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13023146
view 7773
2022.12.11 20:18
진정령, 원작 애니 ㅅㅍ +망기무선
마지막 편 쓰고 나니까 너무 길어서 어떻게 올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냥 안 끊고 한 번에 올림. 좀 긺 ㅈㅇ

위무선이랑 섭회상 관계 개인적으로 되게 좋아해서 둘이 어떻게든 다시 얼굴 보고 협업하는 게 보고 싶었음.
캐붕이라면 캐붕이지만 하여튼 그렇다......
구구절절 길었는데 읽어줘서 고마워. 연말 잘 보내


1-1: https://hygall.com/510097371
1-2: https://hygall.com/510098997
2-1: https://hygall.com/510265342
2-2: https://hygall.com/510266758
2-3: https://hygall.com/510576125
2-4: https://hygall.com/510578287
외전1: https://hygall.com/510708761
3-1: https://hygall.com/510709361
3-2: https://hygall.com/510884992
3-3: https://hygall.com/510886315
4-1: https://hygall.com/511095972
4-2: https://hygall.com/511097042
5-1: https://hygall.com/511336650
5-2: https://hygall.com/511339029
외전2: https://hygall.com/511606508
6: https://hygall.com/511610837
7-1: https://hygall.com/511808574
7-2: https://hygall.com/511809688
8-1: https://hygall.com/512035093
외전3-1: https://hygall.com/512038116
외전3-2: https://hygall.com/512214966
8-2: https://hygall.com/512216704
9: https://hygall.com/512399163
10-1: https://hygall.com/512400710
10-2: https://hygall.com/512591179
10-3: https://hygall.com/512592995
10-4: https://hygall.com/512847399
외전4: https://hygall.com/512849355
외전5: https://hygall.com/513020275





고소 운심부지처의 밤은 고요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만 그랬다. 방음주술이 걸려 있으니 정실 밖의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정실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내는 소음이 얼마나 부적절하고 적나라한지 아주 잘 알았다.

적어도 그 방에 있는 두 명 중에서 한 명만은 그것을 아주 잘 알았고, 잘 아는 만큼 즐겼다. 긴 신음과 함께 몸을 휜 위무선은 자기를 단단히 받친 새하얀 몸 위로 무너지며 키득거렸다.

-어쩜 매일 매일 지치지를 않아, 남잠?

대답 대신 평소보다 조금 거칠어진 상대방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헐떡이는 자기와 달리 호흡이 조금 거칠어진 정도인 자기 도려가 위무선은 새삼 경이로웠다. 그러나 전생의 자기가 가졌던 가슴의 흉터 위로 귀를 대면, 그의 심장도 위무선의 것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흉터 투성이인 흰 피부가 어슴푸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위무선은 괜히 투정을 부렸다.

-오늘은 너무 힘들어. 한 번 더는 안 되겠어.

그러면서 몸에서 힘을 풀자, 남망기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지만 곧 자기 도려의 결정을 따랐다. 그래야지. 매일같이 나를 이렇게 혹사시키면서.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던 위무선은 자기 안에서 느리게 빠져나가는 물건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러자 그 물건의 주인이 멈칫했다.

-아니야. 안 돼, 커지지 마, 남잠!

진심 반 장난 반으로 몸을 움츠리자, 남망기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위무선의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갔다. 그리곤 익숙하게 위무선의 몸을 닦아주었고, 위무선은 그 손길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맨살을 가만가만 닦아내는 비단천의 감촉을 느끼다 보면...... 졸렸다. 남망기가 다시 그를 끌어안아올 때, 위무선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위영.

-응?

남망기는 곧장 용건을 말하는 대신 말없이 위무선을 끌어안고 있었다. 위무선은 그런 그를 가볍게 재촉했다.

-무슨 일인데?

그는 남망기에게서 뭔가 망설이는 기색을 읽었다. 남망기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위무선은 자기 직감이 맞아떨어졌음을 알았다.

-섭 종주가 너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섭회상?

불청객처럼 튀어나온 그 이름에, 위무선은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또 무슨 꿍꿍이래?

남망기는 이번에도 곧장 대답을 내놓지 않고 위무선을 바라보았다. 위무선은 그의 시선에 담긴 뜻을 이해했지만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일 년 전 운심부지처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었다. 위무선은 그 뒤로는 섭회상을 만나보지 못했다. 만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더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는 지난 반 년 간 이곳 저곳 유랑할 때도 청하는 가지 않았고, 운심부지처로 돌아온 뒤에는 섭회상이나 그나 피차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

위무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지난 십육 년 간, 세상은 놀라울 정도로 바뀌었다. 섭회상은 바로 그 변화의 정점에 있었다.

-아직 그를 용서할 수 없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자기를 감싸 안은 품으로 더 파고들며, 위무선은 웅얼거렸다.

-그냥...... 소름끼치잖아.

일 년 전, 도령의 행방을 좇아 간 청하에서 보게 된 섭회상은 모두에게 비웃음과 동정을 사고 있었다. 섭회상이 사랑에 미쳐서 무슨 자살 소동을 벌였다는 소문을 길거리에서 들었을 때, 위무선은 자기 머리를 한 대 쳤다. 그러나 소문은 그대로였다. 내가 아는 그 섭회상? 손가락 베이는 것도 무서워하던 걔? 위무선이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동안 남망기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얼마 뒤 남망기가 인질로 잡아와 만나게 된 섭회상 앞에서는, 위무선이 비슷하게 무언 상태가 되었다.

잔뜩 야윈 채 힘없는 미소를 짓는 검은 옷의 남자는, 누가 봐도 자기 인생을 어딘가에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사람이었다. 아무리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도 섭회상...... 그 섭회상이 저런 모습이 될 거라곤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행로령에 대해 털어놓은 그가 힘없이 방을 나가자마자, 위무선은 남망기의 소맷부리를 붙잡으며 물었다.

-섭회상을 저렇게 만든 선자가 대체 누구야?

-부정세의 수사중 하나라고 들었어. 다른 건 나도 몰라.

-어쨌든 너까지 알 정도라는 거잖아?

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섭회상을 저리 만들어놓았는지 위무선은 궁금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다. 내가 죽었을 때 남잠도 저런 분위기를 풍겼을까, 하고.

물론 남망기는 선문 백가가 모두 모인 청담 성회에서 무려 그 선독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밀이를 좀 찾아달라고 엉엉 우는 추태를 부리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술을 먹여도 그런 짓은 안 했으리라.

근데 밀? 이름이 꿀이야? 어쩌면 현실 인간이 아니라 웬 소설이나 그림 속 여인을 저리 부르는 건 아닌가 위무선은 탁상 위의 나물을 젓가락으로 집어먹으며 생각했었다. 그가 아는 섭회상이라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군. 섭 종주가 몇 달 전 가남 성씨 고명딸과 선을 봤다고 하지 않았소?

-그건 염방존이 주선했다는 소문이 있소. 그래도 의형제의 동생이니, 대 끊기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나 보지.

-다른 건 몰라도, 일문삼부지가 저렇게 나오니 성 종주는 차라리 감사해 하지 않을까 싶소. 선독을 거절할 수야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하나뿐인 딸 저런 사내에게 시집보내고 싶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

그 낭자가 얼마나 평판이 자자한데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 입을 모으던 자들이 또 자기들끼리 며느리를 들이는 이야기로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들으며 위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현우는 금광요의 부인에게 집적거리다가 쫓겨났고, 섭회상은 평판 좋은 세가 낭자를 두고 자기 가문 수사와 저런 짓을 벌인다니. 다들 참 사랑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구나.

