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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8 19:16
진정령 ㅅㅍ 난백 ㅅㅍ
나잇값 못 하고 무리수 두는 섭 종주님이 보고 싶었음 근데 이제 초장에 다 눈치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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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좋아한다더니 얼굴이 두 갠가? 그 정도 생각을 하며 나는 부정세에서의 첫 밤을 보냈고 다음날부터는 분신술을 쓸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분명히 오전에는 수련하고 오후에는 섭회상 옆에 있는 거 아니었냐고.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부르는 덕에 도를 수련하지 않는데도 주화입마가 올 뻔했다. 나만 보면 비아냥거리는 섭씨 수사들은 덤이었다. 어차피 나야 그들과 어울릴 시간도 없고 내가 참가하는 수련이야 해 봐야 연무장에서 함께 진법 펼치는 게 다여서 아직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편한 건 아니었다. 섭회상 상대하는 것만 해도 힘들었다.
-그래서, 저보고 겸상을 하자고요?
-응!
해맑아라. 그래도 벌써 십 년이나 종주직에 앉아있었으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해맑을 수 있을까? 저번에 쓰러지고 더 멍청해졌다는 말이 사실이기라도 한 건지 이쯤 되면 거의 숙연할 지경이었다.
-종주.
-왜?
-저는 밥 먹고 왔어요.
더 숙연한 건 그런 섭회상에게 맞춰주고 있는 나였다. 하지만 밥 먹고 왔다는 내 말에 세상 서러운 얼굴을 하는 섭회상을 보면 그의 장단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옆에라도 앉아있으라는 섭회상의 말에, 나는 얌전히 그의 근처에 앉아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섭명결이 식사예절을 가르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제 섭명결이 죽어서 예절을 차릴 필요가 없는 건지 먹으면서 쫑알쫑알 말이 많았다.
-나는 이게 제일 좋아. 너도 한 입 먹어볼래?
-아뇨.
-그러지 말고. 이거 진짜 맛있어.
-아니......
-아, 내 팔...... 내 팔 떨어진다......
얼굴만 아니었으면 꼴값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하필이면 귀엽게 생겨서 저러는 것도 또 어울린단 말이지. 결국 나는 그냥 섭회상이 건넨 대로 한 입 받아먹었다. 달게 양념된 고기였는데, 어린애 입맛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심란했다.
-어때? 맛있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야.
-네. 그런데 종주...... 아무한테나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이거다 저거다 이야기하지 마세요.
-응? 왜?
-위험하니까요.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습관은 뭔지, 그런 거 아무한테나 구구절절 말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누가 기억해뒀다가 종주님 해칠 때 쓰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나를 왜 해쳐?
물론 지금의 금광요처럼 섭회상을 살려두고 좌지우지하는 게 더 편한 선택이겠지만, 사대세가의 균형이 겨우 유지되고 있는 지금 그 균형을 허물기 위해 제일 좋은 선택지는 제대로 된 후계자도 아직 없는 섭회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금광요가 나를 섭회상에게 붙여둔 것일 수도 있었다. 금광요 입장에선 이 묘한 균형을 계속 유지하고 싶을 테니까. 거기에 기대야 하는 인생이라니, 새삼스레 눈 앞의 남자가 가련해졌다. 사실 내가 이 사람과 이 사람 가문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싶으면서도……
-부정세에서 암살 시도를 할 정도로 간 큰 인간이 얼마나 많겠냐만은, 사람 일이란 또 모르지 않아요. 그냥, 아무나 너무 쉽게 믿지 말라는 말씀이었어요.
섭회상이 꼭 종주가 아니더라도 믿을 사람만 믿는 건 인간관계의 기본 중 기본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가 출신도 불분명한 나를 여기 이렇게 옆에 끼고 있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러나 섭회상이 휘둥그레 두 눈을 뜬 채로 말했다.
-너는 아무나가 아니잖아?
-제가 왜 아무나가 아니에요?
대화의 핵심을 이렇게 비껴가는 것도 기적이었다. 내가 답답해 하는 게 안 보였는지, 그가 말했다.
-혹시 누가 나를 해치려고 하면 네가 날 지켜줄 거잖아. 아니야?
그렇게 묻는 섭회상의 얼굴엔 무한한 신뢰가 서려 있어서, 나는 좀 죽고 싶어졌다. 어쩌면 좋을까. 이 인간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지. 아니, 지금까지 살아있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꽃밭일 수 있지. 섭씨 인간들 다들 단명해서 망정이지, 금씨 같았어 봐. 벌써 방계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섭회상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나 안 지켜줄 거야?
-당연히 목숨 걸고 지켜드려야죠.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장죽을 꺼내들려던 나는 아직 젓가락이 들려 있는 섭회상의 손을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섭회상은 금세 바보처럼 헤헤 웃고 있었다.
씨발.
-그런데 밀이 넌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뭐가요? 아...... 그거요. 다른 가문에 있을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이 양반이 알기는 알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턱을 괸 채 섭회상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섭회상이 아직까지 목이 붙어있는 데 공헌한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물어보니 금광요도 섭회상을 향한 암살 시도를 몇 번 막아준 적 있댔고, 지금 섭회상의 부사가 아주 오랫동안 섭씨를 섬겨온 사람이라는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얼마 뒤 그 부사가 나를 불렀다.
수진계 사람은 외관만 보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지만, 그래도 대략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족히 쉰 살은 넘어보이는 섭회상의 부사는 섭회상이 섭명결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 때 이후 영 섭회상의 행동을 종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문삼부지가 일문삼부지가 된 연유에 관해서는 저잣거리에서도 종종 듣던 바가 있어,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큰 충격을 받고 시간이 멈춘 사람들을 나는 살면서 여럿 봐왔다. 섭회상은 그 중 하나인 것뿐이다.
-슬프네요.
내 반응이 예상한 대로였는지 아니면 예상 밖이었는지, 부사는 종주께서 당신을 마음에 들어하시니 부디 종주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내게 무척 담담하게도 했다. 섭회상은 태생적으로 마음이 여려 사람을 쉽게 믿는단 이야기도 했는데, 그건 아마 배신하면 얄짤 없다는 걸 돌려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말하자면 섭회상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건 그의 부사 덕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금광요도 이미 알고 있을 법한 정보였다. 이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겠지. 그 섭회상마저도 이건 알 것이다. 반대로 그는, 그리고 눈 앞의 남자는 내가 정말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부사님께서는 절대고수이신가봅니다. 어떻게 종주님 같은 분을 여태껏 지키셨어요?
내 질문에 부사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보였다. 차가운 인상은 아니지만 따뜻한 인상도 아니고 어딘가 가면 쓴 것 같은 얼굴이, 딱 자기가 맡은 일에 제격이었다. 그가 말했다.
