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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9 23:08
진정령 ㅅ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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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회복하느라 며칠 좀 버벅거리긴 했지만,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해 남쪽 도시까지 거의 쉬지 않고 쭉 내려갔더니 봄이 와도 너무 왔다 싶을 정도로 날이 훈훈했다. 어검을 주로 해서 이동했더니, 마치 일주일도 안 되어 겨울을 지나 봄이 온 것만 같았다. 아키라는 남쪽까지 계속 나를 따라왔다. 혹시라도 고향의 그 남자들이 자기를 찾고 있을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참 신기한 애였다. 나와 내외할 법도 한데, 어검을 할 때마다 아키라는 기다렸다는 듯 넙죽 내 품에 안겼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자기를 맡길 수 있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엉망으로 헝클어지는 아키라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나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분명 이 애의 무게가 내게 버거웠는데, 버거운 만큼 안정감이 있었다. 왜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사람들끼리 모여 자식을 낳고 일을 벌이는지 문득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아마도 살아갈 이유를 만들고자 그리 하는 것일 테다. 나는 굳이 더 살아갈 이유를 만들고픈 마음은 없었지만, 품에 안긴 어린 몸을 떨어뜨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남쪽 도시에 이르렀다. 지금 동영 지방에서 가장 큰 국가와 여기는 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여기까지 누군가가 쫓아올 거라는 생각은 굳이 할 필요 없었다. 물론 내가 몇 년 전에 동영에 머물면서 여기 저기 조금씩 저질러놓은 일이 있기는 한데...... 여태 조용한 걸 보면 그것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동영에서 제일 큰 국가는 아니라곤 해도, 그래도 북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도시의 인파 앞에서 아키라는 기가 죽은 채 꼬물거렸다. 아마 북쪽과는 언어마저 사뭇 달라 더 주눅들 터였다. 하지만 만국공통어가 하나 있지. 나는 품 속에 든 금자를 꺼내 슬쩍 보여주었다. 그러자 아키라의 눈이 왕방울만 해지는 게 좀 웃겼다.

-가질래?

-에?

얼빠진 얼굴로 그렇게 되묻는 게 재미있었다.

-난 어차피 일 년 이상 살지 어쩔지 모른다고 했잖아. 필요하면 네가 가져가라.

그 말에, 아키라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떨더니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싫어요...... 어차피 나는 그걸 받아봤자 하루만에 빼앗기고 죽을걸요.

-결국 나를 네 호위무사이자 봉으로 쓰겠다는 거 아냐.

-스승님이 되어달라니까요!

빽빽거리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걸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내가 왜?

-그치만...... 그치만!

떨리는 목소리로 보아, 자기 화를 못 이기고 또 비죽비죽 울고 있으리란 걸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던 아키라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민 채로 내게 손바닥을 쫙 펼친 채 내밀었다.

-됐어! 이젠 나도 더 안 매달릴 거예요. 돈이라도 줘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 따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묘하게 재미가 있어서 나는 팔짱을 꼈다.

-싫은데? 마음이 바뀌었어.

그러자 세상 무너진 얼굴로 또 울 준비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등돌려 걷기 시작했다.

-배고프다.

그 한 마디에, 아키라는 또 후다닥 나에게 들러붙었다. 정말 자기 살 방도는 귀신 같이 아는 애였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수를 보면서 나는 조금도 입맛이 돌지 않았다. 사실 입맛 안 돈 지는 벌써 꽤 됐다. 속이 다 상한 뒤로는 먹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맞은 편에 앉아 뭐든 다 와구와구 씹어삼키는 저 젊음이 신기할 뿐이었다.

지겹다. 잘 먹는 게 기특한 것과는 별개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일단 방을 잡았다. 자기 집 아니면 노숙이 전부였는지, 아키라는 평범하다 못해 살짝 노후되기까지 한 객잔 방을 궁전 보듯 둘러보았다. 나도 수사가 되지 않았다면 저 나이때 아마 저랬겠지. 입 안에 쓴 맛이 도는 것을 느끼며, 나는 좁게 붙어있는 침대 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리고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초저녁이었다. 사실 반쯤은 기대했다. 눈 떴는데 아키라가 다 들고 튀었기를. 하지만 멍청하게도 그 애는 내 검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검을 꺼내보기는 무서운지 기웃거리기만 하는 머리통을 바라보다가, 나는 기침했다.

