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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알못ㅈㅇ 마크는 영국에서 돌아 온 후고 마일스 군대 가기 전임 ㅇㅇ
ㅌㅆ올린 적 있음

전편 https://hygall.com/497159420





수요일이 됐어. 마크는 군화가 얼마나 튼튼한지 깨닫고 있었지. 게다가 바빠서 계속 차며 마차를 타고 다녔어. 3일 동안 갑자기 일이 터지는 바람에 정신없이 뛰어다녔는데도 신발이 깨끗했어. 아니, 더럽기는 했지. 실은 매일 닦을 일이 생기는게 구두니까. 근데 이 정도로 마일스에게 가도 되나 싶은거야. 그래서 마크는 자기가 머리를 잘못 썼다고 생각할 것 같아. 그냥 매일 보는게 더 나았을텐데. 마일스는 낯을 가리니까 일주일에 한 번 보는 걸로는 또 둘의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 같았어. 지난 일요일에 한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마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

“잠시 나갔다 오겠네.”

부하에게 이야기하고 구두 닦이 거리로 갔지. 거리가 한산했지만 아무도 마크를 잡지 않았어. 그가 누구에게 갈지 다 알고 있었거든.

“아, 마크.”

가방을 정리하던 마일스가 자신을 반기는 걸 보고 마크는 불안이 싹 가셨어. 그게 이상해서 마크는 마일스에게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계속 마일스를 바라보고 있었지. 마일스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사라지는 걸 깨닫고 나서야 마크가 아차 했어.

“잘 지냈어요?”

뒤늦게 인사를 건네니까 마일스가 금방 다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어. 덕분에 마크도 조금 마음을 놓았지.

“네, 덕분에요. 마크는 잘 지냈어요? 바빠 보이시던데.”

몇 번인가 차를 타고 근처를 지난 적이 있긴한데 그걸 마일스가봤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 마크는 그가 눈썰미가 좋다고 생각하게 됐지. 그래서 의자로 자리를 옮기면서 푸념을 했어. 자기가 3일 동안 얼마나 바빴는지, 그리고 이 눈치 없는 군화는 쉽게 더러워지지도 않더라는 말까지 해버렸지.

“정말이네요. 오늘은 별로 닦을 것도 없겠어요.”

마일스가 마크의 군화를 보고 말했어. 마크는 이미 자리에 앉아버렸는데 말이야. 마크가 머쓱한 얼굴로 웃었어.

“그래도 오셨으니까 오늘은 서비스로 해드릴 게요.”

마일스가 손에 천을 감고 군화에 붙은 먼지를 닦아내기 시작했어. 몇 번의 손길에 금세 깨끗해지는 것을 보고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마일스의 손이 마크의 발목 부분을 잡았어. 군화는 구두보다 목이 기니까 당연한 일이었지 .그런데 순간 마크의 몸이 뻗뻗하게 굳었어. 군화가 가로막고 있긴했지만 자신의 발목을 쥐고 있는 마일스를 보는데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어. 아니, 이게 뭐지? 금세 발목 부분의 먼지를 털고 멀어지는 손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마일스는 이미 다른 발로 손을 옮겼어. 이제 곧 그 발도 발목이 잡힐거야.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마크의 뒷목에 소름이 돋았어. 애써 그 기분을 떨치려고 마일스에게 말을 걸어야했지.

“그날은 잘 돌아갔어요?”
“예. 덕분에 어머니와 맛있는 것도 사 먹었어요. 오랜만에 큰 돈을 받았는데 빈손으로 들어가기 아쉽더라고요. 좋은 일자리를 얻었다고 이야기했더니 어머니도 기뻐하셨고요. 다 마크 덕분이에요.”

마일스가 고개를 슬쩍 들어서 마크와 눈을 마주쳤어. 원래 저렇게 볼이 발그스름했던가? 마크는 그 볼이 만져보고 싶어졌어. 그리고 다시 순식간에 발목을 잡혔지. 마일스에게 뻗을뻔 했던 손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어. 마크는 입술을 꾹 다물었어. 군화 틈 사이로 들어간 먼지를 털어내느라 마일스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어. 별다를 것 없는 손놀림이었는데 마크는 자꾸 어딘가가 불편했어. 그 이상한 느낌을 떨쳐내려고 애쓰느라 발 안쪽을 보여달라는 마일스의 말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할만큼 말이야. 아예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리려고 고개를 돌린채 앉아있어서 마일스가 마크의 이름을 다섯번쯤 부르고나서야 네? 하고 고개를 돌렸지.

