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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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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잼주의 오타주의
매브아이스 맵아 맵아비
ㅊㄱ) 혹시나 해서... 아이스 부모는 슈슈시니어 아님
먼저 눈을 뜬 건 의외로 피트였다. 하루를 나름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받으니 몸이 꽤 개운하다. 물론, 본가에서 제가 아플 때 마다 받아 온 정성과 소란과는 그 정도는 비교할 수 없지만 -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아이스는 아픈 상태에서 다른 이에게 간호를 받은 적도, 누군가를 간호한 적도 없었으니까. 피트는 제 인생 중 가장 최고의 컨디션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각인된 이가 옆에 붙어 자기도 모르게 기분 좋은 향을 내뿜어 주니 개운하지 않을 리 없겠지만.
"…."
피트는 제 옆에 역시 기분 좋게 잠들어 있는 톰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이 애 얼굴을 이렇게 정면에서 보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니까. 그러다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톰의 목덜미를 가린 파자마의 끝을 살짝 내렸다. 쇄골쪽에, 옅긴 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한 상처가 보인다. 각인 상처. 그 날 도망가려는 제 오메가에게 정신을 잃고 달라붙다가, 톰이 자신을 밀치려고 한 순간 거절당하는 기분을 견딜 수가 없어서 홧김에 물어버린 거다. 톰이 아파했던 게 기억이 나긴 한다. 하지 말라고 빌던 모습도. 사실 그건,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장면이다.
솔직히 말하면, 미안함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분명 네가 싫어하는 행동을 했다고, 그러니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는 했다. 그것도 아주 깊숙히.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크게, 안도감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면 다 끝난 줄 알았던 거다. 네가 나한테 종속되면 된 거지. 지금 당장은 모르더라도 결국 언젠가 알게 될 거고, 그러면 네가 돌아올 곳은 나밖에 없을 테니까.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피트는 건방지게도, 그 전까지는 톰이 자신을 거부하는 상황을 깊게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억지로 범했다는 걸 기억하게 되면 아마 화를 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거절로 이어질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왜 네가 당연하게 날 받아줄 거라 생각했지? 사실 아이스에게 자신은 끔찍한 존재인 게 맞는데.
"…피트."
"안녕, 아이스."
청회색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 창문으로는 빛 한 줌 안 들어왔는데도 아이스는 눈이 부시다는 듯 눈을 몇 번이고 깜박였다.
"너 지금… 내 얼굴 보고 있었던 거야?"
"응. 일어나서 계속."
"그래…."
…왜…? 여전히 반쯤 잠결에 잠긴 목소리인데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 눈이 느리게 깜박일 동안에도 피트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 눈을 바라봤다.
"좋아서."
하하, 그래. 톰이 바람빠지듯 허탈하게 웃었지만 피트는 진심이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데. 어떻게 지난 몇 년을 참았지? 피트의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한 체 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던 적은 전혀 없는데 피트와 지내게 되면서 자꾸만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지는 아침이 늘어난다. 좋은 증상은 아니니까, 꾸역꾸역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톰이 자연스럽게 피트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네. 감기는 다 나았나 봐. 다행이야."
성격이 원체 불같아서 바이러스도 못 버티고 금세 도망가는걸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톰은 차가운 침대 밖으로 나섰다. 그러곤 바로 생각났다는 듯, 눈을 금세 가로로 뜨고는,
"피트 미첼, 나한테 설명해야 할 거 없어?"
하고 시선을 돌리는 거다. 톰은 최소한, 이렇게 나오면 피트가 변명의 태새를 취할 줄 알았다. 정작 피트 카잔스키-미첼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빛내곤 신이 나서 미주알고주알 읊고 말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비행 조종에 관심이 있는지,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는지를 들떠서 설명하는 피트를 보며 톰은 차마 준비한 비난의 말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하기사, 뭐라 비난한단 말인가? 이제 막 스무살이긴 했지만 피트는 어쨌거나 성인이고, 스스로 노력해서 프로그램에 참가한 걸. 게다가 피트의 반응을 보니 굳이 저 때문에 어거지로 끼어든 것도 아닌 것 같고.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그저 신이 나서 톰을 답싹 끌어안는 피트를 보며,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결국 톰은 그저 제 몸을 끌어안은 어린 남편의 뒷통수를 쓸어내릴 뿐이었다. 잘 했네, 하고 어색한 칭찬을 덧붙이면서. 부모님에게 칭찬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어색한 부모와 자식간이라면 이런 종류의 말을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정작 피트는 좋아 죽겠다는 태도로 자신을 더욱 세게 끌어안아서 숨이 막히긴 했으나.
