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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8 23:01
진정령 ㅅㅍ
동영 나오는 순간 모든 창작물이 노잼의 강을 건넌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음......
다다음편까지는 섭회상 안 나오고 동영 이야기만 나옴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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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의 여름 공기는 무덥고 습하다. 운몽보다야 낫지만, 사실상 도긴개긴이다. 금광요가 왜 여기에 그렇게 집착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밟은 갑판 위로 느릿느릿 걸었다. 저기 뱃머리에서 환하게 웃으며 나를 부르는 조그만 얼굴을 향해서.

대륙에서 동영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된 경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일단 대륙을 떠난 이야기를 해야할 것이다. 부정세를 떠나 동영으로 향하는 배를 타기까지, 나는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관음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전말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금광요가 난 놈이기는 정말 난 놈이었다. 이릉노조 위무선도 그가 죽인 것이었다니. 이쯤 되면 금광요가 안 죽인 사람을 찾기도 힘들었다. 금광요는 자기 아버지와 그 부인을, 그리고 자기 이복형제를 죽였다. 자기 사촌을 죽였고 그걸 이릉노조 위무선에게 덮어씌웠다. 이복누이와 혼인하여, 결국 그녀와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까지도 죽인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쩌면 그가 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살아있었다면 그를 향한 온갖 경멸과 혐오를 오롯이 느껴야 했을 것이다. 의형제마저 하나는 죽고 하나는 폐관에 들었잖냐며 사람들이 고개를 젓는 것을 보아야 했겠지.

다들 금광요를 찌른 남희신의 심정이 어땠겠느냐고 혀를 차는데, 나만 오직 죽은 이의 심정을 생각하며 입 안의 살을 씹었다. 섭회상은 정말 정확히 두 배로 돌려주었구나.

하지만 섭회상의 복수가 완벽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금광요가 진실을 알고도 곱게 입을 다물고 죽었을 리 없다. 남희신은 물론, 관음묘에 있던 사람들 전체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섭회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 남은 의형제에게도, 친우라 생각한 몇 안 되는 이들에게도 일문삼부지라는 가면 뒤를 보여 버렸으니 그 마음이 대체 어떠할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섭회상은 복수에 성공해 행복할까? 그가 무엇을 더 원할까. 그가 왜 나를 살렸는지까지는 사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살려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까지는 그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섭회상을 생각하면 겨우 얻은 평온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그를 생각하기를 최대한 미뤘지만, 기침과 함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가 그 자체로 그였다.

지금 내 몸 상태는 따지자면 죽기 전 섭명결과 비슷했다. 내부 장기에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하라고, 나를 진맥한 의원은 말했다. 주화입마가 온 건 아니지만 아마도 영력은 평생 불안정해 회복할 수 없을 것이며, 언제 주화입마가 와서 죽을지 모른다고.

-왜일까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수련을 뭐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저...... 감당 못 할 일이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될 수 있냐고 묻자 의원은 심중의 병이야말로 가장 괴이하다는 고지식한 답을 내놓았다. 나야 의원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이런 게 인과응보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억울해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다. 섭회상의 눈 앞에서 피를 쏟으며 죽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의 눈 앞에서 섭명결과 똑같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하지만 이걸 금광요가 나를 데려가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면......

데려가지 않은 것일지, 데려가지 못한 것일지, 또는 둘 다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멀어지는 육지를 바라보았다. 검푸르게 출렁거리는 물을 바라보다 보면 저 포말만큼 새하얀 섭회상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어차피 죽으나 사나 더 이상 의미 없는 삶이래도 떠나기는 해야 했다. 내가 남아봐야 섭회상에게 또 하나의 악몽 외에 뭐가 더 될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는 이 관계를 마무리지어야 했다. 내가 먼저 그를 찾아갔으니, 이번에도 내가 알아서 그를 떠나는 게 옳았다.

나도 내가 어떤 눈으로 그를 보게 될지 알 수 없었고,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만약을 만약으로 비워두는 것 외에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2년 만에 밟게 된 동영 땅은 기억 속에 비해 무언가 크게 달라졌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심하게 추운 것도 익숙했다. 겨울에 북해도를 가는 건 살인행위였지만, 금광요가 염두에 두고 있던 지역이 여기이니 어쩌겠는가. 금광요가 동영에 오려고 했던 이유 자체는 나도 안다. 여기 저기 대륙이나 해동에서 온 자들이 조그만 군소국가를 세우고 있는 게 현재의 동영 상황이니까 거기 편승하려는 생각이었을 거다.

