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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0 23:40
진정령 ㅅ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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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해. 신기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아키라는 덜컹거리는 마차 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이곳은 아키라가 살던 곳과는 하늘부터 땅까지 전부 다 달랐다. 사람들 말하는 것도 정말 신기했고, 옷도 신기했고, 집도, 거리도, 모두 꼭 별세계 같았다. 생각해보면 아키라가 이렇게 말이 끄는 수레에 타 있는 것도 원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키라는 조심스럽게 마차 내부로 시선을 향했다. 그녀가 창 밖으로 고개를 빼고 있던 건 이 곳의 풍경이 신기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색해! 어색해서 죽을 것 같다. 그녀는 자기와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부채를 팔랑거리는 남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쁜 사람. 그리고 스승님이 좋아하는 사람이니, 아마도 좋은 사람. 알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데다 초면인 상대방을 아키라는 도무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승님이 깨어 있어서 통역을 해줄 때는 그래도 좀 좋았는데, 지금은 어색하다 못해 숨을 쉬기 힘들었다.

아키라는 속으로 우는 소리를 냈다. 차라리 나도 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여관에 머무는 내내 푹 자서인지, 지금은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눈을 감고 있기도 이상했고,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해! 앞으로 평생 볼 사람인데! 저 사람이랑 결혼하냐는 아키라의 말에 스승님이 부정하지 않았으니, 이제 아키라는 스승님과 저 사람이 내쫓지 않는 이상 그들과 함께 살게 될 것이었다.

힘들겠지. 지금처럼 말도 통하지 않고, 앞으로는 스승님이 정말 검을 가르쳐준다고 그랬고. 그리고, 이제 스승님에게는 저 남자가 있고. 사실 아키라는 스승님과 평생 둘이서 살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있었고, 나중에 자기가 시집을 가서 스승님을 봉양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다 가진 남자가 나타났으니, 이제 정말 아키라는 스승님에게 있어 혹덩이인지도 몰랐다.

항구에서도, 정말 놀랐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그런 얼굴 표정을 아키라가 또 보게 되는 날이 있을까? 아키라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스승님의 표정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스승님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는 마치 죽었다가 살아나기라도 한 얼굴이었다.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보이지 않았다. 아키라가 다 보고 있었는데, 스승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흘렸다. 다 큰 남자가, 한낮의 사람 많은 거리에서.

그 다음날부터 오늘까지, 아키라는 남자와 스승님 사이에 흐르는 감정적 기류가 보통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눈에 늘 생기가 없던 스승님이 남자를 세상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아키라 입장에선 배신감 느낄 정도로 충격적이었지만, 남자가 스승님을 보는 눈빛도 만만치 않았다. 그 사이에 끼어있고 싶지 않은데, 아키라는 이 땅에서 스승님이 없으면 정말 말 그대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일 뿐이라 어쩔 수 없이 스승님 옆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좀 많이 미안하긴 하다. 둘만 있고 싶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키라는,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깜짝 놀랐다.

-네, 네?

말이 다르긴 해도 우선 대답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묻자, 남자가 말을 반복했다. 그제야 아키라는 남자가 자기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음이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건 분명 아키라의 이름이었다. 어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 맞다. 스승님은 자꾸 정인지 뭔지 하는 한자어 발음으로 아키라를 불렀는데, 저 남자는 아키라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가. 어색한 미소로 답하자,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빤히 아키라를 바라보더니 자기 옷소매를 뒤적였다.

새삼 부티나는 검은 옷자락을 아키라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옷소매에서 종이와 붓이 나오는 것을 보곤 두 눈을 땡그랗게 떴다.

똑똑한 사람! 아키라는 종이 위에 적히는 정갈한 필체를 바라보기 위해 조금 더 남자 쪽으로 꾸물꾸물 이동했다. 잠든 스승님에게 몸을 꾹 붙일 정도로 다가갔더니, 남자는 아예 자기 옆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그래서 아키라는 조심스럽게 자리를 건너가 앉았다.

좋은 냄새. 남자에게서 나는 시원한 향기를 맡으며 아키라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종이에 적힌 글자는 다행히도 아키라가 아는 자들이었다.

몇 살이니?

아키라는 남자가 건네주는 붓을 받아들어 그 밑에 조심조심 적었다.

