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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6 22:29
진정령 ㅅㅍㅈㅇ
외전3은 섭형제 부모 스토리인데 연재 중간에 급 보고싶어져서 적은 거라 사실 본편이랑 크게 이어지지는 않음.
그래도 본편 더 전개되고 올리는 것보다 지금 올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올림.
좀 긺 ㅈㅇ 이상한 데서 끊김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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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로부터 네 혼처가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신기했을 뿐이다. 석녀를 아내로 들이고자 하는 선문세가 종주가 있다니. 아니나 다를까, 정해진 혼처라는 게 재취 자리라는 말을 듣고 여자는 납득했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훌륭한 아들이 이미 하나 있다고 했다.
-잘됐네요.
여자는 한 때는 아버지의 것이었고 지금은 오빠의 것인 종주실 책상 모서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따지자면 여자가 완벽하게 불임 판정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일 년에 절반 정도를 자리보전하는 신세에, 선문이든 속세든 부인에게 요구하는 제1 덕목을 그녀가 수행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이유로 여자는 자기는 평생 합환주 마실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오빠에게 재취 자리는 싫다고, 평생 오라버니와 함께 살겠다고 떼쓰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많겠죠? 그 사람.
-나와 동갑이다.
그 말에는 여자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오빠와 겨우 네 살 터울이었다.
놀란 건 그 사실 때문이었지만, 그 뒤를 따라 이어지는 희미한 불안감 때문에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와 동갑이고, 아들이 하나 있으며, 상처한 사람. 여자는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청하 섭씨인가요?
여자의 질문에 그녀의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자는 백 개가 넘는 선문 가문 중 제법 그럴 듯한 가문의 여식이었고, 그녀의 오빠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때문에 이른 나이에 종주가 되어 여기저기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가 어쩌다가 청하 섭씨의 종주와 우정을 다지게 된 것인지 여자가 알 길은 없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가 청하 섭씨의 종주를, 그러니까 그 남자를 처음 만난 건 어언 십 년 전의 일이었다. 그날은 화창한 봄날이었지만 그녀의 하루는 그렇지 못 했다. 겨울에 앓아누웠으나 봄이 와도 그녀의 몸상태는 그대로였고, 그녀는 창문 밖으로 어른거리는 꽃가지에 만족하는 데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침대 옆의 화병을 깨버리고 의기양양하게 바깥으로 나갔는데, 얼마 걷지 않아 눈 앞이 어질어질해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흙바닥에 쓰러진 게 창피한 것보다도, 땅에 넘어질 때 세게 부딪친 무릎이 아픈 것보다도, 여자는 그 나이에 이미 자기 인생이 원망스러워 울었다. 차라리 어지러운 것이나 이마가 펄펄 끓는 것, 온몸이 아픈 것은 괜찮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방 밖에 나가고 움직일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두 배로 아파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니?
갑작스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거기엔 햇빛을 가린 검은 옷의 남자가 서 있었다.
저승사자인가 봐. 그런 생각을 하며 여자가 정신을 놓으려던 차, 남자가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일으켰다. 휘청거리던 그녀는 어느새 남자의 등에 업힌 채였다. 이대로 저승으로 끌려가고 싶진 않아 힘없이 반항하는 그녀를,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더 단단히 받쳐 업었다. 여자는 잔뜩 열뜬 채 중얼거렸다.
-저 데려가지 마세요, 저승사자님......
-뭐?
-죽기 싫어요.
남자는 멈춰선 채 잠시 굳어있었다. 그 사이를 틈타 여자는 호소했다.
-제가 일찍 죽을 거란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건 너무 빨라요. 저 데려가지 마세요. 데려가시면 안 돼요. 저승사자님은 모르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아픈지, 힘든지...... 살고 싶은지 저승사자님이 알아요?
기력이 있었다면 마치 악을 쓰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듣기에도 힘없는 목소리에, 여자의 감정은 더 북받쳤다.
-아무도......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살고 싶단 말이에요. 아프기 싫고 죽기도 싫어요.
여자가 십이 년치 억울함을 토로하는 동안 묵묵히 들어주던 남자는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알 것 같은데. 그 마음.
그렇게 여자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남자는 여자를 업고 계속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차갑고 단단한 등에 열 오른 뺨을 댔다.
저승사자같이 초월적인 자기 고통스러움을 이해해준다니 위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나이에 품게 되는 비장함에는 본래 좀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다시 자기 방에서 눈을 떴을 때 여자는 당황했다. 몸을 일으킬 힘이 없어 눈동자를 굴려 침대맡을 보았는데, 그녀의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오빠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자네 동생이 깨어난 것 같군.
그때 남자의 그 고요하고 다정한 눈동자를 여자는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었다.
남자를 만난 건 그 날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그가 저승사자가 아니라 청하 섭씨의 소종주로, 오빠의 고소수학 동기이자 친구라는 것을 여자는 그 날 바로 알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 달리 평을 남기지 않았다. 청하 섭씨 직계손들이 대대로 단명하고, 남자도 그 예외가 아니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싫어요.
불쑥 내뱉어진 여자의 말에, 여자의 오빠는 놀란 듯 두 눈을 깜박였다. 여자는 그가 무슨 말이냐고 물을 기회를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 사람은 싫어요! 그 사람네 가문에 시집가기 싫다구요!
-얘가 미쳤니? 왜 이래?
오빠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 섭씨는 오대 세가 중 하나야. 우리 가문이 결코 약하지 않은 가문이라 해도 오대 세가에는 비할 수 없는 것 몰라?
-제가 알 바예요?
-무엇보다, 이 녀석아. 너는......
여자는 오빠가 이어서 할 말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놓고 오빠 앞에서 귀를 막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또렷이 그녀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시집 가기도 어려운 몸인데, 섭종주가 우리 집안의 구혼을 받아준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고......
-싫다구요! 나는 그 사람이랑 혼인하기 싫은데 내가 왜 고마워 해야 해요, 왜!
서러워하고 싶지 않았다. 서러우면 더 비참했으니까. 그러나 그게 여자의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녀의 빈약한 몸이 그녀가 원해 얻은 게 아닌 것처럼. 그녀는 늘 해도 해도 끊이질 않는 기침처럼 오빠에게 토해냈다.
-오라버니는 나를 팔아넘기려는 거잖아요. 매양 골골거리기만 하는 여동생 송장 치우기 싫어서 떠넘기는 거라고 말을 해요!
딱딱하게 굳는 오빠의 얼굴을 보며 여자가 느낀 건 해방감이었다. 그러나 오빠가 말했다.
-너, 오냐오냐해주는 데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네가 뭐라든 넌 우리 가문의 직계손이야. 누릴 수 있는 호사는 모두 누리고 의무는 거부하라 누가 가르쳤지? 부모님은 우릴 그리 가르치지 않으셨어.
-오라버니야 그렇게 입바른 소리 하기 쉽지! 하지만 말해보세요. 내가 무슨 호사를 누렸는데? 호사를 누린 건 오라버니뿐이야.
여자는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오라버니는 사내로 몸 건강히 태어났잖아. 오라버니가 뭘 알아? 나라고 수련이 하기 싫어서 안 하고, 집안을 돌보기 싫어서 안 돌본 줄 알아요? 나는 숨만 쉬어도 힘들단 말이야. 정말, 힘들다고요.
알아주기를 바라진 않았다. 그렇게 큰 것을 바라본 적 없었다. 그저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큰 욕심이었다. 벌써 숨이 차 헐떡이는 여자와 대비되게, 그녀의 오빠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네 말이 맞아. 네가 얼마나 힘든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 하지만 이것 하나는 내 알지. 네가 우리 가문에 태어나지 않고 길거리에, 하다 못해 평범한 여염집에 태어나기만 했어도 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다. 그러니 너는 이 가문에 이바지할 의무가 있고, 우리는 섭씨와의 혼약이 필요해.
-웃기지 마요.
여자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건강했으면 벌써 다른 집에 팔아넘겼을 거면서. 오라버니는 나를 싫어하는 거잖아. 나 때문이니까. 나 때문에......
-그만.
그렇게 여자의 말을 끊을 때, 그녀의 오빠는 거의 그녀만큼이나 음울한 얼굴이었다.
-왜 자꾸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서 너 자신을 상처입히니, 이 녀석아.
여자는 대답하는 대신 입을 앙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오빠의 피곤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섭 종주는 내 친우야. 너를 홀대할 리 없는 데다, 네 몸 상태도 아주 잘 알고 있지. 아이를 요구할 일 없고, 재취라곤 해도 정실 자리니 널 무시할 사람 없어. 무엇보다도 그는 의를 아는 남자야. 그 어느 여인이든 부군으로 원할 만한 남자란 말이다. 네가 늘 말하지 않았니, 그저 평범한 다른 여인들처럼 살고 싶다고.
잠시 말을 멈췄던 오빠가 한결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든 청하 섭씨와 뭉쳐야 한다. 앞으로 온약한과 기산 온...... 아니다.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서 뭣하겠니. 그저 알아두거라. 이 혼인이 너만을 위한 일은 분명 아니어도, 너를 위한 일인 건 사실이야.
-동생을 곧 죽을 남자한테 시집보내면서 그런 말을 해요? 우습게.
여자는 그새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오빠는 어찌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그런 그녀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느릿느릿 다가와 자기를 감싸안는 오빠를, 여자는 밀어내지 않았다. 그럴 힘도 무엇도 없었다.
-기원해 보자꾸나. 그와 네가 백년해로하기를.
여자는 한참동안 대꾸하지 않고 오빠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러다가 오빠가 자기를 놔줄 때쯤 말했다.
-혼인하느니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예요.