그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동영에 왔다고 말할 심산은 아니다. 찾아보니 금광요의 사람들도 아직 여기 오지 않은 듯했는데, 내가 뭐라고 그의 이름을 여기 걸겠나. 이건 그냥 다 내 욕심이었다.

-왔어.

대륙과 별 다를 것 없는 모래를 밟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게 금광요에게 한 말인지 나 자신에게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늘과 땅이야 대륙이든 섬이든 무엇이 다르겠냐만, 다른 모든 건 다 달랐다. 제법 큰 왕국이 있는 남쪽이라면 모를까, 부족 단위의 원주민이 대부분인 이 북쪽 땅은 동영 내에서도 고립되어 있어 말도 잘 안 통했고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무술과 주술을 사용했다. 은이니 금이니 하는 것도 이들에게는 쌀보다 매력이 없었다. 내가 조사한 동영의 지역들 중 가장 정보가 없던 게 북해도일 정도였다. 그런데 금광요는 왜 여기를 골랐을까. 가장 척박하여 사람들의 관심이 없는, 안전한 땅이 여기였던 걸까? 아마 나는 답을 영영 모를 것이다.

이렇게 평생 모를 것으로 남겨둔 것만 벌써 몇 가지인지. 죽은 이들은 항상 풀리지 않는 매듭을 산 사람의 가슴에 묶어놓고 가나 보다. 사실 죽음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만약 금광요가 나를 속이고 죽였다면 나는 그를 이해하며 죽었을 것이다. 그 반대가 성립하리라는 확신이 없어서 내가 이렇게 헤매는 게 아니겠는가. 결국은 내가 그를 믿지 못했어서. 그래서였다.

그러니 이 모든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르지만 나는 움직였다. 그나마 도시라 할 법한 곳이 있는 북해도 남쪽에 자리를 잡는 데까지 한 달이 채 안 걸렸다. 거기선 말뜻이 얼추 통했지만, 말 그대로 얼추였다. 내가 외지인이라는 걸 다들 알았다. 하기야 사람들 사이에 혼자 껑충 큰 키만 봐도 일단 내가 여기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러나 존재감을 지우고 시선을 따돌리는 것 자체는 늘 하던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일상은 잠잠하게 흘러갔다.

여기는 아직 절이 들어온 곳이 거의 없어서, 절 대신 근처 신목 앞에 가서 지전을 태우는 것 외에 나는 객잔 방을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고, 상한 건 금단이나 심장일 텐데 이상하게 기침이 계속 나와서, 괜히 여기 저기 나다니다간 폐병 환자로 사람들 눈에 찍혀 뭔가 일을 치르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무 할 일 없이 남는 시간 동안 나는 주로 잠을 잤고, 명상을 하거나 생각에 잠겼다. 아니면 죽은 이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정말 반쯤 미쳐서 금광요의 환상을 보거나 그의 존재 같은 걸 느끼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차라리 시원하게 미치면 좋을 텐데 그러지도 못해서 그렇게 어정쩡한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니 그날의 일은 말 그대로 순전한 우연이었다.

봄이 오고 날이 조금 풀려, 이제 슬슬 해 뜨는 시간도 밝아지고 안 보이던 짐승도 보이고 할 때였다. 그날 나는 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신목이라고 이런 저런 금줄로 표시가 되어있는 나무는 정말 크기가 꽤 큰 녹나무였다. 나는 신령한 기운 같은 건 느끼지 못하고, 이 나무를 베려면 몇 명이 필요할까를 생각하다가 혼자 허탈하게 웃곤 했다. 그래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나무는 산 깊은 곳에 있어서, 그동안 그 앞을 오가며 사람을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사실, 목에 줄 매단 사람을 마주친 건 인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시발......이라고 할 것도 없다.

이미 죽은 시체를 발견한 거라면 마음은 안 좋아도 더 편하긴 했을 거다. 근데 목에 밧줄 걸고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리려는 여자를 보는 건 영 불편한 일이었다. 하필 또 눈이 마주쳐서 모른 척 갈 수도 없었다. 엉거주춤 서 있자니 여자가 다 울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리 가요. 뭐 좋은 거라고 보고 있어요?

내가 네 감사합니다, 하고 후다닥 떠날 수 있는 인간이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여기 있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기침했다.

-일단 내려오지 그래요.

-참견하지 마요.

