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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23:28
진정령, 난백 ㅅ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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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묘에 몇 번 더 들러 제를 올리고, 중추절이 지나 사람들이 다 빠져 한산해질 때쯤 나는 다시 배에 올라탔다. 하동을 거칠 필요가 없어 곧장 청하로 향하니 사흘 정도가 비었다. 청하에서 마지막으로 하루 묵기로 하고 섭회상에게 사다 줄 선물로 적합한 게 없나 구경하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잠시 멈춰섰다.

-또 실종됐대.

-거기서 그런 일 일어나는 게 하루 이틀 일이야? 정말이지, 지금 섭종주는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

-적봉존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멀쩡했는데......

-아무튼, 행로령 일대는 이제 최대한 지나다니면 안 되겠어. 완전 식인보루라니까.

행로령의 식인보루? 나는 머릿속에 그 기억을 저장하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새삼 운몽이나 청하나 사정이 정말 비슷하다고 중얼거리던 내 발걸음이 멎은 곳은 지난 번 들렀던 붓 가게였다. 붓만 파는 게 아니라 먹도 파는 곳이었으니, 먹을 하나 사 가야겠다 싶었다. 물론, 아주 아주 비싼 것으로.

가격을 기준으로 하니 고민해서 고를 필요 없이 구매에 이르는 과정은 간단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뭔 놈의 먹에 금박을 박는담...... 하여튼 나는 섭회상이 여러번 사서 썼었다는 먹을 샀다. 그리고 객잔에서 하루 묵은 뒤, 다음날 일찍 부정세로 향했다.

부정세에 들어서자, 아는 척 해주는 얼굴들이 몇 있었다. 특히 남초 집단의 몇 안 되는 여수사라는 전우애 같은 것으로 그나마 가까워진 애가 하나 있었는데, 도 쓰는 애답지 않게 하얗고 조그매서 무시하고 거리 두기가 좀 어려웠다. 걔가 또 내 옆에 붙더니 종알거렸다.

-밀이 너 없는 동안 전대 종주님들 제사 지낼 때 빼곤 종주님 얼굴도 못 뵀어. 방에서 거의 안 나오시는 것 같던데?

-저런......

달리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반응이 확실히 시원찮긴 했는지, 상대방이 나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근데 있잖아. 너 종주님이랑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종주님 일주일 뒤에 선 보신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그 선 따지자면 내가 성사시킨 건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상대방은 내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속닥거렸다.

-그럼 너 종주님이랑 적당히 거리 좀 둬야 하지 않을까?

나는 말뜻을 알아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하지만 네가 걱정하는 것 같은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아무튼 걱정해 줘 고맙다며 어깨를 짚었더니 여전히 걱정이라는 듯 한숨을 쉬는데, 나중에 꼭 딸 가져야지 다짐하게 만드는 귀여움이었다. 그때 시종 하나가 다가와 종주께서 나를 부른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그를 따라 섭회상이 지금 나와있다는 정원으로 향했다.

섭회상은 마치 그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원에서 새를 돌보고 있었다. 그가 인기척을 느끼기 전까지 나는 숨죽인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따지자면 별것 아닌 순간이지만, 그 순간 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어 그림을 그린다던 섭회상의 말을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언제고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그림을 그리는 것일 테다. 곧 섭회상이 뒤를 돌아 나를 발견하곤 환히 웃었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가 내게 다가오는 동안, 흰 손 위에 앉아있던 앵무새가 나에게 날아와 내 이마를 쿵 치곤 다시 새장에 가서 앉았다.

앵무새는 새장 문을 열어놓아도 도망치는 법이 없었다. 추적주술이야 걸려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폼이었다. 가끔 섭회상은 내가 새를 만져볼 수 있게도 해주었는데, 머리를 긁어주면 기분이 좋은지 잔뜩 흥분해선 몰라요, 몰라요 하고 외쳐댔다. 따지고 보면 서글픈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내내 기다렸어, 밀아.

