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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2 02:28
반제 if 보로미르가 반지를 가졌을 때()

 

1.

내가 반지를 가져왔어.”

반지의 불길한 황금빛조차 조금도 담지 못하는 검고 어두운 눈으로 보로미르는 말했다. 파라미르는 반지의 흔들림을 따라 좌우로 눈을 굴리며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반지는 마치 영혼이라도 있는 듯 야속하게 그를 비웃고 있었고, 파라미르는 그 악함을 보고 이 반지가 그들을 구하기는커녕 파멸에 이르게 할 것임을 알았다.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동생을 보고 보로미르는 잠시 정신이 든 듯 서둘러 반지가 걸린 목걸이를 옷깃 사이로 집어넣었다.

...아버지한테 줄 거 아니었어?”

파라미르는 차라리 아버지에게 반지를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보로미르는 온화한 목소리로 동생을 안심시키듯 그의 어깨를 잡았다.

반지는 내 거니까.”

그때 그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파라미르는 그의 삶에서 절대 잊을 수 없었다.

 

 

2.

보로미르의 이상한 낌새를 데네소르 역시 눈치챘지만, 그땐 이미 늦은 후였다.

아들의 생환이 너무 기쁜 나머지 평소처럼 의심하는 일을 멈췄던 데네소르는 그 사랑하는 아들의 손에 내쳐지는 것으로 대가를 치렀다.

애초에 평소 데네소르의 회의주의와 히스테리에 질려 있던 대신들의 신임을 사는 것은 반지의 힘을 빌린 보로미르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거기에 다음 날 보로미르가 용병으로 데려왔다는 하라드림 병사들이 성안에 가득 차자 처음엔 적들의 등장으로 공포에 질렸던 백성들도 일단 그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그것만으로도 감격에 겨워 보로미르를 찬양했다.

반지의 힘을 빌린 보로미르는 확실히 그전의 대장이었던 모습과는 달랐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 자비 없는 눈과 잔인함을 보고 웃는 입, 피냄새를 즐기는 코를 가졌으나, 또한 악한이었을지라도 고대의 왕처럼 묘한 위엄과 품위가 느껴지기도 했다.

성안에는 순식간에 하라드림 병사들이 배치되었고, 그나마 양심 있는 중신들은 충언을 해볼 기회도 없이 지하감옥으로 끌려갔다.

보로미르. 이건 반역이야.”

무력한 자신을 원망하며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한 가운데서 파라미르는 왕좌에 앉은 보로미르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동생아.”

보로미르는 어린아이에게 가르쳐주듯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곤도르에는 원래 왕이 없었는데, 어떻게 반역이 된단 말이냐?”

파라미르는 곧바로 반박하려 했으나, 보로미르는 단호히 손을 올렸다.

이제 곤도르의 섭정은 없다. 그러니 우리 둘이 곤도르를 이끌어 가야 한다.”

아버지는 멀쩡히 살아 계신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파라미르는 보로미르의 불길한 말에 다음 말이 나오지 않길 바라면서 말했다.


그의 말에 대답하듯 보로미르는 갑자기 소름 돋는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미소의 의미를 이해한 파라미르는 데네소르가 갇혀 있는 성 꼭대기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파라미르가 방에 당도했을 땐 이미 데네소르는 미나스 티리스 절벽으로 올라가 있었다. 뒤이어 파라미르가 아버지를 따라갔을 때, 그는 팔란티르의 힘으로 미래를 본 아버지가 절망 속에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에도 뒤돌아보지 않고 낙하하는 모습을 보았다.

 

 

3.

파라미르를 잘 알고 있었던 보로미르는 그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면,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계책을 강구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로미르는 자신의 동생이 전혀 손 쓸 수 없도록, 순식간에 일을 처리했고,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곤도르의 권력도 잃어버린 파라미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이 모든 사건의 증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보로미르는 자신에게 방해가 될 수 있는 세력들을 모두 처리하고 그 빈 자리를 하라드림인들과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곤도르 신하들로 채웠다.

또한 보로미르는 충신 베레곤드가 일찌감치 힘을 못 쓰도록 그의 병사들을 흩었으며, 임라힐도 미나스 티리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여전히 포기하지 않을 파라미르에게 그가 도착한 날 저녁 지하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보여주었다.

호빗들이잖아...그들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열악한 환경에 폭력과 고문으로 지쳐 있는 네 명의 호빗들을 보고 더 이상 탄식할 힘도 없는 파라미르가 말했다.