목소리에서 어린 티가 나서 실눈 뜨고 자세히 쳐다보니, 여자라고 지칭하기도 뭣한 십대 중반 정도의 어린애였다. 나는 기가 막혀서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와.

-왜 갑자기 반말! 악!

떽떽거리다가 나뭇가지를 놓친 여자애가 내 눈 앞에서 허무하게 목이 꺾이기 전에 다행히도 내 손이 먼저 움직였다. 내 검이 날아갔고, 내 팔은 여자애가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기 전에 그 몸을 받아냈다. 줄을 끊고 떨어진 검이 내 발치에 꽂히는 것을 여자애는 씨근덕거리며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자기를 내려주기도 전에 빽 외쳤다.

-살려주세요!

-살려줬잖아.

진심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대답하며 여자애를 내려주었는데, 생각보다 더 키가 작았다. 겨우 내 쇄골께에 닿는 정도였다. 다 헤진 옷과 푸석한 머리카락으로 미루어 보아 가난하고 평범한 집 애 같은데, 뭘 어쩌다 여기서 목을 매려고 했을까. 가뭄이 왔던 거라면 이해해도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검집에 넣는 사이, 내 검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던 여자애가 갑자기 산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 말라고 하는 것도 웃겨서 나는 그냥 그걸 묵묵히 들어주었다. 울음소리를 배경 삼아 숲을 둘러보는데, 이제 환하게 밝은 숲은 무관심하게도 조용했다. 나는 그보다는 여자애에게 조금 더 동정심을 가지는 쪽에 가까웠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여자애가 뭉개진 발음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또 살려달라는 거여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너 죽인댔어? 뭘 자꾸 살려달라는 거야.

-그럼 저 좀 구해주세요, 수행자님......

그 말에 나는 멈칫했고, 여자애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작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팔려가기 싫어요. 저 좀 데려가 주세요.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잘 알 것이다. 알겠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거절도 하지 않았더니 여자애는 자기 사정을 그날 처음 본 나에게 속속들이도 털어놓았다. 불쌍한 것과 별개로 기가 막혀서 쳐다보는데, 그 눈이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이어서 차마 말을 그치게 할 수도 없었다.

이야기 자체는 흔하디 흔했다. 굳이 동영뿐만 아니라, 대륙이든 그 어디든 어린 소녀는 자주 거래되는 상품 중 하나였다. 사내자식 팔아먹는 경우는 얼마 못 봤는데 딸자식은 그렇게들 팔아댄단 말이지. 술이나 처마시고 도박이나 하느라 집에 거의 들어오지도 않던 놈팽이가 술값을 빚으로 달아놓은 채 죽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놈팽이가 이 애 아버지였다. 남은 빚이 얼마든 이자가 붙었다면 빠르게 눈덩이처럼 불어날 텐데, 십 대짜리 여자애가 그 빚을 갚을 방법이 무엇이겠나. 아마 얘는 더 남쪽의 도시로 끌려가 어느 가문의 시비가 되거나 사창가로 빠질 것이다. 전자면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판이니, 이렇게 세상 무너져라 우는 것도 이해가 안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뭘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나는 올해를 넘길지 아닐지도 모르는 몸이야. 그런데 내가 너한테 뭘 해줄 수 있어?

기침하며 그렇게 묻자, 그제야 여자애가 찬찬히 울음을 그쳤다.

-저, 전...... 일 잘해요. 뭐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고......

-그래서?

-그러니까......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으로만 가면, 어떻게든......

할 말이 없었다. 심란해서 결국 나는 담뱃대를 다시 꺼내들었다. 불 붙여서 한 모금 길게 들이마셔도, 머리가 영 안 돌아갔다.

-너 다른 가족은 없어?

-없어요.

-그건 다행이네. 근데 너는 내가 인신매매범이면 어쩌려고 나한테 도와달래?

툭 던지듯 묻자 여자애가 다시 비죽비죽 울기 시작했다.

-나도 몰라요. 모르겠단 말이에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울기만 애를 보면서 나는 담뱃대 끝을 이로 깨물었다. 이 조그맣고 꼬질꼬질하고 맹랑한 여자애는 그 누구도 닮지 않았는데. 그런데, 도무지 내 옷소매를 잡고 흔드는 걸 떨칠 수 없었다.

내가 정말 멀리로만 가면 되는 거냐고 물으려 했을 때였다.

-어이!