열 다섯이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었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이해가 가지 않아 인상을 썼던 아키라는 곧 남자가 대륙말로 열 다섯, 을 발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냥한 사람! 그런 생각을 하며 아키라는 조심스럽게 그 발음을 따라했다. 그리고 헤헤 웃었다. 스승님이 남자 보는 눈은 있구나. 다행이다. 남자가 아키라를 따라 무드럽게 웃더니 다시 글씨를 썼다.

밀을 만난 건 언제니?

문장은 알아보겠는데, 밀이 누구를 또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몰라 아키라는 머뭇거렸다. 그 글자를 가리키자, 남자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피식 웃더니 스승님을 가리키며 짧게 발음했다.

-밀.

밀? 그게 스승님 이름이라고? 그러고보니 남자가 스승님을 계속 그렇게 부르는 것 같긴 했는데, 스승님의 다른 이름인가? 설마 스승님이 자기에게 가짜 이름을 가르쳐준 건가 싶어 얼굴이 흐려지려는데, 남자가 밀이라는 글자 밑에 다른 글자를 하나 더 썼다. 그건 아키라가 아는 글자였다. 헌. 스승님의 이름. 남자가 아는 걸 보니 아예 가짜 이름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키라는 기쁜 마음으로 붓을 받아들어 그 밑에 적었다.

세 달 전에 만났어요.

남자가 생각에 잠긴 듯 작게 콧소리를 냈다. 그런 남자의 눈치를 보며 아키라는 서툰 글자를 더 적어내렸다.

스승님이 저를 구해줬어요.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다시 돌아오더니, 아키라의 손에서 붓을 받아갔다.

나도 헌이 구해줬단다.

-진짜요?

자기도 모르게 말한 아키라는 서둘러 붓을 받아들어 종이에 진짜, 를 글자로 적었다. 그러자 남자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못 들었니?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어쩐지 씁쓸한 얼굴이 되어 웃었다. 그래서 아키라는 그에게서 붓을 가져왔다.

스승님이 매일 보는 그림이 있었어요.

볼 때마다 울었다는 이야기는 안 했지만, 이미 짐작하는 눈치였다. 아키라가 적은 글자를 가만히 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스승님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아키라가 아는 단어들로 표현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머뭇거리던 아키라는 스승님이 자고 있는 이 때를 빌어, 남자에게 궁금했던 것을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왜 헤어졌어요?

남자는 아키라가 적은 문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키라도 알았다. 아키라가 알 만한 글자로 사정을 다 설명해주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붓을 들더니 적어내렸다. 그리고 아키라는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나기 위해서겠지.

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땀만 삐질삐질 흘리던 아키라는 남자가 뒤이어 적은 문장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괜찮니? 살던 땅을 떠나왔잖아.

어차피 거기 가족 없어요.

남자는 쓸쓸한 미소를 짓더니 잠시동안 부채를 팔락였다. 그러고보니 부채도 참 신기한 것들 중 하나였다. 부채를 좋아하나? 왜?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자의 부채를 빤히 바라보던 아키라는 자기에게 건네진 부채를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제가 만져도 돼요?

말뜻은 통하지 않아도 아키라의 생각은 읽혔는지, 남자가 작게 웃었다. 아키라는 어색하게 부채를 받아들었다.

-와아......

예쁘기는 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나뭇대도 그렇고, 옷 지어입어도 멀쩡할 듯 탄탄하고 윤기나는 종이 부분도 그렇고. 아키라가 부채를 구경하는 동안 남자는 붓을 들어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내렸다.

우리가 가는 곳이란다. 너의 집이 될 곳.

문장 맨 앞에 적힌 세 글자 중에서, 가운데 한 글자를 제외한 두 글자를 아키라는 읽을 수 있었다. 부...... 세. 아니다...... 세상. 가운데 적힌 건 어떤 글자인지 읽기가 어려웠다. 배웠던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안 났다. 아키라가 그 글자를 가리키며 머뭇거리자, 남자는 고민이 되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새 종이를 꺼내들어 아키라에게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정.

정. 내 이름? 아키라는 두 눈을 깜박였다. 스승님이 적어주었던 정 자는 분명 종이에 적힌 것과 달랐다. 밝고 맑다는 뜻이라고 스승님이 말했던 것을 기억하며 아키라는 눈 앞의 새하얀 종이를 바라보았다. 뜻이 같은 다른 자인 건가? 그런 것들이 몇 개 있다는 것 정도는 아키라도 알았다.

