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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6 22:13
진정령, 난백 ㅅㅍ
광요는 선독 된 뒤로도 항상 자기가 몰락할 거 상상하고 대비해놨을 것 같음
자기가 그러는 걸 이해 못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속이 쓰렸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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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요는 미소 띤 얼굴 그대로 굳었다. 그는 대답 대신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나는 마찬가지 말없이 그를 마주보았다. 아마 내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을 것이었다. 금광요가 열심히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동안 나는 그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건 왜 물어?

-물어보면 안 돼?

금광요의 입꼬리가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한결 편해진 얼굴로, 그리고 날카로워진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웃었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였어? 나는 또 오랜만에 너랑 술이라도 한 잔 하게 되나 싶었네.

-너나 나나 낮술은 취향 아니잖아.

담담하게 대답하자, 금광요는 다시 한 번 내 안색을 살피더니 내 맞은 편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그는 다시금 완벽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여전히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했다. 금광요가 자기 몫의 차를 따르며 웃었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좀 서운하다.

-뭐가?

-글쎄. 그냥.

길지 않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찻잔을 쥔 금광요의 손끝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희고 가지런한 손. 저렇게 희고 가지런한 손이야 이 세상에 수천 개 있을 테지만, 나에게 의미를 지니는 건 그 중 단 하나였다.

-회상에게 그렇게나 정을 준 거니?

섭회상의 이름이 금광요의 입에서 나오자, 그제야 나는 정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시선을 들자 나를 대놓고 탐색하는 금광요의 두 눈이 있었다.

-왜 놀라? 네가 섭명결 때문에 나를 찾아올 리는 없고, 나한테 지금처럼 화를 낼 리도 없잖아. 분명 회상이 관련 있겠지. 무슨 일인지 한 번 말해 봐.

나는 무릎 위에 놓여있던 두 손을 천천히 말아쥐었다. 이제 나는 정말로 생각을 해야 한다.

-오늘 행로령에 갔었어.

-아, 그래. 사람을 보냈었지. 맞아.

금광요가 어떻게 된 일인지 다 알았다는 듯 작게 탄성을 흘렸다.

-먼젓번 보낸 자들에게 소식이 없기에 곧바로 두 번째 조를 짜서 보냈는데, 하필 그 사이에 섭씨에서 사람이 나와 무덤을 확인했더라. 그 바람에 시체는 처리를 못 했어. 참 쓸 데 없이 엄격하지, 청하 섭씨.

그렇게 말하는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아주 잘 알았다. 나는 질문했다.

-뭐가 궁금했던 건데? 섭명결이 혹시 살아나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던 거야?

말하고 나니 떠오르는 것이 있어 나는 내차 내뱉었다.

-너 혹시 그래서 나를 부정세에 보낸 거야? 섭회상이 아니라 섭명결 때문에?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됐다. 섭회상이 섭명결을 봤다며 거품 물었던 게 시작이었고, 금광요가 나를 보낼 때 조건도 부정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봐달라는 거였으니까. 그리고 중원절날. 그가 답지 않게 얕은 수작을 부리던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였다. 맞은편에 앉은 금광요의 얼굴이 티 안 나게 질려가는 걸 보면 내 생각이 정말 맞는지도 몰랐다.

-네가 정말 섭명결 목이라도 잘랐어?

탁상 위로 금광요가 주먹을 말아쥐는 게 보였다.

-그래.

할 말이 없었다.

가난한 어린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값나가는 도자기를 깨뜨렸어도 이 기분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부터 정말 잘 생각을 해야 했다. 내 목소리가 물 속에서 듣듯 먹먹하게 들려왔다.

-그런데도 무서웠다니, 그냥 죽인 게 아니라 뭔가가 더 있는 모양이지?

-잘 아네. 너답지 않게.

금광요는 굳이 목소리에서 칼날을 숨기지 않았고 나도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음호부야? 너 음호부 아니면 그 사람들 쓰는 일 거의 없잖아. 하지만 음호부는 죽은 사람을 괴뢰로 만들거나 귀신을 부리는 사마외도의 물건인데 왜...... 아.