“… 발 좀 돌려주세요.”
“이렇게요?”
“네.”

이럴 줄 알았어. 마일스는 바깥으로 돌린 마크의 군화를 닦으며 한탄했어. 마크는 바쁘고 언제나 자기만 관찰하고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 그치만 이렇게 넋을 놓을 정도로 다른 생각을 하다니. 섭섭하다고 생각하면 안 될 일인데 어쩔 수 없이 섭섭한 마음이 들었어. 그런 생각이 들고나니까 저절로 손이 느려졌어. 마크의 군화 가죽을 느리게 닦아내리며 마일스는 머리를 흔들었어. 아니야, 차라리 잘 됐어. 이런 순간은 매번있을텐데 상처받는 것에 익숙해져야지. 지금 마크를 좋아하는 건 내 자유지만 언젠가 마크가 떠나는 날엔…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까 손이 우뚝 멈췄어. 마크가 멀리 떠날 수도 있겠구나. 당연하지, 그는 군인이잖아. 세상 어딘가에서는 매일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고. 마일스가 고개를 들어 마크를 바라봤어. 이번엔 미간에 잔뜩 힘을 준 마크가 마일스를 내려다보고 있었지. 저런 얼굴도 있구나, 감탄하는 동시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그의 얼굴은 웃는 낯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이상하지 몇 년 동안 한 번도 흘린 적 없는 눈물이 금방 눈물샘을 비집고 나오려고 했어. 마일스는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어. 마크가 눈치채지 않았어야 할텐데.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마일스의 머릿속이 온통 복잡한 생각으로 얽히는데 마크의 손이 마일스의 얼굴을 붙잡아 들었어. 그 바람에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마일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어. 당황한 마일스가 숨을 삼켰어. 마크는 여전히 미간이 좁아진 상태였지만 아까보다 부드러운 얼굴이었지. 마치 자기를 걱정해주고 있는 것 같은.

“무슨 일 있었어요?”

물으면서 눈물을 닦아내는 엄지손가락이 너무 따뜻해.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러면 안된다는 걸 마일스는 잘 알고있어. 마크는 군인이잖아. 군인들은 이 사회에서 용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확실했지. 그도 그럴 거야. 마일스는 제 볼에 닿은 마크의 손에 더 얼굴을 부비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고개를 빼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어.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 같아요.”

아니, 거짓말이야. 마크는 훌쩍이는 마일스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러니까 마일스가 한 걸음 더 멀어져서 마크는 더 움직일 수가 없었어. 군화 닦는 걸 마무리해야 하는데 마일스는 마크에게 다시 앉으라고 할 수 없었어. 마크를 더 보고 있으면 정말 큰일날 것 같았거든. 천천히 자리에서 내려오는 마크를 보고 마일스가 얼른 눈을 비벼서 닦으면서 웃었어. 마크가 지금 이 상황을 어색해하는 게 느껴져.

“아,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억지로 웃는데 입꼬리가 자꾸 떨렸어. 너무, 너무 빠르게 빠져들었어. 마일스는 애초에 자기 마음이 속도를 조절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계속 자책했어. 어쩌면 이게 나을지도 몰라. 빨리 상처받고 빨리 털어버리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 마크가 굳은 얼굴로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냥 품 안에 손을 넣었어. 지갑을 꺼내길래 마일스가 손사래를 쳤지.

“아니에요, 오늘은 별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그냥 가셔도 괜찮아요.”

어쩐 일인지 마크가 얌전히 지갑을 다시 넣었어. 그리곤 다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어. 그리고 마일스의 손에 넘겨주나 싶었는데 다가와서 눈가를 닦아줬어. 안돼, 그는 마일스가 거부하기엔 너무 다정한 사람이었어. 손수건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마크의 온기가 너무 좋았어. 심장이 아릴 정도로.