잠깐만. 그러면 종이에 적힌 목적지의 이름은 부정세였다. 뜻은...... 맑지 않은 곳? 밝지 않은 곳? 어두운 곳?

그래서 옷 색깔이 검은색? 선생님도 그래서 그렇게 지저분한 거였나? 이런 저런 깨달음을 얻어 멍해져 있는 아키라가 우스웠는지, 남자는 또 웃었다.

잘 웃는 사람이기도 하구나. 아키라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자가 그녀의 손에서 부채를 가져가 느리게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힐끔거리다가, 아키라는 뒤늦게 집이라는 글자를 알아보곤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입술을 오므렸다. 그리고 부정세의 가운데 글자가 자기 이름과 똑같은 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랬으면 입구에서부터 여긴 너는 들어올 수 없는 별세계라고 쫓겨났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키라는 남자의 손에서 붓을 받아왔다. 종주......라는 단어를 아키라는 적을 줄 몰랐다. 부디 자기가 버릇없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아키라는 조심조심 적었다.

이름이 뭐예요?

스승님은 종주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만 알려주고, 정작 남자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남자는 아키라에게 빙그레 웃어보이더니 자기 이름인 게 분명한 세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키라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맨 앞 글자에 귀가 세 개 있는 것과 맨 마지막 글자에 나무가 있는 것만 알아볼 수 있었다. 심란한 그녀의 속을 읽었는지, 남자가 부채를 접더니 그 끝으로 글자를 한 자씩 가리켰다.

-섭회상.

그러더니 그는 제일 앞 글자를 가리키며 마치 귓속말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두 번째 글자를 가리키며 자기 가슴께와 관자놀이 부근을 부채로 톡톡 치는 모습에, 아키라는 남자가 그의 이름 뜻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자는, 남자는 몸짓을 이어나가는 대신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몇 번 붓질 하지 않았는데 완성된 그럴 듯한 나무를 보며, 아키라는 자기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런 그에게 웃어보이며 남자는 나무 옆에 작게 애벌레를 그려넣었다.

어? 애벌레? 잠시 멍해져 있던 아키라는 그 옆에 그려진 옷을 보고서야 남자의 이름 마지막 자가 뽕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밌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그녀에게 미소지어 주었다.

그가 만약 조금만 더 나이든 얼굴을 하고 있었어도, 아키라는 어쩌면 그에게서 전혀 아버지답지 않았던 자기 아버지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키라의 옆에 앉은 남자는 아버지보다는 오빠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예쁜 얼굴이었고, 아키라는 그 뒤로 남자가 그리는 그림들을 보며 그저 신나서 박수를 쳤다. 남자는 귀여운 강아지를 그렸고, 고양이를 그렸고, 저기 잠자고 있는 스승님을 그리더니 아키라의 얼굴도 그려주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 종이를 가져와 품에 안자, 남자는 자기도 기쁘다는 듯 아키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행이야. 아키라는 생각했다. 스승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한적한 오솔길을 벗어나 어딘지 모를 성문에까지 이르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아키라는 슬쩍 창문가로 다가가 고개를 뺐다. 높은 성문의 지붕 아래 적힌 글자를, 아키라는 대륙말로 읽을 수 있었다.

-청하!

잠든 스승님을 생각해 작게 속삭이자, 남자는 기특하다는 듯이 웃었다.

청하의 길거리는 얼마 전 들른 담주라는 곳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조금 투박하다면 투박한 느낌이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 손에 하나씩 뭔가가 들려 있었다.

종이로 만든 무언가 같았는데,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아키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기를 내어, 그녀는 남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남자는 아키라를 따라 창문 밖을 내다보더니, 아키라가 손으로 가리킨 무언가를 보곤 나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곧 그가 새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내렸다. 아키라는 용케 그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중원절.

아키라가 발음하자, 남자는 기특하다는 듯 미소지었다. 아무리 퉁명스런 사람이라도 저 미소 앞에선 공손해질 것 같았다. 아키라가 새삼스레 자기 스승님의 안목을 인정하는 동안, 남자는 중원절이라는 그 글자 밑에 또 무언가를 적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날.