-뭐 하냐.

깜짝 놀라서 화들짝 떨리는 어깨가 좀 웃겼다. 머뭇거리며 나와 내 검을 번갈아보던 아키라가 갑자기 꿇어앉을 때, 나는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내가 예상한 대로, 아키라는 넙죽 절을 하듯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저도 가르쳐주세요! 칼 쓰는 법이요!

-칼이 아니고 검인데.

칼은 청하 섭씨에서 쓰는 그게 칼이지. 도 말이다. 섭회상마저도 쓰던 그거. 이쯤 되면 모든 게 섭회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긴 한데, 이미 제 멋대로 뻗어나가는 생각을 멈출 방도는 없었다. 나는 일어나 앉아 기지개를 켰다.

-검. 검......

검이라는 단어를 서툴게 중얼거리는 어린 목소리 때문에 입맛이 썼다. 세상 억울하다는 듯 입술이 댓발 나온 얼굴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행자님이 쓰러졌을 때 제가 불 붙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 지 알아요? 나도...... 나도 수행자가 되면!

-그러면 열 중 다섯은 서른 넘기기 전에 죽고 남은 셋은 나처럼 망가지는데.

내 말에, 아키라는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꼬박꼬박 말대꾸도 참 잘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살면 뭐 오래 사는 줄 아세요? 수행자님은 그래도 도망칠 수라도 있잖아요. 여자면서, 혼자 다니는 것도 안 무서워하잖아요. 검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나도 정말 배우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두 눈이 정말 간절해보였다. 슬슬 컴컴해지는 방 안에서, 안 씻어 꼬질한 아키라의 얼굴은 푸른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더 몰골이 더 심할 것이었다. 나는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러니까, 결국 죽기보단 죽이겠다는 거지?

-아뇨. 살겠다고요!

답답하다는 듯 빽 외치는 그 목소리에, 나는 못 참고 웃었다. 정말 우스워서 웃는 건 아니었다. 그냥 참을 수가 없었단 것뿐이다. 아키라가 입을 다문 채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웬 미친 여자한테 검을 가르쳐달라기는 십대 여자애가 보기에도 좀 아리까리한 거지.

웃음을 그친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땡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키라에게 말했다.

-일단 씻으러 가자.

*

변한 건 없었다. 적어도 내 미래가 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시골 애를 데려다가 씻긴다고 뭔가 엄청난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쭈뼛거리고 새 옷을 어색하게 쓰다듬는 아키라의 손짓이 많은 걸 말해주었다. 그렇게 비싼 옷을 사준 것도 아닌데, 계속 천을 매만지는 모습에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하기야 열다섯이면 한참 그런 거 관심 가질 나이이기는 하지. 나는 그런 데 관심 가진 적 없지만 말이다.

내가 어떻게 수사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사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목검을 손에 쥔 순간부터 버티기 위해 기를 썼다. 밤새 연습했고, 모르겠으면 외웠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수행자님이라고 그만 불러.

-그럼 스승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래라.

나는 결의에 찬 눈 앞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키라가 나처럼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뭣보다 나한테 얘를 그렇게 굴릴 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좀 현명하게 굴기로 했다. 글부터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내가 얘한테 뭐 엄청난 무공을 전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바에야, 이 편이 더 얘한테 도움이 될 것이었다.

처음엔 검이 아니라고 입술 삐죽거리던 아키라는 붓을 하나 사주자 금세 얌전하게 내 강의를 들었다. 붓 하나가 뭐 거의 금값이었다, 여긴. 그도 그럴 게 사실 동영은 자기들만의 문자라고 부를 만한 게 있다고 하기도 우스운지라. 그래서 나는 그냥 대륙 애 가르치듯 가르쳤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아키라가 나에게 물었다.