그 말에, 여자의 오빠는 피식 웃으며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네 하나뿐인 오라비야. 내가 너를 몰라? 너만큼 삶에 간절한 녀석이 없는데, 나더러 그 날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정말 분하지만, 오빠의 말대로였다. 눈깜짝할 새 몇 달이 흘러, 친영례 날 여자는 남자를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보았다. 붉은 옷을 입은 칠척 장신의 남자는 면사 너머로 보여서인지 더 우스꽝스러웠다. 여자는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웃음이 터지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그날 밤을 다들 초야라고 부르지만, 여자에게는 그녀가 태어난 곳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흥겹고 왁자지껄한 소음이 여자는 못 견디게 싫었다. 그냥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신방의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저절로 경직되는 몸을 느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남자는 침대로 다가오는 대신 문 앞에 서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방이 이렇게 조용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저 밖에 있는 누구든 들어와 저 남자를 데려가줬으면. 그렇게 바라며, 여자는 아주 잠시 동안 소리를 지를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리하는 대신 천천히 자기 얼굴을 가린 면사를 걷었다.
아주 꼬장꼬장한 가문이라면 어디 남편이 걷어붜야 할 천을 직접 걷느냐며 소박을 맞혀야 하니 뭐니 난리가 날 수도 있었다. 어디 해보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여자는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막상 남자의 다정한 무표정을 보자 몸에서 힘이 빠졌다. 저 남자가 왜, 뭐라고 자기를 저런 눈으로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하나도 변한 게 없군.
그 웃음기 띈 목소리.
남자가 자기 옆에 와서 앉는 동안 여자는 그저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남자에게서 몸을 물렸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에요?
남자는 대답 대신 생각에 잠긴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그런 그를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남자가 나직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일 때까지. 여자는 불쑥 말했다.
-난 혼인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어요.
그 말에 남자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윽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적어도 이제 당신이 죽고 싶을 일은 없겠군.
-뭐라고요?
-나와 혼례를 치렀다는 건 당신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선택을 했다는 뜻이지.
그러면서 남자는 붉은 면사를 여자의 머리에서 아예 풀어내렸다. 그의 손끝이 눈썹을 스치자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여자는 잔뜩 열이 오른 얼굴로 그의 두터운 팔을 밀쳐냈다.
-호색한!
아주 잠시 동안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는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여자가 생각하기에도 호색한이라는 외침은 좀 민망했으나, 막상 남자가 웃는 모습에 화가 났다. 파르르 입술이 떨리는 것을 느끼는데, 남자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 화려한 머리장식을 올린 채로 잠들 생각인가?
-당신이 알 바예요?
-잘 준비를 하는 게 호색한 소리를 들을 일이면, 이 세상에 호색한 아닌 사람이 없겠군.
여자는 이제 정말 정말로 남자가 싫었다. 그녀가 무섭게 노려보든 말든, 남자는 장포를 끌러 침대 밑으로 떨어뜨리더니 침대 맡 조그만 나무 탁상 위의 합환주 잔을 집어들었다.
-당신은 술을 못 할테니, 이건 나 혼자 마시겠소.
-누구 마음대로요.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잔을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남자는 당연히 그녀에게 잔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가 술을 입 안에 털어넣는 것을 바라보다가, 여자는 말 그대로 미친 짓을 했다.
첫 입맞춤에서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술맛이 났다. 여자는 다 삼키지 못하고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술을 느끼며, 그리고 자기가 술을 다 삼키고 난 뒤까지도 뻣뻣이 굳어있는 남자의 몸을 느끼며 생전 처음 느껴보는 승리감에 취했다. 입술을 뗀 여자는 남자를 노려보는 눈초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남자가 눈을 깜박이며 몸에 힘을 풀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족하오?
그 질문에, 여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럴 필요 없고 피곤할 테니 어서 잠을 청하라는 남자를 더 세게 노려보았다.
-초야는요?
남자는 대답 대신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태도가 여자를 더 날카롭게 한다는 것을 그가 알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고 그러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의 옷소매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날 소박맞히려는 거예요? 왜요, 막상 얼굴 보니까 마음에 안 드나요, 내가?
그 질문에, 남자는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잔잔한 눈빛으로 이미 대답이 되었지만, 여자는 모른 척 떼를 썼다. 술기운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초야 안 치르고 잘 생각이면, 내일 송장 치를 생각 해야 할 거예요.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그러면서 울먹거리던 그녀는 묵직한 팔이 자기 허리를 감싸 당기는 것을 느끼며 헛숨을 들이켰다. 코앞에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여자는 눈물 맺힌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비치는 자기 얼굴이 보였다. 여자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죽어버릴 거라구요.
-당신을 죽게 할 수는 없지.
그렇게 속삭인 입술이 입술 바로 위에 다시금 맞닿아올 때, 여자는 남자가 자기에게 속아넘어간 건지 아니면 자기가 그에게 속은 건지 물었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초야는 느리고, 아프고, 무섭고, 우습고, 뜨겁고, 따뜻했다. 여자는 아마 자기가 내일 느지막한 오후나 되어야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거의 기절하듯이 정신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뺨을 스치는 까슬한 손의 감촉이, 그녀에게 마치 마지막 순간처럼 각인되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까지 남자가 자기 옆에 있으리라고 여자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여자가 눈을 떴을 때, 남자는 무척 태연한 얼굴로 여자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남자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몸이 아파서였다. 그래서 시끄럽다고 소리도 못 지르고 이렇게 힘이 없는 게 분명했다. 남자의 옆자리에 나른히 누운 채, 여자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저 천장은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대신 부정세의 천장을 보게 되겠지. 부정세...... 여자는 그 이름을 되뇌이며 멍하니 입을 열었다.
-부정세는 어떤 곳인데요?
-글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니, 당신이 가서 직접 보는 게 제일 좋지 않겠소.
여자는 그거 설명도 못 해준다는 건가 싶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지.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곳을 닮았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했어.
여자는 대꾸하는 대신 아랫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말리듯 아랫입술을 스쳐서, 그냥 그것까지 깨물어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끄떡없었다.
바위 같은 사람. 그러나 바위는 죽지 않는다. 쪼개질 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여자는 물었다.
-형님이라 불러야 하려나? 이전 섭부인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남자는 별달리 상처받거나 경직된 얼굴이 아니었다.
-내 오랜 친우였소.
친우? 친우랑 몸을 섞고 애를 낳아요, 당신은? 우리 오라버니도 당신 친우인데 어디 둘이 한 번 같이 해보지 그래요? 그런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여자는 참았다. 그 대신 물었다.
-당신 아들은요? 몇 살인데요?
-올해로 네 살이군.
여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되물었다.
-네 살? 그러면 그 애 모친은 대체 어쩌다가 그 어린 애를 두고 세상을 떴대요?
-아렵에서 사고가 있었소.
그제야 어두워지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여자는 그에게서 세차게 몸을 돌렸다. 적어도 남자의 둘째 부인이 야렵에서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패검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쓸모 없는 몸이니까. 여자는 침대맡 창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애에요? 당신 아들.
-아결은...... 지나칠 정도로 나를 닮은 아이요.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난 그 애를 아주 싫어하게 되겠군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등 뒤의 남자가 웃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순쯤 지나 도착한 부정세는 말 그대로 험한 곳이었다. 누가 자기를 그렇게 탐낸다고 저렇게 성벽을 세우고 가시를 둘렀는지. 마차에서 내린 여자는 성벽에 새겨진 짐승의 머리를 노려보았다.
-내가 여기를 닮았다던 말, 잘 설명해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혼인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절혼서 받게될 테니까.
그제껏 여자의 손을 붙잡아 부축하고 있던 남자는 말없이 미소지었다.
부정세 내부는 부정세 밖보다 더 촘촘하고 숨막히는 곳이었다. 자기 몸집만한 도를 맨 수사들이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대놓고 힐끔거렸다. 여자는 겨우 남자의 가슴께 오는 자기가 얼마나 우스워보일까 생각했다.
수진계는 우스운 곳이었다. 가문이 제일이지만, 가문이 아무리 좋아도, 심지어 그 당사자가 웬만해선 평소 검 들 일 없는 여인이라고 해도, 영력이 낮으면 무시당했다. 그러니 저 시커먼 인간들 눈에 내가 얼마나 우스워보일까.
그건 당연한 일이다 못해, 여자는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그녀와 혼인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는 일 년에 절반 가까이를 방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아프고, 그녀가 먹는 약재는 대부분이 다른 이들에게는 극약이라 할 정도로 독한 것들이었다. 장부야 좀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아무리 좋은 종부 노릇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노릇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여자는 커다란 눈으로 자기를 올려다보는 어린 아이를 침대에 앉은 채 내려다보았다. 유모가 아이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자. 아이가 여자에게 혀짧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명결이 모친을 뵙습니다.
-내가 왜 네 모친이니?
유모가 숨을 헉 들이키든 말든, 여자는 어린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는 혼란스러워보였다. 다부진 아이의 눈매를 살피며 여자는 말했다.
-내가 아니라, 너를 낳아주신 분을 모친이라 불러야지.
-하지만......
-보고 싶지 않니? 네 모친 말이야.
아이는 입을 다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여자는 아이가 생각에 잠긴 동안 말했다.
-보고 싶어해도 되고, 나를 싫어해도 돼.
아이는 이제 정말 당황한 얼굴이었다. 머뭇거리던 아이가 내놓은 대답은 실로 장관이었다.
-돌아가신 모친이 보고 싶어요. 하지만 모친이...... 왜 싫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모친도 모친도 다 제 모친이신데요.
-넌 정말 말 안듣는 아이구나. 내가 언제 나를 싫어하랬니? 싫어해도 된댔지. 그리고 모친이라 부르지 말랬는데 그걸 그새 까먹었어?
-그럼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까요?
여자는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는 아이를 마찬가지 마주보다가 손짓했다.
-넌 정말 네 아버지를 닮았구나. 이리 와보렴.
여자는 가까이 다가온 아이를 두 팔로 안아올렸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거워.
그때 아이의 표정은 여자가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여자는 매일같이 아이를 불렀다. 불러서 주로는 뭔가를 먹였고, 가끔 그녀가 읽는 책에 아이가 관심을 보일 때면 책 내용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예가 해를 쏘아 떨어뜨린 이야기는 잘 알고 있지?