오늘은 조금 검은 옷을 입어서인지, 아니면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까이서 보게 된 섭회상의 얼굴은 제법 초췌했다. 새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어째 더 왜소해보이는 그 모습이 걱정스러워 인상을 찌푸리는데, 상대방은 뭐가 좋은지 헤헤 웃을 뿐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돌의자 위에 앉더니 나를 불렀다. 가서 앉자, 곧 찻상이 내어져왔다.

-조상님들께 인사는 잘 드렸고?

-네. 덕분에요.

-그래...... 나는 제사 올린 뒤에 할 게 없어서 형님께 애사도 좀 지어보고, 뭐. 그랬어.

-잠은 잘 주무신 거예요?

내 질문에, 잠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섭회상이 찻상 옆으로 팔을 기대어 엎드려버렸다. 그가 투정 부리듯 말했다.

-걱정했어? 나?

-당연하죠.

-걱정됐으면 더 일찍 왔어야지. 너 없는 동안 난 잠도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었어.

햇볕이 결 좋은 섭회상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투명하게 부서졌다. 그 모습을 잠시 넋놓고 바라보는데, 섭회상이 툭 내뱉었다.

-네 말이 맞더라.

-예?

-그림으로는 안 되겠더라고.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데,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티내지 않기 위해 나는 품에서 먹을 꺼냈다.

-선물도 사왔으니 좀 봐주세요.

-이게 뭐야?

어린아이마냥 반색하며 꾸러미를 끌러본 섭회상은 얌전히 누워있는 먹을 보더니 작게 키득거렸다.

-다음 선물은 벼루나 연적이겠네?

뜨끔해서 아무 말도 못하자, 섭회상은 다시 팔에 얼굴을 기대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밀아.

섭회상에게 전재산을 다 바칠 수 있다는 충동 같은 것이 가슴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솔직히 포사에게 홀려 매번 비단 찢은 유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섭회상이 나한테 비단 찢어달라면 내가 비단만 찢겠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품에서 장죽을 꺼냈다. 불을 붙여 장죽 끝을 입에 물며, 나는 나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섭회상에게 물었다.

-선 준비는 잘 되어가세요?

섭회상이 대답 대신 시선을 피하는 게 썩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사실 기대도 안 했었어서, 나는 한숨만 쉬었다.

-평생 혼자 사실 것 아니면 잘 좀 해보세요, 종주님.

-내가 왜 혼자야?

나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때마침 부사가 나를 부르신다는 소식이 전해져,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섭회상은 일이 끝나자마자 또 자기에게 오라며 아쉬운 얼굴로 나를 보내주었다.

오자마자 일 시키지는 않는 상도덕이 있는지, 부사는 나더러 잘 다녀왔느냐고 간단히 묻기만 했다. 오는 길 별일 없었냐는 그의 질문에, 청하에서 들은 소문이 떠올라 말을 꺼냈다.

-행로령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능숙하게 글씨를 써내려가던 부사의 손이 잠시 굳었다. 찰나였지만, 나는 이 문제가 그냥 가볍게 넘길 것은 아니겠구나 본능적으로 알았다.

-오다 보니 사람들이 행로령에서 행인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조사를 좀 해봐야지 싶은데요.

사실 말하면서도 알았다. 저잣거리에 소문이 날 정도의 일을 아무리 일 안 한다고 해도 그 지역의 선문세가가 모를 리 없다. 내 생각대로, 부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 말이 맞아. 사실 이미 조사를 해 봤다네. 그런데......

-그런데요?

-소득이 없었지.

그럼 심각한 문제인 것 아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사가 말했다.

-그 일은 내 앞으로 알아서 더 고민해 볼 테니, 자네는 신경쓸 필요 없네. 자네가 신경쓸 일은 따로 있지.

-그게 뭡니까?

-종주님 맞선 말일세.

아주 잠깐 동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게 어떻게 행로령보다 중요합니까?

-더 중요하지 않을 건 뭔가?

