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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1 21:57
진정령, 난백 ㅅ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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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손은 가시손이라는 말은 참인 듯했다. 중원절 전날 밤을 그리 절절하게 보냈으면 적봉존의 영혼이 보우하사 당일만큼은 좀 평화롭게 보낼 법한데, 그럴 수가 없었다.
-염방존께서 오셨습니다.
섭회상을 진정시켜서 아침도 먹여두고 종주실에도 겨우 앉혀놨는데 금광요가 부정세 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내 심정은 영 좋을 수가 없었다. 일단 금광요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슬슬 피하는데, 섭회상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김에 나는 어젯밤의 기억으로부터도 벗어날 겸, 내가 원래 부정세에 온 목적도 되새길 겸 섭회상이 팔랑이던 서류를 정리하며 물었다.
-염방존께서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중원절이어서?
-응, 아마 형님께 인사를 올리러 오시나 봐. 평소엔 기일만 함께 챙겨지 중원절은 아니었는데.
대답하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섭회상이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순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저번에 쓰러졌어서 걱정되신 모양이야. 셋째 형님이 나를 특히 잘 챙겨주셔.
가슴을 누가 찌른 듯 답답하게 아파왔다.
금광요가 섭명결을 싫어하던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단순한 증오라기에는 그 감정이 조금 복잡해보였지만, 어쨌든 금광요는 섭명결이 죽고 나서 더 살 만 해 보였다. 그러니 그가 단순히 섭명결에게 인사를 하러 부정세에 온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정말 인사 하나 때문에 왔다고 해도 그게 섭명결을 위해서 온 건 아니겠지.
왜일까? 나에게 직접 당부해야 할 일이 있기라도 한 걸까? 나는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금광요를 모른 척하고 싶었다. 내가 그냥 평범한 부정세 수사로 여기 와 있는 거면 좋을 텐데. 그런 의미 없는 소망을 입 안에 굴리면서 정원으로 가는 섭회상을 따라가던 나는 저 멀리, 오늘 처음 봤다면 좋을 얼굴이 보여 고개를 숙였다.
-종주. 저는 가보겠습니다.
-뭐? 왜? 나랑 더 있어줘.
섭회상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금광요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 나는 손목을 비틀어 뺐다.
-의형제끼리 대화하시는 데 제가 끼면 이상하잖아요. 지난 번에 부사님이 보라고 주신 수사들 근무일지가 있는데, 그거 검토하고 정리해야 해요.
섭회상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오므렸지만, 나를 더 붙잡지는 않았다. 일이 끝나면 바로 자기에게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을 뿐이다.
일을 다 마치자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 섭회상은 웬일로 종주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사가 자기 집무실에 없었나. 금광요라는 이름 석 자를 생각하며 나는 중요해보이는 서류들을 대충 뒤적여보았다. 그러나 달리 특별한 건 없었다. 뭐 그렇겠지. 난 여전히 금광요가 날 여기 왜 보냈는지 모르겠다. 섭회상은 일 끝나고 곧바로 자기한테 오랬지만, 나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대충 몸 좀 풀고 담배 좀 태우다가 가려고 내 방으로 향하는데, 중간에 길이 가로막혔다. 금색 옷을 입은 수사가 나에게 공수했다.
-염방존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시발.
은은히 미소띤 수사의 얼굴을 보니 핑계 대고 안 가긴 글렀다 싶어,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금광요는 정원을 접한 독채를 하나 따로 쓰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햇볕을 받으며 방 창가에 앉아있는 금광요가 보였다. 등 뒤로 문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떠나지 않고 앞에 계속 서있는 수사의 그림자를 바라보는데, 금광요가 말했다.
-방음 주술을 걸어놨으니 괜찮아.
그렇다면야 안심이지만, 그래도 난 뒷말 나오지 않게 부름받은 수사의 정자세를 유지했다.
-왜 부르셨습니까? 염방존.
-그냥, 네 얼굴도 볼 겸, 새롭게 부탁도 할 겸.
-들키면......
-안 들켜.
금광요가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 들키면 뭐 어때? 난 회상의 셋째 형님이잖아. 회상이 요즘 관심 가졌다는 선자가 궁금해 직접 대면해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부릅니까?
-부정 안 하네?
금광요가 고개를 기울였다.
-부정세 사람들은 이미 다 너를 알고 있더라. 회상이 너를 무척 귀애한다며. 소문의 정도가 네가 편지로 전해준 것 그 이상 같던데.
-그건......
나는 명치께에 느껴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한숨을 쉬었다.
-그냥 소문일 뿐이야.
-그래?
-그래. 맞다. 나 궁금한 거 있어. 중요한 문제야.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를 따라 돌연 심각한 얼굴이 되었던 금광요는 내 질문을 듣더니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 섭명결 닮았냐? 생긴 거?
쪼개긴 왜 쪼갠담. 나는 금광요의 예쁜 얼굴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웃을 거 다 웃은 금광요가 고개를 저으며 눈가를 짚었다.
-조금 닮은 것 같기도?
-시발......
-장난이야. 왜, 회상이 너더러 섭명결 닮았대?
고개를 끄덕이자, 금광요는 더욱 즐거워보였다.
-그래서 너한테 그렇게 의지하는구나. 잘됐네.
-이럴 거 알고 보낸 것 아니었어?
-아니. 나는 사실 회상이 너를 이런 식으로 아끼게 될 줄 몰랐어. 그래서 놀랍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잘 된 일이야.
그러더니 금광요는 나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금광요가 뭔지는 몰라도 운을 떼기를 기다리며 장죽을 입에 물었다. 담배통에 불이 붙고 연기가 나기 시작하자 금광요는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종이를 펴보니 가남 성씨 고명딸에 관한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걸 금광요가 나에게 왜 주는지 나는 모르지 않았다. 헛웃음이 흘렀다.
-염방존께서 이제 중매도 서시는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회상이 또 쓰러졌다며? 칠석 날이었댔나.
내가 전한 정보이기는 했지만, 막상 금광요가 그 사소한 정보를 다 기억하고 있다는 데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혼자 하루를 24시진 사나, 아니면 머리 내부 용량이 남들보다 두 배는 큰가? 저 정도로 살벌해야 금씨 종주 노릇 하는가보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금광요는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부터 계속 회상에게 권했었는데, 자기는 애먼 집의 낭자 데려다가 고생시킬 생각 없다며 번번이 퇴짜놓았거든. 하지만 회상이 계속 지금처럼 쓰러진다면...... 섭씨를 위해서라도 혼인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지. 그래서 내가 회상이와 어울릴 만한 낭자를 골라놨어.
진짜 지독하다.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나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리고 잠시 쓴 입맛을 다시다가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뭐가?
-섭씨 이젠 뭐 별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해야겠냐고.
내 질문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금광요의 미간에 줄이 하나 생겼다.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처럼 섭씨를 챙기는 건 내게도 좋은 일만은 아니야. 회상 대신 처리해야 할 일이 한가득이고, 우리 수사들 보내주는 것도 내 입장에선 번거로워. 하지만 내가 그 애의 셋째 형님이니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번거로우면 나를 왜 여기 심어놨어?
그렇게 묻긴 했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금광요가 아니었다면 섭회상이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고, 청하 섭씨가 사대세가의 명맥이나마 잇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을 거다. 그러니 섭회상이 금광요의 호의를 정말 순전한 호의로 여기든 아니든, 그를 거절할 수는 없다. 이것 참 섭회상이랑 나랑 닮은 점이 하나 더 있군. 나도 따지자면 금광요에게 기생해서 살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힘없이 물었다.