생각해보면, 그렇게 따졌을 때 제일은 자기 도려인 것 같기도 했지만......

아무튼 아무도 섭회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상태가 그러함에야. 위무선도 정말 끝에 가서야 알았다. 관음묘에서의 마지막 순간, 금광요가 섭회상의 이름을 부르던 그 목소리는 아마 위무선도 죽는 날까지 잊지 못 할 것이다. 그때 위무선은 섭회상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가 웃고 있었을 것만 같다는 악몽에 그는 이후 며칠 간 시달렸다.

그게 어쩌면 꺼림칙함이 아니라 배신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위무선은 섭회상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깨달았다. 어차피 연기인 게 다 들통 났는데 왜 여전히 저렇게 텅 빈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사악한 자를 멀리하라는 운심부지처의 가규를 읊을 때, 위무선은 그 순간 자기 혀를 움직인 잔인한 충동에 놀랐다. 그리고 정말 그 말에 상처입은 듯 떨리는 손으로 부채를 펴드는 섭회상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압니다, 위 형.

그렇게 대답하는 섭회상의 목소리는 사람의 말문을 막히게 할 정도로 담담했다. 가슴에 무언가 묵직한 게 가라앉았지만, 위무선은 무시하며 계속 혀를 놀렸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아깝지 않다지. 참 대단해, 섭 형. 그런데 복수가 성공한 것치곤 별로 시원하지 않은 얼굴인데, 정말 선독 자리가 욕심 나지 않는단 말이야?

말을 하면서 어째 위무선은 자기가 더 나쁜 놈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섭회상은 위무선을 뒤돌아보더니, 웃었다.

-위 형도 알잖아요? 저는 수진계의 안녕에 골몰할 그릇이 못 된다는 걸. 저는 함광군이나 형과 달리 욕심이 많아서요.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뜬 섭회상은 잘 지내라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운심부지처 산길을 걸어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위무선은 노려보았다. 솔직히 인정하자면, 어쩌면 그때 그에게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미안하다는 말을.

물론 섭회상이 처음부터 솔직하게 도와달라고 밝히는 건 선택지가 될 수 없었음을 위무선은 이해했다. 그랬다고 그가 섭회상의 복수를 지금처럼 완벽히 도와주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모현우를 꼬드겨 자기를 헌사시킨 섭회상에 대한 거부감은 뭘 해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금릉을 포함한 어린 애들의 목숨을 인질 잡은 것도 그렇고, 선문세가 전체를 위험에 몰아넣은 것도 그렇고 섭회상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더 이상 그는 위무선이 알던 그 맘여린 친구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서로에게 있어 수많은 타인들 중 하나가 되는 수밖에.

섭회상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그날 관음묘에 있던 몇 명뿐이었다. 여전히 아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다. 남망기를 만나 운심부지처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 위무선은 섭회상이 기어이 그 밀이라는 선자와 연을 맺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맘고생 역력한 얼굴만은 진짜였을까 헛웃음을 짓던 게 거의 섭회상과 관련된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래서, 왜 섭회상의 이름이 지금 막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낸 뒤 자려고 끌어안은 자기 도려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섭씨의 주화입마를 해결할 방도를 연구하고 있댔어. 그에 관해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위무선은 무엇부터 질문해야 할지 망설였다. 내가 왜 섭회상을 도와줘야 하냐고 먼저 물을까, 아니면 걔는 도와달라는 부탁을 왜 내가 아니라 너한테 한 거냐를 먼저 물을까.

아니면 네가 왜 나한테 섭회상 대신 부탁을 하느냐고 물어야 할까.

-그가 하려는 바가 옳으니까.

늘 그렇듯 남망기는 위무선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의 대답이 별로 위무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선독으로서 나한테 명령을 하시겠다? 함광군, 정말 너무해. 매일매일이라고 약속한 건 자기면서, 나를 운심부지처 밖으로 보내버리려는 거야?

위무선이 그렇게 쏘아붙이자, 남망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도 너에게 부탁하고 싶다고 하셨어.

-택무군이?

아니, 왜? 관음묘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남희신과 섭회상이 절연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망기가 말했다.

-속죄하고 싶다고 하셨어.

위무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사람이 너무 선하면 안 된다. 섭회상은 분명 이런 것까지 다 예상 했을 것이다.

별개로, 남희신의 부탁이라면 남망기가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갔고 위무선도 그 부탁을 거절하기가 좀 그랬다. 관음묘에서 금광요를 자기 손으로 죽인 이후 남희신은 한 차례 폐관에 들었다가 나왔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해보이지만 그 속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수진계의 모두가 알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갑자기 또 말을 잇는 남망기를 올려다본 위무선은, 어둠 속에서 정말 흰 옥처럼 빛을 내는 자기 도려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섭 부인에게도 입은 은혜가 있다고.

-뭐?

반쯤은 남망기의 얼굴을 보느라 잘 못 들었고, 또 반쯤은 자기가 뭔가 잘못 들었다 싶었다. 그러나 남망기가 말했다.

-오래 전, 사일지정 때 운심부지처의 고서를 그녀가 지켜주었다고 해.

-그건 금광요가 했던 일 아냐?

남망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금광요의 친우인 것 같았다고, 형님께서 말씀하셨어.

위무선은 자기가 들은 게 맞는지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그니까, 금광요의 친구가 섭회상의 부인이라고? 말이 돼?

-말이 돼?

남망기는 대답이 없었다. 위무선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정말 가 봐야겠네. 가 볼게.

그렇게 대답하며 위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절반쯤 고소 남씨 사람이 된 몸으로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실 사심이 더 컸다. 그 택무군이 부탁한 일이니, 이 김에 섭회상의 도려가 어떤 사람인지 꼭 보고 오리라 그는 다짐했다. 섭씨 도령...... 그것도 사실 전부터 조금 궁금하긴 했고. 자기 대답에 안심했는지 나직한 한숨을 내쉬는 남망기 때문에, 위무선은 상념에서 깨어난 채 다시 그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남잠. 너 지금 나한테 베갯머리 송사한 거야?

티나게 굳는 자기 도려의 몸을 느끼며, 위무선은 하던 생각은 다 까먹고 웃음을 터뜨렸다.

-함광군이 이렇게 귀여운 건 나만 알지!

-위영.

-근데, 베갯머리 송사 치고는 너무 얌전한 것 아닌가.

그러면서 은근히 남망기의 가슴팍을 찌른 위무선은 자기 손목을 붙잡는 남망기를 올려다보았다. 저 눈에 저렇게 타오르는 불꽃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상에 자기 뿐일 것이었다. 그는 위무선이 가진 유일한 것이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세상이어서 위무선에게는 충분했다.

-한 번 더는 안 된다고, 네가 말했잖아.

-네가 부탁한다면 재고해볼 수도 있어.

-어떻게 부탁하기를 바라?

참 고지식하기도 한 그 반문에, 위무선은 샐쭉 웃었다.

-글쎄, 이것 참...... 난 욕심이 별로 없어서.

남망기는 대꾸하는 대신 위무선의 대답만을 기다리겠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위무선은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얼굴에 구멍 뚫리겠어, 남잠. 그런 눈으로 그만 보고 얼른 입맞춰 줘.

당연하게도, 남망기는 위무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

만약 위무선이 여인이었다면 남망기와 그가 신혼생활 중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섭회상은 그가 그런 꿀 같은 시간을 뒤로 하고 자기를 도와주러 온 것에 대한 사례를 톡톡히 해야 할 것이었다.

