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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0 00:34
백호는 어려서부터 넘어질 일이 꽤 많았음. 손가락으로 나이를 다 셀 수 있던 나이에 떠나보냈던 엄마, 늦은밤까지 돌아오지않던 아버지를 기다려야했던 시간, 붉은 머리카락으로 받았던 이유 없는 손가락질, 어느날 돌연 쓰러져 영영 떠나버린 아버지, 산왕전에서 얻은 등 부상, 그리고 지금 뱃속에 있는 아기에 이르기 까지 백호의 인생은 그다지 오래되지않았지만 크고 작은 돌부리가 꽤 많았음. 처음 몇 번이야 넘어져 엉엉 울긴했음. 하지만 그런 일이 잦아지고 넘어져도 무릎을 털고 혼자 일어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제 상처를 보고 속상해 할 사람들이 떠난 뒤에는 백호는 더이상 울지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음. 계속 넘어져 울고 있기엔 백호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생겼거든. 제 유년시절이 비극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고 백호는 단언할 수 있었음. 중학교 시절부터 함께 어울렸던 백호 군단이 있었고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해진 북산 농구부의 사람들도 있었고 또 서태웅도 있었음. 그래서 백호는 계속 넘어지고 무릎이 까져도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었음. 피가 나도 그동안 받은 사랑으로 상처를 동여매고 다시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긍정은 백호의 천성이었고 중심이었음. 백호는 사랑을 아는 아이였고 그 사랑을 양분 삼아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났음.

9개월로 접어들자 지독하던 입덧이 조금은 가라앉았음. 백호는 그다지 먹고싶은 음식은 없었지만 일상 생활 속 공기의 냄새를 맡는 것조차 힘든 때가 지나자 재빠르게 요리를 시작했음. 몇몇 음식들은 여전히 속을 뒤집었지만 그나마 건드릴 수 있는 재료로 식사를 만들어 배를 채웠음. 몇 번이고 구역질을 해가며 냉장고를 비우고 재료가 떨어지면 염치없지만 백호 군단에게 연락을 해 장을 봐와달라고 했음. 백호는 미안해했지만 백호가 뭘 먹는다는 말에 친구들은 때도 맞추지않고 한꺼번에 재료와 음식을 사와 냉장고가 미어터질 지경이 되었음.
백호는 소연이와 대만이에게 부탁해 농구 잡지와 비디오를 받았음. 두 사람은 백호가 기운을 차려가는 모습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기뻐했음. 백호가 머쓱할 정도로 기뻐해서 백호는 나중에 비싼밥을 사야겠다고 생각했음.
정상적인 생활 루틴이 잡혀갔지만 병원에서는 좀 더 영양을 챙겨야 한다고 했음. 그래도 수액으로 연명하던 시절이 지나서 한숨 놓게 되자 백호를 따라 살이 빠져버린 치수가 다행이라며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는지 몰라. 여긴 비싼밥으로 퉁쳐도 되는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
대만이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백호네 집에 가서 비디오와 과일을 사다주었음.

이제 좀 사람같네.

백호를 볼 때마다 꼭 죽을 병에 걸린 환자를 보듯 보던 대만이 활짝 웃었음.

밥은 잘 챙겨먹지?

백호가 미안한 마음에 머쓱하게 웃었음.

응. 점심엔 야끼소바 먹었어.

단백질은 챙겼어? 살 너무 빠졌다.

새우 든 걸로 먹었어. 돼지고기는 아직 못 먹어.

그래? ...그래도 뭐라도 먹어서 다행이다.

대만이 그새 자란 백호의 빨간 머리카락을 북북 쓰다듬었음. 대만이는 백호와 함께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재활 스케쥴을 짜는 걸 도와줬음.

출산 후에는 관절이 약해진대. 내 운동 루틴 줄테니까 그거 참고해봐.

...이런 걸로 도움받아서 미안.

어떻게보면 대만의 아픈 구석을 찌르는거라 백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음. 대만인 그런 백호의 등짝을 칠 순 없고 다시 머리나 북북 만졌음.

오히려 도움이 되서 좋아. 그 시간이 헛된 게 아니게 되었잖아.

대만의 위로에 백호가 작게 미소지었음. 트레이너 명함을 건네준 대만이 문득 생각났다는듯 물었음.

그러고보니 태섭이가 왜 자기 전화를 안 받느냐는데?

어?

발신자부담이라 그냥 받아도 될거래.

백호의 안색이 어두워졌음. 이상한데서 눈치가 빠른 대만이 물었음.

혹시 태웅이 녀석일까봐?

백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음. 대만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백호를 바라보았음. 하지만 태섭이에게 태웅이 한 말을 들어버린 이상 백호를 설득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음. 대만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음.

그럼 다음엔 나랑 같이 태섭이 녀석한테 전화 걸자. 내가 먼저 받아서 너한테 주면 되잖아.

태웅과는 이야기하고 싶지않았지만 미국에 간 태섭의 안부가 궁금했던 백호가 눈을 빛냈음.

