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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0 17:26
근데 씨발. 그런 일이 저한테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들리십니까? 들리시나요 현대의 인간들이여? 이건 뭐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아니 이미 한번 죽은 몸이기는 합니다만…….
도마 위에 올려진 맛 간 생선 눈으로 거울만을 바라보던 허니비는 착잡한 심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음. 많고 많은 인물 중에 어째 하필 왕영교에게 빙의했는지 모르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가 죽었으므로 자신이 빙의할 수 있었음.
그래, 왕영교는 도대체 어쩌다 죽은 걸까?
그러자 머릿속으로 지난날의 기억들이 거친 파도처럼 우악스럽게 들이닥쳤음.
맙소사, 왕영교, 이 불쌍한 여자야.
범인은 온조. 수행자도 아닌 일반인인 왕영교와 색사를 나누다 힘을 조절 못해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였고, 이후 그녀는 온갖 후유증으로 며칠 넘게 골골 앓다 이 쓸쓸한 방에서 홀로 병사한 것이었음.
온조는 색사를 마친 바로 다음날 야렵을 가장한 유람을 나가셨다지 뭐야. 아주 천하제일 호로새끼 납셨어요.
허니비는 수일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온조의 손자국이 진하게 남은 손목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음.
사실 왕영교는 알릴 수도 있었음. 하지만 온조에게 성가신 여자로 보이기 싫다는 이유로 꾹꾹 눌러왔던 것임.
내상이 상당했을 텐데 의미없는 보약만 몇 그릇씩 비워가며,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니 보약은 오히려 속을 상하게 만들어 버렸고, 그러다 결국…….
그새 두 눈이 촉촉해진 허니비는 제법 의연한 얼굴로 다짐했음.
교교. 당신의 이 소중한 목숨, 내가 이어받은 이상 무슨 짓을 해서라도 끝까지 살아남을게.
다행히도 그녀는 진정령에서 왕영교가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음.
지금은 교교가 일찍 죽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남의 죽음에 이런 식으로 말을 얹어서는 안 되지.
허니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왕영교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방 안을 한번 크게 둘러보았음.
온부인의 몸종에서 단번에 온조의 애첩으로 치고 올라온 야망 넘치는 그녀답게 곳곳에 온갖 허영과 사치의 흔적이 묻어 나왔음. 작지 않지만 크지도 않은 방을 천천히 둘러보던 도중, 허니비의 시선은 바닥에 놓여 만천하에 자랑하듯 활짝 열린 커다란 목함으로 향했음.
죽기 전에 이걸 보고 있었던 걸까.
내용물은 왕영교가 여태껏 악착같이 모아온 장신구와 보석들로 가득했음. 그런데 눈부신 빛 더미 속에서 유난히 흰 옥비녀 하나가 눈에 들어왔음. 전혀 왕영교답지 않은 밋밋한 취향이었지.
허니비는 무심코 그 옥비녀를 집어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음.
상중이니 이거라도 해야겠어.
다시 거울 앞으로 돌아와 자그만 머리에 빈틈없이 꽂힌 무거운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빼기 시작했음.
이상하게도 하나 빼고 둘을 빼고 셋을 뺄수록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기분이었음. 자신이 아니라 왕영교의 몸이 기뻐했음.
왜일까? 분명 자기 손으로 꽂은 것들일 텐데.
왕영교에게 빙의하기는 했지만 머릿속에 전해지는 기억들은 그때그때 필요하다 싶으면 떠오르는 단편들에 불과했음.
즉, 그녀가 알려주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음.
병중임에도 갖가지 오색찬란 비녀와 꽂이가 그득히 올려져 있던 왕영교의 머리에는 어느새 흰 옥비녀 하나만이 단출하게 남았음. 짙은 입술연지까지 손등으로 박박 지우자 거울 속에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 완연히 드러났음.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음.
진정령의 연령대가 그래봤자 열일곱에서 스물 몇살 정도 아니었나. 왕영교도 비슷한 나이였을 텐데.