간만에 찾은 청하는 이전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세상 사람들 갈대 같은 것이야 위무선보다 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니 자기네들 종주에 대한 호평이 간간히 들려오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어째 사람도 더 많아 보이고 가게도 늘어난 게 기분이 묘했다. 섭회상이 또 무슨 일을 벌인 건가 의심하는 자기가 의심병에 걸린 환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심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제일 잘하는 일을 했다. 술 몇 동이에 큼지막한 은자를 하나 건네자 객잔 종업원은 일문삼부지와 청하에 대해 술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염방존인지 뭔지 하는 사람 때문에 한참 또 여기 저기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특히 우리 청하는 적봉존 돌아가신 뒤에 섭씨가 뭐 하는 거 없고 거의 고소 남씨랑 난릉 금씨가 책임졌었단 말이에요. 근데 난릉 금씨가 그리 되었고 고소 남씨에도 뭔가 일이 있었다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들 걱정했는데...... 웬걸요? 다들 걱정했던 거랑 다르게 세금도 안 올리고, 새로운 광산이 발견 돼서 올해 중으로 연다고 그러고...... 행로령도 멀끔해졌고, 들어보니 부정세에서 새로 수사들도 많이 모집하는 것 같던데, 이거 참. 사정이 이렇게 갑자기 좋아질 수가 있습니까? 뭐 섭 종주가 탈사 당한 거란 소문도 있고, 그 나쁜 염방존인지 뭔지가 그동안 섭 종주를 조종했던 거란 말도 있고. 아무튼 예전에 비하면 요즘 훨씬 살맛 나죠, 살맛 나.

위무선은 뿌듯하게 웃고 있는 점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소름이 끼쳐서. 섭회상...... 진짜 무섭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멀어지려는 점원을 붙잡았다.

-그. 그...... 섭 부인은요? 섭 종주랑 그 분 이야기 청하 밖에서도 되게 유명하던데.

-아, 그래요?

점원이 놀랍다는 듯 대꾸했다.

-사실 저는 잘 모릅니다. 뭐 신분이 어떻니 하는 이야기가 한 차례 돌긴 했는데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알 바 아니니까. 그냥 다들 일문삼부지가 혼인하더니 정신 차렸나보다 하죠. 사내들이 원래 다 그렇잖아요?

-그럼 그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요?

-그...... 아. 소문으로는 동영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갈수록 혼란스러울 뿐이어서, 위무선은 그냥 그 이상 듣지 않기로 하고 점원을 보내주었다.

술병을 금세 동내고 부정세로 향할 때, 위무선은 영 기분이 애매했다. 섭회상 그 음습한 인간이 금광요 사후까지 다 준비해놨다는 건 알겠는데, 유독 가문도 뭣도 없는 평범한 수사와 혼인했다는 게 하나 걸리는 탓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 튀었다. 만약 섭회상이 진심으로 그 상대를 사랑해서 그리한 것이라면 그가 조금 다르게 보일 것 같기도 했는데, 또 생각해보면 구제불능들이야말로 가슴 속에 품는 한만큼 정도 깊었다. 설양과 금광요가 그 산 증인...... 아니, 죽은 증인들이었다.

생각할수록 섭회상이 금광요와 진짜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위무선은 부정세 벽의 거대한 수두문 부조를 올려다 보았다. 곧 땅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두터운 철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보는 부정세의 내부가 위무선의 눈 앞에 펼쳐졌다.

사일지정 이후로 정말 처음이니, 벌써 햇수로 따지면 몇 해야. 스무 해가 넘었다. 그때 태어난 애가 약관이 되어 있을 정도의 시간이란 말이다. 연화오도 운심부지처도 기억 속에 비해 많이 달라졌으니 부정세도 그러리라 생각했던 위무선은 생각보다 달라진 게 없는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기억 속 부정세는 늘 뛰쳐나갈 준비가 된 짐승처럼 삼엄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쩐지 어수선했고 그만큼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게 나를 맞아주려고 다들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섭회상이 섭씨를 정말 뜯어고칠 생각인가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위무선은 저기 멀리 있는 연무장을 내려다보았다. 눈에 띄는 건 아직 십 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문하생들이 다수 포진해있는 모습이었다. 전문 수사로 보이는 누군가가 열심히 그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선 수사들이 본격적인 훈련을 하고 있었다.

적봉존이 살아있을 때 만큼은 아니더라도 활력 있는 이 분위기가 나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쩐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위무선은 자길 안내하는 수사를 따라갔다.

그렇게 가게 된 곳은 위무선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부정세 안뜰에서 남망기와 보냈던 짧은 순간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저 지붕 위에서 그가 술을 콸콸 마시고 뻗는 사이, 남망기는 운심부지처로 말없이 떠났다.

그 다음날부터 위무선의 인생은 착실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실 위무선은 그날 남망기가 말없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날 나지막한 소리로 전한 작별 인사가 그날 위무선의 귀에 남아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남망기가 단순히 고소 남씨의 은혜니 택무군의 부탁이니 하는 이유로 자기를 여기 보낸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말을 꺼낸 건 아마 다른 누가 아닌 위무선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위무선보다도 위무선을 잘 아는, 그의 지기이자 도려였으니까.

-너무 착하다니까, 남잠은.

위무선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귀여워. 그 함광군이 사실은 토끼를 좋아하고 은근 응석부리기를 좋아하는 귀염둥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남잠. 남잠! 보고 싶어! 위무선이 머릿속으로 온갖 아우성을 질러댈 때였다.

-위무선.

준비되지 않은 만남에, 위무선은 잠깐 삐끗했다.

섭회상은 섭로령 일로 다시 보았을 때와 비슷한 진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부채를 쥔 채 미소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위무선은 자기도 모르게 허탈해졌다. 다 죽어가던 일 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네가 혼인했다는 그 선자가 혹시 신선이야? 그래서 널 살린 거야? 위무선이 그렇게 물으려던 때였다.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니, 들어가자.

섭회상이 담백하게 말했다. 뒤도는 그를 위무선은 아주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따라 걸었다.

물론 위무선이 뭐 엄청난 재회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다시 만난 게 이게 다라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는 눈 앞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는 섭회상의 검은 머리카락을 찌푸린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래서.

수 겹의 방음주술이 걸린 종주실 의자에 맞은 편에 앉아, 위무선은 삐딱하게 섭회상을 바라보았다. 채광이 그리 좋지 않은 부정세 종주실은 낮 치고는 조금 어두운 편이었다. 그 어두움이나, 섭회상의 얼굴에 진 그림자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위무선은 손가락을 튕기며 물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섭회상은 위무선에게 손수 차를 따라주더니 미소지었다.

-달리 바라는 게 있어?

-아니.

그 대답에, 섭회상은 말없이 자기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위무선은 반대편에 앉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섭회상은 내내 담담한 얼굴이었다.

-와줘서 고마워. 네가 정말 와줄 줄은 몰랐어.

-진짜?

위무선의 질문에, 섭회상은 피식 웃으며 찻잔을 매만졌다.

-나를 높게 사주는 건 고맙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한 것 아니야? 차라리 내 운이 좋다고 말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겠어.

-네가 운이 좋다고.

-평소에는 운이 없다 못해 바닥인데, 이상하게 결정적인 순간에 운이 내 편이더라고.