-스승님. 저 스승님 나라로 데려가게요?

-뭐?

나는 내가 적어놓은 사람 인 자와 아키라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동영에서 죽을 건지 아닌지까지는 구체적으로 안 정해 놨었다. 여기는 금광요가 죽기 전에 오고 싶어 했던 곳이지만, 과연 내가 여기서 죽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말이 없는 걸 어떻게 이해했는지, 아키라가 물었다.

-근데 스승님은 이름이 뭐예요?

나는 생각하던 걸 접어두고 아키라를 바라봤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꼬리와 땡그란 눈 사이의 괴리가 좀 컸다. 나는 걔가 들고 있던 붓을 뺏어 밝을 정 자를 적었다.

-이게 네 이름이다.

아키라는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참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기분이 이상해요.

나는 말없이 붓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나름 비장하게 시작한 수업이건만, 한 시진 정도가 아키라가 가진 집중력의 한계였다. 나는 종이 위에 삐뚤빼뚤 쓰여있는 글자들을 바라보다가 그만 가서 놀라고 손을 휘저었다. 그런데 감사합니다 하고 곧장 일어나는 대신 계속 앉아있지 뭔가.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아키라가 꾸물꾸물 말했다.

-스승님 이름요. 알려주면 안 돼요?

나는 먹물 투성이 종이를 바라보다가 여백에 천천히 내 이름을 적었다. 아키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글자가 왜 이렇게 복잡해요?

-헌이라고 읽어.

-헌.

아키라가 중얼거렸다. 슬쩍 다시 붓을 쥐어든 아키라가 삐뚤거리는 필체로 내 이름을 쓰는 것을 보다가 나는 숨 쉬듯 솟아오르는 기침을 가라앉히며 다 식은 차를 들이켰다.

생각해 보니 내가 늙기는 늙었나보다. 아키라가 내 눈엔 생판 어린애인데, 다시 생각하면 얘 슬슬 혼인할 나이였다. 나가놀라고 말할 나이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네가 내 딸뻘이구나, 그러고 보니까.

내 말에, 아키라는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처음엔 그 반응이 이해가 안 갔는데, 생각해 보니 얘는 금단 있는 수행자 본 건 처음일 거였다. 얘가 살면서 보아온 건 촌 사람들 뿐일 텐데, 노동으로 지친 이들은 빨리 늙는 편이고. 근데 그래도 나는 수행자 치고 동안은 아닌데. 오히려 노안에 가까울 거다.

-저도 얼른 수행하는 법 가르쳐줘요! 급해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럽고, 별일 없으면 여기 얌전히 있어라.

-어디 가시게요?

-산 타게.

아키라는 멍하니 나를 보더니, 뭔가 결심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같이 가요.

-마음대로 해라.

편하게 방에 있으면 되는 걸 왜 굳이 산 타는 데 쫓아오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자기 마음이지, 뭐.

이른 오전 햇빛은 여기나 대륙이나 똑같이 환하고 밝았다. 여기는 바다에 접해있는 것 치고 건조해서 슬슬 날이 더워지는 지금도 살 만했다. 멀리 보이는 산을 보며 기지개를 켜는데, 옆에서 아키라가 우물거렸다.

-근데 산까지 엄청 먼데......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검해 산까지 가는 길, 아키라는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아 너무 좋다며 종알거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니 문득 부정세의 앵무가 생각났다. 인사도 못 하고 왔는데.

살아있을까, 걔는.

산기슭에 내린 뒤로 말없이 걷는데, 아키라는 얌전히 뒤따라오기나 할 것이지 계속 툭툭 말을 던졌다.

-날 엄청 좋지 않아요?

내가 또 남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는 성격은 아니잖은가.

-그래.

-근데 계속 기침하구, 스승님 진짜 등산해도 되는 것 맞아요?

-응.

-스승님은 산이 좋아요?

-그런가 보다.

-그럼 산이 좋아요 바다가 좋아요?

-산.