여기 이 호빗들은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난 반지 원정대였지. 이제 다 지난날이지만.”

메리! 하지마!”

반항심이 가득한 눈을 가진 메리라고 불린 호빗이 족쇄에 묶인 것도 잊고 보로미르를 향해 달려들었다가 옆의 부하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파라미르, 현명한 넌 알고 있겠지? 지금 이 성에 제일 위험이 되는 인물이 너라는 것을.”

보로미르가 마치 파라미르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 것처럼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내가 널 내버려 두는 것은 너는 내 사랑하는 동생이기 때문이다.”

보로미르는 자신을 욕하는 호빗들을 무시하고 파라미르에게 다가왔다.

새로운 곤도르, 곤도르의 부흥을 위해서는 네가 필요해. 나 혼자선 할 수 없다. 나와 함께하자 파라미르.”

보로미르는 파라미르를 단단하게 껴안으며, 몸을 뒤로 빼려는 동생에게 속삭였다.

네가 반항한다면 저기 있는 불쌍하고 냄새나는 호빗들은 무사하지 못하겠지.”

너무도 비겁한 말에 파라미르는 정말 그의 형이 뱉은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형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지하감옥에서 들리는 죄 없는 죄수들의 신음소리에도 반짝이는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보로미르를 보고 파라미르는 힘없이 내던지듯 말했다.

미쳤군.”

그리고 그는 맘대로 하라고 하며 돌아서려다가 구석에 있는 또 다른 호빗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 곱슬머리에 유리구슬처럼 푸른색 눈을 한 호빗은 그를 나리라고 부르며 부축하는 또 다른 덩치 큰 호빗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 호빗은 원망과 연민이 뒤섞인 눈으로 보로미르를 보고 있었는데, 파라미르는 그의 손을 보자 그가 왜 그런 표정으로 형을 봤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헝겊으로 감싼 손에는 거기에 있어야 할 손가락 하나가 없었다.

파라미르는 자신의 형이 그 일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4.

파라미르는 넋이 나간 채로 자신에게 떨어지는 일들을 수행해나갔다.

보로미르는 강한 요새와 군대에 집착했고, 파라미르는 그의 명령에 따라 백성들을 징병하고, 성벽 보수와 군사훈련을 맡았다. 하지만 파라미르는 자신은 그저 허수아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보로미르의 측근으로 새로 권력을 잡은 하라드림 패거리들이 대부분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노인들까지 무리하게 징용했고, 어둠의 무기와 약들을 이용해 병사들을 강제로 강화했다. 가뜩이나 전쟁시기라 식량이 부족했는데, 그마저도 백성들이 먹을 것은 남겨 놓지 않고 모조리 그들의 주머니로 가져갔다.

파라미르는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자신은 그저 죽어서 이 모든 광경을 유령처럼 지켜보고 있는 거 같았다. 이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인질로 잡혀 있는 호빗들과 고통받는 불쌍한 백성들을 도저히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또한 반지의 힘으로 그토록 냉혹하고 잔인하게 일을 처리하면서도 밤에 둘이 있을 때면 자신을 안으며 용서를 구하는 보로미르를 또한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시간이 지나가는 사이 어느새 군사력을 키운 보로미르가 사우론의 군대를 치겠다며, 병사들의 데리고 전쟁터로 나갔다. 물론 명분은 그랬지만, 실제로는 눈엣가시인 로한의 기마대를 처리하러 간 것을 알고 있었던 파라미르는 보로미르와 부하들이 떠나 빈집처럼 고요한 성의 창가에 서서 돌아오지 않을 먼 과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땐 아직은 다정했던 아버지와 용감하고 불의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자랑스러운 형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수줍은 미소로 서 있는 어릴 적 자신이 현재의 파라미르에게 손을 뻗자 파라미르는 그것을 잡기 위해 창가 밖으로 서서히 몸을 밀었다.

그때였다.

파라미르!!”

애정과 놀람, 꾸지람이 담긴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자 거기엔 꿈속에서조차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미스란디르!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감정이 빈속에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래...결국 보로미르는 반지에 굴복했군.”

이미 보로미르의 악행에 대해 알고 있지만, 파라미르의 입으로 자세한 얘기를 듣고 나자 간달프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반지의 유혹에 대항할 수 있는 영혼은 아마 없을 걸세. 형을 너무 원망하지 말게나...”