그렇게 말하는 섭회상에게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위무선은 정의하기 힘들었다. 경멸? 그건 아니었다. 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위무선은 그를 경멸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배신감. 그거였다. 따지자면 섭회상은 위무선의 유일한 친구였다. 남잠은 친구라기에는 너무 가깝고, 강징도 위무선의 친구는 아니었고, 은원으로 얽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이 어울렸던 건 눈 앞의 저 얼굴 뿐이었단 말이다. 아무리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전생의 연을 다 놓아버렸다곤 해도, 위무선도 인간이었다.

-지독한 놈.

위무선은 독기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말 소름이 끼치게도, 섭회상이 그런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 진작 이 말을 했어야 하는데.

이게 진짜 우연이라고? 내 속을 읽은 게 아니라? 따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자기 정신도 이상해질 것 같아서, 위무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원래도 섭회상과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던 건 아니다. 그냥 이 정도로 앙금을 풀고 지내면 된다. 아무리 정신 연령이 이십대 초반이래도, 위무선은 그 사실을 알 정도로는 어른이었다. 남망기도 아마 그 정도를 바랐을 것이다. 위무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한테 미안할 건 없어. 다른 사람들에게나 속죄하든가. 아무튼, 일 때문에 온 거니까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나 말해줘.

얼른 끝내고 자기 도려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다. 섭씨의 그 무시무시한 도령이라는 게 대체 어떤 존재이며, 자기가 상대할 수 있을지 어떨지.

-그래. 그럼, 이 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자기 앞에 놓여진 종이로 위무선은 곧 신경을 집중했다. 이모 저모 꼼꼼히 진을 뜯어본 그는 허리춤에 매달린 진정을 빼내어 손가락 사이로 돌렸다.

-행로령에 이런 진이 있었어?

-정확히는, 가장 밑바닥에.

-섭씨 도령이라는 게 검령과는 다르게 진짜 실체가 있는 거였나보지? 완전 죽어라 봉인을 한 것 같은데.

위무선은 진정 끝으로 진을 따라 그리며 중얼거렸다.

-대대로 도령을 물려받는 거였어?

-그게, 조금 복잡해.

고개를 들자 씁쓸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깐 섭회상이 보였다.

-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핏줄에도 이 질긴 인연이 새겨져 있어. 삼각형이라고 생각하면 쉽겠네. 도를 평생 안 써도 도령의 심술로부터 자유롭지 못 해.

위무선은 요괴에게 자기 후손 팔아 거래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남의 가문 시조를 폄하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격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해가 갔다.

-청하 섭씨가 왜 줄줄이 단명을 하면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전통을 유지해왔는지 알겠네. 피를 갈아끼울 수는 없으니까.

-심지어 피가 아예 다르면 괜찮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야. 말했지? 삼각형이라니까. 어쨌든 섭씨 종주는 도를 써야 하고, 그리고...... 섭씨가 아닌 일반 수사들도 숱하게 죽어나가니까. 도무지 나 혼자선 어찌할 수 없는 문제야.

그러면서 섭회상이 부채를 폈다.

-그러니, 고견을 좀 청하겠습니다. 위 형.

위무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 가문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했어?

-도 무덤이 지어진 뒤로는, 응. 역대 종주들은 모두 자기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였지. 형님이 봉인된 도령을 상대하신 적이 있긴 하지만, 이미 주화입마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셔서 봉인만 다시 겨우 했을 뿐 크게 진척은 없었어.

그렇게 말하는 섭회상의 손마디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다가, 위무선은 고개를 돌려 둥글게 깎인 탁상의 모서리를 보았다. 섭회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소에서 들었던 수업 기억 나?

-수업을 어디 한 두 개 들었어야 말이지. 아니다, 수업을 들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부터 좀 구체적으로 정의해 봐.

섭회상이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스무 해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위무선은 자기 입가에 서리는 쓴 미소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비슷한 미소를 띤 채로 섭회상이 말했다.

-남 선생님이 던진 책자를 네가 피하는 바람에, 네 뒤에 있던 내가 그걸 맞았던 날. 그날 속으로 뜨끔했어. 그때 난 네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거든. 나처럼 타고나길 약한 인간은 아무리 수련해도 영기를 다루기 어려운데, 원기라면 금단이 없는 인간도 쓸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긴 하잖아.

잠시 말을 멈췄던 섭회상은 위무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물론,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탐한다는 점에서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곤 생각했어.

문득 위무선은 온녕이 금자헌과 금씨 수사들만 죽인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무고하게 죽은 섭씨, 남씨 수사들의 피가 여전히 위무선의 손에 묻어있었다.

-교화와 진압, 소멸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는 네 말도 좋았어.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걸, 그때 네가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 선생님을 가장 화나게 했을...... 너 정말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

-아, 깜짝이야.

어디선가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던 위무선은 종주실 한 편에 걸린 금색 새장을 발견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새장 속에는 알록달록한 빛깔의 앵무새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정말 아주 오래 전의 운심부지처가 생각나 그는 섭회상에게 손짓했다.

-네가 다 말해 봐.

그러면서 의자 등받이에 느른하게 몸을 기대자, 섭회상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망나니의 원혼이 난동을 부리면 그 망나니에게 죽은 귀신들을 불러 해결하자고 했었잖아, 네가.

그제야 위무선은 섭회상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멋모르고 지껄였던 그 말에서 동기부여를 받으셨다?

-그렇다기보다는, 너를 이해했다는 거야.

위무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섭회상도 딱히 그의 대꾸를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결론은...... 어때? 정화와 진압, 소멸이라는 방법으로 해결이 될 것 같아? 그걸 묻고 싶었어.

위무선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진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도령이라는 게 음철보다는 약하니까, 어떻게 눌러보려면 누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아니면 너희 도무덤에 매장된 요마귀괴들에게 힘을 실어줘서 도령을 처치하고 토사구팽 전략을 쓰든가. 지금 당장 떠오르는 해법은 그건데, 이 정도는 너도 애저녁에 생각했겠지.

-그렇긴 한데, 그건 너무 위험한 방법이라 가능한 시도하고 싶지 않아.

네가 그런 걸 따지냐는 눈빛을 섭회상에게 보내자, 섭회상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아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래, 뭐. 네 말이 맞지.

그러면서 위무선은 자기 앞에 놓인 종이를 다시 한 번 유심히 바라보았다. 전설 속 선인이 짠 듯 정교하면서도 여러 번 기운 누더기옷처럼 너덜너덜한 진법이, 그리고 그 진법에 묶인 사나운 도령이라는 존재가 오랜만에 그의 학구열과 승부욕을 불러일으켰다.

*

한참 섭회상과 관련된 책을 뒤지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주실을 나섰을 때, 어느새 하늘은 컴컴해져 있었다. 위무선은 힘껏 기지개를 켰다. 쌀쌀한 늦가을 공기에 몸이 떨리는 게, 새삼 이 몸의 주인이 얼마나 약골이었는지 실감이 갔다. 모현우. 그 이름을 곱씹으며 위무선은 낯설지는 않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부정세의 복도를 걸었다. 아무도 모현우라는 인간을 추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야 뭐 영혼까지 소멸되었으니 추억이고 제사고 의미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소멸의 강제적 수혜자가 되어버린 입장에선 그렇게 넘기기가 썩 쉽지만은 않았다.

심란할 때는 남잠의 고금 연주를 듣는 게 최고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진정을 만지작거리던 위무선이 후원에 들어섰을 때였다.

후원의 적송 아래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그 인영 위로 가늘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나직한 기침소리를 들으며 가까이 다가간 위무선은 후원의 절반쯤 가로질러서야 그 누군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는 긴가민가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여자였다. 그리고 오늘 낮에 연무장에서 어린 문하생들을 가르치던 사람이기도 했다. 표정 없는 얼굴이 담배를 문 채 위무선을 응시했다. 근데 그래서 이 여자가 누구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딸려나오는 답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빨랐다.