-가문을 섬긴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 앞으로는 자네가 그 짐을 함께 져줄 것이니 마음이 조금 놓이네.
-아니...... 종주님이야 그렇다 쳐도 부사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내 말에 부사가 가볍게 웃었다.
-종주를 지킨다는 게 자네가 걱정하는 만큼 힘든 일은 아닐세. 자네는 그저 종주의 말벗이 되어드리면 돼. 그것도 어떤 의미에선 종주를 지키는 것이지. 너무 부담갖진 말게나.
듣자하니 괜히 섭씨 집안일에 파고들지 말고 종주한테 장단이나 맞춰주라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여 알아들었음을 표시했다. 일이 상당히 골치 아파진 셈이다. 그냥 일개 수사로 남았다면 모를까, 섭회상 옆에 붙어있게 됐으니 내 뒷조사를 철저히 했겠지. 진짜 금광요가 날 보낸 걸 알고 있으려나?
걱정 마. 섭회상이 이상한 일 하는 건 없고 악몽만 자주 꾼다고 적어보낸 편지에 답장이 왔을 때, 거기엔 그렇게 쓰여있었다. 하기야 금광요가 내 과거를 잘 정리 안 해놓았을 리는 없다. 만약 섭회상의 부사가 내 정체를 안다고 하더라도 당장 문제될 것은 없겠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잊지 마. 회상도, 너도 위험하길 나는 원치 않아. 그렇게 적힌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보다가, 나는 그것을 불에 태워 장죽의 담배통에 넣었다. 바로 다음 순간 내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밀아!
시발. 침대에 삐딱하게 기대어있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문간에 해맑게 서있는 섭회상이 보였다. 나는 놀란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종주라고 하셔도 그렇지, 인기척도 없이 이렇게 방문을 확확 여시는 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제가 뭘 하고 있을 줄 알고요.
-뭘 하고 있을 건데?
얼빵한 얼굴을 잠시 더 노려보다가,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 죄책감을 괜히 죄 없는 어린애한테 풀 수는 없었다. 근데 솔직히 섭회상이 어린애는 아니지. 수련도 안 한다면서 어떻게 저렇게 동안이래? 몰라 시발. 그런 생각을 하며 답답해서 담배를 빠는데, 섭회상이 슬슬 다가와 내 옆에 걸터앉았다.
-있지, 밀. 감 아저씨가 불렀다며.
-감 아저씨라고 하시면?
-내 부사 있잖아.
-아. 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섭회상이 내 얼굴 표정을 살피는 게 의아했을 뿐이다.
-아저씨가 뭐래?
-그냥 종주님을 잘 부탁드린다고만 하셨습니다. 왜 그러세요?
내 질문에, 섭회상의 얼굴이 더욱 흐려졌다. 그가 입술을 삐죽이더니 부채를 팔락거리자 방 안에 흐리게 퍼져있던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아저씨는 내가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들 데려다가 괜히 겁 주거든. 정말 너무해. 덕분에 도망간 수사들이 몇이나 되는 줄 알아?
-그 분이 그렇게 쫓아주신 덕분에 종주님이 이리 무탈하신 줄 아세요.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자 심통난 듯 인상을 구기는 게 귀엽다 못해 심란해서 나는 담배를 더 깊게 빨았다.
-종주님도 그 정도는 아시잖습니까.
-알아. 잘 알지만...... 나도 외롭단 말이야.
창은 닫혀있었지만, 얇은 종이창 너머로 저녁 노을이 들어와 섭회상의 새하얀 얼굴을 울적하게 물들였다.
-난 종주이기 전에 한 사람이잖아. 가끔씩은 내가 원하는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다구. 아저씨가 뭐라하든.
-종주님.
-응?
-부사님이 저에 대해서 뭔가 얘기하신 거 있어요?
섭회상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섭명결 진짜 이런 남동생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냐. 나였으면 못 죽었다. 나였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다소 충동적으로 말했다.
-앞으로 부사님이 무슨 말씀 하시든 그냥 다 믿으세요. 그 분 말이 다 맞구나 생각하고 사시면 장수하실 겁니다.
왜 아주 저는 첩자니까 죽여주세요 대놓고 말하지. 속으로 자조하는 동안, 섭회상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엔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것이 혹시 화가 났나 했는데, 자세히 보면 내 입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거 하면 좋아?
섭회상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가 쥔 장죽을 가리켰다. 우이독경이란 말은 이런 데 쓰나 보다. 송아지 눈망울같은 섭회상의 두 눈을 보다가,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좋으니까 하겠죠.
-나도 해보면 안 돼?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피워보셨어요?
내 질문에 섭회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님이 안 된다고 하셨어서......
-그럼 저도 안 된다고 할 수밖엔 없네요. 잊으셨습니까? 저 적봉존 닮았다면서요.
-아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응?
너무 깔끔하게 거절했는지, 섭회상이 나에게 답싹 다가와 앉으며 애교를 부렸다. 훅 가까워진 얼굴을 보며 나는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코 끝에 담배 냄새와 섞여 솔내음 같은 것이 스쳤다.
-이거 폐에 안 좋습니다.
-하지만 네가 그거 피울 때마다 엄청 좋아 보인단 말이야. 한 번만 피워보게 해 줘.
섭회상이 그렇게 애원하며 손가락을 담배통으로 가져간 게 너무 순식간이라, 나는 막을 수 없었다.
-아야야!
상식적으로, 불 붙어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쇠로 된 담배통을 맨손으로 건드는 게 서른 살 넘은 인간이 할 짓인가? 파드득 떠는 섭회상의 손을 가져와 살펴보자, 붉게 달아올라 있는 중지와 약지 끝이 보였다. 나는 혀를 찼다.
-이리 오세요.
섭회상은 내게 손이 붙잡힌 채 정원까지 얌전히 따라왔다. 연못에 손을 넣고 반 주향 동안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자 울상이 된 그가 말했다.
-나 손에 물집 잡히면 어떡해?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안심시키며, 나는 섭회상의 소매가 물에 닿지 않도록 걷어주었다. 뭔놈의 남자 팔이 이렇게 희고 여린지 모를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노을빛이 연못에 번져 둥글게 둥글게 퍼지고 있었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섭회상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방해했다. 그가 배고픈 고양이마냥 간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 진짜 한 번만 피워보면 안 돼?
그때 내가 쉰 한숨으로 청하에 광산을 하나 더 뚫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하얗고 조그맣고 나잇값 못하는 섭종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 항복했다.
-한 번만입니다.
-응!
나는 내가 물고 있던 장죽 끝을 소매 끝으로 닦은 뒤 섭회상의 입에 물려주었다. 연분홍빛 입술이 진홍색 죽대와 대비되어 묘한 감상을 자아냈다. 아주 잠시 그 입술을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들이마시는 겁니다. 진짜 천천히요.