하지만 안쓰러운 감상도 잠시. 허니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비싼 치맛단을 시원하게 쫘아악 찢었음. 넓게 찢은 치맛단을 보자기로 만들어 그 속에다 목함의 물건을 신중한 눈으로 골라 담기 시작했음.
요것은 끝이 날카로워서 천이 찢어질 테니 안 되고, 요놈은 비싸 보이니 무조건 챙기고, 요 자식도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군.
원래 떠날 때는 여비를 가능한 두둑이 챙겨 두어야 하는 법.
설마 떠나려고? 그럼 미쳤다고 있겠습니까?
당연히 째야지! 여기 있으면 죽는 것밖에 더 하겠어? 교교의 소중한 목숨을 이어받은 이상 무조건 존나존나 멀리멀리 째야지!
허니비는 순식간에 두둑해진 보자기를 등에 단단히 둘러맸음.
무엇보다 딱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더 도망치기 어려워짐. 온조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왕영교에게 당부하기를. 야렵을 마치고 돌아오면 세가 직계 자제들을 대상으로 교화소가 열릴 테니 그때에는 ‘조신하게’ 행동하라고 이르시던걸.
미친놈, 본인 아랫도리나 조신하게 단속할 것이지. 그래봤자 첩이 방에 처박혀 있을 텐데 뭘 조신하라는 거야?
허니비는 눈을 질끈 감고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음.
됐다, 이 몸은 여기서 이만 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훗날 무시무시한 이릉노조한테 좆되는 건 우리 온이공자 혼자서 마음껏 누리시옵소서.
그리고 감았던 눈을 다시 천천히 떴음.
그런데 당당하게 문으로 나가면 역시 눈에 띌 테고, 어쩌면 좋을까?
허니비는 방을 한 번 더 둘러보다가 벽에 큼직하게 뚫린 바깥 창을 발견하고는 손뼉을 짝 쳤음.
창을 넘어서 나가자! 우리 교교, 아무리 수행자가 아니라지만 저 정도는 넘어갈 수 있겠지?
허니비는 깊게 고민 않고 곧장 창문 앞으로 가서 끙끙 매달리기 시작했음. 어린 시절 분유병 꼭지 빨던 힘까지 짜내 몸을 거의 반쯤 걸쳤을 때.
“교교야. 너 미쳤냐?”
순간 머리끝이 쭈뼛.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 목소리.
허니비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음.
이 불야천에서 왕영교를 다정하게 ‘교교’라 부르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이었음.
창문보다 땅이 조금 낮은 곳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유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음. 그는 팔짱을 끼고 허니비를 정녕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음.
“왜 멀쩡한 문을 두고 그런 데로 다니는 거냐? 하기야 너는 예전부터 뭐에 한번 꽂히면 물불을 안 가렸지.”
왕영교의 주인이자 원수, 온조가 허니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려 손끝을 까닥까닥 움직였음.
“이리로 뛰어라. 내 받아주마.”
몸이 그대로 굳어 버린 허니비는 어색하게 헤헤 웃어 보였음.
“아하하…… 공자…….”
“뛰래도. 두 번 말하기 입 아프다.”
“그, 앞으로 이틀은 더 있다가 오시는 거 아니었나요?”
“지루해서 일찍 왔다. 교화소 건도 조금 앞당기기로 했고. 그래서 안 내려올 거냐?”
“여기에는 제 나름대로 깊은 사정이 있어서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계집애가 담만 더럽게 커서는. 되었다.”
온조는 애먼 데다 시간 투자하기 싫었는지 창문에 원숭이처럼 매달린 허니비를 억지로 떼어 내기 시작했음.
그런데 허니비가 창틀에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자, 온조는 그녀가 떨어질까 봐 무서워하는 줄 알고 피식 웃었음.
“본 공자가 안전하게 받아줄 테니 염려 말고 손 놔라. 그리고 예서 떨어져봤자 얼마나 크게 다친다고.”
“제가, 제가 알아서 내려가겠습니다. 제발요.”
이제 거의 울상이 된 허니비는 갓 태어난 아기새처럼 온몸을 파르르 떨었음.
물론 이깟 창문에서 떨어질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온조한테 이대로 질질 끌려가 침상 위로 던져질까 봐 무서운 것이었음.
