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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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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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섭이는 매일 화를 내요, 태섭이는 웃는 방법을 모르나봐요, 태섭이는... 요즘 우성의 모든 말은 태섭으로 시작해서 태섭으로 끝남. 화롯가에 둘러 앉아 다음날 쓸 화살을 깎을 때도 말들에게 물을 먹이느라 짬이 날 때도 우성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건 주로 명헌이라 그걸 들어주는 것도 자연스럽게 명헌이 되었음. 무리의 막내뻘이라 귀여움을 받는 것에 꽤 익숙했던 우성은 이제 낙수나 동오가 신혼이라 좋겠다고 농을 치면 제법 능글맞게 받아치는 법도 배웠지만 부쩍 혼자 생각에 빠지는 시간이 길어지는 우성을 눈치챈 것도 명헌 뿐이었음. 막 결혼한 어린 부부의 사정은 내밀하게 알고 싶지 않으나 명헌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은 초원을 지배하도록 교육받은 남자였으니까
흐릿하게 잇자국이 남은 손목, 소매를 꼼꼼하게 접어 올린 팔뚝을 지나 탄탄한 목덜미를 훑고 올라간 명헌의 시선은 아기 늑대의 배를 간질이던 태섭과 마주침. 태섭은 언제부터인가 뾰족하게 치켜뜨던 눈꼬리에서 힘을 빼고 명헌을 바라봐. 몸집이 작고 발이 재서 도망가면 귀찮아 질거라 생각했던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별 생각없이 베푼 조그만 친절에 누그러진 걸 보고 있으면 단전에서 잘랑거리는 감정이 느껴짐. 어려운 상대를 힘 들이지 않고 공략한 만족감으로 불러야 할까 아님 사나운 말을 길들여 올라탔을 때의 성취감이라고 불러야 할까. 명헌은 이 감정을 아직까지는 정복감이라 부르기로 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달리 문득 초원 너머를 응시하는 눈 안,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은 여전해서 어느정도 우성의 푸념에 공감할 때도 있음. 전사가 되기 위한 자질을 제외한 모든 게 서투르고 부족한 우성을 너무 오냐오냐 받아준 탓인가. 명헌은 잠시 고민했지만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건 태섭도 마찬가지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태섭이 수시로 머릿수건을 확인하는 것과 달리 상처를 보자는 말에 아무런 의심없이 맨 발을 내미는 것만 봐도... 막 음인으로 핀 몸에서는 초원에서 맡을 수 없는 낯선 향기가 났음. 애초에 결혼한 음인이 맨 발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뭔지나 아는지 모르겠어. 우성이 어머니 신께서 성인식 때 빈 소원의 답으로 송태섭을 받았다고 말했던 걸 떠올림.
"태섭."
"응?"
"나중에 우성에게 성인식 날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어봐."
형제의 것을 탐하지 말라. 초원의 불문율을 다시 곱씹은 명헌이 그 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는 태섭을 바라봄. 그리고 동그랗게 솟은 이마를 아프지 않게 밀었음. 흥미가 식었다는 투로 물동이를 챙겨 먼저 자리를 뜬 태섭의 발목이 아지랑이처럼 보일 때가 되어서야 일어난 명헌이 한달음에 달려가 품에 꽉찬 물동이를 받아드니 말랑하게 풀리는 태섭의 얼굴. 어쨌든 신께서 이으신 인연이니 명헌은 그것을 함께 보호할 의무가 있었음
여름은 연한 풀들이 잔뜩 자란 강줄기를 따라 이동하는 계절. 이번에 옮긴 목초지는 푸른 숲을 경계로 끼고 있어서, 가축들을 풀밭에 풀어 놓은 전사들은 바지런히 숲으로 사냥을 나감. 습하고 따뜻한 여름에 익숙했던 태섭은 처음으로 건조하고 시린 초원의 여름밤에 한창 적응 중임. 겨울을 겪어보지 않은 몸은 새벽녘이 되면 우성의 품을 깊게 파고들 정도로 추위를 탔음. 결국 가벼운 감기를 앓게 된 태섭을 위해 우성은 곰을 잡아왔어. 곰가죽으로 만든 요를 깔면 절대 춥지 않을 거라고, 겨울에는 상상도 못하게 추워질테니 털이 가장 예쁜 여우를 잡아서 모자를 만들어 주겠다고도 했음.
