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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9 23:51
진정령, 난백 ㅅ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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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회상이 두고 간 연고는 한동안 유용하게 쓰였다.

사실 상대는 끽해봐야 일반 수사다. 몇 명이고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었고, 피하기만 하라면 눈 감고 피할 자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몸에 익지 않은 섭씨 검법을 사용해 대응하기가 솔직히 조금 버거웠다. 방어할 때 섭씨의 검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던 총령이 다가와 지랄을 해댔고 섭씨 검법을 신경쓰다 보면 상대가 나를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쳐댔다.

이게 자기네들 종주를 너무 존경해서 나를 질투하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수사들끼리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면, 섭회상은 그들 사이에서 전혀 존경받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나도 섭회상도 그들 사이에선 심심풀이로 씹을 수 있는 육포 정도였다. 종주 뒷담이야 다들 까는 거고, 내가 나섰다가 괜히 더 불을 지필까 해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반응을 안 하면 괴롭힘도 식는 게 정상인데, 이건 오히려 반응 안 하면 안 할수록 더 기를 쓰고 공격해대니...... 청하에 무슨 분노 조절 못 하게 하는 맥이라도 흐르나 싶었다.

느낌상 몇몇이서 짜고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았고, 총령도 그걸 묵인하는 것 같은데, 물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못 참겠다고 지랄해봐야 나만 미친놈으로 몰릴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 정도까지 분노할 힘도 사실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늘 하던 대로 수련을 하는 김에 검법을 익힐 텐데, 섭회상은 안 그렇게 생겨선 늦잠도 안 자고 아침 일찍부터 나를 불러 밤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원래 아침에 눈뜨기 힘든데 내가 온 뒤로 안 그렇다며 웃는 섭회상에게 내가 뭐라고 하겠나. 이러니 잠을 줄이지 않는 이상 평소만큼 수련하기도 어려웠고, 여러모로 몸 상태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몰라. 일주일 밤을 새워서라도 내가 이번 주 안에 섭씨 검법 다 외우고 만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다들 잠든 시각에 연무장에 나갔다. 분노와 해방감을 동시에 느끼며 달밤 아래 검을 휘두르는데, 예민해진 오감 덕에 멀리서 꾸물꾸물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을 안 느낄래야 안 느낄 수 없었다. 평소에 괴롭히는 걸로도 모자라 이젠 잠도 안 자고 이 지랄인가. 그 노력으로 무공을 익힌다면 신선 되고도 남겠다. 굳이 내가 혼자 있을 때를 노려 괴롭히겠다는 심보가 괘씸해, 한 방 먹여줄 생각으로 나는 상대방을 눈치채지 못한 척 초식을 구사했다. 상대가 바로 뒤에까지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검을 확 겨누었는데.

-으악! 나 죽이지 마, 아밀!

-종주?

눈을 꼭 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섭회상이 검 끝에 있지 않겠나. 어이가 없어서 검을 내리자, 섭회상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 닦는 시늉을 하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무서워라. 십 년 감수했네.

-종주께서 왜 여기 계세요? 새벽 수련 나오신 건 아닐 거고.

-내가 새벽 수련 나오지 말라는 법 있어? 하지만...... 네 말이 맞아. 그냥 잠 안 와서 돌아다니다가 네가 보여서 와본 거야.

시무룩한 모습이 병든 병아리 같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여름이래도 새벽바람은 찬데, 안 그래도 병약한 사람이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옷은 또 왜 이렇게 얇냐고 내가 묻기 전에, 섭회상이 갑자기 냉큼 다가왔다.

-연습은 다 한 거야? 아니면 내가 봐 줄게.

나는 무심코 섭회상의 옆구리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거긴 아무것도 없었다. 하기야 섭회상 같은 사람이 새벽 산책 할 때 검이든 도든 차고 나오는 건 안 어울리지. 와중에 부채는 챙긴 것이 정말 그다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섭회상이 부채로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해보라니까. 내가 봐 줄게. 내가 몸만 안 따라줄 뿐이지 동작은 다 알아. 진짜야.

생각해보니 당연히 그러겠지 싶어, 나는 섭회상이 시킨 대로 초식을 구사해보였다. 섭회상이 부채를 파닥거리며 거기선 더 꺾으라느니 검을 더 높게 들어야 한다느니 참견을 해댔는데, 그 삐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반 시진 정도 계속하니 뭔가 검법이 더 몸에 익은 것 같기도 했다. 대충 소매로 땀을 닦으며 검을 검집에 넣는데, 섭회상이 나에게 부채를 부쳐주며 말했다.