왕영교의 몸은 그의 애첩답게 당연하게도 색사에 능숙했지만, 허니비의 영혼은 현대에서 두어 번 정도 연애한 경험이 있었을 뿐 죄다 끝까지 가본 적이 없었음.
즉, 색사라면 초짜 중에서도 그야말로 생초짜! 여기 온 첫날부터 온조한테 아다를 빼앗기라고? 이건 존나 너무해!
반면 온조는 흔치 않게 자기 눈앞에서 벌벌 떠는 왕영교의 모습이 어쩐지 색다르게 느껴졌음. 자꾸만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음. 오늘따라 화장도 옅어서 순수해 보였고. 그새 기산에서 유행하는 화장법이 바뀌기라도 했는지.
온조는 허니비에게 바짝 붙어 서며 능글거렸음.
“이러다가 다리라도 부러지면 누구한테 짜증내려 그러느냐? 응?”
허니비는 그의 태도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했음.
“부러지지 않습니다. 짜증도 안 낼 거구요.”
“네가 그리 말해 놓고 지킨 적이 있더냐? 그 동그란 머리로 잘 생각해 봐라. 손끝이라도 베이면 여기 좀 봐달라 빽빽 소리 지르고,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성이 떠나가라 앙앙 울고.”
“아니에요 공자, 이번에는 진짜.”
“교교야.”
교교야, 애정을 듬뿍 담아 불러주지만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목소리. 어째 듣는 이를 잘근잘근 씹는 듯한…….
순간 익숙한 공포가 허니비의 뼛속까지 스며들었음.
마치 아무 대책 없이 거대한 뱀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음.
“본 공자는 이만 들어가서 쉬고 싶으니, 좋은 말로 할 때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어서 손을 놓거라.”
허니비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어깨를 잔뜩 움츠렸음. 왕영교의 몸이 지금의 온조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음.
그러하니 자연스레 허니비도 온조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음.
“너도 알지. 이 몸은 쓸데없이 기다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
온조의 말은 이제 명백한 협박조였음.
그는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고 허니비를 강제로 덥석 안아 들었음.
허니비는 입을 꾹 닫고 온조에게 얌전히 안겼음. 그가 걸을 때마다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음.
애첩이니 뭐니 해도 결국 주인이기는 하다만 이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왕영교…… 온조랑 무슨 관계였던 거지? 이상해.
“헌데 치맛단은 왜 이 모양이야.”
“호, 혼자서 넘어졌어요. 그러다 실수로 밟았고.”
“어디서? 방에서?”
“…… 예에.”
“아주 잘하는구나. 방으로 두꺼운 융단 하나 넣어주마.”
그런 선물 대신 저 좀 놔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하지만 허니비는 차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내뱉을 수 없었음.
왜냐하면 온조가 끌어안는 힘이 생각보다 상당했고, 이건 본능적인 직감인데 지금 냅다 도망치면 잡혔을 때 뼈도 못 추릴 것 같았음. 거기에다가 왕영교의 몸이 온조 옆에 있을 때는 절대 허튼 생각 하지 말라고 시시각각 경고하는 중이었음.
그래도 교교야. 우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니.
이대로 끌려다니면 도대체 뭔놈의 진전이 있겠어.
허니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에라이 모르겠다 내뱉었음.
“공자!”
“듣고 있다.”
“저, 월경합니다.”
“뭐?”
“아……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오늘이 첫날입니다.”
“너는 애가 그런 몸으로 무슨 창문을…… 되었다, 말을 말자.”
그리고 온조는 가던 길의 방향을 틀었음.
“내 방이 아니라 네 방으로 가야겠구나. 들어가면 아까처럼 기어나올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라.”
아싸. 허니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
이러면 당분간 잠자리를 가질 일은 절대 없을 거니까!
그녀는 자신이 매우 재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온조가 어째서 보따리의 존재는 일체 함구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음.