-스승님 이름에도 산이 들어가죠?

그 질문은 좀 기특했다. 글자 배운 거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하긴 한 시진 전에 배운 걸 까먹으면 그거야말로 문제가 있는 거겠지만.

-잘 아네.

내 이름에는 산이 들어가지. 섭회상의 이름에는 나무가 들어가고...... 또 쓸데 없는 생각. 적당히 나무 아래 앉을 만한 곳을 발견했을 때 나는 멈춰섰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나무그늘이 햇빛을 가려주고, 흙바닥은 널찍하니 딱 앉아있기 좋은데, 하필이면 혹이 하나 딸려있어서.

-정좌...... 그러니까, 나처럼 앉아 봐라.

아키라는 나를 힐끔거리며 열심히 자세를 잡았다. 나는 그런 아키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눈 앞에 점을 하나 찍고 그것만 바라본다고 생각해.

이건 내가 생각을 비울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이 방법만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오감을 차단하고 뭐 이런 건 아직 가르쳐 줘 봐야 모를 것이기도 했다.

-하다 보면 눈 앞의 점이 사라지고도 명상을 유지할 수 있을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입을 닫았다.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눈 앞에 그려놓은 점이 누군가의 얼굴로 변하고, 그 얼굴이 다시 다른 얼굴로 변하고 나서도 계속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지만, 이렇게 두 눈을 감고 내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 때면 그리운 얼굴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보고 싶은 건 내 수련이 부족한 탓이겠지.

대개 이렇게 명상을 할 때 내 눈 앞에 떠오르는 섭회상의 얼굴은 나를 보내줄 때의 바로 그 미소 띤 얼굴이었다. 어서 가라고 속삭이던 그 얼굴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 가야 그가 잊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늘 하던 대로 몸 안을 살펴보았다. 정양한 지도 벌써 꽤 되었는데, 여전히 전신의 기운이 제멋대로 꼬여있었다. 미래를 굳이 계획할 것도 없겠는데. 그냥 살다가 알아서 잘 돌연사하면 되겠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깊은 명상에 잠겼다.

눈을 뜨자 슬슬 노을이 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키라가 땅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었다. 아키라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에 묻은 침을 닦았다. 조그만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나는 웃으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 잘 자는 법 하나는 오늘 배웠나 보네.

-놀리지 마요!

떽떽거리면서도 자기를 안으라는 듯 다소곳한 자세를 취하는 아키라 때문에 나는 기가 막혀 다시 웃었다.

어검해 돌아가는 길, 저 멀리 장이 섰는지 밤인데도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시선을 내려 아키라를 바라보자, 벌써 눈이 그 쪽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충동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키라가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필요한 거 있으면 사 가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그 날 산 건 다 필요 없는 것뿐이었다. 아키라의 머리끈이라든가, 허리끈이라든가, 떡이라든가. 아키라의 얼굴이 그렇게 붉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키 때문에라도 동영에선 어딜 가든 눈에 띄는 편이었고, 계속 기침을 해서인지 아니면 인상 때문인지 사람들의 시선도 썩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키라는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나도 남의 시선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어서, 터덜터덜 걸으며 담주나 청하 길거리를 생각했다. 거기와 여기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래도 여기에는 덜 정돈된 곳 특유의 열기가 있었다.

섭회상이 여기 온다면 좋아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입에서 침이라도 흐를 것 같은 아키라의 시선을 따라갔다. 보통 시장 하면 탕후루인데, 이곳 시장에서는 탕후루 대신 조그만 떡 같은 것을 팔았다. 그걸 사주자 아키라는 그걸 열심히도 먹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떡이 맛있는 게 아니라 그냥 야시장 분위기에 들뜬 거였다. 손에 들린 초록색 머리끈이 팔랑거리는 걸 나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못 참고 그것을 낚아챘다. 그리고 흙을 털어냈다고는 해도 여전히 부스스한 아키라의 머리카락을 대충 손에 쥐었다. 머리끈 아껴서 뭐 쓸 데도 없을 건데, 그냥 여기서 묶고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엉성하게 묶인 머리카락을 바라보는데, 드러난 목덜미를 매만지던 아키라가 갑자기 울먹거리는 것 아니겠나. 아껴쓰려고 그랬나 싶어 나는 아주 잠깐 당황했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 더 사면 되지 않나 내가 반문할 때였다.