“약이 조금 묻었어요.”
“괜찮, 괜찮아요.”
“여기, 그리고 여기요.”

마크가 손수건으로 닦아야 할 자리를 차례대로 눌러주고 마일스의 손에 손수건을 쥐어줬어. 손수건을 사이에 두고 맞잡은 손을 마크가 쉽게 떼지 못했어. 그렇게 한참을 뜸들이다가 겨우 말했지.

“여기서 이러면 안되는 거 알아요. 당신이 일하는 곳이고,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마크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손수건을 마일스의 손에 꼭 쥐여줬어.

“이건 내일 돌려줘요. 집에서 받을게요.”
“네?”

당황한 마일스가 마크를 쳐다봤어. 마크는 웃지 않았지. 대신 마일스에게만 들리게 다시 이야기를 했어.

“내일 저녁에, 우리 집에서.”

손수건을 든 채로 얼이 빠진 마일스를 놔두고 마크는 다시 부대로 걸음을 옮겼어. 꼭 화가 난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어갔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어. 그냥 성실하게 사는 아이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마일스의 웃는 낯에도 우는 낯에도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찼을 때 마크는 절망했어. 다시는 못할 줄 알았던 사랑이 이렇게 찾아오다니. 게다가 그걸 깨달은게 감정이 아니라 욕정이 먼저인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어.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팔이, 몸이 나풀거리듯 움직였던 게 자꾸 눈 앞에 보여. 여지껏 자신이 만나온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였어. 자신이 남자를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이렇게 늦게 깨달은 걸까?
마크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물부터 들이켰어. 그리곤 갑자기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지. 마일스를 만나고오면 금방 질 줄 알았던 해는 아직도 제 말간 얼굴을 창으로 드리우고 있었어. 서류에 적힌 글자도 눈에 들어오질 않아.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없었지만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일도 있었지. 마크는 억지로 활자를 읽으며 그 밑에 사인했어.
밤엔 잠이 안 와서 고역이었어. 포근해서 잠이 잘 온다고 좋아했던 침구가 버석거려서 잠이 안왔어. 눈을 감아도 마일스의 웃는 낯과 우는 낯이 번갈아 보였어. 결국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어. 따뜻한 물이라도 마실까 싶어 침실을 나섰는데 응접실에서 빼꼼 저를 쳐다보던 머리가 떠올랐어. 그리곤 자기도 모르게 웃었지. 마크는 주방으로 향하던 걸음을 옮겨서 응접실로 갔어. 마일스가 앉았던 소파에 앉아서 마일스가 구두를 닦던 자리를 응시했어. 어찌나 손이 빠르고 야무진지 몰라. 가까이서 지켜봤지만 이렇게 멀리서 봐도 좋을뻔했어. 그러면 얼굴이며 몸짓을 조금 더 볼 수 있을텐데. 그렇게 하루를 보낸 것이 아쉬워. 상상 속의 마일스는 구두를 닦으면서 자꾸 소파에 앉은 마크를 쳐다봤어.

“괜찮겠어요? 내가 당신을 가지고 싶어해도?”

마일스는 답이 없어. 듣지 못한 것 같아. 그래서 마크는 조금 시간을 주기로 했어. 소파에 모로 누워서 제 기억 속의 마일스가 구두 닦는 것을 보다가 겨우 잠이 들었지. 그날도 약혼자에게 전화를 해야하는 날이었지만 마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어.




날이 밝았고, 마크는 너무 바빴어. 하마터면 마일스를 부른 걸 잊을뻔 할 정도로. 일을 다 처리하고나니 이미 해가 지기 시작했고 구두닦이 거리에도 사람이 없을 시간이었지. 혹시 마일스가 오지 않을까 걱정된 마크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어. 집 근처에 도착하니 이제 정말 하늘이 캄캄해졌지. 오늘은 글렀나 싶어서 내일 구두 닦이 거리에 가야겠다고 체념한 마크의 눈에 무언가 몸을 잔뜩 만 채 현관 앞에 있는 게 보였어.
설마.
마크가 빠르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가서 확인했을 때, 마일스가 고개를 들었어.

“늦으셨네요.”

마일스가 마크를 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가 금세 지웠어. 그리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 마일스가 자기를 기다린게 너무 좋은데, 한편으로 너무 미안하고 걱정 되었어. 마크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지.