정말? 그렇게 해줄거야, 만만군?

당연하지! 태섭이 녀석이랑 시간 맞춰볼게.

그럼 자고 가! 이불 있어!

오, 합숙같고 좋네.

대만은 조만간 태섭과 스케쥴을 맞춰오겠다고 하고 백호네 집을 떠났음. 둘이 있다 다시 혼자가 된 백호는 집이 평소보다 더 넓게 느껴졌지만 그런 감각은 백호에게 익숙한 것이었음. 백호는 우울함을 삼키고 배를 쓰다듬었음.

네가 태어나면 조용하진 않을거야, 그렇지? 여우자식도 말이 많으니까...

백호는 한참동안 배를 쓰다듬었음.



이제 백호는 가벼운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상태가 회복이 되었음. 멀리는 못 나가지만 집 근처 공원까지 슬렁슬렁 걸어다닐 정도는 되어서 우울함도 많이 사라졌음.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백호는 조금이라도 걸으려고 했음. 병원에서도 운동은 좋다고 했으니까. 곧 대만이 백호네 집에 올텐데 집에 마실 게 하나도 없어서 나간 김에 슈퍼마켓에도 들릴 생각이었음. 백호는 오랜만에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음.
따뜻한 날씨는 산책하기 딱 좋았음. 슈퍼마켓은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백호는 산책을 좀 더 즐기고 싶어서 일부러 느릿하게 걸었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걷던 백호의 눈에 농구 코트가 보였음. 환각이라던가 그런건 아니고 집 근처에 있는 야외 코트였음. 공이 퉁퉁 튕기는 소리가 참 오랜만이었음. 어린 남자애들이 너댓명 모여 공을 던지고 노는데 옛날 생각이 나서 괜히 기분이 이상해지겠지. 멍하니 아이들이 노는 걸 보고 있던 백호의 발치로 농구공이 데구르르 굴러왔음.

저기요! 죄송한데 공 좀 차주세요!

바보야! 임신하셨잖아! 죄송해요! 저희가 갈게요!

백호는 손사레를 치고 허리를 굽혀 공을 집어들었음. 몸을 일으키는게 버거웠지만 오랜만에 만지는 농구공의 감촉에 미소가 절로 나왔음. 코트에 공을 퉁퉁 튕긴 백호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공을 치켜들었음. 몸이 기억하고 있는 자세가 공중으로 떠오르고 백호의 손목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공이 하늘 위로 솟구쳐올랐음. 푸른 하늘 위로 농구공이 태양처럼 떠올랐다 림 속 그물로 들어가는 소리가 났음.

퉁! 데구르르...

코트가 일순 정적에 휩싸였음.

우와아아아!!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눈을 빛냈음. 백호는 타고난 스타 답게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제 갈 길로 갔음. 만만군이 말한 말이 무슨 소린지 알겠네. 백호가 쿡쿡 웃었음. 뱃 속 아이도 기분이 좋은지 태동이 거친게 느껴졌음.

너도 좋아? 하긴 누구 자식인데...

백호가 배를 쓰다듬으며 가벼운 걸음으로 슈퍼마켓을 향해 걸어갔음. 슈퍼마켓에서 오렌지 주스와 자잘한 과자를 산 백호는 조금 서둘러 집으로 걸어갔음. 대만이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니 마음이 조급해졌음.

......?

그 때 허리가 갑자기 뻐근해지기 시작했음. 갑작스런 통증에 놀란 백호가 우뚝 멈춰섰음. 그리고 아래에서 무언가 울컥 쏟아지는 느낌이 났음.

어...?

설마 소변은 아니겠지. 백호가 손으로 아래를 더듬자 바지가 물기를 머금은 게 느껴졌음.

어어?

당황함 백호가 허둥거리는 사이 허리와 아랫배에 격통이 찾아왔음.

아으.....

백호가 밀려오는 고통에 신음을 삼키며 골목의 벽에 몸을 기댔음.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오렌지 주스 병과 과자가 골목에 나뒹굴었음. 하지만 그것보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픈 배에 신경이 더 쏠렸음.
아직 예정일은 멀었는데? 백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골목 담장을 짚으며 걸었음. 일단 병원으로..병원에... 그러나 장기를 칼로 쑤시는 것같은 고통은 도저히 백호도 참기 힘든 것이라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바닥이 쓰러지고 말았음. 고통으로 얼룩진 시야가 흐릿했음.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가야하는데... 정신을 잃기전 어디선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난 것 같다고 백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음.





조용하던 아파트에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음. 오늘도 액자를 껴안고 자고 있던 태웅의 얼굴이 이불 속에서 튀어나왔음. 불쾌감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은 휴대폰 액정에 뜬 송태섭 선배 라는 이름에 반쯤 사그라들었음. 바로 통화버튼을 누른 태웅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음.

여보세,

그러나 태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나왔음. 멍하니 태섭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태웅의 동공이 훅 커졌음.
잠시후, 태웅의 아파트 문이 거칠게 열리고 다급한 발소리가 났음.







태웅백호
[Code: 06e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