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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9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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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타탈 ㅅㅅㅊㅈㅇ




타르탈리아는 겉옷을 벗어 팔에 걸치고 배에서 벗어나 리월의 땅을 밟는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만, 하필이면 해등절 기간이었나. 북국은행의 관리 권한을 판탈로네에게 넘겨주기 위해 조용히 서류만 가지고 스네즈나야로 돌아가려 했는데, 결국 이건 무탁대고 일정을 잡은 본인의 탓이겠지. 일부러 밤 시간대에 맞춰 온 건데, 축제의 밝은 분위기 때문에 이 또한 부질없어졌다.
타르탈리아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북국은행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자신에게 대놓고 날카로운 말을 던진 사람은 없었다. 모두 비겁하게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을 뿐. 차라리 다짜고짜 싸움이라도 걸어왔다면 더 좋았을텐데. 진짜 재미 없어.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원래 이곳저곳 돌아다니곤 했지만 해등절에는 특히 더 바빴었지. 마주칠 일도 없겠지만 그 범인 만큼은 마주치고싶지 않았다. 한 때 정을 품은 것은 맞지만, 자신을 이용하고 손바닥에 놓고 굴린 마신에게 품을 정은 없었다. 자신을 속이고 놀려 장기말로 쓴 자에게 정을 품을 수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이젠 상관 없는 일이다. 다시금 그와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려봤자 더 역겨워질 뿐, 좋아한다는 감정은 지운 지 오래였다.



"아."
"..."

그렇게 죽어도 보기 싫었던 그 얼굴을 북국은행 앞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건 한순간이었다.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밝고 황홀한 빛을 내뿜었다. 저걸 보고도 의심 안 한 내가 바보인가. 타르탈리아는 내게 할 말이라도 있냐고 묻는 듯이 표정을 구겼다. 그와 동시에 계단 난간을 힘을 실어 꽉 눌렀더니 끼기긱 하는 나무의 비명 소리가 귀에 작게 울렸다. 종려는 그런 타르탈리아를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의 친근한 인사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것 또한 기대하던 바가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을 모르는 오만한 암왕제군이, 뭐가 좋다고 제게 굽히고 들어오겠는가. 아쉬운 쪽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난간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화가 났다. 그 원인은 원망이나, 증오가 아니었다. 어리석게도 타르탈리아가 느끼는 것은 서러움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서러워해도 저 마신에게는 얼마나 가볍게 느껴질까. 멍청해 보일까. 종려가 심은 감정의 뒷감당은 모두 오롯이 타르탈리아의 몫이었다. 이것도 당신의 계획인가. 정말이지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갖고 노는 구나.
타르탈리아는 드디어 난간에서 손을 떼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난간에 남은 온기가 마치 그에 대한 미련처럼 점점 흐려져 완전히 사라졌다.



그 뒤로는 짧지만 뻔하고도 지루한 업무 시간이 있었다. 부하들이 이미 서류를 정리해뒀다고는 하지만 실수가 잦은 놈들이니 직접 확인하며 점검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던 타르탈리아는 서류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검토했고 수정, 처리를 거쳐 마지막 장 서류까지 확인을 마치자 약 2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시계를 보곤 피곤한 한숨을 푹 쉰 뒤에 그 자리에서 기지개를 한 번 쭈욱 켰다. 그리곤 곧바로 겉옷과 서류를 챙겨 예카테리나와 부하들에게 수고했고 더 수고하라는 장난스러우면서 유쾌한 작별 인사를 하고 북국은행에서 빠져나왔다. 새벽 시간이라 그런지 밝고 북적거리던 거리는 이제 단조로운 빛만이 남았다. 이런 분위기에 한가로움을 느끼는 것도 잠시, 타르탈리아는 계단을 다 내려오자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계단의 건너편, 적당히 먼 거리에서 종려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이 내려오기도 전부터 이곳을 응시하고 있던 눈빛이었으니까.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타르탈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역겨워, 이번엔 먼저 등을 돌렸다. 들고 있던 겉옷을 펼쳐 자신의 어깨에 가볍게 걸치고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려던 때였다.

"공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민했다. 이대로 무시하고 가느냐, 고개를 돌려 왜 부르냐고 묻느냐. 어느 쪽이 후회할 가능성이 적은가.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종려는 미간을 찌푸린 채 타르탈리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기 손목을 부여잡고 제 쪽으로 끌어 당겼다.

"뭐예요."
...

"여긴 왜 왔습니까."