-어때? 나 잘 가르쳐?

-네. 그런 것 같네요.

-나 그럼 좋은 스승인 거네? 너는 내 제자고. 내 첫 제자 말이야.

스승? 제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섭회상을 바라봤는데, 생각해보니까 원래 종주가 제자들을 받아 가르치는 게 보통인 거라. 도를 폼으로만 들고 다니는 섭회상이 특이한 경우였다. 하기야 섭회상이 제자만 안 받다 뿐이겠나, 종주일도 부사에게 거의 다 맡기고 자기는 한가하게 유유자적하는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섭회상이 부채를 거두며 입술을 오므렸다.

-내가 네 검 스승은 못 돼도...... 다른 건 가르쳐줄 수 있어.

-어떤 거요?

내 질문에 섭회상은 비밀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일 알려줄게. 내일 봐!

내일이 아니라 오늘일 텐데. 파닥거리며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헛웃음을 픽 흘렸다. 곧 귀월이니 밤에는 조심하라던 게 누구였더라. 확실히 부정세의 밤은 다른 선부에 비해 더 고요하고 살벌했지만, 저기 저 젊은 종주가 지나가는 길만큼은 밝아보였다.

아무튼 다음날이 되어 나는 섭회상이 나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거길 접어. 아니, 그렇게 말고...... 정말 답답하네. 한 번도 종이등 접어본 적 없어?

-네. 사본 적은 몇 번 있는데, 접어본 건 처음입니다.

섭회상이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본다면 그가 종주라고도, 그와 내가 있는 곳이 종주실이라고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섭회상은 소매에 먹물이 묻지 않도록 소매를 걷어붙인 채였고, 종주실 바닥에는 종이와 나뭇대, 그리고 붓이 나뒹굴었다. 나는 내 손에 쥐인 얇은 나뭇대를 그대로 꺾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차라리 검 휘두르기를 천 번 하라면 하겠는데, 섭회상이 가르쳐주는 대로 종이등의 뼈대를 만드는 건 정말 속 터지는 일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품을 뒤지던 나는 안 된다며 두 손바닥을 펼쳐보이는 섭회상 때문에 멈췄다.

-담배는 안 돼! 종이랑 불은 상극이란 말이야. 기껏 만든 종이등이 불타면 얼마나 우울한지 알아?

-모릅니다.

섭회상인 한숨을 내쉬며 붓대 끝을 물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아직 약관도 안 된 공자라고 해도 믿을 법한 앳됨이 남아있었다.

-담배는 그만 피우고, 한 번 이야기나 해 봐. 넌 종이등 태울 상대가 없어?

-있으니까 사봤겠지요.

말이 생각보다 싸가지 없게 나가 당황하는데, 섭회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럼 아마 가족을 위해 산 거겠지? 생각해보니 네 가족에 대해선 들은 적이 없네. 고향이 청하랬나? 그럼 너 말고 다른 가족들은 어디 살아? 부정세 근처에?

나는 쥐고 있던 막대기를 놓았다. 맘 같아선 대답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 자리를 바로 떠날 수도 없으니 대답은 해야겠지.

-남은 가족 없습니다. 이제는.

-아......

섭회상이 내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시무룩해진 그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내가 싫었다. 그의 질문이 뭐라고 사실대로 답했을까. 대충 둘러댈걸.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닮았네. 나도 이젠 남은 가족 없거든. 그래도 내가 형님을 위해 등을 만드는 것처럼, 너도 누군가를 위해 등을 샀을 것 아냐?

-그렇죠. 부모님, 할머니, 그리고......

-그리고?

나는 다시 나뭇대를 잡았다.

-남동생이요.

방 안에는 이제 완전히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섭회상이 가르쳐주었던 것을 생각하며 나뭇대를 접어 실로 묶었다. 그러나 목구멍 안 쪽이 뻐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었는데, 왜 새삼스럽게 이럴까 . 내가 너무 오랜만에 그 애를 떠올린 걸까? 그래서 그런가? 뻑뻑하게 올라온 감정의 덩어리를 삼키는데, 맞은편에서 조용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를 닮았어?

무심코 고개를 들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냥 순진해보이던 섭회상이 갑자기 제 나이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턱을 괸 채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로 열린 창에서 쨍한 여름 아침 햇빛이 쏟아져, 그림자가 진 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어두운 빛이었다.

