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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4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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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잼주의 설정알못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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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사랑하는 이에게 선물 주는 날' 공식은 사랑꾼이자 지구인 출신 아버지를 둔 설리 가족의 전통처럼 굳어진 거면 좋겠다ㅋㅋ
아직 네테이얌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시절, 제이크의 동료이자 오마티카야 부족과도 가깝게 지내는 연구원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뭔가를 주고 받는 이상 행동(?)을 발견한 네이티리가 혹시 무슨 문제 있냐고 걱정하는 모습에 제이크는 챙길 생각도 안했던 지구의 기념일이 그때서야 떠올랐지. 불안함에 살짝 떨리는 커다란 호박색의 눈을 보니 자기도 네이티리에게 뭔가 선물하고 싶다 느낀 제이크가 급히 준비한 작은 선물과 함께 오늘은 지구인들의 기념일이고 나 역시 1년에 한번 정도는 사랑하는 당신에게 선물 주는 날을 정해놓고 싶다고 고백한 것이 바로 설리 가족의 첫 발렌타인데이가 되었음.
따로 설명 없이 제이크의 행동을 보고 배운 설리 키즈들은 제이크가 말하는 사랑하는 이=네이티리니까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한테 선물을 주면 되겠구나!하고 자기들끼리 열매나 예쁜 돌 같은 선물을 교환하는 날 정도로만 여겼던 것이 멧케이나로 이주하면서 크게 바뀌기 시작했어.
로아크는 츠이레야를 만나고 아빠가 발렌타인데이 - 이 명칭은 제이크만 알고 있지만 - 에 엄마를 챙기는 것이 우리끼리 선물을 주고 받는 것과 살짝 다른 결의 감정이란 걸 깨달았지. 그리고 로아크가 츠이레야에게 선물을 건네면서 "오늘은 우리 가족끼리 정한 기념일인데 특별한 상대에게 선물을 주는 날이야"라고 설명해주던 내용을 바로 아오눙이 엿듣게 된 것임.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뭔가 놀림거리를 얻어내려고 접근했던 아오눙은 뜻밖의 내용에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 장소를 조용히 빠져나왔음. 오전에 있었던 일루 연습 시간에 네테이얌은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오히려 오후 일정을 물어본 아오눙에게 동생들과 같이 조개 껍질을 주우러 가기로 약속했다며 오늘은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대답만 돌아왔으니 비밀리에 선물을 준비하려는 것도 아닐 거야. 그냥 설리 가족 기준 선물을 줄만큼 '특별한 상대'가 네테이얌에게는 아오눙이 아닌 거지ㅠㅠ
아직 특별한 의미의 교제를 하고 있진 않지만 아오눙 스스로도 다시 떠올리기 민망한 초반의 입덕부정기를 지나 이런저런 사건을 거쳐 진심으로 반성한 아오눙이 자기 마음을 인정하고 네테이얌에게 호감을 표현한지 꽤 됐고, 네테이얌도 아오눙에 대한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지면서 인간식으로 말하자면 '썸 타는 관계'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단 말야.
그런데 이게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오눙은 가끔 바다 한가운데서나 볼 수 있다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자기 뱃속에서 휘몰아치는 기분이 들었지. 네테이얌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한번씩 아오눙을 이런 기분에 휘말리게 하는 상대는 네테이얌이 유일했어. 그래서 아오눙이 초반에 네테이얌에게 비뚤게 굴었던 거야 좋지만은 않은 낯선 기분을 자꾸만 느끼게 만드니까.
내일도 정해진 연습 시간에 네테이얌을 만날 수 있겠지만 아오눙은 희망찬 미래를 기대했던 관계가 막 끝나버린 느낌이라 애꿎은 자갈이나 걷어차며 급격히 땅을 파고 드는 마음을 달래려 애썼음. 온갖 생각으로 가득찬 머리를 비우려고 고개를 푹 떨구고 정처없이 걷다보니 어느 새 아오눙은 네테이얌과 그의 동생들이 있는 곳까지 도달해 있었어. 다른 이는 몰라도 네테이얌의 웃음 소리는 확실히 알아듣는 아오눙이 고개를 번쩍 들자 뭘 하고 있는 건지 머리를 맞댄 세명의 모습이 먼 발치에서도 보였지. 네테이얌은 뭔가를 들어 키리의 짧은 머리카락에 갖다대보기도 했는데 아마도 로아크가 말한 가족간의 선물 교환식을 위한 약속이었나봐. 재차 들려오는 네테이얌의 웃는 소리와, 작게나마 볼 수 있는 그의 활짝 웃는 얼굴에 아오눙은 서서히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어.
아와아틀루에 처음 온 날부터 네테이얌에게 가족은 1순위, 아니 0순위였음. 아오눙이 뭐라고 비아냥대고 시비를 걸어도 요령 좋게 피해가던 그가 바로 실력행사를 하게 만든 존재도 가족이었어. 네테이얌에게는 오늘이 평소에도 소중한 가족을 한번 더 챙기는 날이었을 뿐이고 어쩌면 아오눙과 더 가까운 관계가 된 다음에도 가족을 위한 기념일로 남겨둘지도 몰라. 그렇다면.....
아오눙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 자신의 일루를 불렀음. 오늘이 지나기 전까지 '특별한 상대'에게 줄만한 선물을 찾기 위해.