-이릉노조를 뵙습니다.

갈라진 목소리로 인사하는 여자 때문에 위무선은 당황할 기회조차 놓쳤다. 그는 조금은 바보처럼 물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제가 이릉노조인 걸?

-얼굴보고 알지요.

멀뚱한 답이 돌아왔다. 위무선은 슬슬 흥미가 돋는 것을 느끼며 되물었다.

-제 얼굴을 아세요?

-사일지정 때 멀리서지만 본 적이 있으니까요.

사일지정이라. 그때 참전했던 사람이면 연식이 적지 않겠는데. 그가 그렇게 계산하는 사이 여자가 담뱃대를 다시 입에 물며 말했다.

-게다가 이릉노조가 왔다는 이야기가 부정세 곳곳에 알음알음 퍼져있는데, 처음 보는 잘생긴 얼굴이 검은 옷 입고 여기 있으면 당연히 답은 하나 아니겠습니까.

-잘생긴 얼굴이 왜요?

-이릉노조가 한창 때 공자방에서 이름 날렸다고 들었어서요.

내 얼굴 얼마나 잘생겼는지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위무선은 눈 앞의 여자에게 급속도로 호감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자기가 빼어난 공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주는 것도 호감도 상승의 중요한 요인이기는 했지만, 위무선은 원래 이 여자처럼 무뚝뚝한 얼굴에 무심한 말투를 가진 사람을 좋아했다. 그런 사람은 놀리는 재미가 있었고, 놀리지 않더라도 보고 있기에 재미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남망기였다. 그는 평소보다 더 붙임성있게 공수했다.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섭 부인. 저는 위무선입니다.

더 이상 운몽 강씨 위무선이라고 자기를 소개할 수는 없었고, 고소 남씨 일원이라고 할 수도 없어서 위무선은 깔끔하게 자기 정체만 밝혔다. 그런가 하면 눈 앞의 섭 부인은 두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누구인지......

-그야 이 야밤에 부정세의 후원에 서 있을 법한 선자는 제가 알기로 한 명 뿐이어서요.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는 모습이 도무지 부정세의 종부이자 섭회상의 도려 되는 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의 옷차림은 종부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소박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투박한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평가하려는 건 아니지만, 섭회상이 그렇게 미쳐있는 것을 보며 당연히 그 부인이 절세가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차라리 섭회상에게 더 어울렸다. 자기를 관찰하는 위무선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는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섭씨를 도와주러 오신 데에 감사 인사부터 드려야했는데, 깜박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는 슬슬 들어가려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위무선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대체 눈 앞의 여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섭회상을 그렇게 뒤흔들었으며, 고소 남씨를 도왔다는 말은 무엇인지, 금광요와 연이 있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싶었다.

물론 섭회상에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싫어. 싫다고 여자의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다. 그러나 섭씨를 도와주러 온 사람을 바로 거절하지는 못 하겠는지, 여자는 망설였다. 그 동안 위무선은 대충 섭회상과 여자의 상성이 어떠할지를 깨달았다. 사람은 원래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에게 끌린다더니, 거짓말 못 하는 사람이 섭회상의 취향이었나보지. 그가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여자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나무에 툭 기대어 섰다.

-물어보시지요.

무른 사람이군. 하기야 그러니 섭회상과 혼인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위무선은 여자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섭 종주와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여자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내쉬었다. 그녀가 검은 담뱃대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위무선은 흥미진진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정세에 일하러 와서 종주를 처음 뵈었습니다.

그 대답이 좀 이상하다 싶어서 위무선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섭 종주를 이름으로 안 부르세요?

-보통은요.

도려 맞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자기가 편하다는데 위무선이 뭐 어쩌겠는가. 그는 물었다.

-성함은 정말 밀이구요?

여자가 헛기침을 했다. 겸연쩍은 눈치였다.

-종주께서 그냥 그렇게 부르시는 겁니다. 그러고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잠시 망설이던 여자가 다시 공수했다.

-주헌이라고 합니다.

평범한 이름이었다. 눈 앞의 여자는 여러 면에서 평범했다. 옷차림만 아니라면 부정세 일반 수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고, 기억하기도 떠올리기도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 신기했다. 그는 솔직하게 물었다.

-섭 종주 어디가 좋아요?

-예?

잠시동안 얼빠진 얼굴로 위무선을 바라보던 여자가 반쯤 열려있던 입술을 다물었다. 위무선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여자는 머쓱해하지도 어색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위무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과 별빛 외에는 조명도 없었고, 여자의 얼굴에는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 분명 어두웠다. 그러나 고요한 두 눈동자는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다.

-사과는 하셨나요? 종주님이.

갑작스러운 질문을 위무선이 이해하는 데는 몇 초가 걸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했지요. 조금 늦게이긴 했지만.

여자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렇군요.

-제가 용서했냐고는 안 물으세요?

-글쎄요.

여자가 잔기침을 하더니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위무선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회색 연기를 바라보았다.

-제가 끼어들 일은 아니니까요.

무심한 목소리에 위무선이 묘한 감정을 느낄 새 없이, 여자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종주께서 위 공자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는 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맘 편히 즐거웠던 기억이 고소수학 때 공자와 놀던 때뿐이라는 듯이요.

여자가 고개를 들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위무선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았다.

-매일 저 붙들고 옛날 이야기를 하시는데, 죄 형님 이야기 아니면 위 공자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적봉존과 종주님은 맘 편할 수만은 없는 관계이니, 위 공자와 보낸 시간이 어떨 땐 더 그리우셨겠죠. 그리고 알게 모르게 한이 맺히신 듯했습니다. 위 공자에게인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에게인지는 몰라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데에요.

말을 마친 여자는 이미 할 말을 다 해놓고선 괜히 입 연 게 후회된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쓸데 없는 말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뇨.

능숙하게 담배통을 비우는 손을 보며, 위무선은 반쯤 멍하게 대답했다.

-이해합니다. 저도 생각해보면 섭 종주와 놀던 게 제일 철없고 생각없던 때였거든요.

스물 한 해 전. 아니, 위무선이 죽어있던 열 여섯 해를 빼면 오 년 전이었다. 그 시기 고소에서 보낸 나날은 말 그대로 특별했다. 음철이니 뭐니 머리 아플 일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무선은 그곳에서 가장 속 편히 놀았다. 특히 섭회상과 어울린 건 순전히 위무선이 그러고 싶어서 그리한 것이었다.

이리 혼란한 세상에서 그런 사소한 사실이 무슨 의미를 지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위무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섭 종주가 운심부지처에서 몰래 술마신 이야기도 했나요?

-네?

놀란 듯 눈을 깜박이는 여자를 보며 위무선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일문삼부지와 함광군, 삼독성수 그리고 이릉노조가 좁은 방 하나에 모였던 역사적인 밤에 대해 들으며, 여자는 기침을 계속 하면서도 웃었다. 안 그래 보이는데 몸이 병약한 건가 속으로 생각하며 위무선은 이야기를 마쳤다. 여자는 목을 가다듬더니 조금 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계편으로 그렇게 때려버리다니, 그 십대 애들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고소 남씨도 정말 너무하군요.

-그렇죠?

위무선은 맞장구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웃음을 차차 그치곤 질문해오는 여자 때문에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운몽에는 자주 가십니까?

-아......