하. 타르탈리아는 종려의 말을 듣자 마자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뒤이어 하는 말이 왜 왔냐고? 그러게요. 왜 왔을까. 왜 이러고 있을까. 누가 이렇게 되도록 만들었을까? 종려의 질문은 간단하고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복합적인 이유가 머릿속을 마구 어지럽혀 뒤섞이는 바람에 해야할 답을 잃었다. 답을 잃은 타르탈리아는 종려의 손에 쥐어진 손목을 세게 휘둘러 그에게서 벗어났다. 종려는 예기치 못한 반응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제 갈 거예요."
"간다니?"
"왜요. 순순히 간다니까 이상해요?"
...

"왜 그렇게 날이 서있는 겁니까?"
"...왜 날이 서있냐고?"
"단순하던 사람이 왜 이런 질문만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럼. 또 단순하게 굴면서 장기말로 어울려드려요?"
"아무런 말 없이 떠났다가 갑자기 돌아왔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물어봤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별일 없어요. 그리고 지금 갈 거니까 신경 끄고 그쪽도 갈 길 가세요."

"시간이 늦었는데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그냥 좀 가지 그래요?"
"피곤하고 수척해 보이는 얼굴로 늦은 밤에 급히 떠나려는 사람을 누가 안 붙잡겠습니까."
"왜 붙잡는데요?"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 종려는 이 말을 끝으로 뒤돌아 가려는 타르탈리아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 당겼다. 타르탈리아는 갑작스레 잡혔음에도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종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핬다. 한 마디 더 내뱉으려고 했을 때, 종려는 타르탈리아에게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은 손톱에 눌려 피가 날 정도로 억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고 동시에 그에게서 미세한 떨림까지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그의 표정을 봐야한다는 직감이 든 종려는 타르탈리아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손 대지 마."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요.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 더 아파. 그러니까, 좀 가요. 제발...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라고..."

끝소리가 눈물에 잠식되어 흐려졌다. 그 소리에 종려는 깊은 곳 무언가가 툭, 하고 끊기는 느낌이 들었고 아까까지의 조심스러웠던 손길은 거짓이었던 것 마냥 돌변하여 타르탈리아의 고개를 막무가내로 제쪽을 향해 돌려 놓았다. 타르탈리아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고 마주본 얼굴은 그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물과 분노가 가득했다. 종려는 격앙된 타르탈리아의 표정을 두 눈에 담자, 알 수 없는 통증이 제 속에서 스멀스멀 자라나는 게 느껴졌다. 타르탈리아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도, 거친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저 이를 꽉 깨물며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덜덜 떨고 무식하게 눈물만 뚝뚝 흘려 보낼 뿐이었다. 종려는 그런 타르탈리아를 자신의 품으로 당겨 끌어 안았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몇 분을 조용히 껴안고 있었다.

"...우습죠."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예요."
"타르탈리아 씨는 우스운 존재가 아니니까요."
"거짓말. 지금도 내가 우습고 하찮아 보이잖아요. 감정에 지고 이성을 잃어서 끝내 당신의 품에 이렇게 안겨있으니까, 내가 당신을 받아 들인 것 같고 그래요?"

타르탈리아는 종려의 가슴을 힘없이 손으로 밀어내었다. 매우 가냘프고 유약한 힘이었지만 어째선지 힘은 바위보다 무겁고 칼날보다 날카롭게 느껴져 종려는 그가 밀어내는 대로 밀려나며 주춤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타르탈리아를 바라보았더니 타르탈리아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잔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고 있었죠."
"..."
"내가 당신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
"어떤 감정을 품든 당신에겐 알 바 아니었겠지. 난,"

"난 당신을 마음에 품어버려서 심장이 찢겼어."
"...무슨 뜻이지?"
"누군가에게 농락 당했다는 이유로 상처 입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공자."
"이것도 계획에 일부인 거죠? 이미 다 뺏긴 인간에게 이제 뭘 뺏고 싶은 건데요? 눈이라도 하나 뽑아 줄까요?"
"타르탈리아, 우선 진정하고 내 말부터,"
"입 닥쳐. 듣기 싫으니까."

타르탈리아는 견딜 수 없는 감정들 사이에서 어지러움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당장 제 피부를 잡아 뜯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자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고통만을 준다. 조금이라도 잊으려고 노력하면 끔찍하게 나를 몰아 세워 이미 상처가 난 곳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아무 것도 없어서,"

"이제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어요."
"타르탈리아 씨."
"이제 종려 씨가 내게 무슨 말을 하든, 마음에 담을 수 없어요. 이미 다 찢어버려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난 지금 종려 씨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죽을 것 같거든요. 그냥, 종려 씨도 이제 절 놔주세요."