부사가 물었다. 나는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것을 참았다. 그래 그 대를 잇네 마네 하는 문제가 일개 백성 몇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게 옳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기야 내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나. 나는 그동안 서른 해를 넘게 살면서 세상 더러운 꼴은 다 보아왔다. 지금 나 환멸난다고 얼굴에 대놓고 드러낼 군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부사는 나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더 산 사람이니, 내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했나보다.

-행로령에 대해 궁금한 눈치군.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부사는 나와 기이할 정도로 빤히 시선을 맞췄다.

-자네가 처음에 부정세에 오면서 무어라 말했는지 기억 하나?

-아니요.

-여기 정착하고 싶댔지. 그 말이 사실이었다면 나는 행로령에 대해 설명해줄 용의가 있네.

내가 그 순간 어떻게 해야 했을까? 갑자기 거기서 충성을 맹세해야 했나? 아니면 그냥 듣지 않겠다고 선을 그어버렸어야 했나? 나는 둘 다 하지 않았다. 그저, 등 뒤로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그 순간 느낀 모든 감정을 정리해버렸다. 차가워진 머리로 나는 물었다.

-그럼 한 가지만 대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어떤 질문인가에 따라 달라지겠지?

-행로령이 청하 섭씨의 주화입마와 관련이 있습니까?

부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 내게 의심은 남는다. 그러나 눈치싸움을 하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나는 순수하게 궁금했을 뿐이다. 마침내 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특별할 것도 정보일세. 자네가 겨우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게 오히려 놀랍군.

왜 자꾸 나를 엿먹이지? 나는 팔짱을 낀 채 부사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 보듯 관찰했다. 오늘따라 그는 영 분위기가 싸해 보였다.

주화입마는 청하 섭씨 직계들만의 것이 아니다. 뭘 수련하든 주화입마는 올 수 있고, 도를 수련하는 부정세 수사들은 특히 주화입마에 자주 시달린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더 이상 뇌를 거치고 물을 수가 없었다.

-부사님은 어떻게 여즉껏 살아계십니까?

-무슨 말인가?

그렇잖아. 종주도 주화입마로 죽고 젊은 수사들도 여럿 죽어나가는데, 환갑에 가까운 나이로 혼자 살아있는 건 기적 아닌가? 부사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좋아 삼대째 종주를 보필하고 있는 게지. 자네도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네.

그게 진심일 리 없다고 내가 생각하는 사이, 그는 다시 미꾸라지처럼 주제를 틀었다.

-그러니 자네가 이번에 종주님 맞선에 힘 좀 써주게.

나는 굳이 행로령으로 대화 주제를 되돌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된 거 금광요에게 행로령에 관한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면 해결해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느릿느릿 물었다.

-종주님 맞선을 제가 뭘 어떻게 돕겠습니까?

-이번 맞선이 성사되게 해달라는 건 아닐세.

뭐?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놀라서 눈을 꿈벅이던 나는, 이어진 말에 그대로 얼굴을 구겼다.

-앞으로 좀 도움이 될 수 있게 이런 저런 조언 좀 드려보라는 걸세. 장로님들 압박이 얼마나 심한 지 몰라.

-그런 것치곤 종주님은 태평해보이시던데요.

-그 분이야 그렇지. 장로님들께 매번 불려가는 건 나니까.

이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뻔뻔하네. 어이가 없어서 부사를 빤히 쳐다보면, 부사는 태연한 얼굴로 내 시선을 마주한 채 미소지었다. 어쩐지 좀 냉한 미소였다.

-사실 이번 선이 성사되냐 마느냐보다도, 종주께서 혼인에 뜻을 두신 것 자체가 성과일세. 자네 덕분이지. 조금만 더 힘써 주게나.

내가 거기 대고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집무실을 나서며 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안다. 섭회상이 나를 옆에 끼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겠지. 그와 별개로, 아무래도 이거 줄 잘못 선 것 같다. 생각해보면 저 남자는 이번에 섭회상이 맞선 보는 상대가 금광요의 섭외작이라는 것도 모르는 허당인데.