파라미르의 짙은 속눈썹 밑에 깊은 그늘이 졌다.

형을... 이대로 둘 순 없어요.”

파라미르는 결심한 듯 간달프를 똑바로 쳐다봤다.

간달프, 당신이 찾아왔다는 것은 해결책을 들고 왔다는 거겠죠. 어릴 때도 당신이 올 때면 늘 사건이 해결되곤 했으니까요.”

그 말에 간달프는 다 안다는 듯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파라미르는 어린 시절 자신을 두고 떠나는 간달프를 붙잡을 때처럼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요 간달프, 절 도와주셔야 해요. 제가 아니라 이 곤도르와 백성들을 위해서 도와주세요. 저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힘이 없지만, 당신은 그때보다 더 강해졌으니, 우릴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타고난 통찰력으로 지금의 간달프는 회색의 간팔프 보다 더 강하다는 걸 안 파라미르는 마지막 희망인 간달프를 간절하게 바라보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간달프는 파라미르가 진정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파라미르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파라미르. 어떤 혹독한 겨울도 끝내 봄이 되고 만다네. 반지 원정대가 겨우 이렇게 끝났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반지 원정대에 대한 얘기를 듣자 지하감옥에서 자신과 보로미르를 슬프게 바라보던 호빗이 떠오른 파라미르의 눈빛이 흔들렸다.

반지 원정대에는 곤도르의 후손, 돌아온 왕 아라곤이 있었다네! 자네가 알지 모르겠군.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엘프들, 또 중간계 남은 인간 세력들까지! 아직 끝나지 않았네. 희망이 다시 꽃 피우고 있다네 파라미르!”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거죠? 떠돌이왕에게 지금 강력한 어둠으로 무장한 곤도르의 군단을 이기긴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잠시 눈앞으로 찾아온 희망에도 불구하고 보로미르와 곤도르를 둘러싼 깊은 먹구름을 떠올린 파라미르의 마음에는 차라리 희망을 품지 않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파라미르.”

간달프의 눈이 물결이 번진 파라미르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 괜찮을 거야. 이제 곧 밤의 장막을 거두고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비로소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된 파라미르는 그대로 버티지 못하고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간달프는 어린 시절 상처 입고 자신에게 위로받던 그를 떠올리며 울고 있는 곤도르의 대장의 어깨를 토닥였다.

파라미르. 이틀 뒤, 새벽의 어둠이 푸른 빛으로 바뀔 시간에 로한의 지원군과 힘을 합친 아라곤의 군대가 이곳에 올 거다.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실 가장 중요한 게 있다.”

그게 뭐죠, 간달프?”

잠시 무거운 침묵이 방을 채우고, 마침내 간달프가 말했다.

네가 보로미르의 시선을 끌어줘야 한다.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지금 보로미르는 반지의 힘으로 인간을 넘어선 악한 힘을 가지고 있어. 그가 우리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군사들의 움직임을 알아채기라도 하면 모두 실패로 돌아가겠지.”

간달프는 파라미르의 어깨를 꽉 쥐었다.

파라미르 할 수 있겠...”

간달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라미르는 마법사의 어깨를 마주 잡았다.

어쩌면 제 마지막 임무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간달프.”

 

 

5.

곤도르의 왕좌에 오른 뒤, 보로미르는 밤새 잠을 자지도 않고, 어두운 계획과 감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의 아버지 데네소르와 비슷했으나, 다른 점은 보로미르에게 있는 반지가 그에게 무한한 체력과 강한 정신력을 부여해주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보로미르는 파라미르를 감시하려는지 보호하려는지 모르겠지만, 항상 자신의 방에서 자게 했고, 파라미르는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형의 광기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파라미르는 간달프와 헤어진 뒤, 마침내 어떤 식으로든 끝이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오랜만에 꿈을 꿨기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곤도르는 눈 부신 빛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광채의 중심에는 처음 봤지만 금세 누군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왕관을 쓰고 있었다.

파라미르가 항상 되고 싶었던 고대의 왕처럼 위엄 있고, 자애롭고 용맹한 그 왕은 분명 간달프가 말한 아라곤일 것이다.

파라미르는 훗날 자신이 이 평화의 시대를 알리는 현장에 있지 않더라도, 꿈에서 미리 왕의 귀환을 볼 수 있었으니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역할을 상기시키듯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이미 마음을 굳힌 파라미르는 침착하게 보로미르의 옆에서 일을 수행했고, 식사 시간에는 심지어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파라미르의 호의적이고 안정된 모습에 그간 동생에게 강압적이던 보로미르도 이제야 동생이 포기한 줄 알고 마음이 놓여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파라미르를 대했다.