그러니 론에게 지금 상황은 꽤 유쾌하다 못해 흥미롭게 다가왔다. 생각과는 달리 그 '꼬마 신랑' 은 톰과 함께 오지 않았지만, 제 시간이 되자 귀신같이 나타났다. 톰의 입장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변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날과는 달리 당당하게 캠퍼스 안에 바이크를 몰고 오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타고 온 건 맞는 듯 했다. 껄렁거리는 검은 머리의 소년을 보자마자 톰이 거진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튀어나가서는 헬맷은 썼는지, 과속은 하지 않았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으니까. 정작 그 잔소리의 대상자는 톰이 무어라 말을 하든 제 부인 얼굴을 보느라 바빴다. 그 꼴이 제 눈에도 너무 잘 보여서 어이가 없었다. 톰의 말을 들으니 이제는 아예 한 방에서 잔다고 하던데, 그러면 오늘 아침에도 본 거 아닌가? 바로 며칠 전에 제 도움을 받았으면서 저는 본체만체 하는 꼬마 다람쥐가 괘씸해진 론은 적당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아이스, 우린 먼저 가 있어야 할 걸."
"미안, 슬라이더. 기다렸지."
"별로. 그러니 미첼씨는 그만 저 쪽으로 가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론이 자연스럽게 톰의 허리를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피트의 눈이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예상했던 대로, 피트는 론이 톰을 감싸안은 손을 억지로 떨어뜨렸다. 날카로운 비속어는 덤이었고. 으르렁거리는 어린 신랑과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킬킬거리는 제 파트너를 떨어뜨려 놓는 수고는 톰의 몫이었다.
아무리 합동 프로젝트라 할지라도 첫 날 부터 함께 비행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애초에, 교육 내용이 다르니 사실 몇 번의 전형적인 수업만 보여주기 식으로 함께 할 거고. 피트 역시 그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눈 앞에서 몇 시간을 제 부인을 빼앗겼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결국, 이어진 두 번의 비행 이후 기체에서 내려 마이크를 빼곤 톰은 한숨처럼 내뱉었다.
"아까 왜 그랬어?"
"내가? 뭘?"
"피트한테."
"난 꼬마 신랑한테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는 론에 톰 역시 할 말을 잃었다. 하긴, 걔한테 아무것도 안 하긴했지.
"너네 꼬마 신랑이…."
"톰!"
론의 말은 미쳐 이어지지 못할 뻔 했다. 물론, 전속력으로 자신과 아이스를 향해 뛰어오는 다람쥐가 미처 도달하기 전에 론이 재빠르게 아이스의 귓가에 속삭이지 않았다면.
"집착이 어마어마하던데. 향 갈무리 해."
그리곤 피트가 닿기도 전에 론은 금새 체육관 쪽으로 사라졌고, 애꿏은 피트만 사라진 론의 뒷모습을 가자미눈을 하고 좇을 뿐이었다. 아이스, 저 새끼가 뭐라고 했어? 짜증스럽게 따라오는 피트의 말에 조금 넋을 놓고 있던 아이스가 덧붙였다.
"피트, 나한테 마킹했어? 아침에?"
"당연하지. 그게 왜 문제야?"
"왜냐고?"
"내 부인한테 내가 마킹하는 건데 뭐가 문제야."
"…."
그래서 아이스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긴 하지. 정말 부부 사이라면. 아이스는 당당한 피트의 태도에 당황했으나, 곧 론의 말을 떠올렸다. 피트가 제게 집착한다는 걸 피트 본인에게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듣는 건 또 별개의 일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 애로서는 이득이 될 게 없는 관계다. 어쨌거나 자신은 결혼 상대로서 가장 기피한다는 열성 오메가고, 집안의 사생아이며, 공공연하게 내다놓은 자식이 아닌가? 아무리 제 집안에서 강요로 이루어진 결혼이라고 해도 미첼이 이 정도로 결혼에 진심일 필요는 없다는 거다. 심지어 어제 방문한 피트의 아버지 역시 결혼 자체에 딱히 문제가 없다는 듯 행동했고.
"아이스, 뭐 해?"