“왜 지금까지 기다렸어요?”

그 말에 마일스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어. 괜한소리를 했어. 그냥 걱정했다고 말할 걸. 마크는 자기 손끝만 만지작거리는 마일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 한참 망설이다가 마일스가 말했어.

“제 손이 너무 더러워서… 손수건을 꺼내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손을 좀 씻을 수 있을까요?”

어차피 집에 데리고 들어 갈 생각이었으니 마크는 아무 의심 없이 마일스를 앞세워 집 안으로 들어갔어. 마일스 딴에는 마크랑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려고 머리를 쓴 건데, 마크한테 안 들킨 것 같아서 속으로 조금 좋아하고 있었지. 마일스는 제 손을 뒤로 숨기고 화장실을 사용해도 괜찮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마크가 이상한 질문을 해.

“손수건 어디다 뒀는데요?”
“어, 제 바지 주머니에요.”

대답이 끝나자마자 마크가 마일스에게 바짝 다가왔어. 놀란 마일스의 입에서 딸국질이 튀어나왔지.

“왜 그렇게 놀라요?”

묻는데 장난기가 없어서 조금 무서웠어.

“너무, 가까워서요, 딸꾹.”

마일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마크의 손이 불쑥 마일스의 바지 주머니로 들어왔어. 놀라서 히이익 소리를 내면서 뒤로 물러서려는데 마크의 팔이 허리를 감았어.

“여기 아니네요?”

마크의 입과 마일스의 귀가 너무 가까웠어. 아니, 얼굴에 더 가깝나? 마일스가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로 대답했어.

“그, 뒤에, 뒷주머니에….”
“여기요?”

또 마크의 손이 빈주머니를 찔렀어. 놀란 마일스가 손길을 피하려다가 오히려 마크의 품 안으로 달려든 꼴이 되었어. 마크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때, 자신을 찬찬히 뜯어보는 마크의 시선이 느껴졌어.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치고 싶지 않았어. 마일스는 덜덜 떨리는 손을 마크의 어깨 위에 올렸어. 순간 마크의 안광이 번뜩였어. 마일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어. 주머니 속에서 마크의 손이 빠져나가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기는 느낌이 들었어.

“...당신을 원해요.”

마크가 귓가에 속삭였어. 그 의미를 모를 수 없었지. 마일스가 먼저 가진 감정이었으니까. 마일스의 머리와 볼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마일스가 눈을 떴어. 어두운 집 안에서 불빛 한 점 없이도 마크의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보았어. 그 눈을 어떻게 거절하겠어.

“저도요...”

마일스가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어. 마크의 손이 볼을 따라 턱선을 훑으며 아래턱에 닿았어. 그가 원하는 건 분명해보였어. 마일스는 제 턱을 지그시 누르는 엄지손가락에 소름이 돋았지.

“진심이에요?”
“...네.”
“잘 생각해야해요.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나는, 한 번 가진 건 놓아주질 않아서.”

마일스의 턱이 긴장감에 덜덜 떨리기 시작했어. 정말 이대로 괜찮은걸까? 마크가 자신을 원한다는 말이 자기랑 같은 마음인걸까? 내리 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올리자 거의 동시에 마일스의 입술을 보고 있던 마크의 시선이 따라왔어. 둘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입술을 부딪쳤어. 거칠게 부딪쳤지만 때때로 애틋하게 입을 맞추는 마크 때문에 마일스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 싫으면 그만하겠다는 말에는 도리질을 쳤지. 그만두고 싶지 않았어.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는 쪽이 나을거야. 한참 입을 맞추고 숨을 몰아쉬면서 둘의 입술이 떨어졌어. 이마를 여전히 맞춘 채로. 손으로 서로의 어깨를 잡은 채로. 잠시 이 온기가 거짓이 아님을 느끼는데 마크가 갑자기 피식 웃어버렸어. 당황한 마일스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

“내가 당신 때문에 고민했던 시간들 때문에요. 그냥 이 말 한마디면 되는 것을.”

마일스는 무슨 소리인지 다 알아듣지 못해서 그냥 눈만 깜박거렸어. 마크의 입술이 마일스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다녀갔어.