그리고 자정을 넘긴 깊은 밤, 서서히 운명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고 있음을 안 파라미르는 잠이 안 온다는 핑계로 보로미르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이며 그의 신경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애썼다. 평소와 달리 말이 많은 동생이었지만, 보로미르가 돌아온 뒤 파라미르가 이렇게 살갑게 군 적이 없었기에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랜만에 옛날처럼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그때 형이 뭐라고 했냐면...”

아 생각난다. 그때 용이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했었지.”

차갑던 방은 두 형제의 모닥불처럼 따뜻한 대화에 훈훈한 공기로 가득 찼고,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보로미르의 어두운 마음을 조금 밀어내고 그에게 인간성을 되찾아주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옛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새벽의 어둠에 물방울이 떨어져 푸른빛이 번지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밖에서 매가 두 번 우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군대가 오기 전 미리 간달프가 성벽 안의 성문을 열고 나서 보내기로 한 신호였다.

또한 그것은 파라미르가 이제 행동을 개시하면 된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 나 머리가 좀 어지러운데...”

그러니까 잠 좀 자지 않고, 이 수다쟁이야. 지금이라도 자라, 오늘 일정엔 네가 보이지 않아도 모른 척해주겠다.”

보로미르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고 파라미르의 이불을 끌어 올리려고 했다.

형이랑 같이 동트는 걸 보고 싶어. 형이나 내가 전투에 나서거나 멀리 떠날 때, 그리고 큰 일이 있을 때면 항상 거기서 해가 뜨는 걸 보곤 했잖아. 이제 곧 로한의 잔당들을 처리한다고 출전할 건데, 전투에서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의미로 같이 아침을 맞는 건 어때?”

넌 예전부터 그런 시시한 의식들을 좋아했지.”

길게 한숨을 쉬며 보로미르가 말했다.

그래, 네 어리광을 받아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도 또 받아줄 것처럼 다정히 파라미르의 뺨을 쓰다듬으며 보로미르가 말했다.

 

 

6.

미나스 티리스의 꼭대기, 두 눈 가득 채워도 넘치는 펠레노르의 평원이 펼쳐져 있는 그곳에서 파라미르는 지평선 너머로 어둠을 비집고 올라오고 있는 희망의 빛을 보고 있었다.

성 내부에서는 간달프가 은밀히 일을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 간달프는 걱정하는 파라미르에게 레골라스와 김리라는 믿음직한 동료들과 함께 일을 진행하겠다고 했고,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니 이제 안의 준비는 마친 거 같았다.

추억의 장소에서 아침을 맞는다는 인간적인 감회에 젖은 보로미르는 말없이 평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의 방위군의 텐트가 보였는데, 파라미르는 이미 그들은 처리됐고, 지금 보이는 군대는 곤도르의 병사로 위장한 아라곤의 군대라는 걸 눈치챘다.

파라미르, 아버지는....유감이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도 이미 우리가 알던 그분이 아니었어.”

아버지의 마지막 장소가 여기여서 그런지 보로미르는 갑작스러운 죄책감에 눈이 뜨거워졌다.

이 순간만큼은 반지조차 주인의 마음을 끌어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다시 반지의 힘이 강해질 것을 알고 있는 파라미르는 이제 형의 앞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자신의 앞을 막은 동생에게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파라미르는 형을 마지막인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형은 내게 항상 좋은 사람이었어.”

그리고 파라미르는 가지고 있던 칼로 보로미르의 목걸이를 잘랐다.

순식간에 반지와 목걸이가 딸려 나갔고, 보로미르는 순간적으로 앞으로 당겨졌지만 어떻게 할 새도 없이 파라미르는 그에게서 멀어졌다.

때마침 태양이 긴 광원의 가지를 뻗어 어둠에 익숙한 눈을 멀게 하는 사이, 보로미르는 손을 뻗었지만 파라미르를 놓치고 말았고, 그의 동생은 그대로 절벽에 몸을 던졌다.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7.

보로미르는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고, 성 밑에서는 군사들의 함성과 비명이 동시에 들렸다.

보로미르는 감히 절벽을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반지가 없는 그는 지금 일어난 일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일 뿐이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보로미르에게 간달프가 올라와서 다 끝났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기둥처럼 굳어버렸을 것이다.