-스승님.

아키라가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진지한 그 분위기에, 순간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저 살면서 지금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하지 마.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키라의 눈동자가 매끈하게 내 얼굴을 비췄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진짜로요.

나는 말없이 침을 삼켰다. 꼭 모래를 삼키는 것만 같았다. 나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 어쩌겠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아키라는 손등으로 눈을 부비더니, 나를 끌고 장을 종횡무진했다. 그러고보니 객잔 방에 빗이 없니, 자기도 내 머리를 빗어주겠니 종알거리면서.

데리고 오지 말걸. 나는 아키라의 녹색 머리끈을 보며 생각했다. 별로 얘의 깊은 속내를 알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내가 반 시진 전으로 돌아간대도 아마 얘를 여기 데리고 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항상 이랬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선 나는 도무지 후회라는 것을 몰랐다. 손에 들린 꼬치를 푸석하게 씹으며 나는 아키라가 나를 끌어당기는 대로 걸었다. 겨우 이 정도로 나를 자기 경계 안으로 들인 눈 앞의 꼬마가 안쓰러웠고 미안했다. 하지만 미안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대체 얘를 데리고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반문할 때였다.

-원래 이런 데는 애인이랑 와야 하는데.

그러더니 아키라는 입술을 오므렸다. 슬쩍 내 눈치를 보는 아키라를 나는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스승님, 우리 술도 사 마시면 안 돼요?

-까분다.

내 대답에, 아키라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웃었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더, 나는 생각했다. 진짜 괜히 데려왔다.

진짜 괜히 데려갔다.

야시장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명상하는 동안 퍼자서인지, 그날 밤 아키라는 계속 자라는 잠은 안 자고 할 말이 있는 듯 내 뒤에서 꼼지락거렸다. 모른 척 해야지.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모른 척 할 거다. 하지만 모른 척 하는 것도 그 쪽에서 입 다물고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스승님.

그것까지는 못 들은 척 할 수 있었지만.

-스승님은 애인 안 보고 싶어요?

그것까지도, 그냥 귀를 닫을 수 있었지만.

-나는 보고 싶은데.

이건 뒤를 안 돌아볼 방도가 없지 않나?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키라가 이불 위에 누에고치처럼 옆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고개만 돌려 나를 보았다. 저 조그만 게 지금 애인이 보고 싶다는 말을 한 건가?

-야, 너 몇 살인데?

-열다섯이라니까요.

열다섯이면 내가 금광요 만난 그 때 아냐. 그 나이에 애인? 아니, 도무지 상상이 안 갔다. 따지고 보면 여자들은 열여덟 넘으면 시집 가도 안 이상한 나이니 열다섯에 애인 있는 게 이상한 건 아닌데. 아니 근데.

내가 머릿속을 정리 못 하고 침묵하는 동안, 아키라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나에게 꾸물꾸물 다가왔다. 나는 그 애에게서 시선을 비껴 방 모서리를 보았다. 뻥 뚫린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는 달빛 탓에 방 안은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모서리에까지 길게 서리는 창틀 그림자를 보며, 나는 새삼 부정세가 떠올라 입을 꾹 다물었다. 아키라의 웅얼거림이 들렸다.

-옆집 사는 오빠였거든요.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어릴 때부터 그냥 당연히 우리는 결혼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연히...... 나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뭔가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데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담뱃대를 집어 불을 붙이자, 아키라가 희미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개자식. 정말 비겁한 놈이에요.

어디서 들어본 듯한 귀여운 욕에 허탈하게 웃던 나는, 더 희미해진 목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굳었다.

-그런데도 보고 싶어요.