“배고프지 않아요? 밥부터 먹죠. 아니다, 나가서 먹을까요?”

마크의 말에 마일스는 제 옷차림부터 살폈어. 어디가서 외식할만한 복장은 아니었어. 마크는 그의 고민을 기가막히게 알아차리고 마일스의 손을 잡고 옷 방으로 끌었지.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잡고 있는 손에 대한 것을 떠올렸어.

“그러고보니 손이 더럽다고 한 건 어떻게 됐어요?”

마크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어. 마일스는 얼굴이 빨개졌지.

“...거짓말이었어요. 마크랑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요.”

마크는 마일스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마크가 마일스의 손을 가져다가 자기 볼에 대서 마일스가 깜짝 놀랐어. 마크는 그걸 보고 또 웃으면서 얘기해.

“당신 손이 아무리 더러워도 이제 나에게 닿지 못할 곳은 없어요.”

마일스가 또 얼굴을 붉혔어. 마크는 마일스의 손을 잡은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드레스룸으로 향했고, 마일스는 어정쩡하게 따라갔지. 손을 놓기가 아쉬워서 마크는 한 손으로는 여전히 마일스의 손을 잡은 채로 옷장을 뒤졌어.

“내 옷을 빌려줄게요. 이거 어때요? 이건요?”
“잘 모르겠어요. 마크가 마음에 드는 걸로 할게요.”

마크는 옷장을 뒤져서 자기가 잘 입지 않았던 옷을 찾았어. 가진 옷 중에 제일 따뜻한 색이었지.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손이 잘 가지 않는 옷이었어. 마일스가 매일 입는 가디건과 색도 비슷하고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걸로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크는 손을 놓는 걸 잊고 있었어. 마일스가 빈 손으로 옷을 받아들고 어색하게 웃었어. 손을 놓아달라는 뜻이었는데 마크는 그저 그렇게 웃는 그가 귀여워서 또 뽀뽀했어. 마일스는 그의 애정표현이 과감하고 매우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어. 그치만 손이 여전히 잡혀있었지. 마일스가 우물쭈물하자 마크가 다시 물었어.

“입기 싫어요? 다른 걸로 고를까요?”
“아니, 손을 놔주셔야 할 것 같아요.”
“오, 이런 미안해요.”

마크가 손을 놓기 전에 마일스의 손등에 입을 맞췄어.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애정 표현에 능수능란한 그를 보고 있자니 마치 마크가 술이라도 되는 것 같이 금방 취해버렸어.
마크가 자리를 비켜주자 마일스는 어색하게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룸에 있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어. 그리고 쭈뼛대며 마크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어. 마크는 마일스는 보자마자 또 함박웃음을 지었어. 키는 비슷한 거 같은데 확실히 자신보다 훨씬 말랐으니 옷이 큰 것은 어쩔 수 없었지.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거야. 자신의 옷에 마일스가 폭 안겨있는 것 같았지. 마크는 마일스에게 정중하고 멋진 사람이고 싶은데 자꾸 욕망에 휩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옷 매무새를 만져주려고 다가갔다가 또 입맞추고 말았어. 마일스는 부끄러워하긴 했지만 밀어내진 않았어. 그제야 마크는 자신이 진짜로 마일스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지. 물론 자신도 마일스에게 준 거지만. 그냥 이대로 둘이서 밤 새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 같았어. 마일스의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지만 않았어도 말이야. 배가 고프긴 마크도 마찬가지여서 마일스의 붉어진 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준 다음에야 겨우 집을 나섰어.

시간이 너무 늦어서 문 연 곳도 간신히 찾아냈어. 레스토랑이라기 보다는 카페에 가까운 곳이라서 둘은 어정쩡하게 잘 차려입고 샌드위치를 먹게 되었지. 마일스는 계속 여기저기 눈치를 봤어. 마크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그냥 이런데 너무 오랜만에 와봤다는 거야. 식사를 마치고는 이만 돌아가야겠다는 말에 마크의 표정이 굳었어. 마일스의 집에 아픈 어머니가 계신 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거지. 마일스는 마크의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겠다고 했지만 마크가 거절했어.