질문하던 도중에, 나는 금광요의 선택을 이해했다. 금광요는 섭명결이 다시는 그 어떤 형태로든 눈뜨지 않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을 것이다. 그러니 섭회상의 말을 듣고선 도 무덤에 사람을 보낸 것이다. 섭명결의 혼백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을 일말의 가능성도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섭회상은 섭명결을 결코 다시 찾을 수 없겠구나. 사술을 쓴다고 하더라도. 금광요는 겨우 미소를 유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뻔하다고 하더라도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섭명결이 무서웠다고?

-넌 모를 거야.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금광요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는 모른다. 한참 뒤에 금광요가 다시 입을 열 때, 그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날엔 네가 없었잖아.

-뭐?

-나도 노력했어, 헌아. 나는 이미 한 번 섭명결의 목숨을 살려줬다고. 그런데 섭명결이 거기에 고마워했냐고? 아니. 전혀. 그 개자식이 그 날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아? 나를 금린대 계단에서 걷어차더니 창기의 자식이라 불렀어. 나는 부러진 다리로, 그 자식이 서 있는 곳까지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올라가야 했고.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금광요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직까지 나는 그때 꿈을 꾸지. 그러니 말해 봐. 네가 생각하기에 내가 섭명결을 죽여선 안 될 이유가 있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네가 섭명결을 죽이면 안 됐다는 말 한 적 없어.

금광요가 분명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게 더 있었다. 섭명결이 보통 일을 가지고 금광요에게 그런 폭언을 퍼부었을 리가 없었다. 분명 뭔가 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무언가를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나는 금광요가 섭명결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그 사실만을 이해했다. 창기의 자식이라는 말 자체도 금광요에게는 역린인데, 금린대 계단에서 걷어차이기까지 했다니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금광요를 말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 논리대로면 금광선은 왜 네가 안 죽였는데?

아. 금광요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죽인 거였구나. 그건 잘 했다.

여전히 눈물은 맺혀있지만 흐르지는 않은 눈으로 금광요가 나를 보았다. 나는 못 참고 품 속에서 담뱃대를 꺼냈다. 말없이 마른 잎을 채워 넣는데, 금광요가 내 담뱃대를 빤히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더 보내달라고 안 했네. 담뱃잎.

예상 못 했던 질문에,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섭회상이 그 향을 싫어해서.

-담뱃대는?

-부러졌어.

금광요가 준 뒤로 십 년 넘게 썼으니 부러진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내가 부러뜨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덜미를 잡힌 기분이었고 금광요는 덜미를 잡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이제 보니 비녀도 꽂았네? 네가 언제부터 비녀를 꽂았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해.

-회상이 혼인하는 게 싫어서 이러니?

하마터면 손에 들린 담뱃대를 부러뜨릴 뻔 했다. 기가 막혀 금광요를 바라보면 그가 작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닌데도 이렇게 날 찾아온 거면 넌 내 생각보다 더 바보구나.

-뭐?

-너야말로 하고 싶은 말을 해 봐. 금광선과 섭명결이 어떻게 다른데?

섭명결이랑 금광선이라니 그걸 비교라고 해?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는 금광요의 질문을 이해했다.

-말했지. 나는 네가 섭명결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해해.

-그런데?

-그런데 네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나를 섭회상한테 보냈잖아.

사실 그렇다. 내가 섭회상을 만날 일만 없었다면 섭명결이 어떻게 죽었든 나와 상관 없는 일이었다. 하다 못해 섭명결을 죽인 게 금광요라는 것을 내가 알고만 있었어도, 나는 섭회상이 섭명결을 생각하며 울 때 감히 주제 넘게 그를 위로하지 않았을 것이다.

섭명결이 섭회상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될 일도 없었겠지. 그걸 모르기만 했어도. 그러기만 했어도 난 지금 괜찮았을 텐데.