-
필력 딸려…… 이런 분위기로 온조너붕붕 보고 싶다
허니비를 아끼지만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서 대우하는 레전드 시발탑 온조쉑
사실 입덕부정기 겪는 중임
들리십니까? 들리시나요 현대의 인간들이여? 이건 뭐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아니 이미 한번 죽은 몸이기는 합니다만…….
도마 위에 올려진 맛 간 생선 눈으로 거울만을 바라보던 허니비는 착잡한 심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음. 많고 많은 인물 중에 어째 하필 왕영교에게 빙의했는지 모르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가 죽었으므로 자신이 빙의할 수 있었음.
그래, 왕영교는 도대체 어쩌다 죽은 걸까?
그러자 머릿속으로 지난날의 기억들이 거친 파도처럼 우악스럽게 들이닥쳤음.
맙소사, 왕영교, 이 불쌍한 여자야.
범인은 온조. 수행자도 아닌 일반인인 왕영교와 색사를 나누다 힘을 조절 못해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였고, 이후 그녀는 온갖 후유증으로 며칠 넘게 골골 앓다 이 쓸쓸한 방에서 홀로 병사한 것이었음.
온조는 색사를 마친 바로 다음날 야렵을 가장한 유람을 나가셨다지 뭐야. 아주 천하제일 호로새끼 납셨어요.
허니비는 수일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온조의 손자국이 진하게 남은 손목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음.
사실 왕영교는 알릴 수도 있었음. 하지만 온조에게 성가신 여자로 보이기 싫다는 이유로 꾹꾹 눌러왔던 것임.
내상이 상당했을 텐데 의미없는 보약만 몇 그릇씩 비워가며,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니 보약은 오히려 속을 상하게 만들어 버렸고, 그러다 결국…….
그새 두 눈이 촉촉해진 허니비는 제법 의연한 얼굴로 다짐했음.
교교. 당신의 이 소중한 목숨, 내가 이어받은 이상 무슨 짓을 해서라도 끝까지 살아남을게.
다행히도 그녀는 진정령에서 왕영교가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음.
지금은 교교가 일찍 죽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남의 죽음에 이런 식으로 말을 얹어서는 안 되지.
허니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왕영교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방 안을 한번 크게 둘러보았음.
온부인의 몸종에서 단번에 온조의 애첩으로 치고 올라온 야망 넘치는 그녀답게 곳곳에 온갖 허영과 사치의 흔적이 묻어 나왔음. 작지 않지만 크지도 않은 방을 천천히 둘러보던 도중, 허니비의 시선은 바닥에 놓여 만천하에 자랑하듯 활짝 열린 커다란 목함으로 향했음.
죽기 전에 이걸 보고 있었던 걸까.
내용물은 왕영교가 여태껏 악착같이 모아온 장신구와 보석들로 가득했음. 그런데 눈부신 빛 더미 속에서 유난히 흰 옥비녀 하나가 눈에 들어왔음. 전혀 왕영교답지 않은 밋밋한 취향이었지.
허니비는 무심코 그 옥비녀를 집어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음.
상중이니 이거라도 해야겠어.
다시 거울 앞으로 돌아와 자그만 머리에 빈틈없이 꽂힌 무거운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빼기 시작했음.
이상하게도 하나 빼고 둘을 빼고 셋을 뺄수록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기분이었음. 자신이 아니라 왕영교의 몸이 기뻐했음.
왜일까? 분명 자기 손으로 꽂은 것들일 텐데.
왕영교에게 빙의하기는 했지만 머릿속에 전해지는 기억들은 그때그때 필요하다 싶으면 떠오르는 단편들에 불과했음.
즉, 그녀가 알려주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음.
병중임에도 갖가지 오색찬란 비녀와 꽂이가 그득히 올려져 있던 왕영교의 머리에는 어느새 흰 옥비녀 하나만이 단출하게 남았음. 짙은 입술연지까지 손등으로 박박 지우자 거울 속에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 완연히 드러났음.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음.
진정령의 연령대가 그래봤자 열일곱에서 스물 몇살 정도 아니었나. 왕영교도 비슷한 나이였을 텐데.
하지만 안쓰러운 감상도 잠시. 허니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비싼 치맛단을 시원하게 쫘아악 찢었음. 넓게 찢은 치맛단을 보자기로 만들어 그 속에다 목함의 물건을 신중한 눈으로 골라 담기 시작했음.