고개를 돌리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아키라가 보였다. 질끈 동여맨 머리카락이 앙상한 목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눈물 뚝뚝 떨어지는 얼굴은 달빛을 받아 낮보다 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모자란 놈을 보고 싶다고. 다른 가족들은 안 보고 싶고?

그렇게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나부터 그런 질문을 던질 처지가 안 되는 몸이니, 어쩌겠는가.

-데려와 줘?

내 질문에, 아키라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시였다. 곧 그 눈에 차차 빛이 흐려지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생각해본 적 있어요. 내가 팔려갈 정도로 가난하지만 않았으면 다 잘 됐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해봤자 서로 마음은 다 식었는데, 소용 없잖아요.

-똑똑하네.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아키라가 피식 웃었다.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다행이었다. 알다시피 나는 위로에 그다지 능하지 않았다. 얼른 이 순간이 끝나기를 바라며 멀리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였다.

-스승님은 그 사람 안 보고 싶어요?

고개를 돌리자 조금은 겁 먹은 듯한, 하지만 입술에 힘이 꾹 들어가 있는 아키라의 얼굴이 보였다.

-스승님이 맨날 펴 보는 그림. 그거 그린 사람이요.

나는 몇 번 두 눈을 깜박이며 아키라를 보다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기야 어언 한 달을 붙어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어떨 것 같아.

내가 나름의 대꾸를 해주자 그게 좋았는지 아키라는 아까보다 조금 더 밝게 웃었다. 나는 오히려 그게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애인 맞아요?

-그래. 맞다.

그 다음 나올 질문은 뻔했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내가 대답 안 해 줄 것 같은지 아키라는 다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괜찮은 질문이 떠올랐는지 슬쩍 웃었다.

-어떤 사람이었어요?

-글쎄. 뭐라 설명 못 하겠는데.

아키라가 말문이 막힌 듯 나를 보더니 물었다.

-그렇게 좋았어요, 그 사람이?

나는 힘없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아키라가 뭔가 오묘한 얼굴이 되었다. 저거 뭔가 이상한 상상 하는 것 같은데.

-화가였어요?

아니나 다를까, 또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을 한 건지.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라는 신기하다는 듯 작게 탄성을 흘렸다.

-어쩌다 만났……

-자라.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내 잠자리에 누웠다. 등 뒤에서 아키라가 물었다.

-서로 좋아했어요?

-아마도.

-맨날 태우는 그 종이돈도, 그 사람 위해서고요?

나는 달빛이 맨들거리는 창틀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침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

다음날부터 아키라는 부쩍 더 나에게 친근하게 굴었고, 나는 그런 그 애를 그냥 뒀다. 사실 아키라가 나에게 친근하게 굴었다기보다는 귀찮게 굴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방을 치우고, 차를 준비해오고 그러는 게 난 좀 거북했다. 하지만 아키라는 자기가 답답해서 그런 거라며 화를 냈다.

-스승님이 보기에 이 방이 안 더러워요?

있는 짐이라곤 봇짐 하나 옷 몇 벌이 다인데 싶어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면, 아키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스승님 살던 데는 다 더러운 사람밖에 없어요? 여기 먼지도 있고 붓도 그냥 떨어져 있고! 종이도 그냥 막 쌓여있는데!

맞는 말이긴 했지만 나에게는 거슬릴 게 없었다. 그러니 거슬리는 사람이 알아서 치워야지......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 나이 먹고 할 행동이 아닌 것 같아 나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충 팔랑거리는 종이 뭉치들을 주워들었다. 그러면 아키라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기분 좋은 티를 숨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달리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스승님은 애초에 돈도 많은데 왜 이런 여관에 묵어요? 그냥 조그만 집 하나 사서 살면 되잖아요. 스승님은 힘도 세니까 도둑도 안 들텐데.