"아…."
톰은 차고에 헬멧을 던져놓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피트를 바라보았다. 큰일이다. 그러니까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었어. 피트의 치기어린 집착이 부른 진짜 문제 말이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집 안은 익숙하면서 낯설다. 피트가 아마 학교 수업을 끝내고 비행 수업을 위해 애나폴리스로 오기 전에 집에 들려 집 안의 난방기를 켜 두었는지 따듯한 온기가 흘렀고, 늦게 들어올 걸 이미 예상해 두었는지 거실의 작은 불을 하나 켜 둔 것 같았다. 그리고 제 등 뒤의 차고에는 익숙한 검은 세단 한 대와, 어느 새 부터 그 옆에 없으면 걱정부터 솟구치는 바이크 한 대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이 모든 게…, 그러니까, 문제다.
"빨리 들어 와. 춥잖아."
아이스는 속절없이 따듯한 공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며 생각했다. 누군가 자시을 기다리고, 반기는 공간에 이렇게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저를 기다리는 다정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건데. 왜냐면 피트는 곧 떠날 존재니까. 멍한 톰의 모습에 피트는 꼭 제 발이 저린 것 같아 괜시리 말을 덧붙였다.
"아까 네 친구한테 성질부린 건 미안해. 하지만 그 자식이 내 앞에서 너한테 추근거리잖아."
"…정정하자. 론은 그런 식으로 추근덕거린 게 아니야. 나중에 보면 사과해."
"싫…, …알았어."
작은 불을 끄고 복도와 거실의 불을 키던 톰이 입을 잔뜩 내밀고 응접실 테이블에 가방을 던져두곤 쓰러지듯 소파에 앉는 피트를 보며 겨우 머릿속을 뒤덮었던 생각에서 벗어나 희미하게 웃었다.
"착하네."
"착하게 대답했으니까, 소원 들어줄거지."
"…뭐 먹고싶은데? 원하면 오늘은 저녁으로 인스턴트 먹어도 돼."
"……해줘."
"뭐?"
"감기 걸렸을 때 해줬던 거…."
빨리. 부탁하는 태도면서 정작 톰을 붙들고 끙끙거리며 벽으로 밀어붙이는 행각에 어이가 없었으나, 톰은 학습 능력이 좋은 수석답게 빠르게 피트가 무엇을 말하는 지 이해했다. 집이 따듯하긴 하지만, 바이크를 타고 오느라 저녁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온 피트의 몸은 여전히 차갑고 바깥 바람 냄새가 났다. 그러고보니, 피트가 언젠가 제 향이 차가운 바람 냄새라고 한 적이 있는데, 만약 제 향을 스스로 맡을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톰은 고개를 숙인 체 귀까지 붉어진 피트를 바라보다가 반쯤은 충동적으로 아이의 검은 머릿결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피트는, 그 행동에도 가만히 있었다. 꼭 잘 길들여진 늑대마냥. 톰이 몸을 숙여 여전히 차가운 그 뺨에 입술을 대어줄 때 까지.
그제서야 피트는, 왜 자신이 톰에게 거절당하는 경우를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 없는지 깨달았다.
넌 너무 다정하니까. 네가 너무 다정해서 끝도없이 널 원하는 내 욕구까지 채워줄 거라 생각한거야. 만약 내가 죽는다면 네 다정함에 익사해서 죽어버릴 거라 생각한 거지. 하지만, 더이상 네 따듯함이 나를 향하지 않는다면? 만약 아버지의 말처럼 그 다정함이 배신과 분노로 인해 방향을 틀어버린다면? 아니, 아예 그 길을 없애 버린다면?
피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주었다. 톰은 다정해. 하지만 자신은 전혀 다정하지 않다. 그러니까, 그 방향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저 모든 결과를 끌어안고 용서를 빌고는 사라질 성정은 아니라는 거다. 저를 봐 달라고 다그치고, 화를 내고, 기어코 제 손을 놓아버린 그 팔목을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만 그러면 안 돼. 그러면 톰은 영원히 나한테 웃어주지 않을거야. 착하다 말해주지도, 고생했다고 안아주지도 않겠지. 그건….
"큰일이야."
"…뭐가?"
"네가 있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네가 가 버렸다고 외로워지면 어떡하지."
"…."
"넌 언젠가는 떠나야 할 텐데."
그건, 안 되는 거잖아. 그렇지, 아이스?