-네?

깜짝 놀란 아키라에게 남자는 담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종이를 그리더니 그 안에 불 모양을 그렸다. 아키라는 두 눈을 깜박였다.

밤이 되면 저것을 물 위에 띄워서, 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거란다. 인사하는 거지.

아키라가 해석한 게 맞다면, 저번에 스승님이 처치한 그 괴물 같은 게 나타나는 날은 아닌 듯싶었다.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키라에게, 남자가 물었다.

오늘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니?

아키라가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내내 잠들어있던 스승님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깜짝 놀라 앞자리의 그녀를 바라보자, 여전히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지만 어딘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 땀을 보고, 아키라는 스승님이 악몽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세 달 간 매일 밤 같은 방에서 잠들었고 스승님이 아파서 쓰러진 것도 자주 봤지만, 스승님이 악몽을 꾸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래서 지금 스승님이 저렇게 새파란 얼굴로 앓는 모습을 보기란 아키라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깨워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뻗으려던 아키라가 멈칫한 것은 자기 옆에 앉아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그가 진작 스승님을 깨웠어야 했다. 남편이 돼서 왜 안 깨워? 그런 생각을 하며 아키라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피곤한 얼굴로 스승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서린 미소는 힘이 없었다. 그가 시선을 돌려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아키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깊은 슬픔은 스승님에게서 늘 느껴지던 것과 분명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남자가 붓을 들어 종이에 적었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이기지 못 한다는 말을 아니?

아키라는 이기다, 라는 글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머리 위에 느껴지는 손길에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남자가 아키라의 머리를 토닥이며 고요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가 적은 말에 대해 아키라의 생각을 묻는 듯했다. 아키라는 머뭇머뭇 그에게 붓을 받아들어 밑에 적었다.

이상해요. 죽은 게 진 거잖아요.

싸울 것도 없이 죽은 시점에서 이미 진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키라의 머리 위에 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적었다.

똑똑하구나.

정말?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은 여전히 남자의 입가에 걸려있는 지독히도 씁쓸한 미소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아키라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문장의 의미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사실 아키라는 스승님이 사랑했던 사람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스승님은 매일 종이 돈을 태웠으니까.

그럼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남자가 종이에 몇 자를 더 적더니 그것을 아키라에게 건넸다. 그리곤 손을 뻗어 스승님을 깨웠다. 아키라는 엉겁결에 그 종이를 자기 품에 넣었다. 어깨를 흔드는 손에 눈을 뜬 스승님이 나지막히 헐떡이는 동안 남자는 아키라를 돌아보았다. 약간의 미소를 띄운 것 외에 아무 말도, 특별한 표정도 없었지만 아키라는 어쩐지 조금 숨이 막혔다.

무섭다와 불쌍하다는 감정이 동시에 들 수 있는 것일까? 아키라는 잠에서 깨어난 스승님이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과 조금 거리를 둔 채 창가에 붙어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일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동영이라는 단어는 아키라가 살던 섬을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스승님은 자꾸만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누군가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금광요. 그게 누굴까. 궁금했지만, 아키라는 그 궁금증을 곧장 해소하는 게 현명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부정세라는 곳은 정말 거대하고 웅장한 곳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아키라는 까마득한 성벽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성벽 양 옆에 새겨진 도깨비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아키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키라는 자기도 모르게 스승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성벽을 올려다보고 서 있던 스승님은 정신이 들었다는 듯 아키라를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무섭지.

이젠 스승님에게서밖에 듣지 못하는 자기 나라 말을 들으며, 아키라는 입술을 삐죽였다. 가슴 속에 은은히 느껴지는 게 안도감인지 불안감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아니거든요.

-오늘 귀신 나오는 날인 건 아냐?

-거짓말 하지 말아요! 종주님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종주님이?

아키라는 자기도 모르게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당당하게 말했다.

-네. 종주님이 말해주셨어요. 오늘은 종이등 태우는 날이잖아요!

-뭘 태워?

스승님은 웃어야 할지 한숨을 쉬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아깝게 그걸 왜 태우냐.

아키라는 자기 말실수를 깨닫고 입술을 오므렸다.

-어쨌든, 오늘은 엄청 좋은 날이랬어요.