-나는 형님과 전혀 닮지 않았거든. 형님은 부친을 빼닮으셨고 나는 모친을 닮았는데,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복형제였으니까.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 눈이 그 순간 조금 크게 뜨였다면 그건 섭명결과 섭회상이 동복형제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저도...... 아버지를 닮았다고 들었어요. 남동생은 어머니를 닮았다고요. 어렸을 때 보내서 얼굴이 기억 잘 안 나지만, 듣기로는 그랬습니다.

-그렇구나.

나직히 대꾸한 섭회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의 손에는 이제 거의 완성된 종이등의 뼈대가 들려있었다. 멍하니 자기를 바라보는 나에게,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내가 도와줄게, 중원절 밤에 같이 등 띄우자. 청하에는 마땅한 강이 없어서 항상 저 기산 가까이 가게 돼. 너도 갈 수 있지?

-하지만 종주님은 가족 분들과......

-말했잖아. 나도 이제 더 없다니까, 가족.

그러면서 섭회상은 내가 골랐던 재색 종이를 들어보였다.

-이걸로 종이등을 만들면 흰색 종이로 만드는 것보다 더 멋있을 것 같아. 잘 골랐네.

누가 들어도 나를 달래는 목소리였다. 그 어리고, 모자라기로 소문 난 섭회상이 나를 달래고 있었다. 저렇게도 상냥하고 의젓한 어른처럼. 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섭회상은 웃는 얼굴로 자기 등을 완성하고, 내 것까지 자기가 만들어주었다. 능숙하게 실을 매듭 짓는 섭회상의 흰 손을 바라보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종주님은 너무 착하셔서 걱정입니다.

-나?

-아무나 쉽게 믿지 마시라고 제가 저번에 그랬던 것, 꼭 기억하세요.

섭회상의 호의가 화살촉이 되어 양심을 꿰뚫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정도로 화끈거렸다. 시발. 속에서 울컥거리는 죄책감 때문에, 나는 손에 들린 나뭇대를 힘주어 쥐었다. 섭회상이 진짜 소문처럼 멍청한 애새끼이기만 했어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새하얗고 조그맣지만 않았어도. 성격이 나쁘기만 했어도.

나보다 어리지만 않았어도. 섭명결 그 작자가 바보처럼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금광요가 나를 여기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나도 저번에 말했잖아. 밀이 넌 아무나가 아니라니까? 너만치 날 걱정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니.

이런 말만 아니어도.

-네가 날 걱정해주는 게 좋아. 너랑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 그래서 계속 같이 있고 싶어.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고 그렇게 웃다니. 멍청한. 정말 멍청한 일문삼부지 같으니라고.

*

금광요에게 진짜 적어보낼 말이 없었다. 섭회상 나랑 소꿉놀이하는 거 말곤 뭐 없다. 그렇게 적어보내면 그건 너무 종이 낭비 영력 낭비 같았다. 물론 나라는 인력도 착실히 낭비되는 중이었고.

금광요는 늘 나에게 정확한 목적을 알려주지 않고 임무를 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그의 목적을 알고자 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나는 굳이 금광요에게 나를 섭씨에 보낸 진짜 이유가 뭐냐고 묻지 않았다. 금광요는 나더러 자기가 섭회상의 안전을 신경쓴다고 했지만, 그가 더 신경쓰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

섭회상의 종주실이나 그 부사의 집무실에 당장 숨어들어야 할 필요가 없는 건 다행이었지만, 지금으로선 섭회상의 상태가 괜찮고, 중원절을 위해 용정강 하류쪽으로 이동한다는 소식밖엔 금광요에게 전할 게 없었다. 문제는 남는 시간 동안 섭회상과 매일같이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류 결재하기 귀찮다는 거 찡찡댈 때면 입에 당과 물려주고, 놀러 나가겠다는 거 붙잡고 하다보면 내가 진짜 보모인지 수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와중에 사소한 사건도 하나 있었다. 섭회상이 아무 생각 없이 도장 찍는 것을 제지하고 검토하던 중이었다. 계산에 분명한 빈틈이 있어 부사에게 보고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부정세에 온 지 한 달 겨우 넘긴 내가 섭씨 내부의 횡령을 잡아내는 쾌거를 이뤘다는 말이다. 안 그래도 튀는 돌이었는데 이번에 완전히 빼도 박도 못 하게 된 거다. 나는 내 쓸데 없는 오지랖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어떡하겠나. 형 죽고 자기 수사들한테도 등쳐먹히는 섭회상이 그 순간 너무 불쌍했다. 물론 나한테 그를 불쌍해할 자격이 있느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었지만.