-나쁜 놈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섭회상을 해칠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잖아.

금광요는 대꾸하는 대신 나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은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아주 길게 느껴지는 몇 초가 흐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금광요가 웃었다.

-가끔 궁금했어. 네가 스무 해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면서 나를 만나는지. 정말 나한테 신세졌다는 생각 하나로 내 옆에 있었던 거야?

그 목소리에 짙게 배여있는 건 분명한 배신감이었다. 그가 내 시선을 피해 허공을 보았다. 그리곤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작게 웃었다.

-섭섭해, 헌아.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그는 내가 스무 해 전 만났던 바로 그 소년이어서, 나는 무작정 입을 뗐다. 그게 아니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말 아니었다. 그러나 금광요는 나에게 항변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단사를 찍은 것 외엔 스무 해 전과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흰 얼굴이 나를 보며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네가 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섭회상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겠다고 통보하러 온 거니?

-말했잖......

-못 할 텐데.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금광요의 눈에는 잔인한 광채가 돌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네가 정말 섭회상을 아낀다면, 내가 섭명결을 죽였다고 말 못 할걸.

물론 나는 섭회상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 전에 금광요가 나를 죽일 테니까. 그가 나를 안 죽인대도 말 못 한다. 말했다간 섭회상의 정신이 버틸 수 없을 것이고, 그가 버틴대도 금광요가 화근을 남겨둘 리 없으니 그를 어떤 방식으로든 죽여 입막음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내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촉각을 곤두세운 채 금광요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 입술이 불길한 미소를 띤 채로 움직였다.

-내 말이 무슨 뜻 같은지 네가 먼저 말해 봐. 많이 생각하고 온 것 같은데.

금광요의 짐작대로였다. 인정하지 않았다뿐 나는 이미 전부터 어렴풋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짚이는 것도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드러내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손바닥을 펼 수 없었다. 다른 손에 들려있던 담뱃대에도 함께 힘이 들어갔다. 나는 깊게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뱉어냈다.

-섭회상 손으로 죽였구나.

금광요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차 물었다.

-죽기는 주화입마로 죽었으니...... 그거 부추기는 약이라도 먹였나보지?

-정말 생각 많이하고 왔나보네.

금광요가 비꼬듯 말했다. 처음이었다. 그가 나에게 그런 말투를 쓰는 건. 마찬가지로, 내가 그를 지금과 같이 노려보는 것또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금광요가 미소띤 얼굴로 나를 마주보았다. 자학적인 미소였다.

-알려주려고? 자기가 매일 자기 형에게 독약을 먹였다는 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신음은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주먹쥔 손에서 이젠 피가 흘렀다.

여전히 금광요는 금광요였다. 이 지경까지 왔으면 나에게 진실을 말해줄 법도 한데, 그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가 말하는 약이 약이 아닌 것을 나는 안다. 그가 섭회상에게 가르쳐주었다는 동영풍 음악이 아직 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었다. 그건 처음부터 너무 이상해서 내가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금광요가 처음 곡을 알려준 뒤로, 그걸 아주 열심히 연습했을 섭회상을. 악기 연주는 섭회상이 자신있어 하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 자기가 힘을 써서 섭명결의 죽음을 늦출 수 있을 거란 희망도 조금쯤은 있었을 것이다. 섭명결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자기 동생의 호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심장이 그대로 우그러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섭회상은 형을 떠나보낸 뒤에도 계속 그 음악을 연주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가 과연 어떤 심정으로 그리했을까? 그가 올해 여름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데에도, 자기가 미칠까 두렵다고 내게 털어놓던 데에도 그런 내막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감히 주제 넘게 그를 걱정했고, 안심시켰다. 그에게 죽지 말라고 말했다.

-왜?