강호 밖의 사내들이 다 궁에서 일하는 데 목숨 건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그 과정에서 문인이 되든 무인이 되든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하게 된다는 것도 다들 안다. 선문세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문마다 조금씩 다르긴 해도, 수사가 신입 티를 벗기 위해 몸을 더 굴릴 것인지 머리를 더 굴릴 것인지를 하나 정해야 하는 건 같았다. 부정세의 경우 연무장에서 총령과 함께 구를 것인가 부사실에서 부사와 함께 서류 정리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초반에야 둘 다 했어도, 이제 어느 한쪽에 집중해야 할 때가 되었기에 나는 후자를 택했었다. 그쪽이 내가 여기 온 목적에 더 부합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난 역시 현장 체질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금광요에게 행로령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보냈다. 그러면서 그가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랬기에, 답장을 읽으며 나는 애꿎은 미간에 주름을 새길 수밖에 없었다. 행로령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 빼고 다같이 짰나?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런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답을 받고 나서 애꿎은 답장을 박박 찢어 태운 채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하기야 나는 돈을 받는 입장인데, 금광요가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건 개가 주인 밥 훔쳐먹으려는 것과 똑같지.

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이후 나는 행로령 일대에 관한 서류를 부사가 자리에 없는 동안 슬쩍 슬쩍 훔쳐볼 뿐이었다. 사실 그럴 여유도 별로 없었다. 섭회상의 선자리를 준비하느라.

솔직히 서로 조건 다 알겠다, 대화 나누어보고 진짜 안 맞겠다 싶지 않은 이상 결혼합시다 그럽시다 하고 끝나는 게 선 아닌가? 뭣보다 나는 선문세가 아가씨도 아닌데, 나한테 선자리 성공 비급이라도 있는 양 구는 섭회상과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난 정말 어이 없어 돌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 선을 성사시켜야 하는 입장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대충 내가 생각하기에 호감 요소인 것들을 섭회상에게 하나 하나 설명해주었다.

-일단 웃으세요. 아니, 그렇게 실없이 웃지 마시고요. 은은한 미소 같은 걸 좀 띄우시라고요.

그래봐야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란 상대한테 웃어줘라, 할 말 없으면 맞장구라도 열심히 쳐주라, 뭐 이딴 것뿐이었다. 한참 졸린 오후 그런 틀에 박힌 이야기를 하자니 어쩐지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이 와닿아, 나는 그냥 말하기를 관두고 담배나 물기로 했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있던 섭회상이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나 선 보기 진짜 무서운데, 밀아. 혹시 내가 신호 보내면 나 좀 구하러 올래?

-싫어요. 그리고 걱정 마세요, 종주. 듣기로 종주처럼 예술에도 조예가 깊고 성격도 좋기로 유명한 낭자라니, 선자리가 불편하진 않을 겁니다.

이야기 들어보니 다들 그 낭자가 아깝다던데, 금광요가 혼처 하나는 잘 잡은 모양이었다. 적어도 섭회상과 대화는 되겠지. 시 짓고 답수 짓고 뭐 그런 거 하면 될 것 아닌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부부라고 수진계에 소문 나면 섭회상 위상도 조금은 올라갈지도 모르지. 나는 가슴에 미약하게 느껴지는 따끔거림 때문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따끔거림의 정체를 판단하기 전에, 섭회상이 내 소매를 붙잡곤 징징거렸다.

-내 말은, 그렇게 완벽한 낭자가 애초에 왜 나랑 선을 보냐구.

글쎄. 금광요가 손 좀 썼겠지.

-뭣보다 너도 그렇고 다들 양심이 너무 없지 않아? 그 낭자는 이제 겨우 스물이 넘었다더라. 안 징그러워?

-뭐 원래 여자들은 다들 그때쯤 결혼하지 않나요.

-몰라! 나는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은 싫다구.

그럴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연상의 규수를 찾기엔 글러 먹었으니, 뭐 응원하는 것 외에 내가 뭘 더 하겠는가. 솔직히 내가 알 바조차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담배만 피우는데, 섭회상이 내 손에서 장죽을 뺏었다.