-결혼도 그래. 진짜 섭회상을 위해서라고?
-아닐 건 뭐야? 사실 회상에게는 과분한 조건의 낭자인데. 그리고 내가 회상을 굳이 해쳐서 얻는 게 뭐니? 슬슬 섭섭해지려고 하네.
금광요의 미소는 지나치게 산뜻했다.
-뭣보다, 헌아. 생각해 봐. 네가 섭명결이라면 회상을 지금 이대로 둘 거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애꿎은 장죽만 잘근잘근 씹는 것을 보더니, 금광요가 웃는 얼굴로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조그만 금색 주머니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뭐야?
-담뱃잎. 이번에 새로 서역쪽에서 새로 들어온 게 있는데, 네 생각 나서 조금 가져왔어. 써보고 마음에 들면 말해. 더 보내줄게.
시발. 나는 탁상 위의 주머니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금광요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헌이 너 마음 약한 건 내가 잘 알아. 하지만 걱정 마, 나는 회상을 해치지 않을 거야. 네 손으로는 더더욱.
그것 참 안심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주머니를 열어 마른 담뱃잎을 꺼냈다. 담배통에 잎을 마구 쑤셔넣는 나를 금광요는 흐뭇하게도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창 밖을 보았다. 묘한 향기가 곧 폐부를 가득 채웠다. 한참 입술을 씹다가,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뗐다.
-섭회상이 너한테 엄청 의지하더라.
-알아.
재수없게 굴긴. 속으로 웅얼거리며, 나는 말을 이었다.
-시킨 일은 최대한 해 볼게. 그냥, 오늘은 괜히 섭회상 자극하지만 마.
-무슨 뜻이야?
-어제 또 섭명결 때문에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악몽도 꾸더라. 섭명결 머리가...... 없었댔나.
별 뜻을 가지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금광요가 주의해줬으면 해서 일러둔 것이었는데, 대꾸가 돌아오지 않아 고개를 돌리자 금광요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있었다. 금광요가 섭명결 싫어하는 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래도 자기 의형이었고 시체도 못 찾았는데, 머리 없다는 말은 듣기 싫었나? 그러고 보니 섭명결 시체는 진짜 못 찾았는지 문득 궁금했지만, 금광요 표정이 영 별로라 나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 시도가 곧바로 성공하진 못했다.
-어제 이상한 일은 뭐 없었어?
나는 어젯밤을 떠올렸다가, 그대로 머릿속에서 접었다. 최대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금광요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습관처럼 입꼬리만 올렸다. 그 표정이 보기 싫어, 나는 아예 화제를 확 돌려버렸다.
-아무튼, 넌 어제 등 띄웠어?
-응. 그랬지.
금광요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저거 분명히 뭔가 일을 꾸미는 얼굴인데 싶어 인상을 찌푸린 채 바라보면, 금광요가 곧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금린대에서.
-운몽은......
내가 말끝을 흐리듯 묻자, 금광요는 고개를 잠자코 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광요가 맹시라는 창기의 소생인 건 수진계 사람들이 다 알지만, 그 맹시가 운몽에 있는 기루 소속이었다는 건 아는 사람만 알았다. 그리고 금광요가 그 기루를 없앤 뒤 거기 절을 지었다는 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바꿔 말해, 금광요는 그 절에 발걸음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종종 거기 가서 향을 피운다는 걸 용케 알더라. 사람 시켜서 계속 거길 관찰하고는 있나보지.
-중추절쯤 가볼까.
주어도 뭣도 다 잘라먹은 내 말을 듣고, 금광요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 금광요가 먼저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걸 안 물어봤네. 부정세는 어때? 지낼 만 해?
-아니.
나는 아직까지 미약하게 욱신거리는 팔의 상처를 생각하며 즉답했다. 그러나 약을 발라주던 섭회상의 손길도 함께 생각나 두 눈을 질끈 감아야했다. 금광요는 말없이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답했다.
-네가 왜 기산으로 튀었는지 알겠더라. 나쁜 놈아. 뭐? 다 죽은 가문이라 편할 거라고? 그렇게 약 팔고 나니까 기분 좋디?
금광요가 소리내어 웃었다.
-미안해.
바로 사과를 받아주기엔 쌓인 게 있어 나는 대꾸하는 대신 담배만 뻑뻑 피웠다. 내가 자길 용서할 걸 다 안다는 듯 예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섭회상 예쁘다는 이야기는 왜 미리 안 해줬어?
-뭐?
금광요가 드물게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회상...... 그래. 하기야 너는 항상 작고 힘없는 것들에 약했지.
작고 힘없는 것들. 그 표현이 거슬렸지만 나는 꿋꿋이 대답했다.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글쎄. 대부분이 안 그럴걸?
-네가 아무리 선독이라고 해도 그렇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지 안 그런지 그걸 어떻게 아냐?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 수없이 많다. 이건 비단 내 남동생이나 섭회상을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지난 십 여 년간 세상을 유랑하며 느낀 현실이었다. 그 사실이 나는 어릴 적부터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으면 했다. 그런 사람들이 없을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 자체가 그들을 도우려는 사람 또한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들이 살아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금광요가 미소짓더니 모자를 고쳐썼다.
-난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안 했는데. 너는 안 그런 사람인 것 내가 잘 알잖아.
저 봐. 말꼬리 잡는 거랑 추켜세우는 거 동시에 하는 게 보통 정치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무튼, 난 네가 여기 오래 있어주면 좋겠어.
이것도 그렇다. 나는 말뜻을 알아듣고 입매를 굳혔다. 금광요가 나한테 탁상 위에 올려져 있던 내 손등을 토닥였다.
-계속 보자, 헌아.
나는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그 길로 나는 금광요의 방을 나서서 종주실로 향했다. 한낮의 부정세는 어제의 그 음산하고 진득한 밤풍경이 거짓이라는 듯 멀끔했다. 어제 일은 정말 다 신기루였나보지. 그래 그 편이 더 마음 편했다.
종주실까지 가는 길에 나는 주구장창 담배를 피웠다. 혼인. 섭회상이 혼인이라. 금광요 말대로 정말 섭회상이 걱정되어 그러는 거라면 내가 섭회상 혼인시켜선 안 된다고 나댈 필요도 없었다. 하기야 금광요 입장에선 섭회상 아들보다는 섭회상이 더 다루기 쉬울 태지. 금광요 입장에서 섭회상을 해칠 이유가 없고, 무엇보다도, 금광요라는 인간이 섭회상한테 분명히 정을 주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문제는 그 정이란 것을 얼만큼 주고 있느냐인데...... 사실 문제일 것도 없다. 금광요가 섭회상과 그 가남 성씨 아가씨를 혼인시키기로 결심했다면 이미 그건 그렇게 결정된 일이라고 봐야 했다. 내가 혹시라도 그걸 훼방놓고 싶다한들 의미 없다. 내 노력이라 해 봐야 금광요가 짜놓은 계획이 이루어지는 힘에 비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침내 종주실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심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섭회상은 어쩐지 우울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있었다. 보자마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섭회상이 나에게 어쩐지 조금은 냉랭하고 조금은 앙칼진 시선을 보냈다.
-일 끝나고 바로 온 거 맞아?
-네?
-찻상 준비해뒀는데, 다 식었잖아.
시무룩하게 쳐져있는 섭회상의 어깨를 보다가, 나는 사람을 시켜 새 찻상을 내오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섭회상이 바란 대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됐으니까 이리 와.