나는 중얼거렸다. 왜 일이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금광요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섭회상에게 곡을 알려주면서, 그리고 섭명결에게 직접 연주해주면서 금광요 그 자신도 수없이 그 위험한 곡을 들었을 것이다.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지 나는 알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안전장치라기엔 너무 잔인했다. 혹시나 섭회상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 성정을 고려할 때 죄책감 때문에 목숨을 끊는대도 이상하지 않다. 복수심을 품는다고 해도 분명 제동이 걸릴 것이고, 무엇보다도 인간인 이상 섭회상은 자기가 자기 형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참 금광요다운 발상이지 않은가. 그가 지금 나에게 이 사실을 밝힌 것도 비슷한 맥락이겠지.

내가 이걸 어떻게 밝히겠는가. 그가 그러잖아도 매일 밤 잠 못 든다는 걸 아는데, 그의 우울을 아는데. 어느새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섭회상의 뒷모습이 흐린 눈 앞에 어른거렸다. 눈물이 흐르는데도 그 상은 내 눈 앞에 또렷하게 맺혀있었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금광요가 이리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섭회상 때문에 우는 거야?

눈을 뜨자 금광요가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내 뺨을 가볍게 쓸었다.

-후회라도 하니? 처음 만난 날, 나를 도운 걸.

너를 마치 섭회상 인생의 불순물처럼 치워버릴 수 있겠느냐고?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그럴 수 있다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금광요는 아마 내가 없어도 그가 해온 모든 일을 똑같이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백 번 돌아가도 백 번 똑같이 할 거야. 난 그냥...... 너나 섭회상이나 둘 다 행복했으면 하는 게 다야. 그런데 이제 그건 불가능하잖아.

애새끼도 아니고 이런 말이나 하고 앉아있다니. 하지만 그게 내 진심이었다. 나는 차마 금광요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 잔물결 퍼지는 찻잔 안 찻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뭐?

금광요가 묻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더 이상 화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분노와 배신감 대신 그의 얼굴에 자리잡은 건 연민이었다.

-그냥 덮어. 그러면 되잖아. 너만 모른 척 하면 회상도 너도 다 지금처럼 지낼 수 있는데, 왜 굳이 나를 찾아왔니.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 앞의 얼굴을...... 그 흰 목을 조르고 싶다가도, 그 손을 자르고 싶었다.

-미칠 것 같다.

내 중얼거림에, 금광요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만났을 적 내게 보였던 것과 같이 울음기 섞인 웃음이었다. 웃음을 그친 뒤 그는 눈에 고인 눈물을 닦지 않고 물었다.

-이해가 안 가. 섭회상에게 왜 그렇게까지 마음을 써? 내가 너를 부정세로 보낸 지 얼마나 지났지? 반 년도 안 됐잖아?

나는 금광요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윽고 갈라진 목소리가 내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너랑 나만 해도 서로 얼굴 맞댄 시간만 계산하면 일 년이 채 안 될 텐데, 만난 지 얼마나 됐는지가 뭐가 중요해?

-그래도 나와 섭회상이 너에게는 달라야지. 나는 섭씨가 아니잖아?

나는 처음에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눈을 깜박이는 동안에도 금광요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비로소 나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목소리가 제멋대로 떨렸다. 금광요가 다시금 그린 듯 미소지었다. 그의 손이 다시금 내 뺨을 쓰다듬었다.

-가끔 생각했거든. 네가 왜 나와 함께 청하로 가지 않았을까, 너와 함께 부정세로 갔다면 어땠을까 하고.

그렇게 말하는 금광요가 어떻게든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 중인 게 뻔히 보였다. 그는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너라면 너무 정을 주지도, 나쁜 마음을 먹지도 않고 적당히 회상을 돌봐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내 생각보다 너무 착했나 봐. 착한 것 좋지. 하지만 부모님 생각은 정말 안 해, 헌아?

어쩌면 이것도 악몽일지 모른다. 내가 한 줄도 몰랐던 모든 의심이 전부 사실로 밝혀지는, 그런 악몽 말이다.불꽃이 튀는 듯 화끈거리는 두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나는 금광요를 노려보았다.

-뭘 기대하는데?