타르탈리아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손바닥에서는 결국 피가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종려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장갑으로 붉은 피를 가볍게 훑어 닦아주었다. 한바탕 언성을 높이다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하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을 의식했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고 해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리월에서의 소문은 쉽게 퍼지고 그 영향력 또한 큰 편이며 사소하고 가벼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감당하지 못 할 정도로 불어나기 마련이다. 건물의 그림자와 종려의 뒷모습이 타르탈리아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혼란스러워 하는 타르탈리아를 계속 외부에 노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평판이 좋지 않은데, 이런 모습을 누군가가 보게 된다면 악의적인 말이 떠도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다.
종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타르탈리아의 어깨에 걸쳐진 우인단 제복 외투를 걷어내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 머리부터 슬 감싸 덮어주었다. 타르탈리아는 표정을 구기며 자신을 노려볼 뿐, 손을 쳐내며 거부하지 않았다.

"타르탈리아 씨의 말대로, 그대는 인간이고 저는 마신이지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떠나고 나서야 당신이 느끼던 감정이 어떤 건지 이해되기 시작했다면 어떤가요."
"늦었어요."
"늦었죠. 그래서 지금 놓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겁니다."

이대로 그냥 보내면 두 번 다시 내게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종려는 타르탈리아를 다시 자신의 품 안에 가두고 그의 목에 제 얼굴을 묻었다. 타르탈리아는 이번엔 종려를 밀어내지 못했다. 종려가 마치 죽어가는 사람을 껴안고 있는 것처럼 애타고 간절하게 자신을 껴안고 있었기에. 이렇게 자신이 미련하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종려의 품은 아프고 따가웠지만 동시에 기분을 진정시켰다. 쉼없이 흐르던 눈물이 멈춘 뒤에는 공허함이 남았다. 이 안은 뭘로 채워야 할까.
종려는 어떤 선택이든 이해하고 들어줄테니 일단 실내로 들어가서 대화하자 제안했다. 엉망인 자신의 모습을 혹여나 다른 사람이 볼까봐 불안해하는 티가 역력했다. 타르탈리아 또한 자신이 얼마나 추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 잘 알고 있었지만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지금은 종려 씨랑 대화할 여유도 시간도 없어요."
"하지만,"
"종려 씨가 내게 무슨 말은 하든, 전 그걸 올바르게 받아 들일 자신도 없어요."
"...타르탈리아 씨. 지금 그대의 모습이 어떤 지 알고 계십니까."
"알죠, 제 몸인데 제가 모를 리가 있나요. 그냥... 시간을 좀 주세요."
"시간을 달라는 건?"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이해할 지, 안 할 지. 이해할 수 있는 지, 아닌 지."
"..."
"...내년 해등절때 다시 볼까요. 전 이제 북국은행의 관할이 아니라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어요. 오늘은 관할을 넘기기 위한 서류만 가지고 가려고 했던 거고 무엇보다... 지금은 종려 씨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요."
...

"타르탈리아 씨라면,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지 잘 알고 있겠지요."
"몰라요. 인간이 마신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요. 얘기 끝났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외투는... 잠깐 빌릴게요. 대신, 종려 씨한테도 제 걸 빌려줄게요."
"잘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데려다드리지요."
"하하, 싫어요. 외투면 충분해요."

타르탈리아는 붉게 짓무른 눈을 접어 겨우겨우 웃어보이고는 말이 더 나오기 전에 재빨리 뒤돌아 항구로 발을 옮겼다. 종려는 자신의 팔에 걸쳐진 외투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제 외투를 쓰고 점점 작아지는 타르탈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걸음엔 미련이 남지 않은 것 같아 지금이라도 뛰어가 붙잡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지만... 종려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내기로 했다. 타르탈리아가 없는 시간은 고독하고 외롭겠지만 시간이라면 남아 도니까.




"그런데... 객경은 해등절인데도 항상 항구 근처에만 머무시는군요?"
"운치 있고 좋지 않은가."
"해등절 내내 이러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요. 해등절의 마지막 밤까지 항구에서 보낸다니,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지겹다니, 그렇지 않네."
"누구를 기다리고 계시길래 이렇게 매번 나와계신답니까?"
"대상이 있는 건 맞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야. 바라고 있을 뿐이지."
"어렵구려..."