-종주님이 그러셨다고?

아키라가 그렇다고 대답하기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키라가 보기에 그는 스승님과 아키라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렇겠지, 종주라는 발음은 정직했으니까. 스승님이 망설이는 얼굴로 남자에게 무언가 이야기하는 동안, 아키라는 스승님의 옷소매를 쥐었다.

-우리도 저녁에 종이등 띄워요, 네?

스승님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그 두 눈에 서린 그림자가 아키라는 익숙했다. 바다를 건너왔는데도 그 그림자가 여즉 따라붙어있는 게 아키라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 어린 애처럼 뻗댔다. 스승님은 그런 아키라를 피곤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남자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뭐라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쥐어오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아키라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그래라.

그러더니 그녀는 남자의 말을 번역해주었다.

-이따가 시간이 되면 종이등 만드는 법을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하시네.

그렇게 말할 때 스승님의 얼굴에선 그림자가 조금이지만 옅어졌다. 아키라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은 다시 성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그 사이 아키라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눈매를 가늘게 휘었다. 그게 꼭 우린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뒤로는 다들 바빠보였다. 아키라는 처음 이 땅에 왔을 때와 비슷하게 방을 안내받곤 거기 혼자 남겨졌다. 방 안을 구경하는 것도 어느 정도지, 시간이 좀 흐르자 간간이 들려오는 바깥 소음과 나른한 오후 햇빛 외에 아키라 곁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단정하기 그지없는 흑색과 백색의 가구들은 조금도 경쾌한 기색 없이 마치 아키라를 빤히 바라보는 것 같았다. 조금은 무서웠고, 심심했다. 하품을 하며 침대에 몸을 던졌던 아키라는 가슴께에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것을 느끼며 옷깃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러자 마차에서 챙기고 깜박했던 종이가 손에 잡혔다. 아키라는 종이를 꺼내 펼쳤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이기지 못 한다는 말을 아니?

이상해요. 죽은 게 진 거잖아요.

똑똑하구나.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거든. 기억의 양은 정해져 있고, 이미 차 있는 공간을 비울 수는 없지만, 살아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 빈 공간을 채우고 덮을 수 았어. 일 년에 며칠쯤 죽은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건 그래서란다. 잊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 같은 날에만 그 사람을 떠올리렴. 그리고 나머지 날에는 자유롭거라.

아키라는 종이에 적힌 단정한 글씨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또 곱씹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키라는 자기 아버지를 떠올렸다. 자기를 두고 도망친 어머니를 떠올렸고, 고향에 두고 온 나쁜 놈을, 그리고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 한 친구들을 떠올렸다. 다 죽은 사람인 건 아니었지만, 아키라가 죽는 날까지 그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다 비슷했다.

사실 아키라가 깊은 고민을 해서 여기에 이른 건 아니었다. 아키라에게 가장 급한 건 스승님을 살리는 일이었다. 대륙에는 약도 많고 책도 많댔으니, 여기 오면 스승님이 더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승님과 자기를 따라오는 나쁜 사람들도 여기엔 없을 것이었다. 스승님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 여기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긴 했고, 그 사람 때문에 계속 살아가기로 결정한 스승님에게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키라는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했다.

스승님이 자기를 버릴 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사실 처음 한 달 이후로는 한 적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정말 할 필요 없었다. 이제는 이 곳의 주인인 남자가 스승님과 자기를 지켜줄 것이었으니까. 아키라는 살벌하던 부정세 성벽과 그 성벽에 내걸린 도깨비 얼굴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아니지. 든든해 해야 맞는 거지. 그렇지? 그렇게 자기를 다잡으며 아키라는 방 한 편으로 크게 난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곤 아직 밝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생은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처음 본 사람과 진짜 가족보다도 더 가족같은 사이가 되어 새로운 땅에 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하던 옷을 입었다. 언젠간 여기서 소중한 사람을 더 많이 만들 것이다. 그러니 살던 땅을 떠나왔다고 후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열심히 해야지! 뭐든 열심히 해서 자기 한 몸 거뜬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스승님도, 스승님 남편도 자기가 다 지켜주리라. 사실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보답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키라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서 되뇌어보았다.

-중원절.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는 날. 새로운 삶의 첫 시작으로 삼기에 나쁘지 않은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