정말 이상하다. 전에도 내가 일할 때 종주들이 나한테 잘해주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종주와 그 가문에게 이런...... 뭐랄까 책임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섭회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감당하고 싶진 않았다.

-원래 종주께서 결재하시기 전후로 내가 검토를 하는데, 아주 가끔씩 그렇게 놓치는 부분이 있네. 그걸 잡아내다니, 대견하군. 자네의 성의도 무척 고맙고 말이야.

하지 마. 나는 나에게 웃어주는 부사를 마주보며 이를 악물었다.

-자네가 내정 쪽으로도 밝은 줄은 몰랐는데, 잘 되었어. 혼자 일하는 게 힘에 부쳤는데, 앞으로는 나와 함께 서류를 검토하면 되겠군그래.

하지 말라고.

-앞으로 잘 부탁하지.

하지 말라고 시발. 나는 속으로 쌍욕을 했다. 진짜 이번엔 수당 세 배로 받아야 한다.

아무튼 나는 그날부로 더 바빠졌다. 감 아저씨인지 김 아저씨인지 하여튼 날 부려먹을 거면 섭회상이 나 부르는 것도 막아주든가 그건 그대로 내버려둬서 난 정말 진지하게 분신술을 고려했다. 그렇다고 나한테 중요한 서류를 맡기는 것도 아니어서 뭐 알아내는 데에는 소득이 하나 없었다.

나는 주로 장부를 검토하고 검산하고 했다. 보다보면 구색만 맞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부정세의 섭씨 수사들 대신 금씨에서 파견 나온 수사들이 처리한 비용을 계산하는 일이 꽤 잦아서, 나는 금광요가 진짜 섭씨를 먹으려고 하는 건가 마른 침을 삼키게 되었다. 금씨 수사들이 횡령한 걸 발견한 적도 있었다. 그걸 금광요에게 말할까 말까 하다가 말했더니, 자기가 잘 처리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난 그 대답을......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이게 다 섭회상이 아무 생각 없어서 그래. 무능한 일문삼부지. 얼굴만 고운 이 일문삼부지가 농땡이 안 부리고 곧잘 하는 건 중원절 준비 뿐이었는데, 부채를 팔락거리며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섭씨 주인이 아니라 섭씨 안주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쪽이 적성인 것 같은데. 섭명결이 살아있고 섭회상이 안주인 노릇하면 딱이었겠구만. 섭명결 멍청이. 주화입마가 걱정이었으면 얼른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어야지. 섭회상이 잘 돌보다가 종주 자리에 그 아들 앉히고 자기는 보좌했으면 딱이잖아. 섭회상 아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섭명결 아들처럼 섭씨 도법의 전승자는 못 될 것 같은데, 섭회상과 섭씨를 생각했으면 섭명결이 독신으로 죽으면 안 됐다.

근데 확실히 이상하긴 하다. 섭명결은 주화입마 때문에 그랬다 치겠는데, 섭회상은 왜 아직 결혼 안 한 거지. 병약한 몸이라 자식부터 빨리 만들어놔야 할 텐데.

단수인가? 일을 열심히 했으니 이제 쉬어야 한다고 그림이나 열심히 그리고 있는 섭회상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그런 의심이 샘솟았다. 뭐가 됐든 나랑 상관 없는 일이기는 하다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 허공을 바라보았다. 섭회상이 나를 그리겠다며 같은 자리에 벌써 반 시진째 앉혀놓은 차였다.

섭회상은 얼마 전부터 나를 데리고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가 고급스러운 그 시라는 물건을 못 견뎌 하자 그림으로 노선을 틀었다. 오해는 하면 안 되는 게, 그가 시를 못 쓰는 게 아니었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그러하니, 남들은 아마 그를 가리켜 문장가라 할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예쁜 말들을 잘 못 견딘다는 거지. 섭회상은 그런 나를 이해 못 하는 것 같았다. 그건 둘의 학식 차이를 비교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섭회상 입장에선 나를 앉혀놓는 것과 그냥 소를 데려다가 시에 대해 토론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섭회상이 하는 말이 다 맞다. 시라는 건 무엇인지 설명하는 섭회상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섭회상이 자꾸 시에 대한 내 의견을 물었다는 것이고,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릴 수만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을 던졌다.