섭회상은 고분고분 내 말을 들었다. 적어도 그러려는 시도는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담배를 처음 피우는 사람이 으레 그러듯 연기를 반쯤 들이마시다 말고 기침을 하며 난리였고, 나는 그의 등을 토닥여주어야 했다.
-그러게 왜 해보겠다고 하셨어요.
-네가 하는 건 맛있어 보였단 말이야.
섭회상이 억울하다는 듯 대답하며 나에게 기댔다. 나는 눈물이 맺힌 섭회상의 눈가를 무심코 엄지로 훑었다. 선을 넘었나 싶어 멈칫했는데, 섭회상은 오히려 조금 진정된 얼굴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노을빛 아래에서도 확연히 붉어진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나도 모르게 그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번엔 내가 불에 댄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했다. 나는 장죽을 입에 물고 깊게 빨았다. 잠깐만. 이거 섭회상이 물었던 거지. 씨발.
-이제 그만 손 빼셔도 돼요.
다행히도 내 목소리가 갈라진 건 그다지 티가 나지 않았다. 섭회상이 쪼그려 앉아있던 무릎을 펴며 앓는 소리를 내는 동안 나는 내 옷소매로 그의 젖은 손을 닦아주었다. 손끝을 확인하자 흉이 질 것 같진 않았지만 아직 붉은 기가 남아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거 고운 손이 데여서, 원......
-뭐?
섭회상이 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친.
-아무것도 아닙니다. 흉은 안 질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인들 시켜서 연고 가져다 달라고 하시죠.
-응. 근데 밀아. 내 손이 고와?
귀는 존나 좋네. 차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아마 그건 안 덧붙여도 됐을 것이다. 왜 이러지, 진짜.
-그래?
섭회상이 새삼스럽다는 듯 자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를 두고 먼저 내 방으로 돌아갔으나, 심란한 내 속을 알 리 없는 그가 나를 졸졸 쫓아왔다.
-밀아, 밀아.
-또 왜 그러세요.
-내일 낮에 나랑 같이 놀러 나갈래?
나는 방 앞에서 서서 섭회상을 돌아보았다. 섭회상이 들뜬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나는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싫다고 해도 데려가실 거 다 알아요.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수줍게 웃었다.
*
다음날 섭회상이 나를 데려간 곳은 청하의 제일 번화가였다. 어디 귀한 집 도련님은 돈을 얼마나 잘 쓰는지 보자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간 것인데, 막상 섭회상을 곱지 않은 눈으로 힐끔거리는 청하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 지역의 선문세가가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종주를 밖에 내보내보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이 먼저 인사해오며 먹을 걸 바친다면 그 종주가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이고, 가자미눈을 뜨고 길에 침을 뱉는다면 뭐...... 망한 것이다. 섭회상을 보는 사람들 태도로 보아 후자에 더 가까웠다. 나는 섭회상의 옆에 붙어 걸었다. 하필 수사들도 거의 안 데리고 나와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런가하면 섭회상은 희희낙락이었다.
-밀아. 탕후루 좋아해?
내 뒤에 박히는 다른 수사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나는 섭회상이 나에게 건네는 탕후루를 받아들었다. 섭회상은 기분이 무척 좋은지 빠르게 부채를 팔락거리고 있었다.
-덥다, 그치?
-예.
-중원절이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잖아. 종이등 만들 준비 해야지.
그러면서 섭회상이 들어선 곳은 지물포였다. 일반 지물포 말고, 아주 아주 고급 지물포. 종이가 종이지, 무슨 비단 옷감 쌓아놓고 팔듯 이렇게 파는 게 나로선 이해가 안 갔다. 가게 문 앞에 선 섭회상이 빼꼼 나를 돌아보았다.
-뭐해, 아밀. 얼른 들어와.
굳이 나만 데리고 들어가는 섭회상 때문에 다른 수사들 눈치가 보였다. 나도 몰라, 느그 종주가 왜 내 껌딱지처럼 구는지. 대충 남은 탕후루를 입 안에 욱여넣은 뒤, 막대기를 버리며 나는 섭회상의 뒤를 따라 종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옥색 천을 걷고 들어간 가게에서는 향낭 파는 데라고 해도 믿을 만큼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색색깔 종이들이 옷감처럼 벽에 걸려있었다. 점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달려와 섭회상을 맞이했다. 척 보니 섭회상은 이 가게의 일등 단골인 듯했다. 섭회상이 점원과 대화를 나누며 종이를 고르는 동안 나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테두리에 은박, 금박이 둘린 종이도 있었고 꽃무늬가 새겨진 종이도 있었으며 아예 순백색인 종이도 있었다. 나는 연한 잿빛 종이 앞에 멈춰섰다.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섭회상이 호기심 서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빛을 받은 섭회상의 눈동자가 연갈색으로 빛났다.
-왜 그래? 이 종이가 마음에 들어?
-그냥...... 종주님을 닮아서요.
반쯤 멍하니 대답하자, 후다닥 다가온 점원이 나에게 안목이 있다며 칭찬했다. 귀한 흑토를 물에 개어 색을 입힌 것인데, 이리 고르게 염색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원에게 섭회상은 방긋 웃어보였다.
-그럼 이것도 주문함세. 이번 종이등은 이 종이로 만들어야겠어.
그렇게 주문을 마친 섭회상은 산뜻한 걸음으로 가게를 나와 길거리를 배회했고, 수사들은 섭회상이 그러는 게 익숙한지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섭회상이 손짓하는 대로 그에게 따라붙었다. 한가롭게 길거리 패물과 장난감들을 구경하는 그는 아무리 봐도 종주라기보단 종주 동생이었다. 문득 부정세의 주인 운운하던 섭회상이 떠올랐다. 그때, 섭회상이 물었다.
-밀아. 너는 뭘 좋아해?
뭘 좋아하냐고? 나는 인상을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솔직히 말했다.
-돈이요.
-돈?
-돈은 깔끔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야?
-돈은 뭘로든 바꿀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섭회상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돈이 엄청나게 많이 있으면 그걸 뭘로 바꾸고 싶은데?
-글쎄요. 전 그냥 돈으론 뭔가를 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습니다.
-재미있다.
섭회상이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렸다.
-성현들의 말씀과 정반대네. 소위 재물은 수단일 뿐 아무것도 아니니, 재물을 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말들 하잖니.
-맞아요. 저는 어리석은 소인배입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당황한 듯 파닥거리는 섭회상은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내 표정을 살피며 연신 부채질을 하던 섭회상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붙였다.
-그런데 말야. 돈으로 뭐든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않아? 사람의 마음이라든가...... 그런 건 아무리 부자여도 자기 뜻대로 안 된다구.
-그건 부자 아니어도 자기 뜻대로 안 되잖아요.
내 대답에, 섭회상은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의 얼굴에 소년 같은 빛이 돌았다.