-네.
-그럼 예의 아내에 대해서도 알고 있니?
눈을 깜박이는 아이에게 여자는 예가 해를 쏘아 떨어뜨려 아내와 함께 인간이 되는 신벌을 받게 된 것과, 예가 겨우 구한 불사약을 상아가 모두 먹어버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랬더니 상아의 몸이 너무 가벼워져서 달까지 떠오르게 됐다고 하는구나. 거기서 두꺼비가 되었다고도 하고.
아이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여자는 그런 아이 입에 과자를 하나 더 물리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니? 이 이야기에 대해서.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미없어.
여자의 말에, 아이는 어렵다는 듯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재미가 있어야 해요?
-넌 어쩜 이렇게 네 아버지와 똑같니? 이미 그렇게 묻는 순간부터 글러먹은 거야.
여자는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잔기침을 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습관처럼 그렇게 잔기침을 하곤 했다. 그러면 아주 잠깐 동안만 목이 이렇게 쉬어있는 것 같았다. 계속 그런 게 아니라.
-궁금하지도 않니? 상아의 심정이.
아이는 정말 조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참동안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해서 내놓은 답이라 해봐야 네 살짜리 어린애 머리에서 나올 만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상아가 잘못한 건 맞아요. 상아의 사정은 영영 알 수 없으니까, 상아 편을 들 수는 없습니다.
-그럼 상아가 잘못한 건 어떻게 아는데?
아이는 또 열심히 고민하다가 답했다.
-상아가 두꺼비로 변했다고 하셨잖아요. 잘못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변할 리가 없습니다.
-상아가 두꺼비로 변한 게 진짜인지는 어떻게 아는데?
-그건......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결국 항복하듯 말했다. 그러나 아이의 두 눈에는 어떤 빳빳한 의지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여자는 아이 입에 과자를 하나 더 물렸다.
-애초에 왜 꼭 결론을 내려야 하니? 모르는 채로 두면 되는 걸.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질서가 사라지고......
여자는 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이는 그런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모친께서는 그럼 이런 게 재미있으신가요?
-이런 거라니?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는 것이요.
여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재미있다. 왜? 이해가 안 가니?
-아뇨, 그냥 신기해서 여쭤봤습니다.
그러더니 아이는 이번엔 제가 알아서 과자를 하나 더 집어먹었다.
-당신이 자꾸 명결에게 뭔가를 먹인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날 밤, 밤 늦게 침실로 들어선 남자가 그제껏 깨어있던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창밖의 초생달에 닿아있던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을 뿌리치는 대신 그녀는 꾸역꾸역 말했다.
-먹이면 안 돼요? 난 그 애가 당신만큼 무거워질 때까지 계속 먹일 거예요.
남자는 대꾸하는 대신 나지막히 웃었다. 한참동안 그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고, 여자는 만약 남자가 예이고 자기가 상아였다면 자기라도 불사약을 두 개 다 먹어버렸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명결이 오늘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더군.
-왜요, 옷이라도 거꾸로 입고 다녔대요?
-가복들에게 모친께 들려드릴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겠느냐 물어보고 다녔다던데.
여자는 달에 닿아있던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처음 만났던 그 눈빛 그대로였다.
저 눈빛에 그대로 엉겨붙고 매달리고 싶다는 아주 강렬한 충동이 여자를 사로잡았다. 그러잖아도 힘줄이 느슨한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자, 두 눈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눈물이 나왔다. 여자는 자기를 감싸안아오는 남자를 밀쳐내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옷을 눈물로 적셨다. 어느 정도 진정된 뒤 그녀는 남자가 이끄는 대로 힘없이 침대에 몸을 뉘이며 말했다.
-명결, 명결 하지 마요. 하나뿐인 아버지가 돼서 정 없게.
-그럼 어떻게 불러야겠소?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샤오결......
재미있다는 듯 작게 소리내어 웃는 남자를 바라보며, 여자는 말을 끝마쳤다.
-......이라고 불러요, 부군.
남자가 허를 찔린 듯 굳는 모습이 여자를 만족시켰다.
-자, 이제 당신은 날 어떻게 불러야겠어요?
남자의 손이 그녀의 눈매를, 코를, 입술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마지막으로 매만진 곳에 입을 맞추며 그가 속삭였다.
-부인.
여자는 그 목소리가 간지러워 웃었다. 그건 그녀가 느껴본 것 중 몇 안 되는 유쾌한 감각이었다.
어린 아이 주제에 작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지, 명결은 샤오결이라고 불릴 때마다 남자의 아들 아니랄까봐 뻣뻣하게 몸을 굳히며 어색해했다. 어린 의붓아들을 골리는 건 곧 그녀의 한 가지 낙이 되었다.
이제 막 다섯살이 된 꼬마가 아침마다 문안인사 오겠다는 게 우스워 아침잠이 많아 싫다는 이유로 거절했더니, 어느새 오후에 차 마실 즈음이 되면 유모가 명결을 대동한 채로 여자의 방문 앞에서 기침을 했다.
주로는 명결이 평소 자의로 입 밖에 낼 일 없는 시시콜콜한 잡담이 오갔지만, 겨우 다섯살짜리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게 어른에게는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어서 여자는 종종 그냥 작은 몸을 끌어안은 채 침묵을 즐기곤 했다. 처음엔 돌덩이처럼 굳어있던 몸이 갈수록 풀려 더 묵직해지는 게 제법 즐거웠다. 몸 위에 올려놓기는 조금 무거웠지만, 어떻게 안고 있든 마치 강아지를 끌어안고 있는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모친......
웅얼거리는 명결에게, 여자는 멍하니 말했다.
-보고싶지? 네 모친되시는 분.
명결은 잠시 눈을 꿈벅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부모님이 어릴 적에 돌아가셨거든. 너보다 열 살 많을 때니까 많이 어린 나이는 아니었구나.
여자는 자기 이야기를 숨죽여 듣는 어린 몸을 품으로 더 끌어당겼다.
-딸을 위해서 매년 드리던 불공을 그 해에도 드리러 갔다가 못 돌아오셨지. 산이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니?
-모친......
여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말했다.
-나는 의붓아버지도 의붓어머니도 없었어. 그게 조금 아쉽네.
명결이 머뭇거리는 게 품 안에서 느껴졌다. 곧 작은 손이 자기를 더 꼭 끌어안는 것을 느끼며 여자는 힘없이 웃었다. 손을 뻗어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자, 가슴이 아플 정도로 뿌듯했다.
너는 건강하지. 생명력으로 가득찬 품 안의 몸이 경이로웠다. 울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믿고 싶지 않았다. 이곳 부정세 주인들의 전적과 남자의 운명을, 그리고 이 아이의 운명을. 여자는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는 대신 하염없이 아이의 뺨을,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명결은 건강한 아이였다. 당연했다. 자기 아버지를 닮았으니까. 남자가 자기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앓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때 여자는 헛웃음을 흘렸었다. 그러나 막상 명결이 앓자, 그녀는 처음 자기 혼인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그녀는 자기를 막아선 비복들을 노려보았다.
-단순한 고뿔이긴 하지만, 종부님께 옮기라도 한다면......
-걸려도 내가 걸리는데 왜 너희가 나를 막는 것이냐?
난처한 얼굴의 비복들을 여자는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식을 돌보는 건 부모의 도리이고 부모의 도리란 곧 인륜인데, 내 몸의 하찮은 질병 따위가 인륜보다 더 중하단 거냐? 그래?
사납게 달려들자, 힘없는 비복들은 여자에게 길을 틀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발을 구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명결은 침상에 누워 익숙한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자는 그 이마 위에 늘 피가 통하지 않아 차가운 자기 손을 얹었다. 감겨 있던 명결의 눈이 반쯤 뜨였다.
-모친?
열로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기가 평생 받아온 간호를, 여자는 그날 밤 명결에게 베풀었다. 그리고 아예 아이의 침대에 누워 잠들어버렸다. 아침까지 그녀는 억지로 계속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어느새 품 안에 들어와 있는 어린 몸을 마음껏 토닥였다. 남자가 야밤에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내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다음날 멀쩡하게 눈을 뜰 거란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녀는 명결에게서 병을 옮지 않았다. 명결도 열이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
열이 난 건 남자뿐이었다. 여자는 자기를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하는 남자를 마주 노려보았다.
-당신이 인륜을 논하며 가복들을 물리쳤다지?
-네. 그랬어요.
-그럼 나도 묻겠소. 인륜이 당신의 생명보다 중하오?
-한낱 네 살배기 애한테 감기 옮아서 죽을 인간으로 보여요, 내가?
남자는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심장이 쿵 가라앉았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을 티내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입술을 꼭 깨문 채 시선을 피하는 동안 남자가 말했다.
-당신이 옮기라도 했다면 명결의 마음이 어땠겠소?
여자는 이번에는 내가 알 바냐고 대꾸하지 못 했다. 그 대신 말했다.
-당신은 아파본 적 없어서 몰라요.
아픈 사람이 빌 법한 첫 번째 소원은 당연히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자연스레 빌게 된다. 누군가 자기 손을 잡아주기를. 비록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아도 다 괜찮다는 속삭임을 원하고, 낫게 해주지 못한대도 배나 등을 쓰다듬는 손길을 원하는 게 여자가 아는 인간이란 존재였다.
-내가 옮기라도 했다면 그 애 마음이 어땠겠냐구요? 당신만 가만히 있으면, 조금 미안하고 많이 행복했을 거예요. 아플 때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게 얼마나......
말을 잇지 못하고 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남자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여자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는군.
-싫으면 절혼하든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가슴팍에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그가 자기를 떼어놓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조곤조곤 말했다.
-당신의 생은 당신의 것이고 내 생은 나의 것이지만, 이제 당신에게는 내 삶의 지분이, 나에게는 당신 삶의 지분이 있어. 그러니 행동하기 전에 부디 나에게 먼저 말해주시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오.