지금 그에겐 아버지도 동생도 명예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파라미르가 단검을 휘두를 때 생긴 목에 난 상처만이 그저 이 모든 일이 분명히 일어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보로미르는 비록 반지 때문이긴 하나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대가로 곤도르의 대장과 섭정, 그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물론 억지로 어떤 자리를 줬더라도 보로미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알게 된 보로미르는 절망에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마치 녹화된 영상처럼 자신이 반지에 지배당하고 있을 동안 행했던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고, 그중에서도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과 파라미르의 희생이었다.

 

한편, 간달프가 말한 작전에는 파라미르가 보로미르를 잡아 두어 시간을 끈다는 것은 있었지만, 그의 죽음까지 포함되어 있진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파라미르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반지를 없애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고,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래에 있을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반지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택했다.

간달프의 예지마저 뛰어넘은 파라미르의 선택으로 반지의 힘이 사라진 사우론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 됐고, 최후의 전투 끝에 사우론은 몰락하고 중간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동안의 공로를 생각해서 귀환한 왕 아라곤은 보로미르를 다시 불러들이려 했지만, 파라미르의 마지막 온기가 그의 심장에 사라지지 않는 멍처럼 남아 버린 보로미르는 이전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의 머리는 빠르게 은빛으로 변했고, 그의 눈도 세상의 찬란한 색들을 비추지 못하고 오직 흑백의 건조한 색만 볼 수 있게 됐다.

그가 이후에도 볼 수 있었던 색은 오직 마지막 순간 너울지던 보리밭 같던 파라미르의 황금빛 머리카락뿐이었다.

다행히 자비로운 신이 보로미르의 정해진 운명보다 고통을 일찍 끝내주었긴 했지만, 그가 만약 파라미르가 마지막에 눈물이 아닌 평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적어도 다른 길로 떠나기 전 자신의 인생에 한 줌의 여지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보로.png
파라.png




+ 분량 조절 실패하고 하편에 모든 것을 올인....
+ 마지막에 왜캐 서프라이즈 에피소드 끝에 나오는 내레이션 같지...
+ 구구절절해질까봐 차마 본문에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반지가 파괴되지 않았는데도 사우론이 힘을 잃을 까닭:
설정상 곤도르 절벽 밑에는 지구 아주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크레바스 같은 게 있음..곤도르의 고대 왕들이 그의 수명을 다할 때쯤 여기로 가서 스스로 사라짐을 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고, 사실 대부분은 여기에 갈 일이 없음. 여하튼 크레바스가 어디까지 이어지든 중요한 건 그 밑으로 가면 반지의 소멸여부와 상관없이 사우론의 힘이 더 이상 미치지 못하게 됨.
어쨌거나 곤도르에서도 이곳의 존재자체가 전설적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일단 그곳 절벽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막연하게 위험한 곳 정도였는데, 결국 그곳의 존재가 뜻하지 않게 전쟁에 승리를 가져왔다는..그런 설정. 사실 파라미르도 이곳의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데네소르가 이곳에 떨어진 후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 대해 알게 돼서 반지와 함께 떨어지는 것을 계획하게 됐고, 결국 성공함.
+ 크레바스는 어디로 이어지고 그 밑에는 무엇이 있는지는 각자 상상의 몫으로...

반제 보로미르숀콩 파라미르웬햄
2023.02.12 02:44
ㅇㅇ
모바일
세상에 내가 이걸 보려고 안자고 있었어…
[Code: 6bd0]
2023.02.12 03:26
ㅇㅇ
모바일
ㅠㅠㅠㅠㅠ섭정가 형제들은 왜 행복할 수가 없나 ㅠㅠㅠㅠㅠ
[Code: 9b73]
2023.02.12 07:39
ㅇㅇ
모바일
༼;´༎ຶ ۝ ༎ຶ༽ 센세에에에에에엑 반제 읽는줄 알았어 필력 오졌다 ㅠㅠㅠㅠㅠㅜ 섭정가 형제들 ㅠㅠㅠㅠㅠㅠㅠㅜ 으어어엉 ㅠㅠㅠㅠㅠㅠ
[Code: f2df]
2023.02.12 11:24
ㅇㅇ
모바일
센세!! 알럽유
[Code: 46aa]
2023.02.19 01:26
ㅇㅇ
모바일
허거걱 센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조와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d3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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