-시라는 게 훌륭하다는 건 알겠는데요. 말들이 너무 예뻐서 간지럽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몸서리를 치자, 섭회상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하나 하나 다 열심히 고른 말들이니까 그렇지. 겨우 이 정도로 간지럽다면, 넌 마음을 어떻게 전하니?

-말 없이요.

섭회상의 눈썹산이 까딱 올라갔다 내려왔다. 저거 눈빛이 조금 이상한데. 내가 생각하는 사이 섭회상이 말했다.

-말이 없으면, 몸으로?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뭔가.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섭회상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눈빛으로 소통을 시도했다. 섭회상은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가 웃겨 죽겠다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그리고 난 그 뭔가가 나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소통 존나 잘 되네. 그런 생각하면서 눈만 꿈벅거리고 있자니, 한참 뒤에야 웃음을 그친 그가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뭐, 장자께선 무언이야말로 지고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하셨으니 네 말도 맞아.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말 없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 아니니?

그러더니 섭회상은 비련에 찬 공주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슬프네. 내 시를 들어줄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는 게.

-네?

나는 잘 이해가 안 갔다.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신 거면 제 귀를 쓰세요.

-하지만 너는 시가 싫댔잖아?

-싫다기보다는 이해를 못 한다는 거고...... 종주님 목소리 듣는 건 좋으니까요.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하지만 혀를 깨물어도 이미 한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두 눈을 땡그랗게 뜬 섭회상에게 구태의연하게 말을 보탰다.

-사실 제가 여기 아니면 어딜 가서 시라는 걸 들어보겠습니까. 그것도 종주님 같은 문장가가 쓴 시를요.

섭회상은 잠시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곧 작게 웃었다.

-칭찬 고마워, 밀아. 하지만 우리가 쉬면서 할 수 있는 건 시 쓰고 듣는 것보단 많으니까, 다른 걸 더 해보자.

목소리만 좋은 것도 아니고 말도 참 예쁘게 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섭회상이 뭐라고 하든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나는 섭회상이 그리는 정물화 속 정물이 되는 데 동의해 버렸고...... 이렇게 되었다. 섭회상이 붓을 움직이는 동안 나는 가만히 앉아있어야 했다. 딱히 긴장이 된 건 아니었는데, 긴장이 안 되니 졸렸다.

-종주. 저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쉬려고 그림 그리시는 거라면서요. 많이 쉬시지 않았어요?

-요 며칠 바빴는데 오늘 하루쯤 푹 쉬어도 되잖아.

-그럼 하루종일 이러실 거란 말이에요? 아니 그럼 저는 언제 쉰답니까?

모르겠다. 배 째라는 심정으로 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어차피 내 몸에 뭔가 숨겨야 할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섭회상이 내가 눈 감았다고 내 목을 칠 인간도 아니었다. 눈 감으면 안 된다고 투정부리는 섭회상의 목소리는 무시했다.

이마에 무언가 닿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땐 시간이 꽤 지났는지 오후 특유의 나른한 공기가 방 안에 가득차 있었다.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려는데, 머리 위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피곤했어? 너무 곤하게 자더라.

-그걸 아는 분이 저를 이렇게......

대답하다 말고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자, 섭회상의 웃음소리가 더 커지더니 갑자기 뚝 멈췄다.

-쇄골은 또 왜 그래?

시선을 내리자 기지개 켜느라 흐트러진 옷 사이로 또 멍이 들어있었다.

-어제 옷장에 부딪쳤어요.

-그 정도면 나보다 더 덜렁거리는 것 같은데?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잔 낮잠이고 상황이 급하지도 않으니 몸이 파업해버린 모양이었다. 잠이 도무지 잘 깨지 않았다. 섭회상은 어쩐지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뚫어져라 마주보다 보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맞다. 그림은요?

-그림? 아......

섭회상이 곧 탁상에서 종이를 집어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 색은 아직 못 칠했어.

종이에는 옆을 바라보며 의자에 기대앉은 내 모습이 먹물로 그려져 있었다. 제법 잘 그리긴 했으나, 나를 두어 시진이나 앉혀둔 것의 결과물이라기에는 너무 단촐했다.

-어때? 맘에 들어?

-네. 뭐.

-반응이 그게 뭐야.