산 속에 있는 집에 사는 게 좋겠다고 조잘거리는 목소리를 듣다 보면 자기 혼자 내가 포함된 미래 계획을 세워둔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은 뭘로 들었으며, 애초에 내가 자기랑 함께 살 관계이기나 한지. 그런 것들을 묻고 싶었음에도, 나는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그러기엔 아키라가 너무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청출어람이라고, 아키라가 나보다 더 나은 구석도 많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는 수련 체질은 아니었는지, 아키라는 글자를 익히는 데 꽤 열심이었다. 배우기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벌써 천 자 가까이 익힌 것도 기특했지만, 더 대단한 건 글에 대한 그 집념이었다. 아키라는 객잔 한구석에 앉아 사람들의 대화 중에서 자기가 쓸 수 있는 부분들을 베껴쓰거나, 서툴지만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끄적거리곤 했다. 솔직히 나는 그 열정에 감탄했다. 그런 게 재미있냐고 물으면 아키라는 마치 팔로 걸어다닌다는 사람을 보기라도 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그럼 다른 사람들 생각도 이야기도 안 궁금해요?

-어. 조금도.

그렇게 대답하자 아키라는 나를 야만인 보듯 했다. 나는 그런 아키라가 섭회상과 잘 맞겠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종잇값이 금값인 건 쟤가 아직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건 차차 알려주면 되겠지. 사소한 일이 몇 개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시간은 느리고 평화롭게 흘렀다.

사소한 일이라고 하면......

-뭐냐?

늘 가던 신사에 갔는데 아키라가 웬 젊은 유타를 하나 데려와서 나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아니 뭐 데려올 수는 있는데, 아키라가 뭔가 단단히 각오한 얼굴인 게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키라보다 조금 큰 키의 유타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대륙에서 오신 수행자 분이시라고요.

아주 광고를 하고 다니지 그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아키라를 노려보았다. 아키라는 여기 머물기 시작한 첫날 이미 객잔 주인을 포함해 모두에게 내가 수행자라고 말하고 다녔다. 아니, 내가 괜히 스승님이라고 부르라 했겠냐고. 그걸 생각한 머리가 안 되냐? 차마 그 말은 못 하고 왜 그랬냐고 묻자, 아키라는 오히려 맹랑하게 조잘댔었다.

-여자 둘이 다니면 얼마나 만만하게 보는데요. 스승님이 얼마나 센지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야 못 건들죠!

못 참고 그 조그만 입술을 꼬집자 금세 아프다고 울먹거리는데, 이걸 뭐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뒤지게 혼냈는데 아직 버릇을 못 고친 모양이었다. 이번엔 아예 신사에 와서 보고를 해? 아키라는 몸을 움찔 떨었지만 이내 당당하다는 듯 내 시선을 마주했다.

동영은 말이 동영이지 지역마다 제각각이라, 절이 들어온 곳이 있는가 하면 신사조차 없이 그저 표시해놓은 신소만 있는 곳도 있고, 여기처럼 신사의 영향력이 강한 곳도 있었다. 특히 태양신인지를 섬기는 남쪽 신사에서는 유타라 불리는 여자들이 주로 제사를 지내거나 신사에서 할 법한 일들을 했다.

나야 신사에 자주 온대도 조용히 있다 가는 게 다여서 이들과 대화를 나눌일은 거의 없었다. 아키라가 부른 건 알겠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 싶어서, 나는 내게 말을 걸어오는 유타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아키라가 턱을 치켜들며 맹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몸도 안 좋은데 약도 안 먹고 진찰도 안 받잖아요. 나라도 스승님을 챙겨야겠다 싶어서 부탁했어요.

결국 쓸데 없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는 것 아닌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사십대 초중반쯤 됐을까, 자기 일에 이력이 난 듯한 유타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리고 나는 수행자라 진찰 필요 없다.

수사에게 의원이 필요 없다니 개소리이기는 했는데, 어쨌든 나한테 필요 없다는 건 사실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유타가 조용조용하게 명령했다. 대답도 듣지 않곤 등을 돌려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를 아키라가 긴장한 얼굴로 뒤따랐다. 나는 그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걸어나갔다. 내가 여기 신을 믿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이런 데서 불퉁하게 깽판 칠 이유도 없었다.