노잼주의 오타주의
매브아이스 맵아 맵아비
ㅊㄱ) 혹시나 해서... 아이스 부모는 슈슈시니어 아님
먼저 눈을 뜬 건 의외로 피트였다. 하루를 나름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받으니 몸이 꽤 개운하다. 물론, 본가에서 제가 아플 때 마다 받아 온 정성과 소란과는 그 정도는 비교할 수 없지만 -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아이스는 아픈 상태에서 다른 이에게 간호를 받은 적도, 누군가를 간호한 적도 없었으니까. 피트는 제 인생 중 가장 최고의 컨디션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각인된 이가 옆에 붙어 자기도 모르게 기분 좋은 향을 내뿜어 주니 개운하지 않을 리 없겠지만.
"…."
피트는 제 옆에 역시 기분 좋게 잠들어 있는 톰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이 애 얼굴을 이렇게 정면에서 보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니까. 그러다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톰의 목덜미를 가린 파자마의 끝을 살짝 내렸다. 쇄골쪽에, 옅긴 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한 상처가 보인다. 각인 상처. 그 날 도망가려는 제 오메가에게 정신을 잃고 달라붙다가, 톰이 자신을 밀치려고 한 순간 거절당하는 기분을 견딜 수가 없어서 홧김에 물어버린 거다. 톰이 아파했던 게 기억이 나긴 한다. 하지 말라고 빌던 모습도. 사실 그건,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장면이다.
솔직히 말하면, 미안함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분명 네가 싫어하는 행동을 했다고, 그러니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는 했다. 그것도 아주 깊숙히.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크게, 안도감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면 다 끝난 줄 알았던 거다. 네가 나한테 종속되면 된 거지. 지금 당장은 모르더라도 결국 언젠가 알게 될 거고, 그러면 네가 돌아올 곳은 나밖에 없을 테니까.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피트는 건방지게도, 그 전까지는 톰이 자신을 거부하는 상황을 깊게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억지로 범했다는 걸 기억하게 되면 아마 화를 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거절로 이어질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왜 네가 당연하게 날 받아줄 거라 생각했지? 사실 아이스에게 자신은 끔찍한 존재인 게 맞는데.
"…피트."
"안녕, 아이스."
청회색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 창문으로는 빛 한 줌 안 들어왔는데도 아이스는 눈이 부시다는 듯 눈을 몇 번이고 깜박였다.
"너 지금… 내 얼굴 보고 있었던 거야?"
"응. 일어나서 계속."
"그래…."
…왜…? 여전히 반쯤 잠결에 잠긴 목소리인데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 눈이 느리게 깜박일 동안에도 피트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 눈을 바라봤다.
"좋아서."
하하, 그래. 톰이 바람빠지듯 허탈하게 웃었지만 피트는 진심이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데. 어떻게 지난 몇 년을 참았지? 피트의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한 체 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던 적은 전혀 없는데 피트와 지내게 되면서 자꾸만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지는 아침이 늘어난다. 좋은 증상은 아니니까, 꾸역꾸역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톰이 자연스럽게 피트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네. 감기는 다 나았나 봐. 다행이야."
성격이 원체 불같아서 바이러스도 못 버티고 금세 도망가는걸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톰은 차가운 침대 밖으로 나섰다. 그러곤 바로 생각났다는 듯, 눈을 금세 가로로 뜨고는,
"피트 미첼, 나한테 설명해야 할 거 없어?"
하고 시선을 돌리는 거다. 톰은 최소한, 이렇게 나오면 피트가 변명의 태새를 취할 줄 알았다. 정작 피트 카잔스키-미첼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빛내곤 신이 나서 미주알고주알 읊고 말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비행 조종에 관심이 있는지,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는지를 들떠서 설명하는 피트를 보며 톰은 차마 준비한 비난의 말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하기사, 뭐라 비난한단 말인가? 이제 막 스무살이긴 했지만 피트는 어쨌거나 성인이고, 스스로 노력해서 프로그램에 참가한 걸. 게다가 피트의 반응을 보니 굳이 저 때문에 어거지로 끼어든 것도 아닌 것 같고.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그저 신이 나서 톰을 답싹 끌어안는 피트를 보며,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결국 톰은 그저 제 몸을 끌어안은 어린 남편의 뒷통수를 쓸어내릴 뿐이었다. 잘 했네, 하고 어색한 칭찬을 덧붙이면서. 부모님에게 칭찬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어색한 부모와 자식간이라면 이런 종류의 말을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정작 피트는 좋아 죽겠다는 태도로 자신을 더욱 세게 끌어안아서 숨이 막히긴 했으나.
