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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9 08:27
젊은 국어쌤 이명헌 엉뚱한데 시니컬한데다 잘생겨서 인기 개많겠지.. 여학생남학생 할거없이 다 명헌쌤 짝사랑하고있으면 좋겠다 어딜 가든 쌤 이거 드세요 쌤 이 문제 알려주세요 하면서 따라붙는 애들때문에 교무실 밖도 잘 못나오는데 유독 눈에 밟히는 학생 하나가 있는거임 1학년 정우성이라고 귀엽게 생겨가지고 의외로 말수도 적고 거의 항상 무표정인 애가 있었음 마냥 자기한테 관심 없는 유일한 학생이라서가 아니라 담임과 학생간의 친밀도라는게 있기 마련인데 우성이한테선 그런거 찾기 어려워서 이명헌도 나름대로 다루기 어려운 애겠구나 하고 고민하던 차였음 그래도 착실하고 사고도 안치니까 큰 걱정은 덜겠지만

그러다 시험기간이 지나고 한 차례 일대일 진로상담 할 일이 생기는데 한명한명 하다보니 오래걸려서 거의 학교 마칠 시간에 우성이 차례가 된거야 시간 애매해서 우성이부터는 내일 상담할까용? 하는데 웬일로 우성이가 오늘 하고 가겠다 하겠지 나머지 반 학생들 하교시키고 상담실에 우성이 데려와서 하고싶은 일이 있냐 농구부는 어떠냐 형식적인 질문 하는데 우성이는 빨리 상담 끝내고 집에 가고싶은지 발끝만 쳐다보고 네 네 단답하는거야

아무리 쌤이 젊어도 저보다 한참 어린 애인데 무슨 고민이 저렇게 많은지 반응이 매몰찬게 애잔하기도 해서 명헌쌤이 안하던 말을 하는거임 선생님도 어렸을때 농구부였어용 하고 그 말에 눈이 반짝 빛난 우성이가 정말요? 포지션은요? 하고 슬쩍 물어보는데 우성이 반응에 명헌쌤 그제야 희미하게 웃어보이겠지 우성이 어쩐지 그 미소에 가슴이 철렁해서 아 괜히 물어봤나 갑자기 혼자 들떠가지고..하는데 명헌쌤이 포인트가드용 하는거야 그때부터 명헌쌤의 수상할 정도로 다부진 어깨랑 곧게 뻗은 커다란 손이 눈에 띄는데 우성이 저도 모르게 선생님 몸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어서 눈 홱 돌리겠지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것같은 저 판판한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을걸 생각하니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방식으로 가슴이 간질간질 민망해져서 우성이 얼굴 빨개져라 이명헌은 아무것도 모르고 상담실이 더운가 싶어서 창문 열어주겠지 그럼 그 다정함에 또 치이는 우성이..

아무튼 그날은 농구얘기 조금 하다 시간이 늦어서 우성이 집에 돌려보내는데 명헌이가 어려운거 있으면 꼭 얘기하라는 상투적인 말 하기도 전에 우성이가 저, 종종 이렇게 상담 해주실 수 있나요? 하고 물어보는거야 명헌이 드물게 놀라서 그렇게 하라고 하겠지 이명헌 자기 인기를 인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라 개인상담같은 편애로 보일만한 행동 자제하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우성이 동그랗고 착하게 뜬 눈을 마주쳐보니까 선생으로서 안된다고 할 수 없던거지 안그래도 눈에 밟히던 애니까

암튼 그러면서 우성이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데 기억 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농구를 해왔고 실력은 좋았지만 그때문에 중학교때 따돌림을 받았으며 고등학생인 지금도 그때의 무력감이 찾아올 때가 있다는 거였겠지 우성이 삶에 농구가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될거임 대부분 농구얘기 뿐이던 상담이 갈수록 우성이의 이야기가 되어서 이명헌도 내심 뿌듯했으면 좋겠다 명헌이 성격상 덤덤하게 현실적인 조언 많이 해주는데 그 안에는 분명 숨겨진 다정함이 있어서 우성이가 갈수록 명헌이 잘 따르게 됐으면 좋겠다 덕분에 학기가 지나고서는 우성이도 많이 밝아지고 친구들도 많이 생겨서 원래의 애교섞인 성격도 되찾겠지 이명헌은 속으로 그저 애는 애구나 생각했음