-우문현답이네. 그럼 밥 이야기 나온 김에 식사나 하러 가자. 배고파!
그러면서 쏠랑 근처 객잔으로 들어가는 자기 종주를 좇아 검은 옷 입은 섭씨 수사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것이 그날 심심해서 길가에 죽치고 있던 사람들 구경거리는 하나 되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부정세로 귀환하자 신시쯤 되었다. 오전에 수련을 빼먹었으니 오후 수련에 참가하겠다는 나에 섭회상은 왜 그렇게 부지런하냐며 입술을 삐죽였다.
-나랑 놀아주지 않구.
-저는 종주님 놀이친구가 아니라 부정세 수사로 들어온 거여서요.
그렇게 매몰차게 종주를 떨구고 왔는데, 그런 보람 없이 연무장 바닥을 밟자마자 귓가에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꽂혔다.
-우리 종주는 취향도 참 특이해.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는 남수사들 때문에 기분이 잡쳤다. 맘 같아선 그럼 너희도 꼬추 떼고 느그 종주 옆에 붙으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가 괜히 싸움 나면 좋을 게 없으니까.
이번 경우는 특수했다. 그동안 수십 개 세가에서 일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하다가 갔어서, 수사들과 이런 식으로 마찰을 빚을 건덕지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초장부터 대차게 꼬여서 지금은 이 모양이니, 역시 궁합이라는 건 존재한다. 나는 청하랑은 영 아니다.
진법부터가 문제다. 수사들이 도를 쓰기도 하고 검을 쓰기도 하니, 진법의 경우의 수도 뭐 말이 안 됐다. 더 강력하든 뭐든 뭔가 좋은 점이 있으니까 그렇게 번거롭게 하는 거겠지. 근데 그게 나한테 좋은 점은 아니잖은가.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외울 건 존나게 많았다.
그래도 차라리 다 함께 진법을 연습할 때는 괜찮다. 눈치껏 하면 되니까. 진짜 문제는 수사들끼리 짝지어 대련을 할 때였다. 서른 넘은 나이에 이제 막 금단 맺은 십대들처럼 일대일 대련을 해야 한다니, 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나는 처음에 경악했다. 그러나 부정세에서는 그렇다니 뭘 어쩌겠는가. 뭐 씹은 얼굴로 상대방에게 공수할 수밖에.
대련은 말 그대로 끔찍했다. 끔찍하다기보단 빡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예 나를 따돌리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오히려 감사하지. 그런데 장래희망이 종주 남첩인 것도 아니고 참 가지각색으로 좆같게 구는 놈들이 많았다. 피를 보겠다는 듯 달려드는 놈들도 있었고, 반대로 일부러 설렁설렁 하는 놈들도 있었다. 와중에 부정세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사실인지 다들 실력이 말이 아닌 게 웃긴데 안 웃겼다. 이렇게 빡세게 굴리는데 저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 아무튼, 내가 뭐 엄청난 경지에 이른 건 아니지만 저런 잔챙이들쯤 검 없이 두들겨 패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상 모난 돌이 될 수는 없어 참았다.
부정세 꼴 참 잘 돌아가는군. 이게 섭명결 죽고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원래 이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금광요가 맹요일 때 부정세 탈주한 게 이래서일지도...... 엄청 힘들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팔에 든 피멍을 찌푸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금방 낫겠지만 그래도 영 보기 별로였다. 등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데 이 정도면, 햇빛 아래에선 더 심해보일 것이다. 그때 방문이 또 벌컥 열렸다.
-밀아! 밀......
-제가 인기척 내달라고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종주.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굳은 섭회상에게 난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린 뒤 대충 옆에 던져놓았던 겉옷을 걸쳤다. 중의 차림인 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저번 밤에도 중의 차림으로 만났었으니까. 그때에는 껌껌한 밤이었고 지금은 아직 하늘에 빛이 남아있지만, 어쨌든.
-이제 곧 있으면 밤인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급한 일입니까?
-너...... 너......
섭회상이 후다닥 다가와 또 내 옆에 앉았다. 그가 내 팔을 붙잡고 옷소매를 걷는 동안 나는 그저 그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 팔이 왜 이래? 멍든 건 뭐고, 흉터는 또 왜 이렇게 많아?
-흉이야 예전에 생긴 거고, 멍은 오다가 넘어져서 생긴 거예요. 부정세 계단 턱이 은근 높더라고요.
이 말을 믿어줄까 했는데, 다행히도 섭회상은 반문하는 대신 싱거울 정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자주 넘어져. 이거 참 부정세 구조를 바꾸든 해야지...... 내가 이따가 연고 가져다 줄게. 좋은 거 있어.
그렇게 말하는 섭회상을 바라보다보면 가슴께가 답답해졌다. 진짜...... 사랑스럽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을 뻔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종주였고, 명목상 내 주인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왜 오신 거예요?
그러면서 섭회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섭회상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내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종주?
묘하게 초점이 나가있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가 더듬거렸다.
-그게...... 잊어버렸어. 약. 약 가져올게.
그러더니 후다닥 나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종주가 직접 약을 가져다준다는데, 수사들이 나만 보면 눈을 흘기는 게 별로 억울해할 일은 아닐지도. 바보 같이 자꾸 웃음이 나와서 입 안을 씹다보면, 곧 섭회상이 흰 도자기로 된 조그만 병을 하나 들고 왔다. 겨우 멍든 것 가지고 약까지 바를 필요는 없다는 내 말에, 섭회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여인의 몸인데......
-제가 여인인 걸 알고 계셨어요? 언제부터요?
내 말에 섭회상의 얼굴이 어두운 방에서도 표가 날 정도로 붉어졌다. 이제 와서 얼굴 붉힐 게 있나 싶었지만, 그러려니 하며 나는 장죽을 입에 물었다. 섭회상의 시선이 내 입술로 향하는 것이 느껴져 곧장 다시 침대 옆 탁상에 장죽을 내려놓았지만. 시발. 나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의 불을 밝혔다.
-제가 여인인 것 아셨으니, 앞으로는 이렇게 막 찾아오지 마세요. 괜히 이상한 소문 나면 어떡합니까.
섭회상 입술은 보지 말자. 어제 저녁 일도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면서 괜히 먼 곳만 바라보는데,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들려왔다.
-뭐 어때? 나는 상관 없어.
고개를 돌리자, 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섭회상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한껏 오므린 채 우물거리고 있었다. 입술...... 시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냥 아예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럼 마음대로 하시죠. 죽이든 살리시든.
그렇게 말없이 누워있다보니, 곧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탁상 위에 무언가 달칵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응. 그럼 잘 자, 밀.
섭회상이 나가는 소리가 들린 뒤로도 나는 한참 동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잠 자려는 노력을 잠시 동안 하다가 결국에는 장죽에 다시 불을 붙였지만.