왜 좆도 아닌 악역들은 말투나 목소리나 다 비슷할까. 한숨을 쉬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엔 농기구를 든 남자 서너명이 있었다. 기세 당당하게 외쳐놓은 것 치고, 그들은 나를 보더니 주춤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이 여자애 얼마야?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 받았다. 상관 없었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한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당신들 목숨값보다 비싸?

이 여자애 몸값을 흥정해볼까 한 일 초 정도 생각하다 관뒀다. 어린 애 팔아먹는 놈들과 거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래 이런 건 기선제압이 중요한 거라, 나는 따로 감춰두었던 검을 꺼냈다. 아마 태어나서 영검을 본 적은 한 번도 없겠지만, 대충 뭐에 쓰이는 물건인진 다 알 것이다. 남자들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 중 한 명이 외쳤다.

-외지인은 우리 일에 참견 마라!

-싫어.

내가 왜. 내 대답에 상대는 입을 꾹 다물더니, 자기들끼리 눈치를 주고받았다. 그리곤 뒤돌아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졌다. 저거 분명 사람 더 데려오려는 거다. 나는 작게 손가락을 움직여 저 등판들을 향해 추적술을 걸었다. 예감이 좋지 않을 때는 그 예감을 따르는 게 맞다는 것을, 나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잘 알고 있었다. 대륙에서의 마지막 일이 그 증거였다.

그때, 금광요를 기절시켜서라도 여기로 데리고 왔다면. 나는 아주 잠시 동안 그런 쓸데 없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잘 끝났다고 좋아할 일이 아닌 것을 나는 알고 있었는데, 아직 어려서인지 어느새 내 뒤에 숨어있는 이 여자애는 모르는 듯했다. 다리 힘이 풀렸는지 내 허리를 잡고 주저앉은 여자애를 돌아보며 나는 혀를 찼다. 이제 멀리 데려다만 주면 되냐고 내가 물으려 할 때였다. 여자애가 나한테 말 그대로 매달렸다.

-수행자님! 수행자님, 저도 칼 쓰는 거 가르쳐주세요! 제발!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대꾸할 힘도 없어서, 나는 그냥 여자애한테 허리춤이 붙잡힌 채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걔가 여전히 내 뒤에 붙은 채 비틀거리며 뒤따라왔다.

-제...... 제 이름은 아키라예요!

안 물어봤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바느질도 잘 했고, 그리고......

마찬가지 물어본 적 없었다. 그리고 검 배우고 싶다면서 바느질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절 데려가시면 분명 선생님께 도움이 될 거예요.

-목에 걸린 밧줄부터 풀지.

-네!

허겁지겁 꿈틀거리는 등 뒤의 몸을 느끼며, 나는 뭐 얼마 남지도 않았을 내 인생이 뭔가 상당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산을 내려가볼까 생각하다가 보니까, 여긴 산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는 마을이, 서쪽에는 바다에 접한 항구도시가 있는 구조였다. 그러니 이 여자애는 목을 매려고 굳이 산 건너편까지 온 거였다. 그게 좀 이상했다. 원랜 내가 얘를 만날 일이 없어야 했는데.

-마을신님 근처에서 죽으면, 죽어도 좀 더 좋을 것 같아서...... 밤새 헤매다가.

여자애가 웅얼거렸다. 그런 그 애를 잠시 보다가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종종걸음으로 울리는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여자애는 걸음이 느렸다. 나 혼자서는 그냥 걸어도 반의 반 시진도 안 걸리는 거리를 걔를 데리고 걷자니 거의 한 시진을 꽉 채워야 했다. 보통 시골 애들은 다람쥐보다 발 빠르고 산도 잘 타는데, 얘는 대체 뭐지. 그런 생각을 하며 쳐다보자, 애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해준다는 말도 안 했는게 냅다 감사 인사부터 박는 게 어쩐지 섭회상과 닮은 듯 영악하게 느껴져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잘 지내고 있을까. 부정세의 정원에는 꽃이 피었을까. 외롭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안 할 방법이 없었다.

죽으면 안 하게 되겠지만, 그게 또 과연 그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발치에 돌이 걸려 비틀거리는 여자애를 붙잡았다. 팔이 너무 말라서 내 손에 다 쥐이고도 남았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인간은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한댔나. 그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나는 어쩌면 앞으로 누구를 보든 금광요를, 또는 섭회상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잔기침을 삼키며 말했다.

-업혀라.

얘 얼굴과 이름을 내가 그런 식으로 기억하기 전에, 얼른 얘를 어딘가에 떨궈둬야 했다.