아 명헌쌤이 농구부 동기였던 동오 만나서 학교에 이런 녀석이 있다고 얘기하는것도 보고싶다 평소에 잘 안하던 학생 이야기를 하는데 표정이 미묘해서 동오가 설마 얘 지금 웃은건가? 했을듯

아무튼 학년이 바뀔 때가 결국 찾아오고 우성이랑 명헌쌤의 마지막 상담 시간이 되는데 평소라면 조금 들떠서 재재거렸을 우성이가 말수가 없고 입술도 삐죽한거야 우성이는 울보니까 상담하다 쬐끔 운적도 있을 것 같은데 그때랑 표정이 같겠지 명헌이 어 또 우는건가 싶어서 우성, 학년 바뀌는게 많이 걱정되나용? 하는데 고개 처박고 끄덕끄덕 하는 우성이 뺨에 눈물이 도로록 흘렀음 우는것도 아기사슴같았겠지 감정적인 위로에는 익숙하지 않은 명헌이가 우성이 눈물 그칠때까지 기다려주는데 정우성 조금 진정되면 가방 안에서 뭔가 꺼내서 명헌쌤한테 건냈을거같다 그리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고 먼저 상담실 나가겠지

우성이가 건낸건 편지였음 자길 닮아서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로 고1치곤 꽤 진지한 내용을 써놨겠지 매번 시간 내서 이야기해준것 이것저것 조언해준것 덕분에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얘기하다가 자기는 이제 2학년 중순에는 미국으로 떠난다는 말도 써있겠지 명헌이 자기 학생이 기특해서 조금 웃는데 더 읽어보니 이런 말이 써있는거야


선생님을 정말 좋아했어요. 다른 애들 다 하는 그런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요.


아이고 세상에..명헌이 읽자마자 이마를 짚는데 솔직히 그 시절 다 겪어본 명헌이가 이 마음을 모르겠음? 가까운 어른이 챙겨주니까 설렘이랑 감사를 구별 못하는 어린 마음을 이명헌도 너무 잘 알아서 곤란한거지 섣불리 너 나 그만좋아해 하고 말하는건 꼴이 우스운데다 우성이 반응이 걱정됐고, 차라리 이걸 비교적 젊고 제정신인 명헌한테 느꼈다는걸 다행으로 생각해야하나 고민했음 결국 내린 결정은 놔두면 다 잊혀진다 였겠지 그러니까 말미에 쓰인 성인이 되면 꼭 보러올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같은 어른스러운 척 하는 인삿말같은거 너무 신경 안써도 된단 말이야 이명헌도 적당히 어린 시절 아련한 첫사랑 포지션으로 남아줄 의향정돈 있었겠지 본인이 아니라 동급생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 학년이 바뀌고 우성이는 전국대회니 선발전이니 복잡한 이름의 똑같은 농구경기를 여러번 치르느라 학교에 빠지는 일이 잦아졌고 2학년 담당이 아닌 명헌쌤과는 당연히 멀어졌음 마지막으로 마주친건 조기유학 서류때문에 교무실에서 다른 선생님과 이야기하던 우성이 명헌에게 꾸벅 인사했던 날이었음 언제 다 커서 의젓하게 제 갈길을 찾아 가는지 명헌도 시원섭섭하면서 감회가 새롭겠지


그리고 두 해정도 지났을 어느 겨울, 우성이는 얼굴도 모르는 후배들이 벌써 졸업을 하던 날이었음 감색 코트를 입은 명헌이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 졸업사진을 찍는 학생들을 둘러보고 있었겠지 하나하나가 제 손을 타고 졸업하는 애들이라 더 소중했을거야 개중에는 자기 좋아한다고 고백한 애들도 더러 있었는데 우성이때 겪어본 바가 있어서 그런지 갈수록 거절하고 타일러서 되돌려보내는 기술이 늘어있었을거임 우성이한테도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미숙한 선생님이 미안할 따름이었겠지 특이하게도 그 애는 계속 생각이 났음 근데 어쩌겠어 다 지난일을


차가운 겨울 바람에 손이 얼어서 손바닥을 마주대고 문질렀음 명헌도 이만 돌아갈까 싶어서 몸을 돌리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이명헌 선생님 하고 부르는거야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뒤로 돌아보면 저 왔어요 하고 꽃다발을 건내는 우성이가 서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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