여자는 남자가 정말 싫었다. 자장가 같은 그 목소리도, 다정한 말투도, 그가 하는 입 바른 말들도 싫었다. 그것들은 자꾸만 여자를 이렇게 울게 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언제 내 인생의 지분을 당신한테 줬어요? 난 그런 거 준 적 없어요.
-그럼 당신은 한 사람 반 어치의 생을 지고 살아야 하는 건데, 그건 당신이 지기에 너무 무겁지 않겠소?
여자는 한참 침묵하다가 물었다.
-두 사람 어치의 생을 지는 건 당신에게도 너무 버겁나보죠?
-당신이 내게 버겁기를 바란다면 버겁겠지. 그렇지 않다면, 조금도 버겁지 않소.
-말은.
그렇게 어깃장을 놓으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품에 더 깊게 안겼다.
명결은 이틀 만에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였다. 솔직히 그 일 이후 명결이 자기에게 더 어리광 부리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명결은 오히려 더 의젓하게 굴었다.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 숙이는 명결의 머리를 여자는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리곤 다시 땋아주었다.
재미 없는 사람들. 투박하고, 칙칙하고, 단단하고 무겁기만 한 산 같고 바위 같은 사람들. 고지식하고 혼자만 잘났다. 그러나 왜 자꾸 그들을 끌어안아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건지.
이래서 내가 부정세를 닮았다고 한 걸까, 그 사람은. 여자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겨울이 되어 연례행사처럼 앓아눕긴 했으나 여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추위와 아픔을 견딜 만했다. 명결은 여전히 샤오결이라 부르면 뻣뻣해졌고, 열이 많은 남자의 몸은 밤마다 따뜻한 난로가 되어주었다. 그 해 겨울, 여자는 처음으로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말 그대로 살아있었다.
여느 날처럼 진맥을 하러 온 의원이 여자에게서 태기가 느껴진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여자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아이를 낳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건 그녀가 한 유일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먼저 의원의 입을 막았다. 적어도 삼 개월까지는 아무도 자기가 회임한 사실을 몰랐으면 한다는 여자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의원은 한숨을 쉬었다.
-몸에 어떤 영향이 갈지 다 알고 하시는 말씀이시지요?
여자가 고집스레 입을 다물자, 의원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반쯤은 답답하다는 듯, 반쯤은 안쓰럽다는 듯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로 제가 부정세에서 잘리면 종부께서 책임져 주시는 걸로 알고, 원기를 보충하는 약재를 추가로 넣어 탕약을 조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여자는 반쯤 멍하게 대답했다. 의원이 돌아가고 명결이 오기 전의 두어 시진 동안 여자는 판판한 자기 배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또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안에 이제 막 생명으로 진화하려는 무언가가 있었다.
-모친?
갑작스런 부름에, 여자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있던 명결이 그런 여자를 바라보며 답지 않게 놀란 얼굴이 되었다.
-많이 편찮으세요?
-아니.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얌전히 와서 앉은 명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여자는 처음으로 그를 와락 힘주어 끌어안았다. 당황한 듯 꿈틀거리던 몸이 잠잠해지고, 여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명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 아들.
놀란 듯 크게 명결의 두 눈에 물기가 서리는 것을 보며, 여자는 아이의 눈매를 다정히 쓸어주었다.
그 후로 어언 사 개월 간, 남자를 속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녀 자신마저 속을 뻔 한 게 여러 번이었다. 본래도 기침과 헛구역질이 일상이고 월경 주기도 불규칙한 데다, 남자가 평소보다 몸이 좋지 않다고 앓아누운 여자에게 잠자리를 요구할 인간도 아니었다. 여자는 혼자 남을 때마다 자기 배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꼭 너에게 세상 빛을 보여줄 거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가장 가능성이 큰 건 유산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기가 뱃속의 아이를 따라 죽어버리지 못할 것을 알아서 여자는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죽지 못할 것이다. 다른 아이를 기어코 낳고야 말 때까지.
흑과 백으로 된 세상에 살다가 처음으로 색을 보게 된 사람처럼, 또는 그 반대의 경우처럼 여자는 자기 뱃속의 무언가에 매료되었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나, 여자는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녀의 분신이, 흔적이 그녀의 곁에 내내 머물며 그녀가 죽은 뒤에도 이 세상에 남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매일 매일이 아주 중요한 날의 전날밤인 것처럼 설렜다. 여자의 기분을 가라앉히는 건 활력이 도는 여자의 몸 상태에 기쁜 듯 미소짓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태동을 느낀 날, 여자는 뱃속의 아이가 생명의 순수한 정수라는 생각을 했고 그게 자기에게서 빠져나간대도 그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아이를 가졌어요. 사 개월째예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그것만으로도 여자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 부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낳을 거예요.
남자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마치 절벽에 제 몸을 부딪쳐 돌아오는 메아리 그 자체가 된 기분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낳을 거라고요. 알겠어요? 못 낳게 하면 진짜로 죽어버릴 거야.
-부인.
그 호칭이 처음으로 싫었다. 그래서 여자는 어느새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다.
-짜증나. 정말 짜증나요, 당신은. 애초에 내가 내 애 낳겠다는데 왜 당신 허락을 받아야 해?
-부인.
다시금 여자를 부르며, 남자의 손이 여자의 턱을 아프지 않게 붙잡았다. 여자는 눈물로 인해 흐려진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늘 단조롭기 그지없던 남자의 얼굴이 흐트러진 데 여자는 쾌감을 느껴야 할지 고통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가슴팍을 짚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어차피 짧은 생 제대로 살라고, 나한테 그랬잖아요.
십일 년 전, 남자와의 첫만남을 여자는 죽는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 깨어난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남자는 무던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이 그리 두렵니?
여자가 여전히 혼란스러움에 굳은 채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딱 그녀만큼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와 시선을 맞췄다.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죽음이 정말 그리 싫다면, 그걸 두려워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지 않겠니? 생을 원망할 시간 동안 차라리 최선을 다해 붙잡거라. 죽지 않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아. 살아야 하지 않겠니.
처음 보는 사이에 웬 설교냐고 여자는 쏘아붙일 수 없었다.
-네게는 어떻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이건 내 모친께서 내게 해주신 이야기다.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는데, 네게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눈빛에서 남자의 진심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났다. 그날 여자는 남자를 평생 미워하리라고 맹세했었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죽지 않는 데 만족하지 말라고......
십일 년 전도, 지금도 남자는 한결같이 재수가 없었다. 그때 남자에게 당신은 아파본 적 없지 않느냐고 대거리 하지 못 한 게 아직까지도 한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여자 자신이 정말 한결같이 유약하고 얄팍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자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고, 다른 길을 걷기엔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낳을 거예요.
남자는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침하는 그녀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곤 말했다.
-당신은 정말 어려워. 마치 미로 같소, 출구가 없는.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남자는 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이미 결정했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막겠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맘 같아선 당신을 말리고 싶지만......
-낳을 거라구요.
-......우리 아이가 당신을 닮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여자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입가에는 여자가 본 적 없는, 슬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십일 년 전의 바로 그 눈빛으로 그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맥이 풀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군. 그제나 이제나 당신은 참 오만해요. 왜 내가 일찍 죽을 거라고 멋대로 상정해요? 내가 일찍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냥 지금 죽여요. 죽어줄게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을 때, 여자는 목구멍에서 뭔가 서걱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라고 당신 도를 안 없애버리고 싶은 줄 알아요? 당신도 다 알면서 계속 칼 휘두르잖아.
도를 사용하는 청하 섭씨 사람들이 주화입마로 단명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여자는 헛웃음을 지었었다. 단체 자살이야 뭐야?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냐는 여자의 말에, 그녀의 오빠는 그녀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듯 말했었다. 그것이 그들이 가문에 지는 의무라고.
의무? 대체 무슨 의무. 대체 어느 조상이 후손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싶어한단 말인가. 내 아이의 아이, 그 아이, 그 형제자매, 그들의 아이. 내가 살아있던 흔적을 왜 그리도 빠르고 사납게 이 땅에서 지워버리고자 하는지 여자는 부정세에 살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이곳을 닮았다는 남자의 말도. 여자는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아이는 나도, 당신도 닮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진 자기의 분신을 바란다는 게 얼마나 오만한 일인지 여자는 생각하다가, 관두었다. 어차피 그 생각이 변할 리는 없을 것이므로.
다음날, 여자의 회임소식을 전해들은 명결이 여자를 찾았을 때, 여자는 자기 배에 고정된 아이의 시선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손 대볼래?
명결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여자는 그 손을 붙잡아 자기 배 위에 가져다댔다. 때마침 태동이 느껴졌다. 놀란 듯 시선이 떨리는 명결에게 여자는 말했다.
-기지개를 켠 거야. 이 늦은 시간에야 잠을 깨다니, 이 아이는 아무래도 나를 닮았나보다.
명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자의 배 위에 놓인 자기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의 손을 놓아주었다.
-넌 아직 어리지만 총명하니 분명히 말하마. 이 아이는 네 걸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거야. 네가 귀찮아서 이 애에게 던져버리는 거라면 모를까.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여전히 멍해보이는 명결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하니?
-아우......가 생겨서, 정말 기쁩니다. 그런데 웃음이 나온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기분이 이상합니다.
명결이 말했다. 여자는 작게 웃으며 아이의 볼을 꼬집었다.
-네 멋대로 아우라 결정했으니 그렇지.
하지만 여자도 뱃속의 아이가 딸이기보다는 아들이기를 원했다.
-내 아이한테 오빠가 있는 건 싫거든요. 오빠란 다 재수없는 족속들이에요.
여자의 말에, 그녀가 요구한 대로 그녀를 안고 다독여주던 남자는 작게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명결은 당신을 닮았고 당신은 내 오라버니를 닮았으니, 우리 애가 딸이라면 정말 큰일이라구요.
-그렇군. 그렇다면 나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바라 보겠소.