-왜 대답이 없어?

나는 나를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는 흰 얼굴에 그대로 연기를 뿜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냥, 뭐라 대답을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넌 정말...... 내가 혼인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갑자기 왜 이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선만 보시는 것 아니었어요? 곧장 혼인 하시려고요?

-내 말은, 넌 정말로 내가 다른 사람이랑 혼인했으면 좋겠냐는 거야.

-선 보시기로 한 건 종주님인데,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섭회상의 눈빛이 뭔가 변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가 두 팔을 뻗어 나를 끌어당겼다.

-가끔 넌 정말 너무할 때가 있어.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나는 그가 내 아랫입술을 깨물어 올 때까지 상황을 파악 못하고 멍청히 굳어 있었다. 그것을 승낙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상관 없었는지, 섭회상이 더 깊게 입맞춰왔다. 그의 혀가 내 입 안으로 파고든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밀쳤다.

섭회상에게 화가 났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눈에 눈물이 맺힌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뭐라 말을 얹는 대신 방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무래도 바람을 쐬어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젖은 입술에 차갑게 바람이 스치자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정원에 다다를 때쯤, 나는 소란스럽게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를 등 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아밀!

뒤를 돌자 그거 달렸다고 헐떡이는 섭회상이 있었다. 그가 내 오른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나 싫어하지 마.

-제가 종주님을 왜 싫어해요.

나는 고요하기 그지없는 정원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섭회상이 내 손을 잡고 있었고, 복도를 지나가는 이는 누구든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맥없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싫어하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섭회상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그가 어린애처럼 나를 뒤에서 안아왔다.

-너는 정말, 그래도 내가 명색이 종주고 너는 수사인데 항상 내가 이렇게 굽혀야겠어?

-뭘 얼마나 굽히셨다고.

-알면 놀랄걸.

섭회상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 뒤, 그는 평소보다 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내 마음이 궁금하지도 않지?

나는 대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질문에는 경악해야 했다.

-나를 네 남동생으로만 보니?

나는 곧장 몸을 비틀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 얼굴을 확인했다. 섭회상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대로 고여 있었다. 물론 그가 조금도 내 남동생 같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섭회상을 내 남동생으로 생각해서 지금 이러고 있다면 그건 하늘을 뒤집을 소리였다. 당신은 나를 섭명결로 생각해서 지금 이러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나는 최대한 자제하고 말했다.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리를 하세요.

내 대답에, 섭회상은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젖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나를 더 꼭 끌어안아왔다.

-그래. 그러면 됐어.

곧 그 일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선자리에서 섭회상은 놀라울 정도로 무난하게 행동해 상대방의 다음 선자리 약속까지 이끌어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나는 주변 반응을 보고 알았다. 우리 종주가 맞선에서 까이지 않았어? 그 삼독성수도 내내 퇴짜 먹었는데, 우리 종주가? 그것도 어디 평범한 상대도 아니고 수진계에서 좋은 신붓감으로 명성이 자자한 그 성씨 낭자에게? 부정세가 크게 술렁이는 것을 보다 보면 거의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선자리에 나는 나가지 않았지만, 전해 듣기로 섭회상은 꽤 상식인처럼 굴었다고 한다. 선자리가 아니라 시 합평회라도 되는 줄 알았다는 후기를 전해 듣고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섭회상이 간간히 얼빵한 소리를 하며 산통을 깨긴 했지만, 상대방은 그런 섭회상에게 내내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잘됐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기 종주가 혼인에 한 발짝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좋은지 웃는 상이 된 부사가 어쩐지 난 꼴뵈기가 싫었다.

-종주께서 가히 장족의 발전을 이루셨군. 다 밀 자네 덕분이야.

-특별 수당 주시는 겁니까?

-청하 섭씨에 대한 자네의 충성심 내 기억하겠네.