나잇값 못 하고 무리수 두는 섭 종주님이 보고 싶었음 근데 이제 초장에 다 눈치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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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좋아한다더니 얼굴이 두 갠가? 그 정도 생각을 하며 나는 부정세에서의 첫 밤을 보냈고 다음날부터는 분신술을 쓸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분명히 오전에는 수련하고 오후에는 섭회상 옆에 있는 거 아니었냐고.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부르는 덕에 도를 수련하지 않는데도 주화입마가 올 뻔했다. 나만 보면 비아냥거리는 섭씨 수사들은 덤이었다. 어차피 나야 그들과 어울릴 시간도 없고 내가 참가하는 수련이야 해 봐야 연무장에서 함께 진법 펼치는 게 다여서 아직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편한 건 아니었다. 섭회상 상대하는 것만 해도 힘들었다.
-그래서, 저보고 겸상을 하자고요?
-응!
해맑아라. 그래도 벌써 십 년이나 종주직에 앉아있었으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해맑을 수 있을까? 저번에 쓰러지고 더 멍청해졌다는 말이 사실이기라도 한 건지 이쯤 되면 거의 숙연할 지경이었다.
-종주.
-왜?
-저는 밥 먹고 왔어요.
더 숙연한 건 그런 섭회상에게 맞춰주고 있는 나였다. 하지만 밥 먹고 왔다는 내 말에 세상 서러운 얼굴을 하는 섭회상을 보면 그의 장단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옆에라도 앉아있으라는 섭회상의 말에, 나는 얌전히 그의 근처에 앉아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섭명결이 식사예절을 가르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제 섭명결이 죽어서 예절을 차릴 필요가 없는 건지 먹으면서 쫑알쫑알 말이 많았다.
-나는 이게 제일 좋아. 너도 한 입 먹어볼래?
-아뇨.
-그러지 말고. 이거 진짜 맛있어.
-아니......
-아, 내 팔...... 내 팔 떨어진다......
얼굴만 아니었으면 꼴값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하필이면 귀엽게 생겨서 저러는 것도 또 어울린단 말이지. 결국 나는 그냥 섭회상이 건넨 대로 한 입 받아먹었다. 달게 양념된 고기였는데, 어린애 입맛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심란했다.
-어때? 맛있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야.
-네. 그런데 종주...... 아무한테나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이거다 저거다 이야기하지 마세요.
-응? 왜?
-위험하니까요.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습관은 뭔지, 그런 거 아무한테나 구구절절 말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누가 기억해뒀다가 종주님 해칠 때 쓰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나를 왜 해쳐?
물론 지금의 금광요처럼 섭회상을 살려두고 좌지우지하는 게 더 편한 선택이겠지만, 사대세가의 균형이 겨우 유지되고 있는 지금 그 균형을 허물기 위해 제일 좋은 선택지는 제대로 된 후계자도 아직 없는 섭회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금광요가 나를 섭회상에게 붙여둔 것일 수도 있었다. 금광요 입장에선 이 묘한 균형을 계속 유지하고 싶을 테니까. 거기에 기대야 하는 인생이라니, 새삼스레 눈 앞의 남자가 가련해졌다. 사실 내가 이 사람과 이 사람 가문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싶으면서도……
-부정세에서 암살 시도를 할 정도로 간 큰 인간이 얼마나 많겠냐만은, 사람 일이란 또 모르지 않아요. 그냥, 아무나 너무 쉽게 믿지 말라는 말씀이었어요.
섭회상이 꼭 종주가 아니더라도 믿을 사람만 믿는 건 인간관계의 기본 중 기본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가 출신도 불분명한 나를 여기 이렇게 옆에 끼고 있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러나 섭회상이 휘둥그레 두 눈을 뜬 채로 말했다.
-너는 아무나가 아니잖아?
-제가 왜 아무나가 아니에요?
대화의 핵심을 이렇게 비껴가는 것도 기적이었다. 내가 답답해 하는 게 안 보였는지, 그가 말했다.
-혹시 누가 나를 해치려고 하면 네가 날 지켜줄 거잖아. 아니야?
그렇게 묻는 섭회상의 얼굴엔 무한한 신뢰가 서려 있어서, 나는 좀 죽고 싶어졌다. 어쩌면 좋을까. 이 인간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지. 아니, 지금까지 살아있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꽃밭일 수 있지. 섭씨 인간들 다들 단명해서 망정이지, 금씨 같았어 봐. 벌써 방계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섭회상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나 안 지켜줄 거야?
-당연히 목숨 걸고 지켜드려야죠.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장죽을 꺼내들려던 나는 아직 젓가락이 들려 있는 섭회상의 손을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섭회상은 금세 바보처럼 헤헤 웃고 있었다.
씨발.
-그런데 밀이 넌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뭐가요? 아...... 그거요. 다른 가문에 있을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이 양반이 알기는 알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턱을 괸 채 섭회상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섭회상이 아직까지 목이 붙어있는 데 공헌한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물어보니 금광요도 섭회상을 향한 암살 시도를 몇 번 막아준 적 있댔고, 지금 섭회상의 부사가 아주 오랫동안 섭씨를 섬겨온 사람이라는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얼마 뒤 그 부사가 나를 불렀다.
수진계 사람은 외관만 보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지만, 그래도 대략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족히 쉰 살은 넘어보이는 섭회상의 부사는 섭회상이 섭명결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 때 이후 영 섭회상의 행동을 종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문삼부지가 일문삼부지가 된 연유에 관해서는 저잣거리에서도 종종 듣던 바가 있어,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큰 충격을 받고 시간이 멈춘 사람들을 나는 살면서 여럿 봐왔다. 섭회상은 그 중 하나인 것뿐이다.
-슬프네요.
내 반응이 예상한 대로였는지 아니면 예상 밖이었는지, 부사는 종주께서 당신을 마음에 들어하시니 부디 종주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내게 무척 담담하게도 했다. 섭회상은 태생적으로 마음이 여려 사람을 쉽게 믿는단 이야기도 했는데, 그건 아마 배신하면 얄짤 없다는 걸 돌려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말하자면 섭회상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건 그의 부사 덕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금광요도 이미 알고 있을 법한 정보였다. 이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겠지. 그 섭회상마저도 이건 알 것이다. 반대로 그는, 그리고 눈 앞의 남자는 내가 정말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부사님께서는 절대고수이신가봅니다. 어떻게 종주님 같은 분을 여태껏 지키셨어요?
내 질문에 부사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보였다. 차가운 인상은 아니지만 따뜻한 인상도 아니고 어딘가 가면 쓴 것 같은 얼굴이, 딱 자기가 맡은 일에 제격이었다. 그가 말했다.
-가문을 섬긴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 앞으로는 자네가 그 짐을 함께 져줄 것이니 마음이 조금 놓이네.