문제는 산기슭에 다다랐을 때 발생했다. 눈 앞에 보이는 빨간 줄을 나는 잠시 멈춰선 채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까 그 추레한 차림의 인신매매범들이 자기 마을이 아니라 도시로 향했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내가 머무는 곳을 찾으러 간 거거나, 아니면 도시에 있는 연줄을 찾아간 거거나. 물론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예감이 좋지 않은 건지.

그 이유를, 나는 내가 머무는 객잔까지 이어진 붉은 줄을 보며 깨달았다. 붉은 줄. 내 등에 업혀있던 여자애가 비틀거리며 내려왔고, 나는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천천히 객잔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객잔 주인은 나를 보더니 눈물을 쏟았다. 누가 봐도 내가 가게에 뭔가 해코지를 할까 봐 짜내는 가짜 눈물이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객잔 주인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내 방 안은 가관이었다. 그러나 침대가 어떻게 되고 옷가지가 어떻게 됐든 내가 신경쓰는 건 그게 아니었다. 구겨지고 밟혀 가운데 박힌 홍옥이 떨어져 나간 오사모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봇짐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나는 바닥에서 먼지투성이 오사모를 주워들었다.

섭회상의 손에서 금광요의 오사모를 받아들었을 때 마치 온몸의 혈관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면, 이번엔 한없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 차이의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눈 앞의 붉은 선을 따라 걸었다. 문득 드는 생각에 잠시 멈춰선 게 다였다. 뒤를 돌자 헉헉대며 나를 따라오던 여자애가 멈칫했다. 빳빳하게 굳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말했다.

-알아서 잘 따라와.

그 뒤의 기억은 자주 그렇듯 무척 선명하면서도 모호했다. 마치 그림처럼. 사람들은 몇 번 나와 부딪히고 나서는 아예 도망을 가거나 길가에 붙어 수군거렸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붉은 선에 집중했다. 이윽고 그 선은 뻥 뚫려있는 어느 나무 문 안으로 이어졌다. 놀란 얼굴로 문 앞을 막아선 남자 서넛을, 나는 밀치고 들어섰다.

계단을 내려가자 나온 지하 도박장은 퀘퀘한 연기로 가득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들 중 익숙한 얼굴 셋을 나는 곧바로 포착했다. 머리로는 그들에게 다가가 최대한 이성적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떨리는 숨을 내뱉었을 때는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입 안에 다시 도는 피맛은 이제 익숙했다. 왼쪽 눈 앞이 조금 붉고 흐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었든 놀랄 것은 없었다. 몸은 헐떡이느라 바빴지만, 내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했다.

주먹에 칠해진 검은 피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몸들과 탁상의 잔해들을 발로 헤쳤다. 홀로 반짝이는 홍옥을 주워들었고, 피가 묻은 봇짐을 마찬가지 주워들었다. 천을 풀러내자 전에 묶었던 그대로 얌전히 누워있는 족자가 보였다.

그렇게 본래 내 것이었던 짐을 등에 메고 이 어두운 곳을 나서려는데, 발길에 채인 몸뚱이 하나가 벌러덩 뒤집히더니 버둥거렸다. 피가 묻은 얼굴엔 눈코입이 다 제대로 박혀있었지만 입 안으로 이 몇 개가 보이지 않았다.

-괴물......

피에 젖은 눈에 서린 건 원망이 되기에는 아직 먼 공포였다. 떨리고 뭉개진 발음을 듣다가, 나는 그대로 그 공간을 나왔다.

괴물이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문 밖으로 발을 디뎠다. 문 밖은 환했고 소란스러웠다. 모여있던 사람들 중 더러는 도망가고 더러는 소리를 지르고 더러는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떨어져 제일 앞에 혼자 서있는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오래 전, 처음으로 누군가 죽는 걸 보아야 했던 내 얼굴이 바로 저랬을까. 하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있었다. 그게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다. 그렇잖은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 쟤를 내가 데려가야 하기는 할 것이다. 여기 남겨두면 팔려가기 전에 분명 누군가에게 죽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이 직접 선택할 일이다.

햇빛 아래 슬쩍 내려다본 내 몸은 피에 여기저기 젖어있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머리 위로 무겁게 기울었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여자애에게 다가갔다. 다 쉰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갈 거야?

대답은 온전히 여자애의 몫이었다. 여자애의 눈망울이 떨리더니 눈물이 흘렀다. 내 옷자락을 꼭 쥐는 작은 손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여자애를 안아들었다.