다가가자 덥썩 내 손부터 잡는 섭회상 때문에 이게 뭔가 싶었지만, 어째 분위기가 사이 좋은 언니동생 사이 손 잡는 것과 비슷해 그냥 뒀다. 옆에 앉자 섭회상이 아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오. 뭐지. 부정맥 올 것 같은데. 심장을 제외한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는데, 섭회상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내쉬었다.
-냄새가 조금 바뀐 것 같아.
섭회상이 장죽을 쥔 내 손을 비어있는 손으로 또 쥐어왔다.
-이것 때문인가?
가까워진 섭회상의 얼굴이며, 사르르 옆으로 흐르는 그의 머리카락이며,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며, 내 손에 닿은 그의 손이며, 그의 향기며...... 나는 그냥 그대로 계속 굳어있기를 택했다. 안 그러면 뻥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담뱃잎을 바꿨어?
-네.
-왜? 이게 네 취향이야?
그러면서 나를 올려다보는 섭회상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입술을 핥았다가, 속으로 온갖 쌍욕을 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아뇨. 저는 그냥 아무 거나 피워요. 그런데 종주께서 싫으시다면. 그러면 다른 거 태울게요.
-응. 그래줘.
제법 도도하게 말한 섭회상이 멀어졌다. 나는 그가 오늘 왜 이러는가 생각했다. 곧 그가 그 이유를 친히 말해주었다.
-아니, 밀아. 들어 봐. 작은 형님이 오늘 답지 않게 잔소리를 하시잖아.
어제 그 뭐랄까, 조금 미쳐 있던 건 햇빛 아래 사라지는 허상이기라도 했던가 싶게 섭회상은 어린애마냥 내 팔을 흔들며 하소연을 했다.
-자꾸 야렵대회에 나오라고 하시질 않나, 혼인 이야기를 꺼내시질 않나.
섭회상은 내가 놀라기를 바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미 금광요에게 다 들어서 알고 있었고, 괜히 놀라는 연기를 하면 더 어색할 것 같아 나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실망한 듯한 섭회상의 얼굴에 어쩐지 또 양심이 찔려서,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그의 혼인 쪽으로 이끌었다.
-종주님 이립이 훌쩍 넘으셨잖아요. 불혹 전에는 그래도 합환주 드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는 너도 아직 혼인 안 했잖아.
나는 왜 걸고 넘어져. 어쩐지 입맛이 써서 담배를 입에 물려다가, 방금 섭회상이 그 냄새가 싫다고 했던 게 떠올라 그냥 아예 담뱃불을 꺼버렸다. 장죽을 탁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뭐 맘만 맞으면 아무나 데려다가 살 수 있지만, 종주님은 결혼 준비만 몇 년 걸리실 것 아녜요. 그러니 미리 상대를 생각해두셔야죠.
-싫어. 무섭단 말이야.
섭회상이 탁상 위에 엎드려버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목선이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뭐가 무서우신데요?
-부인될 사람이 엄청난 잔소리쟁이면 어떡해?
-종주님이 잔소리한다고 듣는 분이세요?
-쳇.
수가 통하지 않자, 섭회상이 혀를 차더니 입술을 삐죽였다. 서른 살 넘어 저러는 건 일문삼부지여서 할 수 있는 거겠지만...... 솔직히 너무 귀엽다.
-그럼 부인될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해?
-싫다면 애초에 그 쪽에서 혼인을 승낙 안 하겠죠.
-아니, 혼인을 하고 나서 내가 싫어지면 어떡해?
-그럼 절혼해야죠.
-너 그래도 내가 종주인데 대답이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니니?
섭회상이 턱을 괴더니 나를 맹렬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나 진짜 무섭단 말이야. 난 똑똑하지도 않고, 형님처럼 멋있지도 않잖아.
그러더니 갑자기, 무언가 재미있는 게 생각나기라도 한 듯 물었다.
-밀이 너 우리 형님이 무려 공자방 7위셨던 것 알아?
-아뇨? 몰랐어요.
진짜 몰랐다. 그 유명한 고소쌍벽이 공자방 1, 2위를 차지했다는 것만 알았고 금광요가 6위였었다는 것만 알았지. 섭명결이 그 바로 뒤였다고? 적봉존 칭호를 허투루 얻은 건 아니었나보지? 근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별로 좋아할 일은 아니다. 여자한테 생김새가 금광요 닮았다는 건 칭찬일 수 있지만 섭명결 닮았다는 건 어떻게 해도 칭찬이 안 된다.
아무튼 간만에 자기 형님을 자랑하게 되어 신이 났는지 섭회상은 섭명결이 얼마나 남자답고 멋있었는지를 술술 늘어놓았다. 햇빛 때문일까, 어제 밤에 듣던 형 자랑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한참 섭회상이 종알거리는 소리를 듣던 나는 그래서 자기가 섭명결보다 한참 모자라다는 쪽으로 흐르는 대화를 중간에 끊었다.
-적봉존께서 호남에 쾌남에 하여튼...... 무척 준수한 분이신 건 알겠지만 조금 취향을 타시잖아요.
-뭐?
-염방존께서 적봉존보다 공자방 윗순위이신 거 보면 답이 나오지 않나요? 사내답고 우직한 남자도 인기 많지만, 수진계엔 곱고 상냥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더 많아요. 그런 점에서 적봉존보다는 오히려 종주님이 더 뭐랄까...... 다가가기도 편하고 더 정감가고. 보호본능도 자극하고. 그렇죠.
한 마디로 내 취향은 보편적이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두 눈을 깜박이며 내 말을 듣던 섭회상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어서 나는 심장마비로 그대로 세상 뜰 뻔했다.
-하지만 나는 공자방 순위에도 오르지 못했는걸. 셋째 형님이랑 나를 비교하는 건 셋째 형님께 실례야.
-실례긴요? 종주님이 염방존보다 몇 배는 더 걸출하신 걸요.
-에? 정말?
-그럼요. 종주님이 훨씬 고우세요. 세상 사람들 눈이 다 삐었죠.
내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웃음을 터뜨린 섭회상이, 아예 애교 부리는 강아지마냥 내 팔 위에 얼굴을 얹었다.
-그럼 네 눈은 안 삐었어? 너는 나 같은 남자가 취향이야?
죽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가슴에 처박듯 끄덕였다. 섭회상이 배부른 고양이처럼 웃었다. 심장에 너무 무리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참았다. 그런 내가 곧 죽을 것 같아 보였는지, 섭회상이 친히 내게 찬물을 부어주었다.
-그런데 밀이 너, 셋째 형님이 공자방 6위셨던 건 어떻게 알아? 벌써 옛날 전 일인데. 셋째 형님한테 원래 관심 많았어?
-그게...... 저번에 왔던 금씨 수사들이 그걸로 떵떵거리더라고요.
나는 내 순발력을 스스로 칭찬했다. 빈말로도 금광요를 흠모한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괜히 내 양심에 찔렸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자면 섭회상, 금광요처럼 희고 중성적인 남자들이 다 내 취향이긴 했다. 그래도 섭회상 앞에서 금광요 이야기는 최대한 꺼내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섭회상이 나른하게 말했다.
-네 말 잘 알아들었어.
-네?
내가 뭐라 했는데요?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섭회상이 웃었다.
-나는 곱게 생겨서 보호본능을 자극한다며. 그럼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선자와 혼인하라는 거지?
아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섭회상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곤 다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를 지켜주고, 내 응석도 받아주고, 잔소리도 안 하는 여인이 있다면 소개시켜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금광요가 찍어둔 가남 성씨 낭자가 부디 그런 사람이기를 바랄 수밖에.