그런 우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즘 태섭의 최대 관심사는 아기 늑대야. 끼니도 뒤로 미루고 우성이 잡아온 사슴을 얇게 손질해 입안에 하나씩 넣어주고 있음. 차라리 눈앞에서 이러고 있는 게 나아. 젖을 떼기 전엔 밤낮으로 늑대에게 먹일 젖을 짜러 다니느라 얼굴도 제대로 못 봤으니까. 잘 삶은 고기를 칼로 베어 먹던 우성은 입맛이 뚝 떨어져 손을 놨음. 명헌이 준 혼인 선물이라서 버릴 수도 없고... 어미잃은 새끼를 따로 챙기는 명헌의 옆에 우성도 있었어. 그깟 새끼 늑대 여름철이면 덫에 걸려 죽는 어미 늑대들이 한가득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가져다 줬을 거라고 우성은 생각함. 여태 다른 전사들에게 양보했던 천이나 비단, 색실들을 가져다 줘도 영 반응이 시원찮고, 동물을 더 좋아하나 싶어 사냥에 데리고 나가는 검독수리를 보여줬더니 덩치와 발톱을 보고 기겁을 했어. 뾰족한 수가 없는 문제를 붙잡고 고전하는 우성의 입이 썼음.
"더 안 먹을 거면 치운다."
이것 봐. 오늘도 우성이 얼마나 먹었는지 보다 손질한 고기를 다 먹어서 배가 통통해진 새끼 늑대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주는 데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잖아 저 털뭉치한테 쏟는 관심의 반만 줘도 더 잘해줄 수 있는데, 다른 아내를 맞이하지 않을 거라는 초원의 맹세도 할 수 있었음. 언제나 사람들에게 첫번째로 대접받는게 익숙한 우성은 자길 봐주지 않는 태섭때문에 심술이 나서 못 견디겠어. 왜 송태섭과 있으면 처음 겪는 감정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지 모르겠고 머리와 심장이 동시에 불이 붙는 기분이 들어. 표정 관리도 안 돼. 말도 자꾸 퉁명스럽게 나가
"계절이 세 번만 바뀌어도 죽여야 할텐데 뭐 그렇게 정성을 쏟냐."
"그게 무슨 소리야?"
놀라서 입까지 벙긋거리는 태섭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음. 우성은 본능적으로 망했음을 깨달았어. 초원에서 태어난 짐승들은 절대 사람을 따르지 않아 때가 되면 가죽만 남기고 영혼만 다시 초원으로 돌려보내주는 게 오랜 관습임. 남쪽에서 온 태섭이 모르는 건 당연했지. 이렇게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당황한 우성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한 얼굴을 보면서 마른 침을 삼킴. 어쩔 수 없어, 그렇지 않으면 가축과 사람들이 다치니까.