굳이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끌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어검을 했다.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아이를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나는 오른쪽으로 기운 태양을 슬쩍 바라보았다. 남쪽으로......

-수, 수행자님!

겁에 질린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내려다보니 여자애의 가슴팍이 피로 젖어있었다. 순간 놀라서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러자 여자애가 나에게 덥썩 안기며 비명을 질렀다. 그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그 피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각혈하는 사람 처음 보냐고 해봐야 얘 귀에는 들리지도 않겠지. 나는 경기를 일으키는 몸을 끌어안은 채로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숲 한가운데였다. 아마 북해도 최남단까지 왔을 거라 이제 또 바다를 건너야 할 텐데, 이 몸 상태로는 용궁행 직행일 테니 쉬기는 쉬어야 한다. 도시를 벗어난 지는 꽤 되어 혹시 모를 추적을 걱정해야 할 위치는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인 걸까.

분명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박였는데, 눈을 뜨자 한밤중이었다. 옆에서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고 뭔가 훌쩍거리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가슴께에 번지는 격통 때문에 나는 몸을 수그려야 했다. 귓가에 이명이 울릴 정도였는데,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조그만 얼굴이 내 눈 앞에 불쑥 나타났다. 흐려졌던 초점이 잡혔다.

-이제 괜찮아요? 진짜 무서웠어요!

엉엉 우는 얼굴에게, 대답 못하고 나는 나직한 신음만 흘렸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도 그건 아픈 사람의 신음보다는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애가 눈물을 뚝 그쳤다. 겁먹은 얼굴로 울음을 참는 걸 보면서 나는 다시 기절할까...... 하다가.

-내 짐.

-여기! 여기 있어요.

그제야 나는 여자애가 내 봇짐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워서일 수도 있겠지만, 누가 봐도 추워서 뭐라도 끌어안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짐을 지키고 있는 쪽에 가까워보였다. 나는 불안과 안도감이 딱 반반씩 섞인 여자애의 새까만 눈동자를 보다가, 토하듯이 기침을 했다.

-많이 아파요?

-죽겠다.

그 말에 또 겁을 먹고 휘둥그레지는 눈이 조금 웃겼다.

-말했잖아.

나는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물었다.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야. 그래도 나를 따라오려고?

여자애는 거의 나라를 잃은 듯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전 이제 갈 데도 없어요. 당...... 아니, 수행자님이 거기를 완전히 엎어놨잖아요. 돌아갈 곳도 없고, 저 혼자 돌아다니다간 한 달도 못 채우고 죽고 말 거예요.

-한 달도 많다.

-맞아요.

자기와 대화하는 걸 보면 내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 싶었는지, 여자애의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러자 제법 뾰족하게 솟은 눈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안 추워?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밤에는 추울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멍하니 두 눈을 깜박이자, 여자애는 나를 어색하게 곁눈질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그저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칠 때까지 계속 흘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랬지?

-아키라요.

-그래. 정아.

내 말에 아키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저 여자가 미쳤나 생각하는 게 표정으로 다 드러났다.

-내 이름 아키......

-그래. 아무튼 고맙다. 이만 자 봐. 불침번은 내가 설 테니까.

말이 안 된다는 듯 나를 훑어보는 아키라에게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어차피 해 뜨고 출발하려면 속을 다스려야 해. 너까지 깨어있으면 방해 되니까, 넌 이제 자라.

아키라는 대답 대신 머뭇거렸다.

그래놓고 반 시진도 안 돼서 곯아떨어진 것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안 지을 순 없었다. 웃기다, 정말. 곤히 잠든 얼굴엔 아직 젖살이 붙어있는데도 고된 삶의 흔적이 역력했다.

내가 어릴 때도 저런 느낌이었을까. 내 인생을 되짚어보니 참 파란만장하기도 했다. 파란만장하다못해 이젠 너무 구질구질했다.

그냥 죽어도 상관 없지 않을까. 이미 내가 금광요를 배신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그가 지전 좀 받는다고 더 안락한 사후를 누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외엔 내가 더 살아있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섭회상...... 사실 그의 부탁이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그를 다시 보는 일은 평생 없을 텐데.

하지만 보고 싶다. 그 단순한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아키라가 베개로 쓰고 있는 봇짐이 눈에 들어왔다.

이러니 해탈해 부처가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간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도 마음 속에서 치솟는 애오욕에 어쩌지를 못한다.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를 보고 싶은 마음 그 자체가 애틋해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