그 탄성 외에는 달리 내뱉을 말이 없었다. 위무선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아뇨, 그래도 소식은 종종 전해 듣습니다.

강징과 위무선의 관계는 복잡했다. 아무리 관음묘에서 해묵은 감정을 다 풀었다곤 해도, 아니, 그래서 더 복잡했다. 평생 다시 만나지 않아도 상관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강박 같은 것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막상 얼굴을 보면 또 잘 지낼 것 같았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서로 갈 길을 가는 게 최선일 것 같기도 했다.

가슴 한 군데가 얼마나 허하든 말이다.

가족...... 피가 섞인 친형제는 아니라 해도, 강징은 워무선의 가족이었다. 그리고 가족만큼 어려운 게 이 세상에 없었다. 위무선은 자기가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하리라고 의심치 않았다. 여전히 그는 강징을 위해 죽을 수 있었고 강징도 마음만은 비슷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문제는 그들이 이미 한 번 그 마음을 실천에 옮겼다는 점이었다.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은 쉽다. 살아서 얼굴을 다시 보는 게 오히려 힘들었다. 생각하기를 포기한 위무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섭 부인께서는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저와 강징에 대해 뭐 들으신 게 있나요?

섭회상이 눈 앞의 여자에게 강징과 자기 금단에 대해 말한 걸까 생각하던 위무선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또 다시 할 말을 잃었다.

-가끔 운몽에 갈 때마다 생각했거든요. 삼독성수가 저희 종주님을 닮았다고.

-예? 아무리 그래도 섭 종주가 강징만큼 성격이 더러울 리는 없는데,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지금쯤 강징 귀가 무척 간지러울 거란 생각을 하며, 위무선은 반쯤 과장을 섞어 대답했다. 그러나 여자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이는 어투로 느리게 이야기했다.

-저희 종주님이나 그쪽이나 자기 형을 못 잊는 게 비슷해 보였습니다. 주제 넘은 말이라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부디...... 잘 풀리면 좋겠네요.

이번엔 위무선도 웃을 수 없었다. 여자에게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당혹스럽지도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분명한 호의가 신기하다면 차라리 신기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사일지정에 참전했다고 하셨죠.

-예. 맞습니다.

-그럼 혹시 십칠 년 전 불야천에도 계셨는지요?

-아뇨. 저는 사일지정 끝나고 사오 년 정도 고향에 내려가 있었어서, 모든 걸 소문으로만 전해들었습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척 보기에 자기와 동년배여서, 당연히 혈세불야천에 참전했을 거라 생각했다. 연치 좀 있는 수사들 중에 날 안 죽이려 했던 사람 찾기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니까, 당연히 눈 앞의 여자도 그때는 그랬을 줄 알았는데...... 졸지에 너도 나 죽이려고 했을 것 아니냐는 졸렬한 질문을 던진 인간이 되어, 위무선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려고 물은 건 정말 아니었는데. 그가 침묵하는 사이, 여자가 대화를 끝마치듯 말했다.

-이번 생엔 부디 평안하시면 좋겠군요.

그런 덕담을 들은 건 또 처음이었다. 위무선은 눈 앞의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충, 섭회상이 왜 다른 모든 좋은 수를 내팽개치고 저 여자를 붙잡은 건지 알 것 같았다. 피곤한 기색이 완연하지만 자기와 꼬박꼬박 대화를 나누어주는 그 태도가, 어쩐지 문자 그대로 어른 같다는 느낌을 주어서 기분이 묘했다. 그건 헌사된 뒤 만난 옛 인연들을 보며 느낀 감정이기도 했는데, 눈 앞의 여자는 생전 본 적 없는 사람임에도 뭔가 그 느낌이 강렬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어차피 상대방이 먼저 선을 넘은 바에, 위무선이 비슷하게 행동하다고 이제 와서 실례는 아닐 것이다.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듣기로 섭 부인께서 사일지정 때 고소 남씨에 큰 도움을 주셨다던데. 자세한 이야기를 여쭤도 될까요?

그가 그런 질문을 할 것을 예상한 모양인지, 여자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은 아닙니다. 제가 우연히 맡게 된 짐이 고소 남씨의 서책들이었을 뿐이고, 저는 미련하여 짐을 확인도 안 하고 집 한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거죠. 그리고 짐을 찾으러 온 사람에게 돌려주었을 뿐입니다.

위무선은 그 대답에 진 그림자를 곧장 알아챘다. 아주 잠시 동안 고민하던 그는 한 걸음을 더 내딛기로 했다.

-그 사람과 친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여자의 입술이 하나의 선을 그렸다. 그 선에 서린 감정이 무엇인지 위무선은 알 수는 없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머리로든, 가슴으로든. 위무선은 여자의 눈에 아주 약간이지만 물기가 서리는 것을 보았고, 그녀는 그것을 그에게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것까지 알고 계시다면 묻고 싶은 게 많으실테죠. 다는 대답 못 해드리겠지만, 물어보세요.

그럼 진짜 물어봐야지. 위무선은 무엇부터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섭 부인께서 섭 종주의 복수를 도우신 건가요?

-그런 셈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과 섭 종주의 관계에 대해 처음부터 다 알고 섭 종주를 만나셨고요?

-아니요.

여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가 담뱃대를 쥐지 않은 손을 자꾸만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보면서, 위무선은 머릿속으로 금광요와 눈 앞의 여자, 그리고 섭회상의 관계도를 그려보았다. 자기 생각이 맞다면 눈 앞의 여자가 보통 심정으로 여기 부정세에 있는 게 아닐 터였다.

-섭 종주가 원망스럽지는 않습니까?

금광요가 명백한 악인이고, 눈 앞의 여자가 그와 친분이 있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둘째 문제였다. 그 순간 위무선이 가장 궁금했던 건 금광요와 여자의 관계가 아니라, 여자와 섭회상의 관계였다. 분위기로 보아 저 여자는 금광요와 보통 사이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섭회상이 자기를 이용했듯 저 여자도 이용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녀가 어떻게 섭회상에게 정을 붙이고 그의 도려로 여기 남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자기가 궁금해할 영역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지만, 언제부터 이 위무선이 그런 예의를 차리는 인간이었다고. 항상 호기심이 먼저였다. 그리고 눈 앞의 여자는 그런 그를 노려보지도, 그에게 무례하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과거형. 위무선은 고개를 기울였다. 결국 먼젓번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섭 종주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요? 소름은 안 끼칩니까? 그 인간이 무슨 생각하는지 아무도 모를 텐데.

그렇게 묻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정말 궁금했다. 섭회상이 상사병을 거하게 앓았다는 건 수진계 모두가 알고 있다. 여자에게 따로 또 절절한 고백을 하긴 했겠지. 근데 그걸 어떻게 믿냐고? 여자는 위무선의 마음을 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디가 좋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어렵지만...... 저는 종주님을 믿습니다. 종주님이 제가 그러기를 원하시니까요. 만약 원치 않으신다면 믿지 않을 테지요. 그냥,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때 여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말을 하듯 태연하고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 앞에서 위무선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그에게 여자가 말했다.

-저도 몇 가지 더 여쭤봐도 될까요? 이릉노조께밖에 여쭤볼 수 없는 질문이라.

-예, 뭐......

-지옥이라는 게 정말 있습니까?

위무선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자기가 아마도 지금 살아있는 사람 중에선 유일하게 한 번 죽어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기억은 안 나는데, 지옥에 갔다기보다는 그냥...... 악몽을 꿨던 것 같습니다. 왜요? 지옥이 두려우셔서요?