무어라 말을 하려던 태섭은 이내 새끼 늑대를 담요에 감싸서 우성과 최대한 멀찍이 떨어뜨렸음. 옆자리가 아니라 늑대를 재우는 자리 근처에 자리를 펴고 등을 돌려 눕는 걸 말리지도 못했어. 아 진짜 망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자꾸 못되게 굴게 돼. 같은 언어와 같은 주제로 말을 하는데도 만나지 않는 평행선을 걷는 기분이 들어서 미칠 지경임. 깊은밤, 우성은 잠이 오지 않아 천막 근처를 한참 서성이다 무언가 생각난듯 눈을 빛냄. 그는 어떠한 난공불락의 부족도 기필코 함락하고야 마는 산왕의 전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번엔 태섭의 마음을 분명히 공략할 수있는 게 생각났거든
짧게 주고 받던 대화도 사라진 삭막한 관계. 우성은 무어라 말을 붙이려 하지만 태섭이 일방적으로 피하는 것에 가까웠음. 태섭은 혹여 아기 늑대에게 우성이 해라도 가할까 작은 보자기에 싸서 품고 다녔음. 이렇게 사람을 잘 따르는데 언젠가 죽여야한다니 믿기지 않아. 빨래터에 모인 다른 음인들에게 슬쩍 물어보니 몰랐냐는 듯 측은한 얼굴로 봐서 허탈해졌고. 아무것도 모르고 제법 뾰족해진 이빨로 제 손가락을 앙앙 무는 아기 늑대의 턱을 간지럽히던 태섭은 납치되어 우성과 강제로 혼인을 한 이후부터 체념을 체화한지 오래였던 터라 죽여야 한다는 말이 무서웠던 건 아님. 정말로 우성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건 끝까지 너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나도 죽일 거냐는 질문 하나였지
기분이 침울해 진도가 느린 수틀을 놓고 가만히 앉아 있던 태섭을 깨운 건 우성. 부족의 어른들이 있는 근방 목초지에 다녀온다는 걸 얼핏 들은 것도 같은데, 어쩐지 들뜬 목소리로 재촉하는 우성이 신이난듯 해보여서 순순히 손에 잡혀줬음. 어미말과 망아지가 한가롭게 졸고 있는 울타리 앞에 선 우성은 잡혀 있는 태섭의 손을 망아지의 목덜미에 얹어줬음. 말보다 소를 더 많이 기르는 남쪽에서 자란 태섭은 이렇게 어린 망아지는 처음 봤단 말야. 눈을 떼지 못하고 신기해 하니까 우성은 확실히 신이 났어. 해변의 모래색을 한 보송보송한 망아지는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까맣고 구슬같은 눈을 끔뻑이고 냄새를 맡음. 피부에 닿는 코가 촉촉하고 다리가 곧은 것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알 정도로 좋은 말이었음
"좀 더 자라면 널 태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음인들은 말을 타지 못하는 걸로 아는데..."
힘들게 약탈한 음인들이 도망이라도 갈까 무서워 발목도 끊어놓는 집이 허다한데 말을 타게 해준다니 아무래도 믿기 힘들어. 태섭이 제 말을 믿지 못하는 걸 눈치 챈 우성은 잠시 말을 골랐음.
"짐짝처럼 실려다니는게 싫다며."
"......"
"가르쳐 줄게."
우성은 정말 이상한 곳에서 기억력이 좋았지. 머쓱해진 태섭이 애꿎은 머릿수건만 베베 꼬았음. 우성의 가면에 달려있던 것과 같은 구슬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냄. 솔직히 아직도 우성을 믿어도 되는지 확신할 순 없어. 바다로 돌아갈 수 없는 지금 숨이 다 할 때까지 함께해야 할 사람은 우성이라는 걸 받아들이긴 했지만... 바다의 날씨보다 더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우성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확신이 부족했음
"그러다 정말 내가 도망가면 어쩌려고?"
"상관없어. 내가 따라가면 되니까."
그제야 놀란 태섭의 고개가 우성을 향해 돌아감. 줄곧 보고 있었는지 태섭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우성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음. 발갛게 달아오른 귀끝이 어이없을 정도로 티가 나는 하얀 얼굴이 멀끔했음. 쟤가 저런 표정을 지었나, 언제부터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혼란스럽고 정리가 되지 않는 머리속, 태섭은 우성의 얼굴을 좋은 진주를 고르기 위해 관찰하던 눈빛으로 살피고 있다는 것도 몰랐어
"그리고 그 늑대말이야."
"......"
"성체가 되어서도 기른 사람이 있대. 정말이야, 내가 직접 들었어. 그러니까..."
우성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은 초원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 또한 많다고 믿어. 혀 위에서 구르는 말을 뱃속으로 삼키고 다시 한 번 태섭과 시선을 마주했지. 갸름해진 뺨 위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잡고 귀 뒤로 넘겨준 우성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봐. 오늘 밤에 머리를 빗겨줄게. 조금 힘이 빠진 눈꼬리를 한 태섭이 작게 고개를 끄덕임. 그제서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괜히 가슴을 쓸어내렸어. 먼저 몸을 돌려 걷는 태섭을 놓칠세라 바투 붙은 우성의 등 뒤로 뜨끈하고 건조한 바람이 부드럽게 훑고 지나감. 초원의 여름이 무르익고 있어
우성태섭
명헌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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