여자는 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전3은 섭형제 부모 스토리인데 연재 중간에 급 보고싶어져서 적은 거라 사실 본편이랑 크게 이어지지는 않음.
그래도 본편 더 전개되고 올리는 것보다 지금 올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올림.
좀 긺 ㅈㅇ 이상한 데서 끊김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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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로부터 네 혼처가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신기했을 뿐이다. 석녀를 아내로 들이고자 하는 선문세가 종주가 있다니. 아니나 다를까, 정해진 혼처라는 게 재취 자리라는 말을 듣고 여자는 납득했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훌륭한 아들이 이미 하나 있다고 했다.
-잘됐네요.
여자는 한 때는 아버지의 것이었고 지금은 오빠의 것인 종주실 책상 모서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따지자면 여자가 완벽하게 불임 판정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일 년에 절반 정도를 자리보전하는 신세에, 선문이든 속세든 부인에게 요구하는 제1 덕목을 그녀가 수행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이유로 여자는 자기는 평생 합환주 마실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오빠에게 재취 자리는 싫다고, 평생 오라버니와 함께 살겠다고 떼쓰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많겠죠? 그 사람.
-나와 동갑이다.
그 말에는 여자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오빠와 겨우 네 살 터울이었다.
놀란 건 그 사실 때문이었지만, 그 뒤를 따라 이어지는 희미한 불안감 때문에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와 동갑이고, 아들이 하나 있으며, 상처한 사람. 여자는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청하 섭씨인가요?
여자의 질문에 그녀의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자는 백 개가 넘는 선문 가문 중 제법 그럴 듯한 가문의 여식이었고, 그녀의 오빠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때문에 이른 나이에 종주가 되어 여기저기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가 어쩌다가 청하 섭씨의 종주와 우정을 다지게 된 것인지 여자가 알 길은 없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가 청하 섭씨의 종주를, 그러니까 그 남자를 처음 만난 건 어언 십 년 전의 일이었다. 그날은 화창한 봄날이었지만 그녀의 하루는 그렇지 못 했다. 겨울에 앓아누웠으나 봄이 와도 그녀의 몸상태는 그대로였고, 그녀는 창문 밖으로 어른거리는 꽃가지에 만족하는 데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침대 옆의 화병을 깨버리고 의기양양하게 바깥으로 나갔는데, 얼마 걷지 않아 눈 앞이 어질어질해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흙바닥에 쓰러진 게 창피한 것보다도, 땅에 넘어질 때 세게 부딪친 무릎이 아픈 것보다도, 여자는 그 나이에 이미 자기 인생이 원망스러워 울었다. 차라리 어지러운 것이나 이마가 펄펄 끓는 것, 온몸이 아픈 것은 괜찮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방 밖에 나가고 움직일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두 배로 아파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니?
갑작스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거기엔 햇빛을 가린 검은 옷의 남자가 서 있었다.
저승사자인가 봐. 그런 생각을 하며 여자가 정신을 놓으려던 차, 남자가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일으켰다. 휘청거리던 그녀는 어느새 남자의 등에 업힌 채였다. 이대로 저승으로 끌려가고 싶진 않아 힘없이 반항하는 그녀를,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더 단단히 받쳐 업었다. 여자는 잔뜩 열뜬 채 중얼거렸다.
-저 데려가지 마세요, 저승사자님......
-뭐?
-죽기 싫어요.
남자는 멈춰선 채 잠시 굳어있었다. 그 사이를 틈타 여자는 호소했다.
-제가 일찍 죽을 거란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건 너무 빨라요. 저 데려가지 마세요. 데려가시면 안 돼요. 저승사자님은 모르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아픈지, 힘든지...... 살고 싶은지 저승사자님이 알아요?
기력이 있었다면 마치 악을 쓰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듣기에도 힘없는 목소리에, 여자의 감정은 더 북받쳤다.
-아무도......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살고 싶단 말이에요. 아프기 싫고 죽기도 싫어요.
여자가 십이 년치 억울함을 토로하는 동안 묵묵히 들어주던 남자는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알 것 같은데. 그 마음.
그렇게 여자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남자는 여자를 업고 계속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차갑고 단단한 등에 열 오른 뺨을 댔다.
저승사자같이 초월적인 자기 고통스러움을 이해해준다니 위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나이에 품게 되는 비장함에는 본래 좀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다시 자기 방에서 눈을 떴을 때 여자는 당황했다. 몸을 일으킬 힘이 없어 눈동자를 굴려 침대맡을 보았는데, 그녀의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오빠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자네 동생이 깨어난 것 같군.
그때 남자의 그 고요하고 다정한 눈동자를 여자는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었다.
남자를 만난 건 그 날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그가 저승사자가 아니라 청하 섭씨의 소종주로, 오빠의 고소수학 동기이자 친구라는 것을 여자는 그 날 바로 알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 달리 평을 남기지 않았다. 청하 섭씨 직계손들이 대대로 단명하고, 남자도 그 예외가 아니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싫어요.
불쑥 내뱉어진 여자의 말에, 여자의 오빠는 놀란 듯 두 눈을 깜박였다. 여자는 그가 무슨 말이냐고 물을 기회를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 사람은 싫어요! 그 사람네 가문에 시집가기 싫다구요!
-얘가 미쳤니? 왜 이래?
오빠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 섭씨는 오대 세가 중 하나야. 우리 가문이 결코 약하지 않은 가문이라 해도 오대 세가에는 비할 수 없는 것 몰라?
-제가 알 바예요?
-무엇보다, 이 녀석아. 너는......
여자는 오빠가 이어서 할 말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놓고 오빠 앞에서 귀를 막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또렷이 그녀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시집 가기도 어려운 몸인데, 섭종주가 우리 집안의 구혼을 받아준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고......
-싫다구요! 나는 그 사람이랑 혼인하기 싫은데 내가 왜 고마워 해야 해요, 왜!
서러워하고 싶지 않았다. 서러우면 더 비참했으니까. 그러나 그게 여자의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녀의 빈약한 몸이 그녀가 원해 얻은 게 아닌 것처럼. 그녀는 늘 해도 해도 끊이질 않는 기침처럼 오빠에게 토해냈다.
-오라버니는 나를 팔아넘기려는 거잖아요. 매양 골골거리기만 하는 여동생 송장 치우기 싫어서 떠넘기는 거라고 말을 해요!
딱딱하게 굳는 오빠의 얼굴을 보며 여자가 느낀 건 해방감이었다. 그러나 오빠가 말했다.
-너, 오냐오냐해주는 데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네가 뭐라든 넌 우리 가문의 직계손이야. 누릴 수 있는 호사는 모두 누리고 의무는 거부하라 누가 가르쳤지? 부모님은 우릴 그리 가르치지 않으셨어.
-오라버니야 그렇게 입바른 소리 하기 쉽지! 하지만 말해보세요. 내가 무슨 호사를 누렸는데? 호사를 누린 건 오라버니뿐이야.
여자는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오라버니는 사내로 몸 건강히 태어났잖아. 오라버니가 뭘 알아? 나라고 수련이 하기 싫어서 안 하고, 집안을 돌보기 싫어서 안 돌본 줄 알아요? 나는 숨만 쉬어도 힘들단 말이야. 정말, 힘들다고요.
알아주기를 바라진 않았다. 그렇게 큰 것을 바라본 적 없었다. 그저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큰 욕심이었다. 벌써 숨이 차 헐떡이는 여자와 대비되게, 그녀의 오빠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네 말이 맞아. 네가 얼마나 힘든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 하지만 이것 하나는 내 알지. 네가 우리 가문에 태어나지 않고 길거리에, 하다 못해 평범한 여염집에 태어나기만 했어도 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다. 그러니 너는 이 가문에 이바지할 의무가 있고, 우리는 섭씨와의 혼약이 필요해.
-웃기지 마요.
여자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건강했으면 벌써 다른 집에 팔아넘겼을 거면서. 오라버니는 나를 싫어하는 거잖아. 나 때문이니까. 나 때문에......
-그만.
그렇게 여자의 말을 끊을 때, 그녀의 오빠는 거의 그녀만큼이나 음울한 얼굴이었다.
-왜 자꾸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서 너 자신을 상처입히니, 이 녀석아.
여자는 대답하는 대신 입을 앙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오빠의 피곤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섭 종주는 내 친우야. 너를 홀대할 리 없는 데다, 네 몸 상태도 아주 잘 알고 있지. 아이를 요구할 일 없고, 재취라곤 해도 정실 자리니 널 무시할 사람 없어. 무엇보다도 그는 의를 아는 남자야. 그 어느 여인이든 부군으로 원할 만한 남자란 말이다. 네가 늘 말하지 않았니, 그저 평범한 다른 여인들처럼 살고 싶다고.
잠시 말을 멈췄던 오빠가 한결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든 청하 섭씨와 뭉쳐야 한다. 앞으로 온약한과 기산 온...... 아니다.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서 뭣하겠니. 그저 알아두거라. 이 혼인이 너만을 위한 일은 분명 아니어도, 너를 위한 일인 건 사실이야.
-동생을 곧 죽을 남자한테 시집보내면서 그런 말을 해요? 우습게.
여자는 그새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오빠는 어찌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그런 그녀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느릿느릿 다가와 자기를 감싸안는 오빠를, 여자는 밀어내지 않았다. 그럴 힘도 무엇도 없었다.
-기원해 보자꾸나. 그와 네가 백년해로하기를.
여자는 한참동안 대꾸하지 않고 오빠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러다가 오빠가 자기를 놔줄 때쯤 말했다.
-혼인하느니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예요.