섭회상은 힘빠진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지난 번 종이등 만들 때도 열심이시더니...... 종주님은 종이가 그렇게 좋으세요?

-보통은 그림 그리는 게 좋냐고 물어보지 않니?

-종주님은 부채도 모으시잖아요.

저번날 부채 하나의 가격을 전해듣고 나는 말 그대로 억 소리를 냈다. 저런 부채를 수십 개씩 모은다니, 내가 섭명결이었으면 섭회상 등짝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섭회상은 말 나온 김에 보여주겠다는 듯 부채를 펼쳐보였다. 흰 부채에는 아예 일문삼부지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거 아무도 안 훔쳐가긴 하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부채가 왜 좋으세요?

-그냥 보기에 예쁘기도 하고...... 이렇게 얼굴을 가리면 또 묘한 느낌을 주잖아. 어때? 내가 웃고 있는 것 같니?

그가 부채로 하관을 가리더니, 내게 눈웃음을 쳐보였다. 사람 홀리는 여우 같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걸 입 밖에 낼 순 없으니, 나는 최대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안 보여서.

섭회상은 나를 빤히 보더니 곧 탁 소리 나게 부채를 접었다. 그리곤 김빠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정말 어쩜 그리 성의가 없니.

-제가 정말 성의가 없다면 좀쑤시는 거 참고 여기 계속 앉아있지 않았겠죠, 종주님.

그러면서 나는 한 번 쭉 기지개를 켜고, 하품도 했다.

-그림 그리는 게 그리 좋으세요?

-그럼. 꽃도 지고 사람도 언젠가는 죽지. 하지만 그림을 그려두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간직할 수 있잖아.

섭회상이 방금 그린 그림이 내 삶에서 제일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한 것이라면, 내 인생은 꽤나 암울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아까 그거 그리는 데 몇 시진이 걸렸다면 각잡고 그리면 며칠 걸린다는 뜻 아니야. 꽃 같은 건 그리다가 다 시들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손에 내내 들려있던 그림을 섭회상에게 돌려주었다.

-그림 그리는 시간 동안 그냥 눈 앞에 두고 보는 게 낫지 않아요?

-에, 그럼 나더러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너만 계속 보고 있으라는 소리야?

-네? 저는 그런......

개소리를 한 기억이 없는데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코 앞까지 다가온 섭회상의 얼굴이 내 입에 침묵주술이라도 걸었는지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코 끝이 거의 맞닿을 법한 거리였는데 섭회상은 아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신기한 것을 발견한 소년처럼 그가 두 눈을 깜박였다. 그의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고, 평소에는 검은색으로 보이는 짙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섭회상에게서 나는 소나무 내음을 의식한 순간, 그가 속삭였다.

-저번부터 생각했지만, 너한테서는 참 좋은 냄새가 나. 평범한 영몽초 향인 것 같으면서도 뭔가 달라. 뭐가 다른 걸까?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숨을 참고 있었다. 섭회상이 얼굴을 살짝 틀더니 내 냄새를 맡듯 크게 숨을 들이마실 때까지. 그가 숨을 내쉬며 내 귓가에 속삭일 때까지.

-밀이 너 귀 빨개졌다.

시발. 진짜 시발. 입가에 느껴지는 섭회상의 숨결을 무시하며,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다가 바닥에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섭회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숙인 채 닥치는 대로 막 내뱉었다.

-감기 걸려서 그래요. 이제 종주님도 옮으셨을걸요.

갈라진 목소리 덕에 설득력이 있었는지, 섭회상이 불에 덴 듯 펄쩍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타 나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감기 걸렸다고 왜 진작 말 안 해줬어! 난 옮으면 안 돼. 몸이 약하단 말이야!

후다닥 멀어지는 섭회상을 느끼며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빨리 뛰고 있었다. 차라리 주화입마 오는 게 낫겠다. 주화입마...... 시발. 나는 심란한 티를 내지 않으려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자기 몸 약한 거 아시는 분이 맨날 밤마다 그렇게 얇게 입고 돌아다니세요? 수련 안 하실 거면 몸이라도 챙기셔야지, 정말 답답하네요. 저는 이만 수련하러 가렵니다.

그렇게 그대로 종주실을 나가려는데, 섭회상이 어딜 가냐며 나를 붙잡았다. 나는 내 소맷부리를 잡은 흰 손을 의식하지 않으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가지 마. 아직 해가 중천인데, 나랑 더 놀아야지.