요것은 끝이 날카로워서 천이 찢어질 테니 안 되고, 요놈은 비싸 보이니 무조건 챙기고, 요 자식도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군.
원래 떠날 때는 여비를 가능한 두둑이 챙겨 두어야 하는 법.
설마 떠나려고? 그럼 미쳤다고 있겠습니까?
당연히 째야지! 여기 있으면 죽는 것밖에 더 하겠어? 교교의 소중한 목숨을 이어받은 이상 무조건 존나존나 멀리멀리 째야지!
허니비는 순식간에 두둑해진 보자기를 등에 단단히 둘러맸음.
무엇보다 딱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더 도망치기 어려워짐. 온조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왕영교에게 당부하기를. 야렵을 마치고 돌아오면 세가 직계 자제들을 대상으로 교화소가 열릴 테니 그때에는 ‘조신하게’ 행동하라고 이르시던걸.
미친놈, 본인 아랫도리나 조신하게 단속할 것이지. 그래봤자 첩이 방에 처박혀 있을 텐데 뭘 조신하라는 거야?
허니비는 눈을 질끈 감고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음.
됐다, 이 몸은 여기서 이만 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훗날 무시무시한 이릉노조한테 좆되는 건 우리 온이공자 혼자서 마음껏 누리시옵소서.
그리고 감았던 눈을 다시 천천히 떴음.
그런데 당당하게 문으로 나가면 역시 눈에 띌 테고, 어쩌면 좋을까?
허니비는 방을 한 번 더 둘러보다가 벽에 큼직하게 뚫린 바깥 창을 발견하고는 손뼉을 짝 쳤음.
창을 넘어서 나가자! 우리 교교, 아무리 수행자가 아니라지만 저 정도는 넘어갈 수 있겠지?
허니비는 깊게 고민 않고 곧장 창문 앞으로 가서 끙끙 매달리기 시작했음. 어린 시절 분유병 꼭지 빨던 힘까지 짜내 몸을 거의 반쯤 걸쳤을 때.
“교교야. 너 미쳤냐?”
순간 머리끝이 쭈뼛.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 목소리.
허니비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음.
이 불야천에서 왕영교를 다정하게 ‘교교’라 부르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이었음.
창문보다 땅이 조금 낮은 곳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유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음. 그는 팔짱을 끼고 허니비를 정녕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음.
“왜 멀쩡한 문을 두고 그런 데로 다니는 거냐? 하기야 너는 예전부터 뭐에 한번 꽂히면 물불을 안 가렸지.”
왕영교의 주인이자 원수, 온조가 허니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려 손끝을 까닥까닥 움직였음.
“이리로 뛰어라. 내 받아주마.”
몸이 그대로 굳어 버린 허니비는 어색하게 헤헤 웃어 보였음.
“아하하…… 공자…….”
“뛰래도. 두 번 말하기 입 아프다.”
“그, 앞으로 이틀은 더 있다가 오시는 거 아니었나요?”
“지루해서 일찍 왔다. 교화소 건도 조금 앞당기기로 했고. 그래서 안 내려올 거냐?”
“여기에는 제 나름대로 깊은 사정이 있어서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계집애가 담만 더럽게 커서는. 되었다.”
온조는 애먼 데다 시간 투자하기 싫었는지 창문에 원숭이처럼 매달린 허니비를 억지로 떼어 내기 시작했음.
그런데 허니비가 창틀에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자, 온조는 그녀가 떨어질까 봐 무서워하는 줄 알고 피식 웃었음.
“본 공자가 안전하게 받아줄 테니 염려 말고 손 놔라. 그리고 예서 떨어져봤자 얼마나 크게 다친다고.”
“제가, 제가 알아서 내려가겠습니다. 제발요.”
이제 거의 울상이 된 허니비는 갓 태어난 아기새처럼 온몸을 파르르 떨었음.
물론 이깟 창문에서 떨어질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온조한테 이대로 질질 끌려가 침상 위로 던져질까 봐 무서운 것이었음.
