움이 솟구쳤지만 그와 동시에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음. 새콤달콤한 기억 속의 맛이 입 안에 맴돌자 혀 끝이 축축해졌음. 태섭은 처방약과 함께 영양제 세 통을 함께 사서 숙소로 돌아왔음.

영양제 한 통을 삼십분 만에 모조리 먹어치운 태섭은 뭔가 잘못되었단 걸 느꼈음. 잠시 제 평소 상태를 되짚어보던 태섭은 왁스로 넘긴 머리카락을 헤집어 부스스하게 만든 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쓴 뒤 플랫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약국으로 갔음. 그곳의 모든 임신테스트기를 사온 태섭은 새벽 2시에 인정해야했음. 본인이 임신했다는 걸.

앞서 말했듯이 태섭의 삶에서 불행은 연이어 찾아왔음. 그럼 이 애는 불행인걸까? 태섭이 멍하니 배를 바라보았음. 납작한 배에 애가 들어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음.
너는 꼬리물기로 온 불행인걸까 아니면 내 인생에 몇 없는 행운인걸까.

밤새 고민한 태섭은 바로 구단으로 직행했음. 프런트에 임신 사실을 통보하기 무섭게 태섭은 회의실로 끌려갔음. 장장 3시간 동안의 입씨름 끝에 태섭은 시즌 아웃을 선고 받았음. 그러나 시즌 아웃을 받은 선수치고 태섭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음.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물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고 계약 파기도 없을거라네. 아이를 낳고 재활한 뒤 복귀해달라는 말에 태섭이 결국 물었음. 나에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태섭은 흔치않은 동양인 농구 선수였지만 그렇다고 대체 불가한 선수는 아니였음. 이런 부담을 안고 저를 끌고 갈 이유가 하등 없다는 게 태섭의 냉정한 판단이었음. 태섭의 물음에 프런트 직원이 어깨를 으쓱였음.

[구단주 아들이 미혼부거든요.]

단순한 동질감에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만은 아니었음. 구단은 태섭의 마이너리티를 톡톡히 활용 할 생각이었음. 동양인에 오메가인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미혼부 타이틀까지? 완전 드라마퀸이라고. 구단이 미친듯이 써내려가는 소설에 브레이크를 건 것은 태섭이었음.

[임신, 출산 소식은 비밀로 해줘요.]

3시간의 회의 중에서 30분은 구단주와의 연락에, 30분은 그가 받을 수 있는 혜택에 대한 설명이었고 남은 두 시간은 프런트와 태섭의 싸움이었음. 치열한 논쟁 끝이 결국 태섭은 출산 이후에는 자신과 상의 하에 구단 측에서 제 마이너리티를 활용하는데 동의하고 말았음. 솔직히 농구 포기해야 할 줄 알았단 말이지. 태섭은 협상을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플랫에 돌아갔음.

태섭은 자신의 임신, 출산 휴가를 플랫에 앉아 보낼 생각이 없었음. 튼튼함은 자신있었고 몇 년만에 받는 휴가냐고, 이게. 물론 몇 달 전에 휴가가 있긴 했지만 그건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져버렸으니 새 휴가가 필요했음. 병원에서 받아온 팜플렛과 수첩을 뒤적이던 태섭은 태교 여행에 관심을 보였음. 신경만 잘 쓰면 괜찮겠는데. 1년 전 충동적으로 샀다가 먼지만 쌓여가고 있는 지프를 끌고 나가볼까. 그렇게 임신 팜플렛 대신 여행 책자를 보고 있던 태섭의 플랫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섭의 심장이 쿵쾅거렸음. 설마...... 두꺼운 현관문 너머로 익숙한 이의 목소리가 들렸음.

태섭이 문을 열자 빨간 머리카락의 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이 된 백호가 서 있었음.

"강백호,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태섭의 의아한 목소리에 백호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음.

"태섭 선배......"

백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내밀었음.

"나....나....어떡하지......?"

백호가 건넨 건 태섭에게도 익숙한 물건이었음. 몇 시간 전만해도 태섭이 쥐고 있던 거였으니까. 심지어 빨간줄이 두 개인 것도 똑같네. 태섭은 눈 앞이 아찔해졌음.










대만태섭 태웅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