“집에 가져가요. 어차피 나한테는 안 어울리는 옷이에요. 대신 나중에 양장점에 가서 수선을 좀 해야겠어요. 당신 몸에 맞게요.”

마일스가 괜찮다고 거절하는 손을 잡아채고 마크가 말했어.

“나를 가진 걸 누려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할 거예요. 마일스, 당신은, 그냥 받아들이면 돼요.”

마일스도 같은 마음이야. 하지만 가진게 없어 줄 것도 없었지. 뒤늦게 그를 마음에 품은 것이 조금 후회되었어. 분수를 너무 몰랐던 것 같아. 지금 부른 배가 언젠가 깨어날 꿈 같이 느껴졌어. 자기를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말하는 마크도 말이야. 갑자기 집에 가서 잠들기가 두려워졌어. 이게 정말 다 꿈이면 어떡하지? 마일스가 우물쭈물하자 마크가 얼른 손을 잡아채고 걷기 시작했어.

“집이 어디에요? 이 방향이 맞아요? 아니라면 빨리 얘기해야 할 거예요. 이쪽은 우리 집 방향도 아니라서 계속 걷다간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요.”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였어. 이대로 영원히 같이 거리를 걷다가 죽어도 괜찮다는 듯이 말이야. 손은 다정한 모양새로 잡지 않았지만 그래도 닿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온기가 전해졌지. 마지못해 끌려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마일스가 손가락으로 자기 집 쪽을 가리켰어. 마크는 마치 제 집으로 가는 것처럼 마일스를 끌면서 앞장서서 걸었어. 그리고 말 없이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마일스를 돌아봤지.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어. 그제야 마일스의 손을 놓고 문 앞에 세우는 마크야.

“그래요. 오늘처럼 내가 끌고가는 대로 다 맡겨도 좋아요. 그리고 당신은 갈림길에서 원하는 방향을 제시하면 되고요.”
“그래도… 마크가 저에게 너무 과분한 것 같아요.”
“그런 생각 말아요.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잖아요. 끝이 막다른 골목인지 낭떨어지인지 몰라도 같이 걸어가면 괜찮을 거예요. 내가 지켜줄게요. 그정도는 할 수 있어요. 당신이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꽤 유능한 사람이거든요.”

마크의 말이 바로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 사람이 자기한테 진심이라는 것은 느껴졌어. 헤어지기 전에 마일스는 용기를 내서 마크와 포옹했어. 남들이 보기엔 그냥 친구들끼리 인사로 보일 법했지. 금방 떨어지려고 했는데 마크가 갑자기 팔을 한 번 더 당겨 안았어.

“당신한테서 내 냄새 나는 거. 좋네요.”

마일스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마크가 크게 웃었어.

“진심으로요. 잘 자요.”

마크가 소리내지 않은 채 마지막에 ‘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어. 마일스는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지. 그가 돌아서는 가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겨우 집 안으로 들어갔어.
이미 잠든 어머니를 보고 마일스는 많은 생각에 잠겼어. 세상에 유일하게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엄마니까 언젠가 이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엄마의 병세가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어.



둘의 생활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어. 마일스는 늘 구두닦이 거리로 출근했고 마크도 부대 일로 바빴어. 그렇지만 일주일에 이틀을 둘은 꼭 붙어지냈어. 산으로, 들로 놀러가자는 약속은 쌓여갔지만 하나도 지켜지지 못해도 괜찮았어. 마일스는 그냥 마크랑 이렇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마크는 마일스에게 지극정성이었어. 그가 일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었지만 전적으로 자신에게 기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귀엽다고 생각했지. 마크는 이제 선을 지킬 줄 알아. 실패해 봤으니까.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해야 자신의 곁에 계속 있어줄지 더 생각하게 되었지. 그런데 정말 마일스는 마크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 원하는 게 없대. 어쩌면 얼마나 많은 것을 마크가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모르는 것 같기도하지만, 그는 정말 자신의 비싼 옷도 구두도 눈에 들어오지 않나봐. 매번 자기 집에 와서도 매번 남의 집에 온 듯 예의를 차리고, 늘 무언가 보답하려고 노력해. 진짜 자기만 보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마크는 자기가 진짜 사랑할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 마일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지금까지 겪은 모든 실패는 종착역에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마크는 그 실패들이 더이상 아프지 않았어. 그저 마일스를 안고 사랑을 속삭이고만 싶어. 그러면 세상에 근심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 구두약 냄새가 풍기는 자신의 연인을 마크는 너무나 사랑했어.