그러니 론에게 지금 상황은 꽤 유쾌하다 못해 흥미롭게 다가왔다. 생각과는 달리 그 '꼬마 신랑' 은 톰과 함께 오지 않았지만, 제 시간이 되자 귀신같이 나타났다. 톰의 입장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변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날과는 달리 당당하게 캠퍼스 안에 바이크를 몰고 오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타고 온 건 맞는 듯 했다. 껄렁거리는 검은 머리의 소년을 보자마자 톰이 거진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튀어나가서는 헬맷은 썼는지, 과속은 하지 않았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으니까. 정작 그 잔소리의 대상자는 톰이 무어라 말을 하든 제 부인 얼굴을 보느라 바빴다. 그 꼴이 제 눈에도 너무 잘 보여서 어이가 없었다. 톰의 말을 들으니 이제는 아예 한 방에서 잔다고 하던데, 그러면 오늘 아침에도 본 거 아닌가? 바로 며칠 전에 제 도움을 받았으면서 저는 본체만체 하는 꼬마 다람쥐가 괘씸해진 론은 적당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아이스, 우린 먼저 가 있어야 할 걸."
"미안, 슬라이더. 기다렸지."
"별로. 그러니 미첼씨는 그만 저 쪽으로 가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론이 자연스럽게 톰의 허리를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피트의 눈이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예상했던 대로, 피트는 론이 톰을 감싸안은 손을 억지로 떨어뜨렸다. 날카로운 비속어는 덤이었고. 으르렁거리는 어린 신랑과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킬킬거리는 제 파트너를 떨어뜨려 놓는 수고는 톰의 몫이었다.
아무리 합동 프로젝트라 할지라도 첫 날 부터 함께 비행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애초에, 교육 내용이 다르니 사실 몇 번의 전형적인 수업만 보여주기 식으로 함께 할 거고. 피트 역시 그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눈 앞에서 몇 시간을 제 부인을 빼앗겼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결국, 이어진 두 번의 비행 이후 기체에서 내려 마이크를 빼곤 톰은 한숨처럼 내뱉었다.
"아까 왜 그랬어?"
"내가? 뭘?"
"피트한테."
"난 꼬마 신랑한테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는 론에 톰 역시 할 말을 잃었다. 하긴, 걔한테 아무것도 안 하긴했지.
"너네 꼬마 신랑이…."
"톰!"
론의 말은 미쳐 이어지지 못할 뻔 했다. 물론, 전속력으로 자신과 아이스를 향해 뛰어오는 다람쥐가 미처 도달하기 전에 론이 재빠르게 아이스의 귓가에 속삭이지 않았다면.
"집착이 어마어마하던데. 향 갈무리 해."
그리곤 피트가 닿기도 전에 론은 금새 체육관 쪽으로 사라졌고, 애꿏은 피트만 사라진 론의 뒷모습을 가자미눈을 하고 좇을 뿐이었다. 아이스, 저 새끼가 뭐라고 했어? 짜증스럽게 따라오는 피트의 말에 조금 넋을 놓고 있던 아이스가 덧붙였다.
"피트, 나한테 마킹했어? 아침에?"
"당연하지. 그게 왜 문제야?"
"왜냐고?"
"내 부인한테 내가 마킹하는 건데 뭐가 문제야."
"…."
그래서 아이스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긴 하지. 정말 부부 사이라면. 아이스는 당당한 피트의 태도에 당황했으나, 곧 론의 말을 떠올렸다. 피트가 제게 집착한다는 걸 피트 본인에게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듣는 건 또 별개의 일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 애로서는 이득이 될 게 없는 관계다. 어쨌거나 자신은 결혼 상대로서 가장 기피한다는 열성 오메가고, 집안의 사생아이며, 공공연하게 내다놓은 자식이 아닌가? 아무리 제 집안에서 강요로 이루어진 결혼이라고 해도 미첼이 이 정도로 결혼에 진심일 필요는 없다는 거다. 심지어 어제 방문한 피트의 아버지 역시 결혼 자체에 딱히 문제가 없다는 듯 행동했고.
"아이스, 뭐 해?"
"아…."