*
금광요와 섭회상은 그 날 저녁 사당에서 섭명결에게 제를 올렸다. 나는 사당 앞에서 다른 섭씨, 금씨 수사들과 서 있었다. 어쩐지 금린대에서 보초 서던 때가 생각났는데, 궁중 암투 벌이고 싶은 거 아니면 수사 생활 하기는 부정세가 더 좋은 것 같기도...... 물론 섭명결 살아있을 때는 개빡셌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고, 금씨와 섭씨의 두 주인께서 사당을 나오셨다.
-울지 말거라, 회상.
금광요가 다정히 말하며 섭회상의 등을 토닥였다. 섭회상은 종주로서의 체통 따위 내버린 채 거의 숨이 넘어가라 울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큰 형님께서도 네가 너무 슬퍼하는 건 원하지 않으실 거야.
-셋째 형님......
금광요는 무너지는 섭회상의 몸을 익숙한 태도로 받아들었다. 한 두 번 해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저 멀리 뜬 보름달을 올려다보더니 한숨 쉬듯 말했다.
-사실 지난밤 내 꿈에 큰 형님이 나오셨단다. 너를 더 잘 챙겨주지 않고 뭐하냐고 나를 꾸짖으시지 뭐니. 그 꿈이 너무나 생생해서 중원절은 중원절이구나 했다.
금광요 이게 미쳤나? 그게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이런 개수작을 부린다고? 하지만 이게 개수작이라는 걸 알 리 없는 섭회상은 안 그래도 창백하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둘째 형님의 문령에도 항상 답이 없으시니...... 어디 계시는지 일러주시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네게도 소식이 없더냐?
-아......
이제 섭회상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나서서 섭회상을 부축했다.
-염방존. 저희 종주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니 이만 방으로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눈으로 금광요에게 욕을 했고, 금광요는 잠시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미소지었다. 스무 해 가까이 보고 살아서인지, 그 짧은 사이 우리 사이에는 말 없이도 충분한 대화가 오갔다. 다만 마음에 걸린 점은 금광요의 미소가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래야지. 회상, 몸 보중하거라.
금광요가 떠나고, 나는 섭회상을 부축해 방까지 데려갔다. 나쁜 새끼. 뭐? 섭회상 건드릴 생각이 없어? 지금 이것만 봐도 금광요에게 섭회상이라는 존재의 우선순위가 상당히 밑에 있으리라는 게 다 보였다.
그게 왜 이토록 화가 나고 답답할까.
-종주.
나는 섭회상을 침상에 조심스레 눕혔다. 섭회상의 얼굴은 흠뻑 젖어있었다. 지금이 밤이라는 것을 나는 그 창백한 얼굴을 보며 새삼스레 깨달았다.
-종주, 괜찮으세요? 향을 피워드릴까요?
섭회상은 대답 대신 팔로 눈가를 덮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우선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협탁 위의 촛대에 불을 밝히려는데, 섭회상이 내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
나는 아주 잠시 동안 망설였지만, 섭회상의 손에서 천천히 팔을 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섭회상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아귀힘이 정말 이상할 정도로 세단 말이지. 섭회상도 섭씨 사람은 맞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섭회상 옆에 걸터앉았다.
-그럼 주무실 때까지만 같이 있어드릴게요.
옆에 있으라는 섭회상 명령 때문에 어젯밤을 꼴딱 새웠다. 그러니 저도 오늘은 자야죠, 종주님. 물론 어제 밤새워서 종주님 얼굴을 보며 버틸 수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니겠습니까.
어젯밤의 그 일은 신기루로 남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섭회상의 젖은 뺨을 닦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면 문득 나는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매일 밤 이렇게 우는 걸까? 섭명결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만 알면 당장이라도 가지러 가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이 사람이 덜 울까?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최대한 길게 뻗어 수면향을 피웠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아주 조금 아쉬워했다. 섭회상이 팔을 치우지 않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데에.
내가 그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건 입술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낮에 그랬던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지거나 가슴이 울렁거리진 않았다. 오히려 속이 무척 차분해졌다. 시선을 조금 내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목울대를 바라볼 때였다.
-나 맨날 이렇게 우는 건 아니야. 밀아.
내 생각을 읽었나? 섭회상이 독심술을 부릴 줄 알았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드는데, 옆에 놓인 내 손등을 가만가만 매만지며 섭회상이 물었다.
-넌 어떻게 버티니?
맥락 없는 질문처럼 들렸지만, 나는 그의 말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촛불 빛을 받아 검붉은 내 옷소매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냥, 생각을 안 합니다.
-그게 쉽니?
-생각이 나면 나는 대로 어쩔 수 없지만, 굳이 제가 억지로 떠올리진 않습니다. 그래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아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치 파도에 떠밀리는 듯 울렁거리는 감각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산다는 데 별 의미를 안 두면 됩니다. 어차피 사람은 다 죽잖아요. 제가 뭐 얼마나 슬퍼하든 아파하든 어차피 제가 죽으면 그것도 끝 아닙니까. 그것도 길어봐야 몇십 년이라는 걸 생각하면 죽음이 무섭지 않지만, 애초에 굳이 나서서 죽을 필요도 없어지는 거죠.
죽어서 편하다면 죽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굳이 내가 뭘 하는지, 어떤 마음을 품는지 일일히 의미부여할 필요는 없다. 내 생각은 그러했지만 섭회상이 그에 동의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 아닐까.
-너는 왜 나를 챙기니?
갑작스런 섭회상의 질문에, 나는 꼭 자기도 모르게 물 깊은 곳으로 가다가 정신이 든 사람마냥 더듬거렸다.
-무슨......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잖아. 너는 우리 섭씨에 은혜 입은 것도 없고, 권력욕도 없는데, 나에게 왜 잘 해주는지 모르겠어.
-제가 권력욕이 있는지 없는지 종주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그야 보면 알지.
섭회상이 눈가를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웠다. 그의 두 눈에는 특별한 감정이랄 것이 없었다. 아마 내 두 눈도 그와 비슷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럼, 제가 왜 종주님을 걱정하는지는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응. 진짜 진짜 모르겠어.
일부러 이러나? 일문삼부지라는 그의 호를 생각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개를 돌리자 종이창에는 보름달의 윤곽이 어슴푸레하니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 툭 내뱉었다.
-제가 먹고 살 돈이 종주님께 나오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저는 종주님께 충성하지요.
섭회상이 상처받기를 원했나? 아니. 그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내 대답을 듣고 울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그랬는데, 섭회상이 내 손을 꼭 쥐어왔다.
-그럼 내가 너한테 돈을 아주 많이 주면, 그 누구보다도 많이 준다면...... 그러면 평생 내 옆에 이렇게 너를 둘 수 있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무표정했다. 나는 그 얼굴에 대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씹었다. 무의식중에 가슴팍을 더듬었으나, 섭회상이 새로운 담뱃잎의 냄새가 별로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섭회상이 작게 웃더니 내쪽을 보며 웅크려 누웠다. 나는 그가 내 손을 붙잡아 자기 입가로 가져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떤 충동에서 그리한 것인지는 몰라도, 나 또한 그 순간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나도 모르게 한 일이라 놀라서 손을 떼려는데, 섭회상이 속삭였다.
-더 쓰다듬어 줘.
그래서 나는 몇 번 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어떤 잔인한 충동이 내 입술을 움직인 건지는 나도 모른다.
-선이라도 한 번 봐 보시죠. 종주님을 이해해주고, 또 평생 함께해주실 분을 만나실 수도 있잖아요.