금광요의 눈빛이 흔들렸으나 나는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말했지. 나는 네가 금광선 잘 죽였다고 생각해. 그 새끼가 진작 죽었으면 좋았을 거라고도 생각해. 그 부인까지 네가 죽인 거래도 나는 신경 안 써. 부모님 생각은 안 하냐고? 내가 뭐라 대답할지 알잖아. 알면서 굳이 묻는 이유가 뭔데? 나는 너한테 다 알면서 나 부정세로 보낸 거냐고 안 묻잖아. 그런데 넌 왜 그래?

나는 그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 또 누구를 죽였느냐고. 네 아들도 네가 죽였느냐고. 어쩌면 금광요는 내 할머니가 그랬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아들을 죽였을지 모른다. 웃었을 수도 있고, 울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게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숨 쉬기가 어려워 나는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너 정말...... 평생 이렇게 살 자신 있어?

그럴 자신이야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 한단 말인가? 정말이지 금광요가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가 정말 온전히 그 자신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가 어머니를 위해서 이렇게 사는 거라면...... 그건 더 말이 안 됐다. 내가 금광요의 어머니라면, 내 아들이 이렇게 사는 걸 원치는 않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관음보살이 되어 저 멀리 운몽에 있고, 금광요는 거기 가지 못한 지 아주 오래 되었다. 어쩌면 평생 거기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뒷받침하듯 금광요가 말했다.

-다른 길 같은 건 내게 애초부터 없었어.

그렇게 말하는 금광요는 내가 본 그 어느 때보다도 지쳐 보였다.

-그리고 앞으론 더더욱 없겠지. 그러니 말해 봐, 헌아.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지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섭회상을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답이 나왔다.

-그만둘래. 부정세를 떠나고 싶어. 섭회상...... 자기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그 바보에게 대체 뭐가 있겠어.

그건 거짓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렇게 느껴지지조차 않았다. 어차피 금광요가 맘먹었다면 섭회상은 섭명결을 되살리긴커녕 그 시체조차 평생 찾을 수 없을 거다. 평생 그렇게 헤매겠지. 나도 평생 그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그 곡이 당신 형을 죽였고 당신을 죽이고 있다고, 당신이 당신 혼을 찢어발겨도 당신 형은 못 되살린다고 말 못 한 채 가슴 졸이고 그렇게 살아야 할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부정세에 갔을까?

-시간 낭비였어.

나는 중얼거렸다. 금광요가 물었다.

-부정세를 떠나고 싶다고. 원하는 건 그게 다야?

눈을 뜨자 표정 없는 금광요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탁할게.

그렇게 툭 던져놓고 침묵하는 동안, 금광요는 이미 내가 무슨 부탁을 할지 다 아는 눈치였다. 나는 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네가 앞으로 뭘 하든, 섭회상은 거기서 빼줘. 더 이상 건드리지 마. 제발.

-그 말 하려고 지금 네 목숨을 걸러 온 거야?

-아니. 내 목숨엔 그만한 가치 없다는 것 잘 알아.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내 인생은 하등의 가치가 없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일이 마법처럼 해결되는 건 그 자체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온약한, 위무선, 그리고 섭명결. 그 정도 인사가 아니고서야 한 사람의 생명이 그 정도 무게를 지니긴 힘들다. 나는 금광요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대가로 지불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지금 난 그냥......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금광요의 온정에 기대다니 그거야말로 정신 나간 일 아니냐고 물을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이건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탁을 하겠다고? 네가?

금광요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그가 하동으로 나를 찾아왔던 적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나에게 순전한 호의를 베풀었다. 굳이 그 호의를 거래로 바꾸어 받아들인 건 나였다. 그때는 그에게 빚을 지기 싫다는 생각으로 그리했던 것이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때 이미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되었든, 그와 나 사이 암묵적인 약속을 맺은 것도 깨뜨리는 것도 나였다. 그걸 알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광요가 물었다.

-나를 믿을 수 있겠니?

-믿고 싶어.