그 말에, 여자의 오빠는 피식 웃으며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네 하나뿐인 오라비야. 내가 너를 몰라? 너만큼 삶에 간절한 녀석이 없는데, 나더러 그 날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정말 분하지만, 오빠의 말대로였다. 눈깜짝할 새 몇 달이 흘러, 친영례 날 여자는 남자를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보았다. 붉은 옷을 입은 칠척 장신의 남자는 면사 너머로 보여서인지 더 우스꽝스러웠다. 여자는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웃음이 터지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그날 밤을 다들 초야라고 부르지만, 여자에게는 그녀가 태어난 곳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흥겹고 왁자지껄한 소음이 여자는 못 견디게 싫었다. 그냥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신방의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저절로 경직되는 몸을 느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남자는 침대로 다가오는 대신 문 앞에 서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방이 이렇게 조용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저 밖에 있는 누구든 들어와 저 남자를 데려가줬으면. 그렇게 바라며, 여자는 아주 잠시 동안 소리를 지를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리하는 대신 천천히 자기 얼굴을 가린 면사를 걷었다.
아주 꼬장꼬장한 가문이라면 어디 남편이 걷어붜야 할 천을 직접 걷느냐며 소박을 맞혀야 하니 뭐니 난리가 날 수도 있었다. 어디 해보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여자는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막상 남자의 다정한 무표정을 보자 몸에서 힘이 빠졌다. 저 남자가 왜, 뭐라고 자기를 저런 눈으로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하나도 변한 게 없군.
그 웃음기 띈 목소리.
남자가 자기 옆에 와서 앉는 동안 여자는 그저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남자에게서 몸을 물렸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에요?
남자는 대답 대신 생각에 잠긴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그런 그를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남자가 나직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일 때까지. 여자는 불쑥 말했다.
-난 혼인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어요.
그 말에 남자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윽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적어도 이제 당신이 죽고 싶을 일은 없겠군.
-뭐라고요?
-나와 혼례를 치렀다는 건 당신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선택을 했다는 뜻이지.
그러면서 남자는 붉은 면사를 여자의 머리에서 아예 풀어내렸다. 그의 손끝이 눈썹을 스치자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여자는 잔뜩 열이 오른 얼굴로 그의 두터운 팔을 밀쳐냈다.
-호색한!
아주 잠시 동안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는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여자가 생각하기에도 호색한이라는 외침은 좀 민망했으나, 막상 남자가 웃는 모습에 화가 났다. 파르르 입술이 떨리는 것을 느끼는데, 남자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 화려한 머리장식을 올린 채로 잠들 생각인가?
-당신이 알 바예요?
-잘 준비를 하는 게 호색한 소리를 들을 일이면, 이 세상에 호색한 아닌 사람이 없겠군.
여자는 이제 정말 정말로 남자가 싫었다. 그녀가 무섭게 노려보든 말든, 남자는 장포를 끌러 침대 밑으로 떨어뜨리더니 침대 맡 조그만 나무 탁상 위의 합환주 잔을 집어들었다.
-당신은 술을 못 할테니, 이건 나 혼자 마시겠소.
-누구 마음대로요.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잔을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남자는 당연히 그녀에게 잔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가 술을 입 안에 털어넣는 것을 바라보다가, 여자는 말 그대로 미친 짓을 했다.
첫 입맞춤에서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술맛이 났다. 여자는 다 삼키지 못하고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술을 느끼며, 그리고 자기가 술을 다 삼키고 난 뒤까지도 뻣뻣이 굳어있는 남자의 몸을 느끼며 생전 처음 느껴보는 승리감에 취했다. 입술을 뗀 여자는 남자를 노려보는 눈초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남자가 눈을 깜박이며 몸에 힘을 풀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족하오?
그 질문에, 여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럴 필요 없고 피곤할 테니 어서 잠을 청하라는 남자를 더 세게 노려보았다.
-초야는요?
남자는 대답 대신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태도가 여자를 더 날카롭게 한다는 것을 그가 알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고 그러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의 옷소매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날 소박맞히려는 거예요? 왜요, 막상 얼굴 보니까 마음에 안 드나요, 내가?
그 질문에, 남자는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잔잔한 눈빛으로 이미 대답이 되었지만, 여자는 모른 척 떼를 썼다. 술기운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초야 안 치르고 잘 생각이면, 내일 송장 치를 생각 해야 할 거예요.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그러면서 울먹거리던 그녀는 묵직한 팔이 자기 허리를 감싸 당기는 것을 느끼며 헛숨을 들이켰다. 코앞에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여자는 눈물 맺힌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비치는 자기 얼굴이 보였다. 여자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죽어버릴 거라구요.
-당신을 죽게 할 수는 없지.
그렇게 속삭인 입술이 입술 바로 위에 다시금 맞닿아올 때, 여자는 남자가 자기에게 속아넘어간 건지 아니면 자기가 그에게 속은 건지 물었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초야는 느리고, 아프고, 무섭고, 우습고, 뜨겁고, 따뜻했다. 여자는 아마 자기가 내일 느지막한 오후나 되어야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거의 기절하듯이 정신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뺨을 스치는 까슬한 손의 감촉이, 그녀에게 마치 마지막 순간처럼 각인되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까지 남자가 자기 옆에 있으리라고 여자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여자가 눈을 떴을 때, 남자는 무척 태연한 얼굴로 여자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남자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몸이 아파서였다. 그래서 시끄럽다고 소리도 못 지르고 이렇게 힘이 없는 게 분명했다. 남자의 옆자리에 나른히 누운 채, 여자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저 천장은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대신 부정세의 천장을 보게 되겠지. 부정세...... 여자는 그 이름을 되뇌이며 멍하니 입을 열었다.
-부정세는 어떤 곳인데요?
-글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니, 당신이 가서 직접 보는 게 제일 좋지 않겠소.
여자는 그거 설명도 못 해준다는 건가 싶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지.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곳을 닮았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했어.
여자는 대꾸하는 대신 아랫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말리듯 아랫입술을 스쳐서, 그냥 그것까지 깨물어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끄떡없었다.
바위 같은 사람. 그러나 바위는 죽지 않는다. 쪼개질 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여자는 물었다.
-형님이라 불러야 하려나? 이전 섭부인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남자는 별달리 상처받거나 경직된 얼굴이 아니었다.
-내 오랜 친우였소.
친우? 친우랑 몸을 섞고 애를 낳아요, 당신은? 우리 오라버니도 당신 친우인데 어디 둘이 한 번 같이 해보지 그래요? 그런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여자는 참았다. 그 대신 물었다.
-당신 아들은요? 몇 살인데요?
-올해로 네 살이군.
여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되물었다.
-네 살? 그러면 그 애 모친은 대체 어쩌다가 그 어린 애를 두고 세상을 떴대요?
-아렵에서 사고가 있었소.
그제야 어두워지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여자는 그에게서 세차게 몸을 돌렸다. 적어도 남자의 둘째 부인이 야렵에서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패검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쓸모 없는 몸이니까. 여자는 침대맡 창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애에요? 당신 아들.
-아결은...... 지나칠 정도로 나를 닮은 아이요.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난 그 애를 아주 싫어하게 되겠군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등 뒤의 남자가 웃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순쯤 지나 도착한 부정세는 말 그대로 험한 곳이었다. 누가 자기를 그렇게 탐낸다고 저렇게 성벽을 세우고 가시를 둘렀는지. 마차에서 내린 여자는 성벽에 새겨진 짐승의 머리를 노려보았다.
-내가 여기를 닮았다던 말, 잘 설명해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혼인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절혼서 받게될 테니까.
그제껏 여자의 손을 붙잡아 부축하고 있던 남자는 말없이 미소지었다.
부정세 내부는 부정세 밖보다 더 촘촘하고 숨막히는 곳이었다. 자기 몸집만한 도를 맨 수사들이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대놓고 힐끔거렸다. 여자는 겨우 남자의 가슴께 오는 자기가 얼마나 우스워보일까 생각했다.
수진계는 우스운 곳이었다. 가문이 제일이지만, 가문이 아무리 좋아도, 심지어 그 당사자가 웬만해선 평소 검 들 일 없는 여인이라고 해도, 영력이 낮으면 무시당했다. 그러니 저 시커먼 인간들 눈에 내가 얼마나 우스워보일까.
그건 당연한 일이다 못해, 여자는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그녀와 혼인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는 일 년에 절반 가까이를 방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아프고, 그녀가 먹는 약재는 대부분이 다른 이들에게는 극약이라 할 정도로 독한 것들이었다. 장부야 좀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아무리 좋은 종부 노릇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노릇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여자는 커다란 눈으로 자기를 올려다보는 어린 아이를 침대에 앉은 채 내려다보았다. 유모가 아이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자. 아이가 여자에게 혀짧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명결이 모친을 뵙습니다.
-내가 왜 네 모친이니?
유모가 숨을 헉 들이키든 말든, 여자는 어린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는 혼란스러워보였다. 다부진 아이의 눈매를 살피며 여자는 말했다.
-내가 아니라, 너를 낳아주신 분을 모친이라 불러야지.
-하지만......
-보고 싶지 않니? 네 모친 말이야.
아이는 입을 다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여자는 아이가 생각에 잠긴 동안 말했다.
-보고 싶어해도 되고, 나를 싫어해도 돼.
아이는 이제 정말 당황한 얼굴이었다. 머뭇거리던 아이가 내놓은 대답은 실로 장관이었다.
-돌아가신 모친이 보고 싶어요. 하지만 모친이...... 왜 싫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모친도 모친도 다 제 모친이신데요.
-넌 정말 말 안듣는 아이구나. 내가 언제 나를 싫어하랬니? 싫어해도 된댔지. 그리고 모친이라 부르지 말랬는데 그걸 그새 까먹었어?
-그럼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까요?
여자는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는 아이를 마찬가지 마주보다가 손짓했다.
-넌 정말 네 아버지를 닮았구나. 이리 와보렴.
여자는 가까이 다가온 아이를 두 팔로 안아올렸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거워.
그때 아이의 표정은 여자가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여자는 매일같이 아이를 불렀다. 불러서 주로는 뭔가를 먹였고, 가끔 그녀가 읽는 책에 아이가 관심을 보일 때면 책 내용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예가 해를 쏘아 떨어뜨린 이야기는 잘 알고 있지?