여기는 아직 대륙처럼 전문 의원이 여기저기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점을 보고 있는 것이겠지. 사실 대륙에도 점쟁이는 많다. 한 번도 봐본 적은 없지만. 나와 아키라를 뒤로 한 채 제단 앞에 꿇어앉은 유타는 펴놓은 천 위에 뭔가를 굴렸다. 유타가 매캐한 연기를 피워놓고 무언가를 웅얼거리는 동안 나는 굳이 기침을 참지 않으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높이 솟은 나무 천장.

-곧 돌아가시겠군요.

나는 시선을 내렸다. 꿇어앉아있는 유타의 뒷모습이 보였고, 아키라가 그 등에 대고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것이 들렸다.

-무슨 뜻이에요? 스승님이 정말 곧 죽는다는 말이에요?

-모르지. 이건 점괘일 뿐이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유타가 뒤를 돌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해가 뜨는 것을 인간이 막을 순 없지만 햇빛을 피할 수는 있는 것처럼, 사람의 명도 마찬가지라......

그렇게 말하는 두 눈은 완전히 새까매서 조금 섬뜩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유타가 중얼거렸다.

-이상하지. 올해를 넘기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그 말에 좋아한 건 아키라였다. 아키라는 잘됐다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옆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표정 없는 내 얼굴을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내막을 깨달은 듯 충격받은 얼굴로 시선을 떨었다.

신사에서 돌아온 뒤로는 다들 예상할 법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아키라는 그날 하루 종일 말 없이 구석만 바라보며 앉아있었고, 나는 아키라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아키라였다.

-왜 저한테 거짓말 했어요?

-뭐가.

-왜 죽는다고 거짓말 했냐구요.

어느새 어두워진 방 안, 눈물이 그런그렁 맺힌 아키라의 얼굴은 누가 봐도 가련하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너무도 무감각했다. 나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난 너한테 거짓말한 적 한 번도 없는데.

내 말에, 아키라의 눈망울이 사정 없이 흔들렸다.

-그 말은......

-정말 몰라. 앞으로 죽을지 살지 너한테 아무런 약속도 못 해줘.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키라가 곧장 질문했다.

-왜요?

지난 일 년을 아키라에게 설명해줄 힘도 그럴 용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창틀에 기대어앉아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았다.

-저를 살려놓고, 스승님은 맘대로 죽어버리겠다고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힘들다. 문득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힘들었다. 아키라의 심정은 나도 잘 알았다. 정말이다. 안다. 아키라와 나는 분명 만난 지 몇 달도 안 됐지만, 우습게도 여기서 얘가 아는 사람이라곤 나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러니 막막하겠지. 하지만 내가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네가 뭔데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하냐고 물을 수 있으면 깔끔하게 이 관계도 끝날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수는 없어도 울음소리를 무시하는 건 할 수 있겠어서 나는 중얼거렸다.

-자자, 그만.

-안 죽으면 안 돼요?

대답이 없자, 아키라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냥 저랑 계속 살아요, 스승님. 네?

그렇게 묻는 앳된 얼굴을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우리가 그럴 사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냥 자문했다. 얘를 이만 떠나는 게 좋을까, 하고. 섭회상을 떠났듯이.

섭회상. 그는 아직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질문을 던진 것 자체가 나 스스로 너무 우스워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순간, 아키라가 내 손을 덥썩 잡아왔다. 나는 그 뜨겁고 거친 감촉에 그대로 굳었다.

-제 아빠라는 인간은 자기 살겠다고 망설이지도 않고 저를 버렸어요. 하지만 스승님은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안 그랬잖아요. 스승님이 저를 살렸잖아요...... 저는 그때 목에 밧줄 걸면서도 살고 싶었어요. 스승님은 살고 싶지 않아요? 조금도?

그렇게 묻는 두 눈은 정말 삶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건 내가 오래 전에 놓친 것이어서, 나는 인파 속에서 어린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마냥 막막함을 느꼈다.

결국 나는 뭐라 대답하는 대신 아키라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그리고 그 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키라의 어깨가 쳐졌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