-아니...... 종주님이야 그렇다 쳐도 부사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내 말에 부사가 가볍게 웃었다.
-종주를 지킨다는 게 자네가 걱정하는 만큼 힘든 일은 아닐세. 자네는 그저 종주의 말벗이 되어드리면 돼. 그것도 어떤 의미에선 종주를 지키는 것이지. 너무 부담갖진 말게나.
듣자하니 괜히 섭씨 집안일에 파고들지 말고 종주한테 장단이나 맞춰주라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여 알아들었음을 표시했다. 일이 상당히 골치 아파진 셈이다. 그냥 일개 수사로 남았다면 모를까, 섭회상 옆에 붙어있게 됐으니 내 뒷조사를 철저히 했겠지. 진짜 금광요가 날 보낸 걸 알고 있으려나?
걱정 마. 섭회상이 이상한 일 하는 건 없고 악몽만 자주 꾼다고 적어보낸 편지에 답장이 왔을 때, 거기엔 그렇게 쓰여있었다. 하기야 금광요가 내 과거를 잘 정리 안 해놓았을 리는 없다. 만약 섭회상의 부사가 내 정체를 안다고 하더라도 당장 문제될 것은 없겠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잊지 마. 회상도, 너도 위험하길 나는 원치 않아. 그렇게 적힌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보다가, 나는 그것을 불에 태워 장죽의 담배통에 넣었다. 바로 다음 순간 내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밀아!
시발. 침대에 삐딱하게 기대어있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문간에 해맑게 서있는 섭회상이 보였다. 나는 놀란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종주라고 하셔도 그렇지, 인기척도 없이 이렇게 방문을 확확 여시는 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제가 뭘 하고 있을 줄 알고요.
-뭘 하고 있을 건데?
얼빵한 얼굴을 잠시 더 노려보다가,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 죄책감을 괜히 죄 없는 어린애한테 풀 수는 없었다. 근데 솔직히 섭회상이 어린애는 아니지. 수련도 안 한다면서 어떻게 저렇게 동안이래? 몰라 시발. 그런 생각을 하며 답답해서 담배를 빠는데, 섭회상이 슬슬 다가와 내 옆에 걸터앉았다.
-있지, 밀. 감 아저씨가 불렀다며.
-감 아저씨라고 하시면?
-내 부사 있잖아.
-아. 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섭회상이 내 얼굴 표정을 살피는 게 의아했을 뿐이다.
-아저씨가 뭐래?
-그냥 종주님을 잘 부탁드린다고만 하셨습니다. 왜 그러세요?
내 질문에, 섭회상의 얼굴이 더욱 흐려졌다. 그가 입술을 삐죽이더니 부채를 팔락거리자 방 안에 흐리게 퍼져있던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아저씨는 내가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들 데려다가 괜히 겁 주거든. 정말 너무해. 덕분에 도망간 수사들이 몇이나 되는 줄 알아?
-그 분이 그렇게 쫓아주신 덕분에 종주님이 이리 무탈하신 줄 아세요.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자 심통난 듯 인상을 구기는 게 귀엽다 못해 심란해서 나는 담배를 더 깊게 빨았다.
-종주님도 그 정도는 아시잖습니까.
-알아. 잘 알지만...... 나도 외롭단 말이야.
창은 닫혀있었지만, 얇은 종이창 너머로 저녁 노을이 들어와 섭회상의 새하얀 얼굴을 울적하게 물들였다.
-난 종주이기 전에 한 사람이잖아. 가끔씩은 내가 원하는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다구. 아저씨가 뭐라하든.
-종주님.
-응?
-부사님이 저에 대해서 뭔가 얘기하신 거 있어요?
섭회상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섭명결 진짜 이런 남동생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냐. 나였으면 못 죽었다. 나였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다소 충동적으로 말했다.
-앞으로 부사님이 무슨 말씀 하시든 그냥 다 믿으세요. 그 분 말이 다 맞구나 생각하고 사시면 장수하실 겁니다.
왜 아주 저는 첩자니까 죽여주세요 대놓고 말하지. 속으로 자조하는 동안, 섭회상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엔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것이 혹시 화가 났나 했는데, 자세히 보면 내 입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거 하면 좋아?
섭회상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가 쥔 장죽을 가리켰다. 우이독경이란 말은 이런 데 쓰나 보다. 송아지 눈망울같은 섭회상의 두 눈을 보다가,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좋으니까 하겠죠.
-나도 해보면 안 돼?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피워보셨어요?
내 질문에 섭회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님이 안 된다고 하셨어서......
-그럼 저도 안 된다고 할 수밖엔 없네요. 잊으셨습니까? 저 적봉존 닮았다면서요.
-아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응?
너무 깔끔하게 거절했는지, 섭회상이 나에게 답싹 다가와 앉으며 애교를 부렸다. 훅 가까워진 얼굴을 보며 나는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코 끝에 담배 냄새와 섞여 솔내음 같은 것이 스쳤다.
-이거 폐에 안 좋습니다.
-하지만 네가 그거 피울 때마다 엄청 좋아 보인단 말이야. 한 번만 피워보게 해 줘.
섭회상이 그렇게 애원하며 손가락을 담배통으로 가져간 게 너무 순식간이라, 나는 막을 수 없었다.
-아야야!
상식적으로, 불 붙어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쇠로 된 담배통을 맨손으로 건드는 게 서른 살 넘은 인간이 할 짓인가? 파드득 떠는 섭회상의 손을 가져와 살펴보자, 붉게 달아올라 있는 중지와 약지 끝이 보였다. 나는 혀를 찼다.
-이리 오세요.
섭회상은 내게 손이 붙잡힌 채 정원까지 얌전히 따라왔다. 연못에 손을 넣고 반 주향 동안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자 울상이 된 그가 말했다.
-나 손에 물집 잡히면 어떡해?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안심시키며, 나는 섭회상의 소매가 물에 닿지 않도록 걷어주었다. 뭔놈의 남자 팔이 이렇게 희고 여린지 모를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노을빛이 연못에 번져 둥글게 둥글게 퍼지고 있었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섭회상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방해했다. 그가 배고픈 고양이마냥 간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 진짜 한 번만 피워보면 안 돼?
그때 내가 쉰 한숨으로 청하에 광산을 하나 더 뚫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하얗고 조그맣고 나잇값 못하는 섭종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 항복했다.
-한 번만입니다.
-응!
나는 내가 물고 있던 장죽 끝을 소매 끝으로 닦은 뒤 섭회상의 입에 물려주었다. 연분홍빛 입술이 진홍색 죽대와 대비되어 묘한 감상을 자아냈다. 아주 잠시 그 입술을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들이마시는 겁니다. 진짜 천천히요.