아니 돈을 달라고. 늙고 얄미운 고양이 같은 저 얼굴을 할퀴어버릴 수도 없고, 나는 그저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보았다. 속 모를 인간. 섭회상 혼인해야 하니 곁에서 떨어지라고 나에게 말할 법도 한데, 그런 말은 어째 한 마디도 안 하고.

아무튼, 주변 반응과 관계 없이 섭회상 본인은 자기가 보고 온 선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관련해서 전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실 그는 다가오는 자기 의형제의 생일 때문에 약간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택무군 남희신. 아정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공자방 1위의 그는 현 수진계에서 제일 등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받는 이이기도 했다. 적봉존도 오직 그에게만은 유했다고 하고, 금광요도 내가 보기엔 반쯤 그를 숭배하고 있었다.

-너 남희신 사랑하는 거 아니냐?

대놓고 고소 남씨에 퍼주는 금광요에게 그렇게 물으면, 금광요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짓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그는 감시탑을 비롯한 다양한 업적을 굳이 자기 것이라 내세우는 대신 자기와 남희신 두 사람의 공으로 돌렸는데, 그게 단순히 책임을 분산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눈에는 그게 어떤 방식으로든 남희신과 하나로 묶이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남희신을 닮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냥 좋은 거야?

-글쎄.

그렇게 대답하며 손 안에서 잔을 굴리던 금광요를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내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지 않니.

남희신이 너를 안다고?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나는 물었다.

-남희신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고?

네가? 그 질문이 생략되긴 했지만 금광요는 내 말뜻을 알아들은 듯 했다. 그가 삐딱하게 웃을 때, 그의 머리 위 오사모가 살짝 기울어지던 것도 분명히 기억이 난다. 그의 얼굴 위로 일렁거리던 등잔불의 그림자도.

-그러는 너는? 너는 나를 위해서 죽을 수 있어?

-취했냐? 새삼스러운 걸 다 물으시네요, 염방존.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취한 건 나였는지 굳이 덧붙였다.

-너 말곤 그런 거 나한테 물어볼 사람도 없다.

내 대답에, 금광요는 기분 좋은 듯 소리내어 웃었다. 그가 우아한 몸짓으로 내 술잔을 채워주던 것도 기억이 난다.

-옛말에 사내가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고 여인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이를 위해 용모를 가꾼다는데, 헌이 너는 아무래도......

-죽는다.

나는 중얼거리며 그것을 마저 비웠지.

그게 아니더라도, 금광요는 실제로 온씨 밑에 있을 때 나한테 남씨 고서를 가져다가 맡겼었다. 그때 운 안 좋게 온씨에게 들켰으면 나는 아마 모가지였겠지만, 딱히 그걸로 금광요를 원망해본 적은 없었다. 그건 금광요 입장에서도 도박이었을 테니까. 그때 나는 금광요와 단 한 번 만난 게 다였다. 그런 나에게 온씨가 찢어 불태우려 혈안이 되었던 책을 맡겼다는 건, 내가 그 책의 정체를 알고도 그를 고발하지 않았으리란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는 거다. 물론 내가 물건 확인도 안 하는 대가리 꽃밭이라고 생각한 걸 수도 있고 그게 또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한데...... 어쨌든, 그건 그와 내가 서로 믿지 않았으면 어긋났을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남희신이 금광요를 믿고 그에게 자기 가문의 유산을 맡기지 않았다면 그런 과거는 존재할 수 없었겠지.

금광요가 남희신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남희신도 금광요에게 정성이었다. 그 둘은 벌써 몇 년째 함께 감시탑을 만들고 관리하며 민생을 신경쓰고 있었다. 적어도 들리는 바로는 그러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금린대에 들를 때면 남희신이 와 있다는 이야기를 네 번 중 한 번쯤은 어렴풋이 듣곤 했다. 하지만 내가 멀리서는 몰라도 가까이에서 남희신의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뭐 아무리 잘생겼다봐야 내 눈에 비치는 섭회상만 하겠나. 나는 그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았다.