섭회상은 싫다고 대답하는 대신 한참 동안 침묵했다. 잠들었나보라고 생각할 때쯤에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볼게. 그러니까 오늘은 너...... 그만 말해.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손을 쥔 섭회상의 손에서 힘이 풀릴 때까지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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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손은 가시손이라는 말은 참인 듯했다. 중원절 전날 밤을 그리 절절하게 보냈으면 적봉존의 영혼이 보우하사 당일만큼은 좀 평화롭게 보낼 법한데, 그럴 수가 없었다.
-염방존께서 오셨습니다.
섭회상을 진정시켜서 아침도 먹여두고 종주실에도 겨우 앉혀놨는데 금광요가 부정세 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내 심정은 영 좋을 수가 없었다. 일단 금광요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슬슬 피하는데, 섭회상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김에 나는 어젯밤의 기억으로부터도 벗어날 겸, 내가 원래 부정세에 온 목적도 되새길 겸 섭회상이 팔랑이던 서류를 정리하며 물었다.
-염방존께서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중원절이어서?
-응, 아마 형님께 인사를 올리러 오시나 봐. 평소엔 기일만 함께 챙겨지 중원절은 아니었는데.
대답하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섭회상이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순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저번에 쓰러졌어서 걱정되신 모양이야. 셋째 형님이 나를 특히 잘 챙겨주셔.
가슴을 누가 찌른 듯 답답하게 아파왔다.
금광요가 섭명결을 싫어하던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단순한 증오라기에는 그 감정이 조금 복잡해보였지만, 어쨌든 금광요는 섭명결이 죽고 나서 더 살 만 해 보였다. 그러니 그가 단순히 섭명결에게 인사를 하러 부정세에 온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정말 인사 하나 때문에 왔다고 해도 그게 섭명결을 위해서 온 건 아니겠지.
왜일까? 나에게 직접 당부해야 할 일이 있기라도 한 걸까? 나는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금광요를 모른 척하고 싶었다. 내가 그냥 평범한 부정세 수사로 여기 와 있는 거면 좋을 텐데. 그런 의미 없는 소망을 입 안에 굴리면서 정원으로 가는 섭회상을 따라가던 나는 저 멀리, 오늘 처음 봤다면 좋을 얼굴이 보여 고개를 숙였다.
-종주. 저는 가보겠습니다.
-뭐? 왜? 나랑 더 있어줘.
섭회상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금광요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 나는 손목을 비틀어 뺐다.
-의형제끼리 대화하시는 데 제가 끼면 이상하잖아요. 지난 번에 부사님이 보라고 주신 수사들 근무일지가 있는데, 그거 검토하고 정리해야 해요.
섭회상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오므렸지만, 나를 더 붙잡지는 않았다. 일이 끝나면 바로 자기에게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을 뿐이다.
일을 다 마치자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 섭회상은 웬일로 종주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사가 자기 집무실에 없었나. 금광요라는 이름 석 자를 생각하며 나는 중요해보이는 서류들을 대충 뒤적여보았다. 그러나 달리 특별한 건 없었다. 뭐 그렇겠지. 난 여전히 금광요가 날 여기 왜 보냈는지 모르겠다. 섭회상은 일 끝나고 곧바로 자기한테 오랬지만, 나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대충 몸 좀 풀고 담배 좀 태우다가 가려고 내 방으로 향하는데, 중간에 길이 가로막혔다. 금색 옷을 입은 수사가 나에게 공수했다.
-염방존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시발.
은은히 미소띤 수사의 얼굴을 보니 핑계 대고 안 가긴 글렀다 싶어,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금광요는 정원을 접한 독채를 하나 따로 쓰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햇볕을 받으며 방 창가에 앉아있는 금광요가 보였다. 등 뒤로 문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떠나지 않고 앞에 계속 서있는 수사의 그림자를 바라보는데, 금광요가 말했다.
-방음 주술을 걸어놨으니 괜찮아.
그렇다면야 안심이지만, 그래도 난 뒷말 나오지 않게 부름받은 수사의 정자세를 유지했다.
-왜 부르셨습니까? 염방존.
-그냥, 네 얼굴도 볼 겸, 새롭게 부탁도 할 겸.
-들키면......
-안 들켜.
금광요가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 들키면 뭐 어때? 난 회상의 셋째 형님이잖아. 회상이 요즘 관심 가졌다는 선자가 궁금해 직접 대면해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부릅니까?
-부정 안 하네?
금광요가 고개를 기울였다.
-부정세 사람들은 이미 다 너를 알고 있더라. 회상이 너를 무척 귀애한다며. 소문의 정도가 네가 편지로 전해준 것 그 이상 같던데.
-그건......
나는 명치께에 느껴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한숨을 쉬었다.
-그냥 소문일 뿐이야.
-그래?
-그래. 맞다. 나 궁금한 거 있어. 중요한 문제야.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를 따라 돌연 심각한 얼굴이 되었던 금광요는 내 질문을 듣더니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 섭명결 닮았냐? 생긴 거?
쪼개긴 왜 쪼갠담. 나는 금광요의 예쁜 얼굴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웃을 거 다 웃은 금광요가 고개를 저으며 눈가를 짚었다.
-조금 닮은 것 같기도?
-시발......
-장난이야. 왜, 회상이 너더러 섭명결 닮았대?
고개를 끄덕이자, 금광요는 더욱 즐거워보였다.
-그래서 너한테 그렇게 의지하는구나. 잘됐네.
-이럴 거 알고 보낸 것 아니었어?
-아니. 나는 사실 회상이 너를 이런 식으로 아끼게 될 줄 몰랐어. 그래서 놀랍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잘 된 일이야.
그러더니 금광요는 나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금광요가 뭔지는 몰라도 운을 떼기를 기다리며 장죽을 입에 물었다. 담배통에 불이 붙고 연기가 나기 시작하자 금광요는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종이를 펴보니 가남 성씨 고명딸에 관한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걸 금광요가 나에게 왜 주는지 나는 모르지 않았다. 헛웃음이 흘렀다.
-염방존께서 이제 중매도 서시는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회상이 또 쓰러졌다며? 칠석 날이었댔나.
내가 전한 정보이기는 했지만, 막상 금광요가 그 사소한 정보를 다 기억하고 있다는 데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혼자 하루를 24시진 사나, 아니면 머리 내부 용량이 남들보다 두 배는 큰가? 저 정도로 살벌해야 금씨 종주 노릇 하는가보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금광요는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부터 계속 회상에게 권했었는데, 자기는 애먼 집의 낭자 데려다가 고생시킬 생각 없다며 번번이 퇴짜놓았거든. 하지만 회상이 계속 지금처럼 쓰러진다면...... 섭씨를 위해서라도 혼인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지. 그래서 내가 회상이와 어울릴 만한 낭자를 골라놨어.
진짜 지독하다.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나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리고 잠시 쓴 입맛을 다시다가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뭐가?
-섭씨 이젠 뭐 별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해야겠냐고.
내 질문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금광요의 미간에 줄이 하나 생겼다.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처럼 섭씨를 챙기는 건 내게도 좋은 일만은 아니야. 회상 대신 처리해야 할 일이 한가득이고, 우리 수사들 보내주는 것도 내 입장에선 번거로워. 하지만 내가 그 애의 셋째 형님이니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번거로우면 나를 왜 여기 심어놨어?
그렇게 묻긴 했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금광요가 아니었다면 섭회상이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고, 청하 섭씨가 사대세가의 명맥이나마 잇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을 거다. 그러니 섭회상이 금광요의 호의를 정말 순전한 호의로 여기든 아니든, 그를 거절할 수는 없다. 이것 참 섭회상이랑 나랑 닮은 점이 하나 더 있군. 나도 따지자면 금광요에게 기생해서 살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힘없이 물었다.
-결혼도 그래. 진짜 섭회상을 위해서라고?