매일 볼 수 없는 사이인 걸 알면서도 마크는 매일 마일스를 보고 싶었어. 일부러 구두닦이 거리를 지나가면서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쓸데없이 구두를 닦으러 가기도 했지. 그런데 일이 바쁘면 전혀 마일스를 만날 수가 없는거야. 심지어 주말까지도. 그래서 마크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어. 두 명 분의 샌드위치와 차가 든 보온병을 들고 마크는 구두닦이 거리로 갔어. 그리고는 마일일스의 의자에서 손님이 사라지자마자 그를 거의 채가듯이 끌고 왔지.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원의 한적한 벤치였어.

“앞으로 점심은 나랑 여기서 먹어요. 오후 열두시 반에 이리로 와요.”

마크가 말했어. 실은 마일스는 조금 당황했어. 마크를 못 본지 조금 시간이 오래 되었거든. 갑자기 나타나서 손에 샌드위치를 쥐여주다니. 주말에도 마크 집에 가서 정말 구두만 닦고 왔는데 갑자기 이렇게 나타난게 반갑기도 하지만 얼떨떨하기도 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한게 있었지.

“잘 지냈어요?”

마일스의 물음에 마크가 가지고 나온 야전용 컵에 차를 따르다가 멈췄어. 실은 너무 바빠서 며칠만에 마일스를 만났는지도 까먹을 지경이었거든. 대답을 기다리는 마일스의 얼굴이 매일 꿈에 나와서 실은 오래 된 것 같지도 않아. 마크는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마일스에게 키스했어. 아주 짧고 확실하게. 놀란 마일스가 마크의 어깨를 밀어냈어. 밀려날만큼 힘을 주지도 않았지만 마크는 순순히 밀려나줬어.

“어때보여요?”
“볼이 수척한데요. 나한테 이런 거 챙겨줄 생각 말고 본인 몸 좀 챙겨요.”
“음음. 어쩔 수 없는 일들 말고 나한테 최우선은 당신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너무 오래 못 만났어요, 우리.”

마일스가 솔직하게 말하는게 마크는 꽤나 마음에 들었어. 이번 주말은 쉴 수 있을거야.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았으니 어질러진 것도 없을거고, 사용인들은 빨리 퇴근시키고 휴가나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마크였어.

“괜찮다면 주말에 우리 집에서 묵는 건 어때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마일스가 입에 넣으려던 샌드위치를 그대로 뱉을 뻔했어. 마일스의 반응을 보고 마크도 아차 싶었지. 그런 것을 염두해두고 한 말은 아닌데 마일스가 굳는 걸 보니까 조금 긴장하는 게 좋은가 싶기도 해. 그리고 마일스가 확실하게 자신을 연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게 또 한편으로는 뿌듯해지기도 했지. 그래, 그런 사이니까. 실은 마크는 제 욕심에 마일스가 겁을 먹고 달아날까봐 많이 참고 있긴 했거든.

“…꼭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건 아니에요. 너무 의식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의식, 네, 알겠, 알겠어요.”

오히려 더 의식하게 만들었나봐. 마크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기려고 입에 샌드위치를 쑤셔넣었어. 그렇게 정적 속에서 둘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마크가 가져 온 바구니를 다시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어. 둘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공원을 벗어날 때까지 걸었어.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에 마크는 마일스가 아직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

“아까 그 제안말인데요,”

마일스가 또 움찔해. 너무 곤란하게 하는 건가? 하지만 며칠만에 만났는데 주말 이틀 정도 붙어있고 싶다고 욕심내는 게… 욕심인가? 마크는 잠깐 마일스의 안색을 살펴 눈이 마주치니까 애써 웃는데 아무래도 긴장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아. 그래서 마크는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어.

“그냥 친구 집에 놀러온다고 생각해요.”
“…그치만 아니잖아요.”

맞아. 실은 마일스가 알겠다고 바로 대답하면 조금 섭섭할 뻔 했어. 마크는 마일스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감췄어.