-네.
-그럼 예의 아내에 대해서도 알고 있니?
눈을 깜박이는 아이에게 여자는 예가 해를 쏘아 떨어뜨려 아내와 함께 인간이 되는 신벌을 받게 된 것과, 예가 겨우 구한 불사약을 상아가 모두 먹어버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랬더니 상아의 몸이 너무 가벼워져서 달까지 떠오르게 됐다고 하는구나. 거기서 두꺼비가 되었다고도 하고.
아이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여자는 그런 아이 입에 과자를 하나 더 물리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니? 이 이야기에 대해서.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미없어.
여자의 말에, 아이는 어렵다는 듯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재미가 있어야 해요?
-넌 어쩜 이렇게 네 아버지와 똑같니? 이미 그렇게 묻는 순간부터 글러먹은 거야.
여자는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잔기침을 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습관처럼 그렇게 잔기침을 하곤 했다. 그러면 아주 잠깐 동안만 목이 이렇게 쉬어있는 것 같았다. 계속 그런 게 아니라.
-궁금하지도 않니? 상아의 심정이.
아이는 정말 조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참동안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해서 내놓은 답이라 해봐야 네 살짜리 어린애 머리에서 나올 만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상아가 잘못한 건 맞아요. 상아의 사정은 영영 알 수 없으니까, 상아 편을 들 수는 없습니다.
-그럼 상아가 잘못한 건 어떻게 아는데?
아이는 또 열심히 고민하다가 답했다.
-상아가 두꺼비로 변했다고 하셨잖아요. 잘못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변할 리가 없습니다.
-상아가 두꺼비로 변한 게 진짜인지는 어떻게 아는데?
-그건......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결국 항복하듯 말했다. 그러나 아이의 두 눈에는 어떤 빳빳한 의지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여자는 아이 입에 과자를 하나 더 물렸다.
-애초에 왜 꼭 결론을 내려야 하니? 모르는 채로 두면 되는 걸.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질서가 사라지고......
여자는 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이는 그런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모친께서는 그럼 이런 게 재미있으신가요?
-이런 거라니?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는 것이요.
여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재미있다. 왜? 이해가 안 가니?
-아뇨, 그냥 신기해서 여쭤봤습니다.
그러더니 아이는 이번엔 제가 알아서 과자를 하나 더 집어먹었다.
-당신이 자꾸 명결에게 뭔가를 먹인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날 밤, 밤 늦게 침실로 들어선 남자가 그제껏 깨어있던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창밖의 초생달에 닿아있던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을 뿌리치는 대신 그녀는 꾸역꾸역 말했다.
-먹이면 안 돼요? 난 그 애가 당신만큼 무거워질 때까지 계속 먹일 거예요.
남자는 대꾸하는 대신 나지막히 웃었다. 한참동안 그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고, 여자는 만약 남자가 예이고 자기가 상아였다면 자기라도 불사약을 두 개 다 먹어버렸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명결이 오늘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더군.
-왜요, 옷이라도 거꾸로 입고 다녔대요?
-가복들에게 모친께 들려드릴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겠느냐 물어보고 다녔다던데.
여자는 달에 닿아있던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처음 만났던 그 눈빛 그대로였다.
저 눈빛에 그대로 엉겨붙고 매달리고 싶다는 아주 강렬한 충동이 여자를 사로잡았다. 그러잖아도 힘줄이 느슨한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자, 두 눈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눈물이 나왔다. 여자는 자기를 감싸안아오는 남자를 밀쳐내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옷을 눈물로 적셨다. 어느 정도 진정된 뒤 그녀는 남자가 이끄는 대로 힘없이 침대에 몸을 뉘이며 말했다.
-명결, 명결 하지 마요. 하나뿐인 아버지가 돼서 정 없게.
-그럼 어떻게 불러야겠소?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샤오결......
재미있다는 듯 작게 소리내어 웃는 남자를 바라보며, 여자는 말을 끝마쳤다.
-......이라고 불러요, 부군.
남자가 허를 찔린 듯 굳는 모습이 여자를 만족시켰다.
-자, 이제 당신은 날 어떻게 불러야겠어요?
남자의 손이 그녀의 눈매를, 코를, 입술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마지막으로 매만진 곳에 입을 맞추며 그가 속삭였다.
-부인.
여자는 그 목소리가 간지러워 웃었다. 그건 그녀가 느껴본 것 중 몇 안 되는 유쾌한 감각이었다.
어린 아이 주제에 작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지, 명결은 샤오결이라고 불릴 때마다 남자의 아들 아니랄까봐 뻣뻣하게 몸을 굳히며 어색해했다. 어린 의붓아들을 골리는 건 곧 그녀의 한 가지 낙이 되었다.
이제 막 다섯살이 된 꼬마가 아침마다 문안인사 오겠다는 게 우스워 아침잠이 많아 싫다는 이유로 거절했더니, 어느새 오후에 차 마실 즈음이 되면 유모가 명결을 대동한 채로 여자의 방문 앞에서 기침을 했다.
주로는 명결이 평소 자의로 입 밖에 낼 일 없는 시시콜콜한 잡담이 오갔지만, 겨우 다섯살짜리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게 어른에게는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어서 여자는 종종 그냥 작은 몸을 끌어안은 채 침묵을 즐기곤 했다. 처음엔 돌덩이처럼 굳어있던 몸이 갈수록 풀려 더 묵직해지는 게 제법 즐거웠다. 몸 위에 올려놓기는 조금 무거웠지만, 어떻게 안고 있든 마치 강아지를 끌어안고 있는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모친......
웅얼거리는 명결에게, 여자는 멍하니 말했다.
-보고싶지? 네 모친되시는 분.
명결은 잠시 눈을 꿈벅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부모님이 어릴 적에 돌아가셨거든. 너보다 열 살 많을 때니까 많이 어린 나이는 아니었구나.
여자는 자기 이야기를 숨죽여 듣는 어린 몸을 품으로 더 끌어당겼다.
-딸을 위해서 매년 드리던 불공을 그 해에도 드리러 갔다가 못 돌아오셨지. 산이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니?
-모친......
여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말했다.
-나는 의붓아버지도 의붓어머니도 없었어. 그게 조금 아쉽네.
명결이 머뭇거리는 게 품 안에서 느껴졌다. 곧 작은 손이 자기를 더 꼭 끌어안는 것을 느끼며 여자는 힘없이 웃었다. 손을 뻗어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자, 가슴이 아플 정도로 뿌듯했다.
너는 건강하지. 생명력으로 가득찬 품 안의 몸이 경이로웠다. 울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믿고 싶지 않았다. 이곳 부정세 주인들의 전적과 남자의 운명을, 그리고 이 아이의 운명을. 여자는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는 대신 하염없이 아이의 뺨을,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명결은 건강한 아이였다. 당연했다. 자기 아버지를 닮았으니까. 남자가 자기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앓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때 여자는 헛웃음을 흘렸었다. 그러나 막상 명결이 앓자, 그녀는 처음 자기 혼인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그녀는 자기를 막아선 비복들을 노려보았다.
-단순한 고뿔이긴 하지만, 종부님께 옮기라도 한다면......
-걸려도 내가 걸리는데 왜 너희가 나를 막는 것이냐?
난처한 얼굴의 비복들을 여자는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식을 돌보는 건 부모의 도리이고 부모의 도리란 곧 인륜인데, 내 몸의 하찮은 질병 따위가 인륜보다 더 중하단 거냐? 그래?
사납게 달려들자, 힘없는 비복들은 여자에게 길을 틀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발을 구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명결은 침상에 누워 익숙한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자는 그 이마 위에 늘 피가 통하지 않아 차가운 자기 손을 얹었다. 감겨 있던 명결의 눈이 반쯤 뜨였다.
-모친?
열로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기가 평생 받아온 간호를, 여자는 그날 밤 명결에게 베풀었다. 그리고 아예 아이의 침대에 누워 잠들어버렸다. 아침까지 그녀는 억지로 계속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어느새 품 안에 들어와 있는 어린 몸을 마음껏 토닥였다. 남자가 야밤에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내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다음날 멀쩡하게 눈을 뜰 거란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녀는 명결에게서 병을 옮지 않았다. 명결도 열이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
열이 난 건 남자뿐이었다. 여자는 자기를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하는 남자를 마주 노려보았다.
-당신이 인륜을 논하며 가복들을 물리쳤다지?
-네. 그랬어요.
-그럼 나도 묻겠소. 인륜이 당신의 생명보다 중하오?
-한낱 네 살배기 애한테 감기 옮아서 죽을 인간으로 보여요, 내가?
남자는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심장이 쿵 가라앉았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을 티내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입술을 꼭 깨문 채 시선을 피하는 동안 남자가 말했다.
-당신이 옮기라도 했다면 명결의 마음이 어땠겠소?
여자는 이번에는 내가 알 바냐고 대꾸하지 못 했다. 그 대신 말했다.
-당신은 아파본 적 없어서 몰라요.
아픈 사람이 빌 법한 첫 번째 소원은 당연히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자연스레 빌게 된다. 누군가 자기 손을 잡아주기를. 비록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아도 다 괜찮다는 속삭임을 원하고, 낫게 해주지 못한대도 배나 등을 쓰다듬는 손길을 원하는 게 여자가 아는 인간이란 존재였다.
-내가 옮기라도 했다면 그 애 마음이 어땠겠냐구요? 당신만 가만히 있으면, 조금 미안하고 많이 행복했을 거예요. 아플 때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게 얼마나......
말을 잇지 못하고 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남자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여자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는군.
-싫으면 절혼하든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가슴팍에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그가 자기를 떼어놓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조곤조곤 말했다.
-당신의 생은 당신의 것이고 내 생은 나의 것이지만, 이제 당신에게는 내 삶의 지분이, 나에게는 당신 삶의 지분이 있어. 그러니 행동하기 전에 부디 나에게 먼저 말해주시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오.