-아닐 건 뭐야? 사실 회상에게는 과분한 조건의 낭자인데. 그리고 내가 회상을 굳이 해쳐서 얻는 게 뭐니? 슬슬 섭섭해지려고 하네.
금광요의 미소는 지나치게 산뜻했다.
-뭣보다, 헌아. 생각해 봐. 네가 섭명결이라면 회상을 지금 이대로 둘 거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애꿎은 장죽만 잘근잘근 씹는 것을 보더니, 금광요가 웃는 얼굴로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조그만 금색 주머니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뭐야?
-담뱃잎. 이번에 새로 서역쪽에서 새로 들어온 게 있는데, 네 생각 나서 조금 가져왔어. 써보고 마음에 들면 말해. 더 보내줄게.
시발. 나는 탁상 위의 주머니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금광요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헌이 너 마음 약한 건 내가 잘 알아. 하지만 걱정 마, 나는 회상을 해치지 않을 거야. 네 손으로는 더더욱.
그것 참 안심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주머니를 열어 마른 담뱃잎을 꺼냈다. 담배통에 잎을 마구 쑤셔넣는 나를 금광요는 흐뭇하게도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창 밖을 보았다. 묘한 향기가 곧 폐부를 가득 채웠다. 한참 입술을 씹다가,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뗐다.
-섭회상이 너한테 엄청 의지하더라.
-알아.
재수없게 굴긴. 속으로 웅얼거리며, 나는 말을 이었다.
-시킨 일은 최대한 해 볼게. 그냥, 오늘은 괜히 섭회상 자극하지만 마.
-무슨 뜻이야?
-어제 또 섭명결 때문에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악몽도 꾸더라. 섭명결 머리가...... 없었댔나.
별 뜻을 가지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금광요가 주의해줬으면 해서 일러둔 것이었는데, 대꾸가 돌아오지 않아 고개를 돌리자 금광요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있었다. 금광요가 섭명결 싫어하는 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래도 자기 의형이었고 시체도 못 찾았는데, 머리 없다는 말은 듣기 싫었나? 그러고 보니 섭명결 시체는 진짜 못 찾았는지 문득 궁금했지만, 금광요 표정이 영 별로라 나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 시도가 곧바로 성공하진 못했다.
-어제 이상한 일은 뭐 없었어?
나는 어젯밤을 떠올렸다가, 그대로 머릿속에서 접었다. 최대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금광요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습관처럼 입꼬리만 올렸다. 그 표정이 보기 싫어, 나는 아예 화제를 확 돌려버렸다.
-아무튼, 넌 어제 등 띄웠어?
-응. 그랬지.
금광요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저거 분명히 뭔가 일을 꾸미는 얼굴인데 싶어 인상을 찌푸린 채 바라보면, 금광요가 곧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금린대에서.
-운몽은......
내가 말끝을 흐리듯 묻자, 금광요는 고개를 잠자코 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광요가 맹시라는 창기의 소생인 건 수진계 사람들이 다 알지만, 그 맹시가 운몽에 있는 기루 소속이었다는 건 아는 사람만 알았다. 그리고 금광요가 그 기루를 없앤 뒤 거기 절을 지었다는 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바꿔 말해, 금광요는 그 절에 발걸음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종종 거기 가서 향을 피운다는 걸 용케 알더라. 사람 시켜서 계속 거길 관찰하고는 있나보지.
-중추절쯤 가볼까.
주어도 뭣도 다 잘라먹은 내 말을 듣고, 금광요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 금광요가 먼저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걸 안 물어봤네. 부정세는 어때? 지낼 만 해?
-아니.
나는 아직까지 미약하게 욱신거리는 팔의 상처를 생각하며 즉답했다. 그러나 약을 발라주던 섭회상의 손길도 함께 생각나 두 눈을 질끈 감아야했다. 금광요는 말없이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답했다.
-네가 왜 기산으로 튀었는지 알겠더라. 나쁜 놈아. 뭐? 다 죽은 가문이라 편할 거라고? 그렇게 약 팔고 나니까 기분 좋디?
금광요가 소리내어 웃었다.
-미안해.
바로 사과를 받아주기엔 쌓인 게 있어 나는 대꾸하는 대신 담배만 뻑뻑 피웠다. 내가 자길 용서할 걸 다 안다는 듯 예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섭회상 예쁘다는 이야기는 왜 미리 안 해줬어?
-뭐?
금광요가 드물게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회상...... 그래. 하기야 너는 항상 작고 힘없는 것들에 약했지.
작고 힘없는 것들. 그 표현이 거슬렸지만 나는 꿋꿋이 대답했다.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글쎄. 대부분이 안 그럴걸?
-네가 아무리 선독이라고 해도 그렇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지 안 그런지 그걸 어떻게 아냐?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 수없이 많다. 이건 비단 내 남동생이나 섭회상을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지난 십 여 년간 세상을 유랑하며 느낀 현실이었다. 그 사실이 나는 어릴 적부터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으면 했다. 그런 사람들이 없을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 자체가 그들을 도우려는 사람 또한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들이 살아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금광요가 미소짓더니 모자를 고쳐썼다.
-난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안 했는데. 너는 안 그런 사람인 것 내가 잘 알잖아.
저 봐. 말꼬리 잡는 거랑 추켜세우는 거 동시에 하는 게 보통 정치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무튼, 난 네가 여기 오래 있어주면 좋겠어.
이것도 그렇다. 나는 말뜻을 알아듣고 입매를 굳혔다. 금광요가 나한테 탁상 위에 올려져 있던 내 손등을 토닥였다.
-계속 보자, 헌아.
나는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그 길로 나는 금광요의 방을 나서서 종주실로 향했다. 한낮의 부정세는 어제의 그 음산하고 진득한 밤풍경이 거짓이라는 듯 멀끔했다. 어제 일은 정말 다 신기루였나보지. 그래 그 편이 더 마음 편했다.
종주실까지 가는 길에 나는 주구장창 담배를 피웠다. 혼인. 섭회상이 혼인이라. 금광요 말대로 정말 섭회상이 걱정되어 그러는 거라면 내가 섭회상 혼인시켜선 안 된다고 나댈 필요도 없었다. 하기야 금광요 입장에선 섭회상 아들보다는 섭회상이 더 다루기 쉬울 태지. 금광요 입장에서 섭회상을 해칠 이유가 없고, 무엇보다도, 금광요라는 인간이 섭회상한테 분명히 정을 주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문제는 그 정이란 것을 얼만큼 주고 있느냐인데...... 사실 문제일 것도 없다. 금광요가 섭회상과 그 가남 성씨 아가씨를 혼인시키기로 결심했다면 이미 그건 그렇게 결정된 일이라고 봐야 했다. 내가 혹시라도 그걸 훼방놓고 싶다한들 의미 없다. 내 노력이라 해 봐야 금광요가 짜놓은 계획이 이루어지는 힘에 비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침내 종주실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심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섭회상은 어쩐지 우울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있었다. 보자마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섭회상이 나에게 어쩐지 조금은 냉랭하고 조금은 앙칼진 시선을 보냈다.
-일 끝나고 바로 온 거 맞아?
-네?
-찻상 준비해뒀는데, 다 식었잖아.
시무룩하게 쳐져있는 섭회상의 어깨를 보다가, 나는 사람을 시켜 새 찻상을 내오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섭회상이 바란 대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됐으니까 이리 와.
다가가자 덥썩 내 손부터 잡는 섭회상 때문에 이게 뭔가 싶었지만, 어째 분위기가 사이 좋은 언니동생 사이 손 잡는 것과 비슷해 그냥 뒀다. 옆에 앉자 섭회상이 아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오. 뭐지. 부정맥 올 것 같은데. 심장을 제외한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는데, 섭회상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내쉬었다.