~



"이 시간에 웬일이야? 내일 연습 시간 전에 봐야할 급한 일이라도 있어?"
"오늘 중에 봐야 하는 일이라."
"그게 뭔데?"
"...이거."

아오눙이 멋없이 불쑥 내민 바구니에는 네테이얌이 처음 보는 열매가 한가득 담겨 있었음. 모양은 낯설어도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풋내가 코끝에 스치자 네테이얌은 절로 아련한 기분이 들었어. 근처가 죄다 모래사장인 이곳에서는 보기도 쉽지 않은 이런 열매를 대체 어떻게?

"오늘이 특별한 상대한테 선물 주는 날이라며. 너희 가족한테는."
"그걸 어떻게 안 거야? 그리고 그런 선물을 나한테 주겠다고?"
"네 동생이 츠이레야한테 선물 주면서 하는 말을 들었거든."
"로아크가 츠이레야한테? 며칠 동안 나 붙들고 끙끙대더니 잘 전했나보네."
"그런 개념의 날이 있다면, 난 네게 선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아니 난 아무 것도 준비 못했는데..애초에 그런 선물할 생각도..."

무심결에 튀어나온 네테이얌의 속내에 아오눙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축 쳐지는 귀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지. 네테이얌은 더욱 당황해서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어.

"그러니까 네가 싫다는 게 아니고..! 일단 고백이 먼저 아니야? 아오눙 네가 그런 마음인줄 몰랐단 말이야..."
"나는 꽤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바다 생활 잘 가르쳐주고 일루 탈 때 꽉 잡아주는 거? 그건 그냥 친절한 행동이지."
"너는 아무하고나 그렇게 일루에서 꼭 붙어 타고 허리도 확 껴..안고 그러냐?"
"안 그러면 떨어지니까, 이크란 탈 때는 그 정도로 안 잡으면 죽을 수도 있거든."

설리 가족이 이곳으로 처음 올 때 타고 왔던 사납게 생긴 생물을 떠올린 아오눙의 얼굴이 몇 초 후 시뻘겋게 달아올랐음. 그럼 지금까지 좋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던 게 진짜로 혼자만의 착각이었단 말이지?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할 것이며 당장 내일부터 연습은 어떻게...

쪽-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매년 선물 받을 때마다 이렇게 보답하시더라."
"......"
"특별한 관심은 특별하게 표현해야 알아 바보야. 선물 고마워. 내년에는 나도 선물 준비할게."
"어...어...."
"내년 전까지는 고백할 거지? 그럼 내일 봐."

아오눙은 네테이얌이 먼저 자리를 떠난 뒤에도 한참을 그곳에 서있었음. 아직도 뺨에 남은 촉촉하고 보드라운 감촉과, 고개만 들면 보이는 밤하늘에 가득한 별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피부 위를 수놓은 주근깨들, 그리고 그 어떤 별보다도 크고 선명하게 빛나는 금빛의 두 눈동자까지.
네테이얌이 아오눙의 선물에 보답하기 위해 훅 거리를 좁힌 그 순간, 아오눙은 마치 눈 앞으로 유성우가 쏟아지는 듯한 환상을 봤어. 우주가 내게 와서 안기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대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생애 한번 만난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네테이얌에게 어울릴만한 특별한 고백은 또 어떻게 해야할지 행복한 고민과 함께 뒤늦게 슬슬 집으로 옮기는 아오눙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 마냥 사뿐사뿐 가볍기만 했음.




그날 선물로 받은 열매가 근방에선 구하기 어려운 희귀종이었고, 지나가듯 숲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쳤던 네테이얌의 말을 기억해뒀던 아오눙이 수고스럽게 준비한 선물이었다는 사실은 둘 관계가 정말로 특별해지고 나서 아오눙만 알던 비밀 장소를 함께 공유하게 된 훗날에야 네테이얌도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