-아뇨. 그 반대입니다.

여자의 입가에 메마른 미소가 걸렸다.

-죽으면 정말 끝이네요.

그 말이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위무선이 판단하기 전에, 여자는 내차 물었다.

-함광군과는 정말 도려 사이이시고요?

위무선은 이내 다른 건 다 머릿속에서 지우고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뭐가요?

-그냥요.

잠시 동안 짧은 침묵이 흘렀다. 여자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고, 위무선은 생각에 잠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참 신기해서, 혼자일 때는 아무도 나에게 검을 안 겨눠도 스스로 죽곤 하지만, 둘이 되면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해도 끝끝내 살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위무선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때마침 등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밀! 그리고...... 위무선. 야심한 시각에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거야?

뒤를 돌자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섭회상이 보였다. 너 사실 다 엿들었지. 위무선의 얼굴에서 하마터면 그런 질문이 튀어나올 정도로 그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거 진짜 소름끼쳐서 어떻게 매일 얼굴 맞대고 사냐고.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여자를 돌아본 위무선은 멈칫했다.

그녀는 말없이 섭회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다정하게 풀린 눈매는 오직 시선 끝에 있는 상대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 순간 위무선이 깨달은 건 섭회상을 바라보는 눈 앞의 여자가 정말로...... 정말로, 자기를 보는 남망기를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뭐, 잘됐어. 안 그래도 위무선 너를 찾고 있었거든. 생각해보니까 식사 대접도 안 했더라고.

자연스럽게 자기 부인 옆에 다가가 선 섭회상이 위무선에게 겸상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 위무선은 그가 여자의 손을 단단히 감싸쥐는 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누군가 자기에게 거울을 비춰보인 기분이었다. 나와 남잠이 남들 눈에는 저렇게 보이겠구나. 섭씨 내외 뒤를 따라걸으며 위무선은 뭐라 형용 못 할 감정에 내내 비틀거렸다. 그리고 벌써 찬이 올라와 있는 상 앞에 앉았을 때, 자기 옆으로 상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섭회상은 저기 상석에 앉아있고, 그 부인도 그의 오른편에 앉아있고. 그러면 자기 옆에 앉는 건 대체 누구......

-와, 뭐예요? 오늘은 왜 여기서 다 따로 먹어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위무선은 토끼눈이 된 웬 조그만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십대 중반 쯤 되었을까? 입은 옷을 보니 섭씨 문하생인 듯 싶었는데 생김새는 섭회상도 그 부인도 닮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애가 중얼거린 말은 전혀 다른 곳의, 아마도 동영의 언어였다.

-엄청나게 잘생긴 얼굴, 이라고 하네요.

고개를 돌리자 무심한 얼굴로 자기를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다. 그 얼굴에 희미하게 서린 장난기에 놀라기도 전에, 옆에서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마찬가지로 동영어였다.

-이번엔 부끄럽게 그걸 왜 말하냐고......

-아 진짜!

드디어 대륙말로 빽 소리를 지른 여자애가 위무선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끄러워서인지 뭔지 새빨개진 얼굴로 맹렬히 상 위의 음식만 바라보는 여자애를 위무선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웃음기 섞인 여자의 기침소리와 함께, 마찬가지 웃음기 띈 섭회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 형은 내가 직접 청한 손님이란다, 아키라. 먼저 자기소개부터 드리렴.

아키라? 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위무선은 자기에게 꾸벅 공수하는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청하 섭씨 임정입니다.

이국적인 말씨야 둘째 치고, 아까 이름 아키라라며? 위무선의 생각을 읽은 듯 섭회상이 말했다.

-정이의 이름이 동영어로 음차하면 아키라가 된다더라고. 성은...... 없다고 하여, 직접 지어보라 했더니 수풀 림 자를 고르지 뭐야.

-그래?

뭔지 모르겠지만 위무선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자애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왜 하필 수풀 림 자였어?

-그, 그건......

여자애가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위무선의 시선을 피했다. 대답은 여자애가 아니라 맞은 편의 여자에게서 돌아왔다.

-종주님의 이름에 나무가 들어가고, 제 이름에 산이 들어간다고......

-그런 거 말하지 말라고요! 스승님 진짜!

-스승님?

위무선의 중얼거림에, 이번엔 여자애가 그 누구에게도 선수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대답했다.

-네, 저는 종부님의 제자예요. 동영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종부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하는 여자애 때문에 의아했던 위무선은, 티내지 않지만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구기는 여자를 보며 대충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눈치챘다. 이거 강징이랑 나랑 맨날 하던 건데.

-아무튼, 아키라. 위 형은 앞으로 얼마간 부정세에 머무실 것이니 마주칠 때면 인사 드리거라. 뭔가 가르쳐주시면 열심히 배우고.

그렇게 중재하는 섭회상은 강징과 위무선 사이를 중재하던 강염리를...... 위무선은 자기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미친 생각을 했군. 사저를 저 인간에 비유할 수는 없지.

그 뒤로 식사가 시작되긴 했지만 식사 내내 아키라인지 정이인지 하는 여자애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것 저것 종알거렸고, 섭회상과 여자는 그녀를 조용히 시키는 대신 일일히 다 대꾸해주어 식사 시간이 도무지 조용할 틈이 없었다.

자기가 고소 운심부지처의 식불언에 익숙해졌다는 깨달음과 함께 위무선은 익숙함을, 그리고 그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래 전 운몽에서의 기억이 마치 눈 앞에 상연되는 것만 같았다.

아니 잠깐만.

아닌 게 아니라, 이제 와 보니 상 위에 차려진 것도 운몽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나 때문에 운몽 음식 올린 거야?

그렇게 묻자, 느리게 젓가락질하던 섭회상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밀이 운몽 음식을 좋아해서가 제일 크지만, 뭐 위 형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종주.

여자가 한숨 쉬듯 섭회상을 불렀고, 섭회상은 사실을 말한 것뿐이라며 배시시 웃었다. 위무선 옆에 앉은 아키라는 자기도 운몽 음식이 입에 맞다며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근데 공자님 운몽 분이세요? 운몽은 어떤 곳이에요? 이름이 너무 예뻐서 항상 궁금했는데, 스승님은 모기 많다는 이야기밖에 안 해줬어요.

-아키라.

-사실이잖아요! 전 거짓말 안 했어요.

스승님이라면서, 감히 맹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여자에게 대꾸한 아키라가 위무선을 바라보았다. 티없이 밝은 그 눈동자를 마주볼 때, 위무선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가족이고, 행복했다.

그럴 수 있었다.

*

강징이 그 성씨 낭자와 선을 보기로 했다는 소식까지 전해듣고 그 뒤로는 위무선도 그 정신 없는 식사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러고 나서 방으로 돌아오니 온녕과 함께 떠난 사추가 그리워지는가 하면, 강징과 금릉의 얼굴이 어른거리기도 해서 그날 밤 위무선은 잠자리에서 작게 뒤척였다. 고소로 돌아갈 때, 온녕과 사추를 한 번은 보아야겠어. 그리고 운몽을 거쳐서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든 다음 날 아침, 위무선은 고소에서의 습관 탓인지 아니면 남잠과의 매일매일이 없었던 탓인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생각해보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고소 남씨 가규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위무선이 운몽에서 막 살던 게 특이한 경우였지, 지금처럼 묘시에 다들 연무장에서 몸 풀고 있는 게 사실은 정상이었다.

-신기하네.