-냄새가 조금 바뀐 것 같아.
섭회상이 장죽을 쥔 내 손을 비어있는 손으로 또 쥐어왔다.
-이것 때문인가?
가까워진 섭회상의 얼굴이며, 사르르 옆으로 흐르는 그의 머리카락이며,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며, 내 손에 닿은 그의 손이며, 그의 향기며...... 나는 그냥 그대로 계속 굳어있기를 택했다. 안 그러면 뻥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담뱃잎을 바꿨어?
-네.
-왜? 이게 네 취향이야?
그러면서 나를 올려다보는 섭회상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입술을 핥았다가, 속으로 온갖 쌍욕을 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아뇨. 저는 그냥 아무 거나 피워요. 그런데 종주께서 싫으시다면. 그러면 다른 거 태울게요.
-응. 그래줘.
제법 도도하게 말한 섭회상이 멀어졌다. 나는 그가 오늘 왜 이러는가 생각했다. 곧 그가 그 이유를 친히 말해주었다.
-아니, 밀아. 들어 봐. 작은 형님이 오늘 답지 않게 잔소리를 하시잖아.
어제 그 뭐랄까, 조금 미쳐 있던 건 햇빛 아래 사라지는 허상이기라도 했던가 싶게 섭회상은 어린애마냥 내 팔을 흔들며 하소연을 했다.
-자꾸 야렵대회에 나오라고 하시질 않나, 혼인 이야기를 꺼내시질 않나.
섭회상은 내가 놀라기를 바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미 금광요에게 다 들어서 알고 있었고, 괜히 놀라는 연기를 하면 더 어색할 것 같아 나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실망한 듯한 섭회상의 얼굴에 어쩐지 또 양심이 찔려서,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그의 혼인 쪽으로 이끌었다.
-종주님 이립이 훌쩍 넘으셨잖아요. 불혹 전에는 그래도 합환주 드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는 너도 아직 혼인 안 했잖아.
나는 왜 걸고 넘어져. 어쩐지 입맛이 써서 담배를 입에 물려다가, 방금 섭회상이 그 냄새가 싫다고 했던 게 떠올라 그냥 아예 담뱃불을 꺼버렸다. 장죽을 탁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뭐 맘만 맞으면 아무나 데려다가 살 수 있지만, 종주님은 결혼 준비만 몇 년 걸리실 것 아녜요. 그러니 미리 상대를 생각해두셔야죠.
-싫어. 무섭단 말이야.
섭회상이 탁상 위에 엎드려버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목선이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뭐가 무서우신데요?
-부인될 사람이 엄청난 잔소리쟁이면 어떡해?
-종주님이 잔소리한다고 듣는 분이세요?
-쳇.
수가 통하지 않자, 섭회상이 혀를 차더니 입술을 삐죽였다. 서른 살 넘어 저러는 건 일문삼부지여서 할 수 있는 거겠지만...... 솔직히 너무 귀엽다.
-그럼 부인될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해?
-싫다면 애초에 그 쪽에서 혼인을 승낙 안 하겠죠.
-아니, 혼인을 하고 나서 내가 싫어지면 어떡해?
-그럼 절혼해야죠.
-너 그래도 내가 종주인데 대답이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니니?
섭회상이 턱을 괴더니 나를 맹렬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나 진짜 무섭단 말이야. 난 똑똑하지도 않고, 형님처럼 멋있지도 않잖아.
그러더니 갑자기, 무언가 재미있는 게 생각나기라도 한 듯 물었다.
-밀이 너 우리 형님이 무려 공자방 7위셨던 것 알아?
-아뇨? 몰랐어요.
진짜 몰랐다. 그 유명한 고소쌍벽이 공자방 1, 2위를 차지했다는 것만 알았고 금광요가 6위였었다는 것만 알았지. 섭명결이 그 바로 뒤였다고? 적봉존 칭호를 허투루 얻은 건 아니었나보지? 근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별로 좋아할 일은 아니다. 여자한테 생김새가 금광요 닮았다는 건 칭찬일 수 있지만 섭명결 닮았다는 건 어떻게 해도 칭찬이 안 된다.
아무튼 간만에 자기 형님을 자랑하게 되어 신이 났는지 섭회상은 섭명결이 얼마나 남자답고 멋있었는지를 술술 늘어놓았다. 햇빛 때문일까, 어제 밤에 듣던 형 자랑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한참 섭회상이 종알거리는 소리를 듣던 나는 그래서 자기가 섭명결보다 한참 모자라다는 쪽으로 흐르는 대화를 중간에 끊었다.
-적봉존께서 호남에 쾌남에 하여튼...... 무척 준수한 분이신 건 알겠지만 조금 취향을 타시잖아요.
-뭐?
-염방존께서 적봉존보다 공자방 윗순위이신 거 보면 답이 나오지 않나요? 사내답고 우직한 남자도 인기 많지만, 수진계엔 곱고 상냥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더 많아요. 그런 점에서 적봉존보다는 오히려 종주님이 더 뭐랄까...... 다가가기도 편하고 더 정감가고. 보호본능도 자극하고. 그렇죠.
한 마디로 내 취향은 보편적이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두 눈을 깜박이며 내 말을 듣던 섭회상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어서 나는 심장마비로 그대로 세상 뜰 뻔했다.
-하지만 나는 공자방 순위에도 오르지 못했는걸. 셋째 형님이랑 나를 비교하는 건 셋째 형님께 실례야.
-실례긴요? 종주님이 염방존보다 몇 배는 더 걸출하신 걸요.
-에? 정말?
-그럼요. 종주님이 훨씬 고우세요. 세상 사람들 눈이 다 삐었죠.
내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웃음을 터뜨린 섭회상이, 아예 애교 부리는 강아지마냥 내 팔 위에 얼굴을 얹었다.
-그럼 네 눈은 안 삐었어? 너는 나 같은 남자가 취향이야?
죽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가슴에 처박듯 끄덕였다. 섭회상이 배부른 고양이처럼 웃었다. 심장에 너무 무리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참았다. 그런 내가 곧 죽을 것 같아 보였는지, 섭회상이 친히 내게 찬물을 부어주었다.
-그런데 밀이 너, 셋째 형님이 공자방 6위셨던 건 어떻게 알아? 벌써 옛날 전 일인데. 셋째 형님한테 원래 관심 많았어?
-그게...... 저번에 왔던 금씨 수사들이 그걸로 떵떵거리더라고요.
나는 내 순발력을 스스로 칭찬했다. 빈말로도 금광요를 흠모한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괜히 내 양심에 찔렸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자면 섭회상, 금광요처럼 희고 중성적인 남자들이 다 내 취향이긴 했다. 그래도 섭회상 앞에서 금광요 이야기는 최대한 꺼내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섭회상이 나른하게 말했다.
-네 말 잘 알아들었어.
-네?
내가 뭐라 했는데요?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섭회상이 웃었다.
-나는 곱게 생겨서 보호본능을 자극한다며. 그럼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선자와 혼인하라는 거지?
아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섭회상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곤 다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를 지켜주고, 내 응석도 받아주고, 잔소리도 안 하는 여인이 있다면 소개시켜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금광요가 찍어둔 가남 성씨 낭자가 부디 그런 사람이기를 바랄 수밖에.