종려는 오늘도 곧게 서서 리월의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런 종려와 대화를 나눈 뱃사공은 종려를 희한한 객경이라 생각했다. 해등절이 한창인 날에 왠 회색빛 겉옷을 팔에 걸치고 혼자 우중충한 분위기로 항구 근처에서만 지평선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니 희한하지 않을 리 없다. 설마 마지막 날까지 이러고 있을 줄이야. 역시 객경의 생각은 아무도 모르겠다니까.

하늘에 잔뜩 떠있던 소등도 모두 사라지고 들뜬 분위기도 점차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안에 섞이지 못 한 건 오직 종려 뿐이었다. 결국 오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혹시, 내년엔 올까. 그 다음 해에는. 시간은 계속 흘러도 감정은 여전히 그때 그 자리에 머물러 오히려 1분 1초가 지날 때마다 배로 불어나는데.
데려다 줄 걸 그랬지.
답지 않게 후회해도 그리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종려는 항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발을 돌렸다. 타르탈리아를 마지막으로 붙잡았던 그때처럼 잔잔한 빛이 거리를 비추고 한적했다. 오늘, 해등절은 끝났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던 종려는 불이 꺼진 북국은행 앞에 섰다. 지금이라도 이 안에 들어가면 타르탈리아가 있을 것 같은데, 남은 건 겉옷과 그와의 기억이었다. 종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타르탈리아가 내게 준 것은 외투가 아닌 그가 느끼던 감정이었다. 서운함과 미련, 후회와 분노. 팔에 걸친 타르탈리아의 우인단 제복을 보자 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이걸로 평생 자신을 떠올리고 그로 인한 후회와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그가 완전히 떠나버리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잔인한가.
나는, 이제...



...




"아프죠?"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자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타르탈리아가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이곳에, 타르탈리아가 이곳에 있다. 종려는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잊고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사고가 멈추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종려의 머릿속엔 그저 '타르탈리아가 이곳에 있다.' 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타르탈리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종려를 향해 싱긋 웃으며 다가갔고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종려는 곁에 다가온 타르탈리아를 순식간에 와락 끌어안고서 그리웠던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하하, 되게 놀랐나보네. 안 올 줄 알았죠?"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네. 그런 것 같아 보여요."

타르탈리아는 종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일부러 해등절이 끝난 새벽에 온 건 맞지만 이렇게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니, 괜히 미안해지기도 해서 별말 없이 그를 마주 안고 토닥여주었다. 공허했던 마음 한 켠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고 이를 받아들이니 괴로울 정도로 달콤한 기분과 함께 기시감이 느껴졌다.
타르탈리아는 종려의 등을 토닥이며 다리 밑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고 해도 거리에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점잖은 객경의 우스꽝스러운 소문이 도는 것도 나름 재밌을 것 같지만, 지금은 그런 걸 즐길 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계속 엉겨붙는 종려를 힘들게 밀어내 떨어뜨려놓곤 그의 팔에서 제 외투를 집어 종려의 머리부터 슬 감싸주었다. 종려는 눈물 맺힌 황금빛 눈으로 자신을 마주보았고 타르탈리아는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으며 그의 눈물을 스윽 닦아주었다.

"종려 씨가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는지 다 들어줄테니깐 우선 실내로 들어가서 얘기하죠. 으음... 백마여관에 잠깐 들렀다 갈래요? 빌린 것도 돌려줄겸."

타르탈리아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흘려 들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려는 타르탈리아가 하는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그의 손바닥에 제 뺨을 문질렀다. 그리고 한 손으론 제 머리에 덮인 타르탈리아의 외투를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잡았고 남은 한 손으론 타르탈리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백마여관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예전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재잘 거리는 타르탈리아에게서 종려는 감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침내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보여 그의 모든 걸 눈과 가슴에 담고 싶은 욕심이었다. 지금 자신의 꼴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 따위는 상관 없었다.

"그럼, 이제는 제 말을 마음에 담아주실 겁니까?"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질게 굴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이미 글러먹은 것 같네. 왜요,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마음 속에 묻어두고 모른 채 했던 말이 있다. 아무리 깊은 곳에 묻어도 잊을 수 없는 그 달콤한 말을, 지금의 그대에게 전해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외로움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던 그 말을. 종려는 허리를 숙여 타르탈리아에게 입을 맞추었다. 뒤이어 붉어진 그의 뺨에도 입술을 내리며 애정을 표했다. 그리고는 가득 차다 못해 넘쳐버린 제 감정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제 마음을 모두 바쳐 타르탈리아 씨를 사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