왕영교의 몸은 그의 애첩답게 당연하게도 색사에 능숙했지만, 허니비의 영혼은 현대에서 두어 번 정도 연애한 경험이 있었을 뿐 죄다 끝까지 가본 적이 없었음.
즉, 색사라면 초짜 중에서도 그야말로 생초짜! 여기 온 첫날부터 온조한테 아다를 빼앗기라고? 이건 존나 너무해!
반면 온조는 흔치 않게 자기 눈앞에서 벌벌 떠는 왕영교의 모습이 어쩐지 색다르게 느껴졌음. 자꾸만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음. 오늘따라 화장도 옅어서 순수해 보였고. 그새 기산에서 유행하는 화장법이 바뀌기라도 했는지.
온조는 허니비에게 바짝 붙어 서며 능글거렸음.
“이러다가 다리라도 부러지면 누구한테 짜증내려 그러느냐? 응?”
허니비는 그의 태도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했음.
“부러지지 않습니다. 짜증도 안 낼 거구요.”
“네가 그리 말해 놓고 지킨 적이 있더냐? 그 동그란 머리로 잘 생각해 봐라. 손끝이라도 베이면 여기 좀 봐달라 빽빽 소리 지르고,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성이 떠나가라 앙앙 울고.”
“아니에요 공자, 이번에는 진짜.”
“교교야.”
교교야, 애정을 듬뿍 담아 불러주지만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목소리. 어째 듣는 이를 잘근잘근 씹는 듯한…….
순간 익숙한 공포가 허니비의 뼛속까지 스며들었음.
마치 아무 대책 없이 거대한 뱀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음.
“본 공자는 이만 들어가서 쉬고 싶으니, 좋은 말로 할 때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어서 손을 놓거라.”
허니비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어깨를 잔뜩 움츠렸음. 왕영교의 몸이 지금의 온조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음.
그러하니 자연스레 허니비도 온조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음.
“너도 알지. 이 몸은 쓸데없이 기다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
온조의 말은 이제 명백한 협박조였음.
그는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고 허니비를 강제로 덥석 안아 들었음.
허니비는 입을 꾹 닫고 온조에게 얌전히 안겼음. 그가 걸을 때마다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음.
애첩이니 뭐니 해도 결국 주인이기는 하다만 이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왕영교…… 온조랑 무슨 관계였던 거지? 이상해.
“헌데 치맛단은 왜 이 모양이야.”
“호, 혼자서 넘어졌어요. 그러다 실수로 밟았고.”
“어디서? 방에서?”
“…… 예에.”
“아주 잘하는구나. 방으로 두꺼운 융단 하나 넣어주마.”
그런 선물 대신 저 좀 놔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하지만 허니비는 차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내뱉을 수 없었음.
왜냐하면 온조가 끌어안는 힘이 생각보다 상당했고, 이건 본능적인 직감인데 지금 냅다 도망치면 잡혔을 때 뼈도 못 추릴 것 같았음. 거기에다가 왕영교의 몸이 온조 옆에 있을 때는 절대 허튼 생각 하지 말라고 시시각각 경고하는 중이었음.
그래도 교교야. 우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니.
이대로 끌려다니면 도대체 뭔놈의 진전이 있겠어.
허니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에라이 모르겠다 내뱉었음.
“공자!”
“듣고 있다.”
“저, 월경합니다.”
“뭐?”
“아……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오늘이 첫날입니다.”
“너는 애가 그런 몸으로 무슨 창문을…… 되었다, 말을 말자.”
그리고 온조는 가던 길의 방향을 틀었음.
“내 방이 아니라 네 방으로 가야겠구나. 들어가면 아까처럼 기어나올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라.”
아싸. 허니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
이러면 당분간 잠자리를 가질 일은 절대 없을 거니까!
그녀는 자신이 매우 재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온조가 어째서 보따리의 존재는 일체 함구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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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력 딸려…… 이런 분위기로 온조너붕붕 보고 싶다
허니비를 아끼지만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서 대우하는 레전드 시발탑 온조쉑
사실 입덕부정기 겪는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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