*
금광요와 섭회상은 그 날 저녁 사당에서 섭명결에게 제를 올렸다. 나는 사당 앞에서 다른 섭씨, 금씨 수사들과 서 있었다. 어쩐지 금린대에서 보초 서던 때가 생각났는데, 궁중 암투 벌이고 싶은 거 아니면 수사 생활 하기는 부정세가 더 좋은 것 같기도...... 물론 섭명결 살아있을 때는 개빡셌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고, 금씨와 섭씨의 두 주인께서 사당을 나오셨다.
-울지 말거라, 회상.
금광요가 다정히 말하며 섭회상의 등을 토닥였다. 섭회상은 종주로서의 체통 따위 내버린 채 거의 숨이 넘어가라 울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큰 형님께서도 네가 너무 슬퍼하는 건 원하지 않으실 거야.
-셋째 형님......
금광요는 무너지는 섭회상의 몸을 익숙한 태도로 받아들었다. 한 두 번 해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저 멀리 뜬 보름달을 올려다보더니 한숨 쉬듯 말했다.
-사실 지난밤 내 꿈에 큰 형님이 나오셨단다. 너를 더 잘 챙겨주지 않고 뭐하냐고 나를 꾸짖으시지 뭐니. 그 꿈이 너무나 생생해서 중원절은 중원절이구나 했다.
금광요 이게 미쳤나? 그게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이런 개수작을 부린다고? 하지만 이게 개수작이라는 걸 알 리 없는 섭회상은 안 그래도 창백하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둘째 형님의 문령에도 항상 답이 없으시니...... 어디 계시는지 일러주시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네게도 소식이 없더냐?
-아......
이제 섭회상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나서서 섭회상을 부축했다.
-염방존. 저희 종주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니 이만 방으로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눈으로 금광요에게 욕을 했고, 금광요는 잠시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미소지었다. 스무 해 가까이 보고 살아서인지, 그 짧은 사이 우리 사이에는 말 없이도 충분한 대화가 오갔다. 다만 마음에 걸린 점은 금광요의 미소가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래야지. 회상, 몸 보중하거라.
금광요가 떠나고, 나는 섭회상을 부축해 방까지 데려갔다. 나쁜 새끼. 뭐? 섭회상 건드릴 생각이 없어? 지금 이것만 봐도 금광요에게 섭회상이라는 존재의 우선순위가 상당히 밑에 있으리라는 게 다 보였다.
그게 왜 이토록 화가 나고 답답할까.
-종주.
나는 섭회상을 침상에 조심스레 눕혔다. 섭회상의 얼굴은 흠뻑 젖어있었다. 지금이 밤이라는 것을 나는 그 창백한 얼굴을 보며 새삼스레 깨달았다.
-종주, 괜찮으세요? 향을 피워드릴까요?
섭회상은 대답 대신 팔로 눈가를 덮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우선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협탁 위의 촛대에 불을 밝히려는데, 섭회상이 내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
나는 아주 잠시 동안 망설였지만, 섭회상의 손에서 천천히 팔을 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섭회상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아귀힘이 정말 이상할 정도로 세단 말이지. 섭회상도 섭씨 사람은 맞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섭회상 옆에 걸터앉았다.
-그럼 주무실 때까지만 같이 있어드릴게요.
옆에 있으라는 섭회상 명령 때문에 어젯밤을 꼴딱 새웠다. 그러니 저도 오늘은 자야죠, 종주님. 물론 어제 밤새워서 종주님 얼굴을 보며 버틸 수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니겠습니까.
어젯밤의 그 일은 신기루로 남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섭회상의 젖은 뺨을 닦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면 문득 나는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매일 밤 이렇게 우는 걸까? 섭명결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만 알면 당장이라도 가지러 가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이 사람이 덜 울까?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최대한 길게 뻗어 수면향을 피웠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아주 조금 아쉬워했다. 섭회상이 팔을 치우지 않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데에.
내가 그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건 입술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낮에 그랬던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지거나 가슴이 울렁거리진 않았다. 오히려 속이 무척 차분해졌다. 시선을 조금 내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목울대를 바라볼 때였다.
-나 맨날 이렇게 우는 건 아니야. 밀아.
내 생각을 읽었나? 섭회상이 독심술을 부릴 줄 알았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드는데, 옆에 놓인 내 손등을 가만가만 매만지며 섭회상이 물었다.
-넌 어떻게 버티니?
맥락 없는 질문처럼 들렸지만, 나는 그의 말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촛불 빛을 받아 검붉은 내 옷소매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냥, 생각을 안 합니다.
-그게 쉽니?
-생각이 나면 나는 대로 어쩔 수 없지만, 굳이 제가 억지로 떠올리진 않습니다. 그래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아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치 파도에 떠밀리는 듯 울렁거리는 감각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산다는 데 별 의미를 안 두면 됩니다. 어차피 사람은 다 죽잖아요. 제가 뭐 얼마나 슬퍼하든 아파하든 어차피 제가 죽으면 그것도 끝 아닙니까. 그것도 길어봐야 몇십 년이라는 걸 생각하면 죽음이 무섭지 않지만, 애초에 굳이 나서서 죽을 필요도 없어지는 거죠.
죽어서 편하다면 죽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굳이 내가 뭘 하는지, 어떤 마음을 품는지 일일히 의미부여할 필요는 없다. 내 생각은 그러했지만 섭회상이 그에 동의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 아닐까.
-너는 왜 나를 챙기니?
갑작스런 섭회상의 질문에, 나는 꼭 자기도 모르게 물 깊은 곳으로 가다가 정신이 든 사람마냥 더듬거렸다.
-무슨......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잖아. 너는 우리 섭씨에 은혜 입은 것도 없고, 권력욕도 없는데, 나에게 왜 잘 해주는지 모르겠어.
-제가 권력욕이 있는지 없는지 종주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그야 보면 알지.
섭회상이 눈가를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웠다. 그의 두 눈에는 특별한 감정이랄 것이 없었다. 아마 내 두 눈도 그와 비슷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럼, 제가 왜 종주님을 걱정하는지는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응. 진짜 진짜 모르겠어.
일부러 이러나? 일문삼부지라는 그의 호를 생각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개를 돌리자 종이창에는 보름달의 윤곽이 어슴푸레하니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 툭 내뱉었다.
-제가 먹고 살 돈이 종주님께 나오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저는 종주님께 충성하지요.
섭회상이 상처받기를 원했나? 아니. 그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내 대답을 듣고 울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그랬는데, 섭회상이 내 손을 꼭 쥐어왔다.
-그럼 내가 너한테 돈을 아주 많이 주면, 그 누구보다도 많이 준다면...... 그러면 평생 내 옆에 이렇게 너를 둘 수 있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무표정했다. 나는 그 얼굴에 대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씹었다. 무의식중에 가슴팍을 더듬었으나, 섭회상이 새로운 담뱃잎의 냄새가 별로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섭회상이 작게 웃더니 내쪽을 보며 웅크려 누웠다. 나는 그가 내 손을 붙잡아 자기 입가로 가져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떤 충동에서 그리한 것인지는 몰라도, 나 또한 그 순간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나도 모르게 한 일이라 놀라서 손을 떼려는데, 섭회상이 속삭였다.
-더 쓰다듬어 줘.
그래서 나는 몇 번 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어떤 잔인한 충동이 내 입술을 움직인 건지는 나도 모른다.
-선이라도 한 번 봐 보시죠. 종주님을 이해해주고, 또 평생 함께해주실 분을 만나실 수도 있잖아요.
섭회상은 싫다고 대답하는 대신 한참 동안 침묵했다. 잠들었나보라고 생각할 때쯤에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볼게. 그러니까 오늘은 너...... 그만 말해.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손을 쥔 섭회상의 손에서 힘이 풀릴 때까지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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