연무장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기대어선 위무선은 어제처럼 어린 문하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종부가 문하생들을 훈련시키거나 수사들과 야렵을 다니는 건 흔한 일이었다. 위무선을 단련시킨 것도 사 할은 우부인의 호통과 채찍질이었다. 다만 어제 보았던 여자는 몸이 안 좋아보였기에, 그녀가 저기서 수사들을 돌보는 게 당연한 일로 와닿지는 않았다.

-일찍 일어났네, 위무선.

뒤를 돌자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띄운 섭회상이 보였다. 위무선은 네 부인이 아니라 네가 저기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너야말로 매일 이 시간에 일어나?

고소수학 시절 섭회상이 아침마다 눈을 못 뜨고 힘들어하던 것을 위무선은 기억하고 있었다.

-노력은 하지. 그리고 네가 있는 동안에는 꼭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려고 해.

-뭐?

-너를 오래 붙잡아 둬선 안 되고, 그러고 싶지도 않으니 네가 있는 동안만큼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대답하는 섭회상의 시선은 위무선의 뒤쪽에 향해있었다. 그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잔잔한 눈빛에 소름이 끼쳤다. 섭회상의 저런 눈빛을 자기가 보게 될 거라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상상할 이유조차 없었으니 뭐, 어쩌겠는가. 위무선은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섭 부인도 부지런하시네. 아침부터 저렇게 문하생들 수련을 봐주시고. 그런데 괜찮은 거야? 기침을 굉장히 자주 하시던데.

섭회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채를 펴서 얼굴 밑부분을 가렸다.

-아밀이 몸을 챙겨야 하는 건 맞지만, 가만히 있으면 너무 좀쑤셔 해서. 야렵이나 대련은 말고 동작을 가르치는 것까지만 하기로 합의를 봤어.

-병은 지병이야?

섭회상은 부채를 팔랑거리더니 대답 대신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위무선, 넌 혹시 죽을 때 기억 나?

-뭐?

-불야천 절벽 밑에서 네 시체는 찾을 수가 없었대. 단순히 그 땅의 독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던데, 시체가 녹을 정도로 사람이 괴로울 수 있을까?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위무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괴로운 기억이었다. 아마 절벽에서 몸을 던지지 않았더라도 그때 그의 몸은 생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 날만, 정확히는 자기 대신 죽어가던 사저만 생각해도 심장이 심히 지끈거렸다.

자기 부인 건강에 대해 물었는데 이런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건, 뭔가 그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어서겠지. 실제로 섭회상의 눈매에 자조 섞인 건조한 웃음기가 서려 있어서, 위무선은 조금 더 가벼운 주제로 대화의 물길을 틀어버렸다.

-그건 그렇고, 어제 묻는다는 걸 깜박했는데 말이야. 아키라? 그 아이랑 너랑은 무슨 관계야?

섭회상의 시선이 위무선에게로 옮겨왔다.

-아키라가 말한 그대로인데? 아밀이 동영에서 아키라를 거두었고, 여기로 데려온 거야.

-동영.

그러고보니 섭 부인이 동영 사람이라는 소문도 있었댔지. 동영이라고 하면 위무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은 단 한 명이었다. 여자가 금광요의 동영행을 돕기 위해 준비되어 있던 인물들 중 하나였을까? 동영어를 능숙하게 할 정도로 그쪽 지방에 대해 잘 안다면, 혹시......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어. 하지만 아밀이 동영에 간 건 형님 사후였으니, 그건 생각하지 않아도 좋아.

-그럼 난백초의 기워맞춰진 부분은?

위무선의 질문에, 섭회상은 천천히 부채를 접었다. 그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위무선도 아마 그와 비슷한 표정일 터였다.

분명 공정술로 직접 난백초를 들었는데, 기억으로 들었던 그 부분에 미묘하게 다른 곡이 있는 것을 보고 운심부지처에서 위무선은 남망기와 머리를 맞댔었다. 만약 남희신이 위무선의 말을 믿고 그가 한 연주로 실험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소섭이 난백초의 진짜 악보를 가지고 있다는 위무선의 말에 동요하지 않았다면 일은 지금과는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금광요가 어떻게 고서를 감쪽같이 복원해놓은 것인지 위무선은 아직도 몰랐다.

금광요가 그럴 수 있었던 게 저기 저 여자 때문이었으려나. 위무선은 심경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는 금광요가 난백초에 수작질 해놓았을 거라 짐작했을 것 같은데, 왜 달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어?

-나는 악보 같은 한낱 물건보다는 사람을 믿는 편이라.

고개를 돌리자 섭회상이 물끄러미 위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기지를 생각해낼 것도, 택무군이 네 말을 믿을 것도, 그리고 소민선이 당황할 것도 모두 계산에 있었어.

그 순간 위무선은 말 그대로 할 말이 없었다. 가슴에 얹히는 이름 모를 덩어리를 느끼며 고개를 돌린 그는 저 아래 점처럼 보이는 청하 섭씨 수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재미있네. 그리고 그럴듯해. 너야말로 사람을 그 누구보다도 신봉한다는 게.

대꾸 없는 섭회상에게, 위무선은 물었다.

-믿는 거야? 네 도려도.

어젯밤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지만, 섭회상만 여자를 이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자 또한 섭회상을 속였을 것이고, 이미 한 번 누군가를 배신한 사람을 믿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그 배신이 자기가 의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때, 섭회상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선명히 들려왔다.

-믿음이라는 게 네가 말하는 그런 거라면, 아니. 아밀을 믿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함께 있을 때면 아무것도 계산하거나 예상하지 않고 매 순간 생각 없이 주사위를 던지려고 해. 잘 안 되기는 하지만...... 적어도 아밀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내가 나를 배신하려고 노력은 늘 하고 있어.

자기도 모르게 경악하며 뒤를 돌아본 위무선이 마주한 건 다시금 미소를 짓고 있는 섭회상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가 실패해도 아밀은 괜찮다고 할 걸 아니까, 별로 부담은 갖지 않으려고 해. 왜? 어떤 답을 기대했어?

질렸다고 말해야 할까. 위무선은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기가 막힌 채 섭회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정도야?

그 마음이. 질문의 생략된 부분도 잘 알아들은 건지 섭회상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리고 위무선은 생각했다. 섭회상처럼 똑똑한 인간이, 웬만한 자신감 아니고선 자기 도려 소중한 티를 이 정도 낼 수는 없다고. 지금 이 일상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거겠지. 그 근원이야 알 수 없지만.

새장 문을 열어두고 새를 기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정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인 걸까, 오히려 더 지독한 주인인 걸까, 아니면 그 둘 다 아닐까. 그 질문을 위무선은 섭회상을 보며 던졌지만, 답까지 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앓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을 비웠다. 행복하다잖은가. 그럼 그렇게 계속 살겠지. 그들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위무선 자신도, 세상이 뭐라 손가락질하든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니까.

그 행복이 한 사람에게 묶여있다는 점에서 자기와 섭회상이 아주 조금이지만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날려버리며, 위무선은 섭회상의 자신감에 기대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얼른 해결해보기로 했다. 온녕과 사추도 찾았다가, 운몽도 들렀다가 고소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금이었다. 이렇게 흐르는 일 초 일 초가 아까웠다.

-누가 보면 너만 도려 있는 줄 알겠다.

나도 운심부지처에 흰토끼 같은 도려가 기다린다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위무선에게 섭회상은 웃어보이며 뒤를 돌았다. 그 뒤를 따라걸으며, 위무선은 오직 자기만을 위해 지어진 익숙한 곡을 휘파람으로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