여자는 남자가 정말 싫었다. 자장가 같은 그 목소리도, 다정한 말투도, 그가 하는 입 바른 말들도 싫었다. 그것들은 자꾸만 여자를 이렇게 울게 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언제 내 인생의 지분을 당신한테 줬어요? 난 그런 거 준 적 없어요.
-그럼 당신은 한 사람 반 어치의 생을 지고 살아야 하는 건데, 그건 당신이 지기에 너무 무겁지 않겠소?
여자는 한참 침묵하다가 물었다.
-두 사람 어치의 생을 지는 건 당신에게도 너무 버겁나보죠?
-당신이 내게 버겁기를 바란다면 버겁겠지. 그렇지 않다면, 조금도 버겁지 않소.
-말은.
그렇게 어깃장을 놓으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품에 더 깊게 안겼다.
명결은 이틀 만에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였다. 솔직히 그 일 이후 명결이 자기에게 더 어리광 부리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명결은 오히려 더 의젓하게 굴었다.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 숙이는 명결의 머리를 여자는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리곤 다시 땋아주었다.
재미 없는 사람들. 투박하고, 칙칙하고, 단단하고 무겁기만 한 산 같고 바위 같은 사람들. 고지식하고 혼자만 잘났다. 그러나 왜 자꾸 그들을 끌어안아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건지.
이래서 내가 부정세를 닮았다고 한 걸까, 그 사람은. 여자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겨울이 되어 연례행사처럼 앓아눕긴 했으나 여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추위와 아픔을 견딜 만했다. 명결은 여전히 샤오결이라 부르면 뻣뻣해졌고, 열이 많은 남자의 몸은 밤마다 따뜻한 난로가 되어주었다. 그 해 겨울, 여자는 처음으로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말 그대로 살아있었다.
여느 날처럼 진맥을 하러 온 의원이 여자에게서 태기가 느껴진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여자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아이를 낳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건 그녀가 한 유일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먼저 의원의 입을 막았다. 적어도 삼 개월까지는 아무도 자기가 회임한 사실을 몰랐으면 한다는 여자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의원은 한숨을 쉬었다.
-몸에 어떤 영향이 갈지 다 알고 하시는 말씀이시지요?
여자가 고집스레 입을 다물자, 의원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반쯤은 답답하다는 듯, 반쯤은 안쓰럽다는 듯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로 제가 부정세에서 잘리면 종부께서 책임져 주시는 걸로 알고, 원기를 보충하는 약재를 추가로 넣어 탕약을 조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여자는 반쯤 멍하게 대답했다. 의원이 돌아가고 명결이 오기 전의 두어 시진 동안 여자는 판판한 자기 배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또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안에 이제 막 생명으로 진화하려는 무언가가 있었다.
-모친?
갑작스런 부름에, 여자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있던 명결이 그런 여자를 바라보며 답지 않게 놀란 얼굴이 되었다.
-많이 편찮으세요?
-아니.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얌전히 와서 앉은 명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여자는 처음으로 그를 와락 힘주어 끌어안았다. 당황한 듯 꿈틀거리던 몸이 잠잠해지고, 여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명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 아들.
놀란 듯 크게 명결의 두 눈에 물기가 서리는 것을 보며, 여자는 아이의 눈매를 다정히 쓸어주었다.
그 후로 어언 사 개월 간, 남자를 속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녀 자신마저 속을 뻔 한 게 여러 번이었다. 본래도 기침과 헛구역질이 일상이고 월경 주기도 불규칙한 데다, 남자가 평소보다 몸이 좋지 않다고 앓아누운 여자에게 잠자리를 요구할 인간도 아니었다. 여자는 혼자 남을 때마다 자기 배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꼭 너에게 세상 빛을 보여줄 거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가장 가능성이 큰 건 유산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기가 뱃속의 아이를 따라 죽어버리지 못할 것을 알아서 여자는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죽지 못할 것이다. 다른 아이를 기어코 낳고야 말 때까지.
흑과 백으로 된 세상에 살다가 처음으로 색을 보게 된 사람처럼, 또는 그 반대의 경우처럼 여자는 자기 뱃속의 무언가에 매료되었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나, 여자는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녀의 분신이, 흔적이 그녀의 곁에 내내 머물며 그녀가 죽은 뒤에도 이 세상에 남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매일 매일이 아주 중요한 날의 전날밤인 것처럼 설렜다. 여자의 기분을 가라앉히는 건 활력이 도는 여자의 몸 상태에 기쁜 듯 미소짓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태동을 느낀 날, 여자는 뱃속의 아이가 생명의 순수한 정수라는 생각을 했고 그게 자기에게서 빠져나간대도 그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아이를 가졌어요. 사 개월째예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그것만으로도 여자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 부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낳을 거예요.
남자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마치 절벽에 제 몸을 부딪쳐 돌아오는 메아리 그 자체가 된 기분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낳을 거라고요. 알겠어요? 못 낳게 하면 진짜로 죽어버릴 거야.
-부인.
그 호칭이 처음으로 싫었다. 그래서 여자는 어느새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다.
-짜증나. 정말 짜증나요, 당신은. 애초에 내가 내 애 낳겠다는데 왜 당신 허락을 받아야 해?
-부인.
다시금 여자를 부르며, 남자의 손이 여자의 턱을 아프지 않게 붙잡았다. 여자는 눈물로 인해 흐려진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늘 단조롭기 그지없던 남자의 얼굴이 흐트러진 데 여자는 쾌감을 느껴야 할지 고통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가슴팍을 짚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어차피 짧은 생 제대로 살라고, 나한테 그랬잖아요.
십일 년 전, 남자와의 첫만남을 여자는 죽는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 깨어난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남자는 무던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이 그리 두렵니?
여자가 여전히 혼란스러움에 굳은 채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딱 그녀만큼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와 시선을 맞췄다.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죽음이 정말 그리 싫다면, 그걸 두려워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지 않겠니? 생을 원망할 시간 동안 차라리 최선을 다해 붙잡거라. 죽지 않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아. 살아야 하지 않겠니.
처음 보는 사이에 웬 설교냐고 여자는 쏘아붙일 수 없었다.
-네게는 어떻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이건 내 모친께서 내게 해주신 이야기다.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는데, 네게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눈빛에서 남자의 진심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났다. 그날 여자는 남자를 평생 미워하리라고 맹세했었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죽지 않는 데 만족하지 말라고......
십일 년 전도, 지금도 남자는 한결같이 재수가 없었다. 그때 남자에게 당신은 아파본 적 없지 않느냐고 대거리 하지 못 한 게 아직까지도 한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여자 자신이 정말 한결같이 유약하고 얄팍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자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고, 다른 길을 걷기엔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낳을 거예요.
남자는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침하는 그녀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곤 말했다.
-당신은 정말 어려워. 마치 미로 같소, 출구가 없는.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남자는 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이미 결정했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막겠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맘 같아선 당신을 말리고 싶지만......
-낳을 거라구요.
-......우리 아이가 당신을 닮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여자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입가에는 여자가 본 적 없는, 슬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십일 년 전의 바로 그 눈빛으로 그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맥이 풀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군. 그제나 이제나 당신은 참 오만해요. 왜 내가 일찍 죽을 거라고 멋대로 상정해요? 내가 일찍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냥 지금 죽여요. 죽어줄게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을 때, 여자는 목구멍에서 뭔가 서걱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라고 당신 도를 안 없애버리고 싶은 줄 알아요? 당신도 다 알면서 계속 칼 휘두르잖아.
도를 사용하는 청하 섭씨 사람들이 주화입마로 단명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여자는 헛웃음을 지었었다. 단체 자살이야 뭐야?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냐는 여자의 말에, 그녀의 오빠는 그녀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듯 말했었다. 그것이 그들이 가문에 지는 의무라고.
의무? 대체 무슨 의무. 대체 어느 조상이 후손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싶어한단 말인가. 내 아이의 아이, 그 아이, 그 형제자매, 그들의 아이. 내가 살아있던 흔적을 왜 그리도 빠르고 사납게 이 땅에서 지워버리고자 하는지 여자는 부정세에 살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이곳을 닮았다는 남자의 말도. 여자는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아이는 나도, 당신도 닮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진 자기의 분신을 바란다는 게 얼마나 오만한 일인지 여자는 생각하다가, 관두었다. 어차피 그 생각이 변할 리는 없을 것이므로.
다음날, 여자의 회임소식을 전해들은 명결이 여자를 찾았을 때, 여자는 자기 배에 고정된 아이의 시선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손 대볼래?
명결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여자는 그 손을 붙잡아 자기 배 위에 가져다댔다. 때마침 태동이 느껴졌다. 놀란 듯 시선이 떨리는 명결에게 여자는 말했다.
-기지개를 켠 거야. 이 늦은 시간에야 잠을 깨다니, 이 아이는 아무래도 나를 닮았나보다.
명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자의 배 위에 놓인 자기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의 손을 놓아주었다.
-넌 아직 어리지만 총명하니 분명히 말하마. 이 아이는 네 걸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거야. 네가 귀찮아서 이 애에게 던져버리는 거라면 모를까.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여전히 멍해보이는 명결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하니?
-아우......가 생겨서, 정말 기쁩니다. 그런데 웃음이 나온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기분이 이상합니다.
명결이 말했다. 여자는 작게 웃으며 아이의 볼을 꼬집었다.
-네 멋대로 아우라 결정했으니 그렇지.
하지만 여자도 뱃속의 아이가 딸이기보다는 아들이기를 원했다.
-내 아이한테 오빠가 있는 건 싫거든요. 오빠란 다 재수없는 족속들이에요.
여자의 말에, 그녀가 요구한 대로 그녀를 안고 다독여주던 남자는 작게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명결은 당신을 닮았고 당신은 내 오라버니를 닮았으니, 우리 애가 딸이라면 정말 큰일이라구요.
-그렇군. 그렇다면 나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바라 보겠소.
여자는 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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