톰은 차고에 헬멧을 던져놓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피트를 바라보았다. 큰일이다. 그러니까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었어. 피트의 치기어린 집착이 부른 진짜 문제 말이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집 안은 익숙하면서 낯설다. 피트가 아마 학교 수업을 끝내고 비행 수업을 위해 애나폴리스로 오기 전에 집에 들려 집 안의 난방기를 켜 두었는지 따듯한 온기가 흘렀고, 늦게 들어올 걸 이미 예상해 두었는지 거실의 작은 불을 하나 켜 둔 것 같았다. 그리고 제 등 뒤의 차고에는 익숙한 검은 세단 한 대와, 어느 새 부터 그 옆에 없으면 걱정부터 솟구치는 바이크 한 대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이 모든 게…, 그러니까, 문제다.
"빨리 들어 와. 춥잖아."
아이스는 속절없이 따듯한 공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며 생각했다. 누군가 자시을 기다리고, 반기는 공간에 이렇게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저를 기다리는 다정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건데. 왜냐면 피트는 곧 떠날 존재니까. 멍한 톰의 모습에 피트는 꼭 제 발이 저린 것 같아 괜시리 말을 덧붙였다.
"아까 네 친구한테 성질부린 건 미안해. 하지만 그 자식이 내 앞에서 너한테 추근거리잖아."
"…정정하자. 론은 그런 식으로 추근덕거린 게 아니야. 나중에 보면 사과해."
"싫…, …알았어."
작은 불을 끄고 복도와 거실의 불을 키던 톰이 입을 잔뜩 내밀고 응접실 테이블에 가방을 던져두곤 쓰러지듯 소파에 앉는 피트를 보며 겨우 머릿속을 뒤덮었던 생각에서 벗어나 희미하게 웃었다.
"착하네."
"착하게 대답했으니까, 소원 들어줄거지."
"…뭐 먹고싶은데? 원하면 오늘은 저녁으로 인스턴트 먹어도 돼."
"……해줘."
"뭐?"
"감기 걸렸을 때 해줬던 거…."
빨리. 부탁하는 태도면서 정작 톰을 붙들고 끙끙거리며 벽으로 밀어붙이는 행각에 어이가 없었으나, 톰은 학습 능력이 좋은 수석답게 빠르게 피트가 무엇을 말하는 지 이해했다. 집이 따듯하긴 하지만, 바이크를 타고 오느라 저녁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온 피트의 몸은 여전히 차갑고 바깥 바람 냄새가 났다. 그러고보니, 피트가 언젠가 제 향이 차가운 바람 냄새라고 한 적이 있는데, 만약 제 향을 스스로 맡을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톰은 고개를 숙인 체 귀까지 붉어진 피트를 바라보다가 반쯤은 충동적으로 아이의 검은 머릿결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피트는, 그 행동에도 가만히 있었다. 꼭 잘 길들여진 늑대마냥. 톰이 몸을 숙여 여전히 차가운 그 뺨에 입술을 대어줄 때 까지.
그제서야 피트는, 왜 자신이 톰에게 거절당하는 경우를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 없는지 깨달았다.
넌 너무 다정하니까. 네가 너무 다정해서 끝도없이 널 원하는 내 욕구까지 채워줄 거라 생각한거야. 만약 내가 죽는다면 네 다정함에 익사해서 죽어버릴 거라 생각한 거지. 하지만, 더이상 네 따듯함이 나를 향하지 않는다면? 만약 아버지의 말처럼 그 다정함이 배신과 분노로 인해 방향을 틀어버린다면? 아니, 아예 그 길을 없애 버린다면?
피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주었다. 톰은 다정해. 하지만 자신은 전혀 다정하지 않다. 그러니까, 그 방향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저 모든 결과를 끌어안고 용서를 빌고는 사라질 성정은 아니라는 거다. 저를 봐 달라고 다그치고, 화를 내고, 기어코 제 손을 놓아버린 그 팔목을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만 그러면 안 돼. 그러면 톰은 영원히 나한테 웃어주지 않을거야. 착하다 말해주지도, 고생했다고 안아주지도 않겠지. 그건….
"큰일이야."
"…뭐가?"
"네가 있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네가 가 버렸다고 외로워지면 어떡하지."
"…."
"넌 언젠가는 떠나야 할 텐데."
그건, 안 되는 거잖아. 그렇지, 아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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