나는 그때껏 말려쥐어 있던 주먹을 천천히 폈다. 이미 손바닥은 피로 붉었고 무릎 위에도 핏방울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피로 젖은 손을 보며 나는 섭회상을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이 손은 몇 달 전 그가 붕대를 감아주었던 바로 그 손이었다. 무수히 많은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내가 섭회상에게 했던 무수히 많은 약속들. 그 중에 하나.

그는 나에게 자기를 지켜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게 내가 그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는 그의 곁에 계속 남아있을 수 없었다. 그랬다간 나도 모르게 모든 걸 다 말해버리고 말 것이다. 적어도, 그가 무엇을 하든 그의 형은 돌아오지 않을 거란 말만은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섭회상은......

나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금광요의 손이 내 턱을 덥썩 쥐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한참동안 내 얼굴을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왜 이번엔 염방존이라고 안 불러?

-너에게 부탁하는 거니까.

-그러면서, 그렇게 죽을 각오한 눈을 하고 있니?

나는 잠시 허를 찔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금광요가 말했다.

-너 이제 보니 정말 섭명결을 닮았다. 섭회상은 참 복도 많지. 섭명결도 있고, 너도 있고.

그 말에 내가 입 안을 깨물었던 건 자기 곁에서 계속 살아달라던 섭회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서였다. 그가 그 말을 한 뒤로 그건 내 유일한 소망이 되었지만, 이미 그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사람은 대개 자기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며, 나도 예외일 리 없다는 것을. 금광요의 두 눈이 지금 내 앞에서 마치 업경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섭회상을 사랑해?

그 질문에, 나는 기어이 입 안에서도 피를 보고야 말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턱을 쥔 금광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그래. 그렇구나.

금광요는 내게서 시선을 돌려 여전히 새파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옆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금광요가 섭회상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는지가 알고 싶었다. 그가 섭명결과 섭회상을 함께 증오했을까? 아니면 섭명결의 단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자리가 부러웠던 걸까.

섭회상은 섭명결의 유품 중 가장 귀한 것이다. 그래서 그걸 아예 치워버리고 싶었을까? 아니면 섭회상의 다정한 형이 되어 섭명결을 조롱하고 싶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섭회상에게 내가 너보다 더 나은 섭명결의 동생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섭명결에게는 정말 좋은 동생이 되고 섭회상에게는 정말 좋은 형이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그러기 위해 섭명결이 죽어야만 했던 걸지도.

아니면, 섭회상이 금광요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금광요 자신조차 모를 것이다. 나는 그저 그가 내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적선하듯이라도 좋으니 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바랄수록 비참한 그런 바람을 품고 있자면, 금광요가 마침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좋아. 약속할게. 명색이 선독인데, 친구 부탁도 못 들어주면 그건 너무 우스우니까. 사실 부정세에서 얻어낼 것도 더 없는걸. 회상이 다치거나 죽는 건 나에게도 악재이고 말이야. 회상은 내가 안전하게 오래오래 살려둘 거야. 약속할 테니 믿어도 좋아.

그러더니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만족하니?

그 물음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금광요는 웃었다. 평소와 다르게 묘하게 피로한 미소였다. 이 방 바깥의 누구에게도, 그가 저런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 나를 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너를 어떻게 처분하느냐겠지. 너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알지? 너도 각오하고 왔을 거잖아?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희미한 연기가 새는 담뱃대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무척 다정하다고 말할 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너를 오래 보고 싶다고 했던 덴 변함이 없어.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동영에 가 있으면 어떨까?

-너......

번쩍 고개를 들자, 상냥한 미소를 띤 금광요의 얼굴이 보였다. 눈가의 눈물자국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넌 모르는 것 같지만, 난 널 알아. 헌아.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섭회상에게 말 못 할 거야. 안 그래? 널 부정세에 그냥 둔대도 나에겐 사실 아무 문제 없어. 하지만 네가 떠나고 싶댔으니...... 내가 어쩌겠니? 네 부탁을 들어줘야지. 멀리 떠나있어. 네가 말했던 동영의 북쪽 섬 있잖니. 아직 개발이 덜 됐다던 곳 말이야. 그 쪽으로 괜찮은 땅이 있으면 내 이름으로 사서 터를 잡아. 아니면 금린대에 있을래? 뭐가 좋니? 네가 골라.