섭회상은 고분고분 내 말을 들었다. 적어도 그러려는 시도는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담배를 처음 피우는 사람이 으레 그러듯 연기를 반쯤 들이마시다 말고 기침을 하며 난리였고, 나는 그의 등을 토닥여주어야 했다.
-그러게 왜 해보겠다고 하셨어요.
-네가 하는 건 맛있어 보였단 말이야.
섭회상이 억울하다는 듯 대답하며 나에게 기댔다. 나는 눈물이 맺힌 섭회상의 눈가를 무심코 엄지로 훑었다. 선을 넘었나 싶어 멈칫했는데, 섭회상은 오히려 조금 진정된 얼굴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노을빛 아래에서도 확연히 붉어진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나도 모르게 그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번엔 내가 불에 댄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했다. 나는 장죽을 입에 물고 깊게 빨았다. 잠깐만. 이거 섭회상이 물었던 거지. 씨발.
-이제 그만 손 빼셔도 돼요.
다행히도 내 목소리가 갈라진 건 그다지 티가 나지 않았다. 섭회상이 쪼그려 앉아있던 무릎을 펴며 앓는 소리를 내는 동안 나는 내 옷소매로 그의 젖은 손을 닦아주었다. 손끝을 확인하자 흉이 질 것 같진 않았지만 아직 붉은 기가 남아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거 고운 손이 데여서, 원......
-뭐?
섭회상이 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친.
-아무것도 아닙니다. 흉은 안 질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인들 시켜서 연고 가져다 달라고 하시죠.
-응. 근데 밀아. 내 손이 고와?
귀는 존나 좋네. 차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아마 그건 안 덧붙여도 됐을 것이다. 왜 이러지, 진짜.
-그래?
섭회상이 새삼스럽다는 듯 자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를 두고 먼저 내 방으로 돌아갔으나, 심란한 내 속을 알 리 없는 그가 나를 졸졸 쫓아왔다.
-밀아, 밀아.
-또 왜 그러세요.
-내일 낮에 나랑 같이 놀러 나갈래?
나는 방 앞에서 서서 섭회상을 돌아보았다. 섭회상이 들뜬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나는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싫다고 해도 데려가실 거 다 알아요.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수줍게 웃었다.
*
다음날 섭회상이 나를 데려간 곳은 청하의 제일 번화가였다. 어디 귀한 집 도련님은 돈을 얼마나 잘 쓰는지 보자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간 것인데, 막상 섭회상을 곱지 않은 눈으로 힐끔거리는 청하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 지역의 선문세가가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종주를 밖에 내보내보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이 먼저 인사해오며 먹을 걸 바친다면 그 종주가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이고, 가자미눈을 뜨고 길에 침을 뱉는다면 뭐...... 망한 것이다. 섭회상을 보는 사람들 태도로 보아 후자에 더 가까웠다. 나는 섭회상의 옆에 붙어 걸었다. 하필 수사들도 거의 안 데리고 나와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런가하면 섭회상은 희희낙락이었다.
-밀아. 탕후루 좋아해?
내 뒤에 박히는 다른 수사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나는 섭회상이 나에게 건네는 탕후루를 받아들었다. 섭회상은 기분이 무척 좋은지 빠르게 부채를 팔락거리고 있었다.
-덥다, 그치?
-예.
-중원절이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잖아. 종이등 만들 준비 해야지.
그러면서 섭회상이 들어선 곳은 지물포였다. 일반 지물포 말고, 아주 아주 고급 지물포. 종이가 종이지, 무슨 비단 옷감 쌓아놓고 팔듯 이렇게 파는 게 나로선 이해가 안 갔다. 가게 문 앞에 선 섭회상이 빼꼼 나를 돌아보았다.
-뭐해, 아밀. 얼른 들어와.
굳이 나만 데리고 들어가는 섭회상 때문에 다른 수사들 눈치가 보였다. 나도 몰라, 느그 종주가 왜 내 껌딱지처럼 구는지. 대충 남은 탕후루를 입 안에 욱여넣은 뒤, 막대기를 버리며 나는 섭회상의 뒤를 따라 종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옥색 천을 걷고 들어간 가게에서는 향낭 파는 데라고 해도 믿을 만큼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색색깔 종이들이 옷감처럼 벽에 걸려있었다. 점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달려와 섭회상을 맞이했다. 척 보니 섭회상은 이 가게의 일등 단골인 듯했다. 섭회상이 점원과 대화를 나누며 종이를 고르는 동안 나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테두리에 은박, 금박이 둘린 종이도 있었고 꽃무늬가 새겨진 종이도 있었으며 아예 순백색인 종이도 있었다. 나는 연한 잿빛 종이 앞에 멈춰섰다.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섭회상이 호기심 서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빛을 받은 섭회상의 눈동자가 연갈색으로 빛났다.
-왜 그래? 이 종이가 마음에 들어?
-그냥...... 종주님을 닮아서요.
반쯤 멍하니 대답하자, 후다닥 다가온 점원이 나에게 안목이 있다며 칭찬했다. 귀한 흑토를 물에 개어 색을 입힌 것인데, 이리 고르게 염색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원에게 섭회상은 방긋 웃어보였다.
-그럼 이것도 주문함세. 이번 종이등은 이 종이로 만들어야겠어.
그렇게 주문을 마친 섭회상은 산뜻한 걸음으로 가게를 나와 길거리를 배회했고, 수사들은 섭회상이 그러는 게 익숙한지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섭회상이 손짓하는 대로 그에게 따라붙었다. 한가롭게 길거리 패물과 장난감들을 구경하는 그는 아무리 봐도 종주라기보단 종주 동생이었다. 문득 부정세의 주인 운운하던 섭회상이 떠올랐다. 그때, 섭회상이 물었다.
-밀아. 너는 뭘 좋아해?
뭘 좋아하냐고? 나는 인상을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솔직히 말했다.
-돈이요.
-돈?
-돈은 깔끔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야?
-돈은 뭘로든 바꿀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섭회상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돈이 엄청나게 많이 있으면 그걸 뭘로 바꾸고 싶은데?
-글쎄요. 전 그냥 돈으론 뭔가를 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습니다.
-재미있다.
섭회상이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렸다.
-성현들의 말씀과 정반대네. 소위 재물은 수단일 뿐 아무것도 아니니, 재물을 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말들 하잖니.
-맞아요. 저는 어리석은 소인배입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당황한 듯 파닥거리는 섭회상은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내 표정을 살피며 연신 부채질을 하던 섭회상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붙였다.
-그런데 말야. 돈으로 뭐든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않아? 사람의 마음이라든가...... 그런 건 아무리 부자여도 자기 뜻대로 안 된다구.
-그건 부자 아니어도 자기 뜻대로 안 되잖아요.
내 대답에, 섭회상은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의 얼굴에 소년 같은 빛이 돌았다.