-종주님은 왜 자꾸 그런 개...... 상망측한 소리를 하세요.

-내가 뭘.

입술을 삐죽거린 섭회상이 탁상 위에 어지러이 놓여있던 그림 도구들을 정리했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그림에 흥미가 없으면, 음악엔 흥미 있어?

-음악도 별로 관심은 없지만, 그림보다는 낫죠. 들으면서 딴짓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이유로 음악 좋아한다는 사람은 처음 보네. 넌 진짜 특이해.

누가 누굴 보고 특이하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나도 양심 없지만 섭회상의 양심도 보통 상태는 아닌 듯했다. 내 생각도 모르고 혼자 키득거리며 고개를 젓던 섭회상이 곧 종주실 서랍에서 웬 대나무 피리를 하나 꺼냈다.

-난 음악도 좋아한다? 좋아하는 노래 있으면 말해 봐. 내가 연주해 줄게.

자기 피리 연주는 아무나 못 듣는다고 떵떵거리는 섭회상은 너무 귀여워서 심장에 영 좋지 않았다. 산재 처리를 아무래도 금린대와 부정세, 두 군데에서 다 받아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종주께서 연주해주시는 거면 다 좋습니다.

-그래?

나를 빤히 바라보던 섭회상이 곧 고개를 끄덕이며 피리를 들었다.

-그럼 이 노래가 좋겠다.

곧 맑은 선율이 울려퍼졌다.

노래 좋네. 사실 나는 섭회상에게도 몇 번 이야기했던 것처럼 막귀여서, 음악보다도 피리부는 섭회상을 감상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눈을 감고 연주에 집중한 섭회상은 도자기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왔다. 고요한 음악 소리는 그에게서 늘 은은하게 풍기는 처연함을 극대화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보면 내가 꼭 망국의 왕자라도 납치해온 도적 무리떼의 수장이라도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틀린 것도 아니지. 섭회상은 사람을 홀리는 순진무구한 정령이었고, 나는 정령의 호의를 기만하는 인간이었다.

그렇듯 별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섭회상을 바라보던 나는 어쩐지 익숙한 곡조가 귓가를 스쳐 순간 흠칫 놀랐다.

종주실을 꾸며놓은 것을 보면 서역의 물건도 많고 은근 이국적인 정취가 풍기기도 하니, 섭회상이 동영의 음악을 아는 것은 물론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기한 일이긴 했다. 그래서 연주가 끝난 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동영쪽 음악에도 관심이 있으세요?

-동영?

섭회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방금 연주한 게 동영의 음악이야?

-정확한 건 모르지만, 곡조가 아무리 들어도 동영풍이던데요.

금광요가 시킨 것중에 동영에서 비곡집 모아오는 것도 있어서 팔자에도 없는 동영 음악을 좀 들었었는데, 느낌이 지금 섭회상 연주와 비슷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웬 비곡집?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금광요는 고소 남씨 음률술에 관심이 생겼다고 말했었는데, 고소 남씨의 아류 격인 말릉 소씨의 종주가 금광요에게 충성하는 게 그와 관련이 있나 혼자 생각했었다.

-동영풍이라니...... 그럴 리가 없는데...... 뭐지?

자기 손에 들린 피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섭회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 모습이 아주 얼빵하기 그지없어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밀이 넌 동영 음악을 어떻게 알아?

-작년까지 동영에 있었거든요. 한 오 년 정도? 거기서 듣던 거랑 방금 종주께서 연주하신 거랑 음이 비슷해서 여쭤봤습니다. 근데 뭐, 제 귀는 막귀니까 제가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죠. 어쨌든 노래는 좋네요.

-좋아?

섭회상이 나를 다시 빤히 바라보았고, 나는 그게 이상하긴 했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섭회상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메마른 미소였다.

-네가 좋다면야.

곧 섭회상은 내가 동영을 가본 적 있다는 게 신기한지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왔다. 거기 음식은 어떤지, 풍치는 어떤지, 사람은 어떤지...... 거기엔 당신처럼 희고 낭창낭창한 남자가 많다는 말이 어쩐지 성대를 스쳤지만 나는 현명해서 그걸 입 밖에 내는 대신 삼켜버렸다. 갑자기 이렇게 말이 막 나오려 하다니, 미쳤나보군. 술 마신 것도 아니고 왜 이런담. 아무튼 섭회상을 상대해주다 보면 그 날의 황금같은 오후도 방 밖 창문으로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