언뜻 보기에 평온한 그의 눈에 분명히 반짝이고 있는 건 승리감이었다.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인지, 섭명결을 향한 것인지, 섭회상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명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내가 섭회상이 아니라 금광요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지만, 그때는 딱히 선택의 여지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분명히 내 선택을 굳혔다.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원하는 곳에 있을게.

내 대답을 들은 금광요가 미소지었다.

-그럼 거기 가 있어. 네 말마따나 나도 다른 길을 하나쯤 생각해둬서 나쁠 건 없잖아? 그러니 거기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면 안 되는 것 아니야?

금광요가 고개를 저었다.

-나를 보러 오고 싶을 때면 언제든 와도 좋아. 알잖아. 금린대는 항상 너에게 열려있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의 얼굴은 참 영롱하기도 했다. 나는 거의 탈진하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금광요가 내 어깨를 쥐었다가, 놓았다.

-마지막 인사는 잘 하고 와. 회상을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금광요와 나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는 자기 조카와 더 나눌 이야기가 있다며 방을 비웠고, 나는 몇 번 피우지도 않은 담뱃대를 손에 쥔 채 금린대를 나왔다.

이렇게 환한 대낮에 금린대를 나서기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스무 해 전 맹요라는 이름의 어린 소년을 업고 이 문을 나서던 날 이후로는 정말 처음일지도 몰랐다. 그 때 기억이 머릿속에 똑똑히 남아있었지만, 사실 의미는 없었다. 나는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하게 타오르는 가을 태양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다시 또 비칠비칠 걸어나갔다.

부정세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른다. 어검을 했던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는 해가 지기 직전에 부정세에 도착했고, 섭회상이 이미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소식을 전해주는 수사의 시선이 자꾸만 내 손에 가닿았다.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손은 죽은 자의 것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나는 문득 칠석날 섭회상의 선물을 사러 귀신꼴을 한 채 청하를 헤매던 것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지나가는 시비에게 목욕물을 부탁하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우스웠고, 다 우스웠다.

뜨거운 물에 잠긴 채로 나는 욱신거리는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흉터가 남으면 좋겠다. 뭐가 됐든, 섭회상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내 몸에 새겨졌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정도의 사치는 바랄 만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목욕물이 식어가는 것을 초라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고, 목욕을 마친 뒤 욕조 옆에 준비되어있던 섭씨 수사복을 몸에 걸쳤다.

이제 이 옷은 평생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치 수의를 입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냥, 이미 죽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있지만 않았어도, 섭회상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과연 그 사람을 가장 적게 상처입히고 떠나는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할 필요 따위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막 하늘에 노을이 지는 것을 알면서도 침대에 누웠다.

그냥...... 오지 말걸.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금광요한테 처음부터 그냥 다 털어놓을걸. 가기 싫다고 말할걸. 어쩌면 금광요는 내가 그러기를 기대했던 게 아니었을까? 뒤늦게 가정해보고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몸을 둥글게 말아 눕는 것이었다.

다시 눈 뜨지 않는 행운은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언제 잠이 든 걸까, 이마에 닿는 손길을 느꼈을 때 방 안은 불이라도 난 듯 붉었다. 나는 주변 공기에 은은하게 배어있는 소나무 향이, 그리고 내 이마에 닿아있는 서늘한 손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많이 아프니?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야 나는 섭회상이 내 방에 와 있고 나는 잠에서 깨어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 수는 없었다. 섭회상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그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섭회상의 손이 내 머리를 가만 가만 쓰다듬었다. 그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을 게 아니라 심장을 찔러주면 좋겠는데, 이런 유의 환상통엔 대개 답이 없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닿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이마를 간질였다.

-미안해.

사과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