-우문현답이네. 그럼 밥 이야기 나온 김에 식사나 하러 가자. 배고파!
그러면서 쏠랑 근처 객잔으로 들어가는 자기 종주를 좇아 검은 옷 입은 섭씨 수사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것이 그날 심심해서 길가에 죽치고 있던 사람들 구경거리는 하나 되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부정세로 귀환하자 신시쯤 되었다. 오전에 수련을 빼먹었으니 오후 수련에 참가하겠다는 나에 섭회상은 왜 그렇게 부지런하냐며 입술을 삐죽였다.
-나랑 놀아주지 않구.
-저는 종주님 놀이친구가 아니라 부정세 수사로 들어온 거여서요.
그렇게 매몰차게 종주를 떨구고 왔는데, 그런 보람 없이 연무장 바닥을 밟자마자 귓가에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꽂혔다.
-우리 종주는 취향도 참 특이해.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는 남수사들 때문에 기분이 잡쳤다. 맘 같아선 그럼 너희도 꼬추 떼고 느그 종주 옆에 붙으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가 괜히 싸움 나면 좋을 게 없으니까.
이번 경우는 특수했다. 그동안 수십 개 세가에서 일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하다가 갔어서, 수사들과 이런 식으로 마찰을 빚을 건덕지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초장부터 대차게 꼬여서 지금은 이 모양이니, 역시 궁합이라는 건 존재한다. 나는 청하랑은 영 아니다.
진법부터가 문제다. 수사들이 도를 쓰기도 하고 검을 쓰기도 하니, 진법의 경우의 수도 뭐 말이 안 됐다. 더 강력하든 뭐든 뭔가 좋은 점이 있으니까 그렇게 번거롭게 하는 거겠지. 근데 그게 나한테 좋은 점은 아니잖은가.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외울 건 존나게 많았다.
그래도 차라리 다 함께 진법을 연습할 때는 괜찮다. 눈치껏 하면 되니까. 진짜 문제는 수사들끼리 짝지어 대련을 할 때였다. 서른 넘은 나이에 이제 막 금단 맺은 십대들처럼 일대일 대련을 해야 한다니, 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나는 처음에 경악했다. 그러나 부정세에서는 그렇다니 뭘 어쩌겠는가. 뭐 씹은 얼굴로 상대방에게 공수할 수밖에.
대련은 말 그대로 끔찍했다. 끔찍하다기보단 빡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예 나를 따돌리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오히려 감사하지. 그런데 장래희망이 종주 남첩인 것도 아니고 참 가지각색으로 좆같게 구는 놈들이 많았다. 피를 보겠다는 듯 달려드는 놈들도 있었고, 반대로 일부러 설렁설렁 하는 놈들도 있었다. 와중에 부정세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사실인지 다들 실력이 말이 아닌 게 웃긴데 안 웃겼다. 이렇게 빡세게 굴리는데 저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 아무튼, 내가 뭐 엄청난 경지에 이른 건 아니지만 저런 잔챙이들쯤 검 없이 두들겨 패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상 모난 돌이 될 수는 없어 참았다.
부정세 꼴 참 잘 돌아가는군. 이게 섭명결 죽고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원래 이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금광요가 맹요일 때 부정세 탈주한 게 이래서일지도...... 엄청 힘들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팔에 든 피멍을 찌푸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금방 낫겠지만 그래도 영 보기 별로였다. 등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데 이 정도면, 햇빛 아래에선 더 심해보일 것이다. 그때 방문이 또 벌컥 열렸다.
-밀아! 밀......
-제가 인기척 내달라고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종주.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굳은 섭회상에게 난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린 뒤 대충 옆에 던져놓았던 겉옷을 걸쳤다. 중의 차림인 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저번 밤에도 중의 차림으로 만났었으니까. 그때에는 껌껌한 밤이었고 지금은 아직 하늘에 빛이 남아있지만, 어쨌든.
-이제 곧 있으면 밤인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급한 일입니까?
-너...... 너......
섭회상이 후다닥 다가와 또 내 옆에 앉았다. 그가 내 팔을 붙잡고 옷소매를 걷는 동안 나는 그저 그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 팔이 왜 이래? 멍든 건 뭐고, 흉터는 또 왜 이렇게 많아?
-흉이야 예전에 생긴 거고, 멍은 오다가 넘어져서 생긴 거예요. 부정세 계단 턱이 은근 높더라고요.
이 말을 믿어줄까 했는데, 다행히도 섭회상은 반문하는 대신 싱거울 정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자주 넘어져. 이거 참 부정세 구조를 바꾸든 해야지...... 내가 이따가 연고 가져다 줄게. 좋은 거 있어.
그렇게 말하는 섭회상을 바라보다보면 가슴께가 답답해졌다. 진짜...... 사랑스럽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을 뻔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종주였고, 명목상 내 주인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왜 오신 거예요?
그러면서 섭회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섭회상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내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종주?
묘하게 초점이 나가있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가 더듬거렸다.
-그게...... 잊어버렸어. 약. 약 가져올게.
그러더니 후다닥 나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종주가 직접 약을 가져다준다는데, 수사들이 나만 보면 눈을 흘기는 게 별로 억울해할 일은 아닐지도. 바보 같이 자꾸 웃음이 나와서 입 안을 씹다보면, 곧 섭회상이 흰 도자기로 된 조그만 병을 하나 들고 왔다. 겨우 멍든 것 가지고 약까지 바를 필요는 없다는 내 말에, 섭회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여인의 몸인데......
-제가 여인인 걸 알고 계셨어요? 언제부터요?
내 말에 섭회상의 얼굴이 어두운 방에서도 표가 날 정도로 붉어졌다. 이제 와서 얼굴 붉힐 게 있나 싶었지만, 그러려니 하며 나는 장죽을 입에 물었다. 섭회상의 시선이 내 입술로 향하는 것이 느껴져 곧장 다시 침대 옆 탁상에 장죽을 내려놓았지만. 시발. 나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의 불을 밝혔다.
-제가 여인인 것 아셨으니, 앞으로는 이렇게 막 찾아오지 마세요. 괜히 이상한 소문 나면 어떡합니까.
섭회상 입술은 보지 말자. 어제 저녁 일도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면서 괜히 먼 곳만 바라보는데,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들려왔다.
-뭐 어때? 나는 상관 없어.
고개를 돌리자, 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섭회상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한껏 오므린 채 우물거리고 있었다. 입술...... 시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냥 아예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럼 마음대로 하시죠. 죽이든 살리시든.
그렇게 말없이 누워있다보니, 곧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탁상 위에 무언가 달칵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응. 그럼 잘 자, 밀.
섭회상이 나가는 소리가 들린 뒤로도 나는 한참 동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잠 자려는 노력을 잠시 동안 하다가 결국에는 장죽에 다시 불을 붙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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