즉, 나는 고소에 가기 싫었다. 사실 그 이유는 남희신이 아니라 금광요였다. 괜히 또 섭회상 앞에서 금광요를 마주쳤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냥 부정세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섭회상에게 대놓고 말했다.

-저는 부정세에 남을래요. 이번 고소 가는 행렬에서 빠지겠습니다.

계속 도망다니다가 결국 붙잡혀 서류와 씨름하던 섭회상이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듯했다. 곧 그가 그러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나는 그가 맞선을 잘 마친 데 놀란 부정세 수사들만큼이나 놀랐다.

-왜, 내가 같이 가달라고 떼쓰는 걸 기대했어?

-아뇨.

그런 걸 왜 기대하겠는가. 하지만 그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더러 부정세에 남으라고 할 줄 예상 못한 건 사실이었다. 그 사실에 왜 스스로 민망해지는지, 나 스스로도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이제 해질녘이 다 되어 방 안이 어두운 게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뜨거워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섭회상이 내려놓은 서류에 얼굴을 박았다.

섭회상이 결재한 뒤 내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게 이제 거의 당연한 일처럼 되어있었다. 문제는 글자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나는 꾸역꾸역 글자를 눈에 발랐고, 갑자기 속도가 붙었는지 마지막 장에 인장을 찍은 섭회상이 나에게 웃는 낯으로 서류를 건넸다. 씨발. 뭐가 더 씨발일까. 어쩐지 묘한 섭회상의 눈빛? 종이를 받아드는 내 손에 부러 스친 것이 분명한 그의 손끝? 아니면 등신같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나?

나는 대충 다 개씨발이라고 결론 내린 뒤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섭회상이 내 손목을 잡았다. 정신이 없었던 나는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그대로 휘청거렸고, 섭회상은 이게 현실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게 나를 감싸안았다.

그와 내 코끝 사이 약 반 뼘 정도의 거리를 그는 줄이지도 않았고, 늘리지도 않았고, 달리 어떤 대사를 치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만 보았을 뿐이다. 마치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 또한 그를 마주보았다. 그의 시선은 집요하다고밖엔 설명할 수 없었지만, 흔히 표현하는 것처럼 불꽃 같은 시선은 분명 아니었다. 오히려 동공이 확장된 그의 눈동자는 마치 관 위에 뿌려지는 한줌 흙처럼 기묘할 정도로 새까맸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본 순간, 섭회상이 갑작스럽게 나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생각 해?

섭회상이 그렇게 물었을 때 내가 곧장 대답할 수 없었던 건,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좀 돌아온 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부러 헛웃음을 지었다.

-종주께서 이상하게 요새 똑똑해지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섭회상은 자기가 멍청했다는 말이냐며 나에게 화를 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어떻게 알았어?

-네?

이제 멍청해진 건 내쪽이었다. 멍하니 섭회상을 바라보자, 그가 비밀을 말하듯 속살거렸다.

-사실 두뇌에 좋은 영약이 있다고 해서, 그걸 구해다가 먹었거든.

-진짜요?

-그럼 가짜겠어?

-뭐야. 그럼 얼른 더 드세요. 저한테도 좀 파시고요.

나는 진심으로 섭회상에게 그렇게 응수했다. 섭회상이 웃음을 터뜨리는 걸 보고서야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 아니 근데 진심 진짜인 줄 알았다고. 무슨 신병이라도 앓는 게 아닌 이상 사람이 이런 식으로 휙휙 바뀌는 게 가능한 거야? 내가 진심으로 당황하고 또 심란해 하는 사이, 섭회상은 거의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어제꼈다. 한참 뒤에야 웃음을 멈춘 그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정말 알기 쉬운데, 그래서 무서워.

-네?

- 요즘 항상 무섭단 말이야, 너 때문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섭회상이 내 어깨를 부채로 톡톡 쳤다.

-보름 뒤면 돌아올 테니 잘 지내고 있어. 운심부지처 식사가 어떤지 알면 아마 너도 내가 너를 안 데려가는 데 감사할걸?

거기에 대고 뭐라 대꾸하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