“어머님은 간병인을 보내도록 할게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런 것 뿐이에요. 그냥 나랑 잠깐이라도 편하게 있는 당신이 보고 싶어요. 아무 걱정없이.”

마일스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어. 마크는 그제야 마음 편히 부대로 돌아가면서 다시 이야기했지.

“내일 점심, 잊지 말고요.”

그것도 알겠다고 마일스가 고개를 끄덕였어.



다음 날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이 찾아왔어. 저 멀리서 마크가 다가오는 걸 보고 마일스가 의자에 앉으려던 손님을 정중하게 거절했어. 그리고 마크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자리를 정리하고 마크에게 달려갔지. 그가 들고 온 바구니를 받아들려는데 마크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어.

“저는 그렇게 배려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매번 마크가 준비한 걸 얻어먹는데 이 정도는 들 수 있어요.”

마일스의 말에 마크가 이상하다는 듯 반문해.

“얻어먹어요? 난 당신을 대접하는 거예요.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당신 시간을 뺏는 것에 더 가깝죠.”

마일스는 조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어. 마크는 정말 많은 걸 자신에게 베풀고 있는걸. 그게 사랑이라는 말로 다 허용이 되는 수준인지 잘 모르겠어.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주변의 연애사에 귀를 기울일만큼 여유롭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냥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면 마크가 웃었어. 아주 행복하게. 그가 웃는 걸 보는게 좋았어. 자신을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며칠 만나지 못해도 다시 만나는 날 그렇게 웃어줄 마크를 상상하면 기다림이 어렵지도 않았어. 아직 그렇게 오래 떨어져있었던 적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대신 마일스는 이 모든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처음처럼 늘 과한 것은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마크는 점점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정도도 못 해줄 정도로 못난 사람이 아니라며 자꾸 더 해주려고만 해. 마일스는 이게 자신을 나태하게 만들까봐 늘 긴장하고 있었지. 그냥 천성이 그랬어. 편안한 삶이라는 게 어떤건지 잘 모르니까. 아니, 다르게 이야기하면 불편하지 않은 삶이라는 걸 모르는 걸지도. 아니, 애초에 이 삶이 불편한 건가? 잘 모르겠어. 마일스가 아는 삶은 마일스의 삶이 전부였거든. 마크의 삶이 자신의 삶에 끼어들면서 많은 것이 변했어. 주말에 왜 다들 쉬려고하는지 마크 덕분에 알게 되었지. 그래서 마일스는 마크가 하는만큼 최선을 다하고 싶었어. 나중은 생각하지 않을래. 마크를 만나게 될줄도 몰랐었잖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그러니까 지금 최선을 다해서 그를 사랑할거야.

“…마크를 만나는 시간은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당신이 바쁠 땐 제 없는 시간까지 내고 싶은 걸요.”

하지만 역시 쑥스러워! 마크의 입매가 환하게 웃는 걸 봐도 볼이 빨개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어. 마일스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걸 마크가 웃으면서 뒤쫓아왔어.

“천천히 가요. 시간까지 당신을 따라서 달려가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어쩜 저런 말도 낯빛 하나 안 바꾸고 하는지. 마크는 정말 신기해. 하지만 이상하지 정말 그런 말 듣는게 싫지 않아서 마일스는 삐져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어. 둘은 속도를 맞춰서 천천히 걸었어. 인적이 드물어지기 전까지 마크는 계속 마일스만 들리게 속삭였지.

“보는 눈이 없었으면 아까 키스했을 거예요. 가능하면 오랫동안 당신을 끌어안고 싶어요.”

그런 말들이었어. 마일스는 못들은 척했지만 마크는 그의 빨개진 귀를 보고 그가 제대로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둘은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 서로의 하루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는 건 늘 재미있었거든. 매일 소풍하는 기분이었지. 그리고 돌아가는 길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랐어. 그러다 마일스는 문득 마크의 온기가 필요하다고 느껴졌어. 그래서 돌아서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어. 마일스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챈 마크가 주저 없이 손을 내어 잡았.지 남들이 보면 그냥 악수하는 것처럼 보일거야. 남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마크가 마일스의 손목을 손가락으로 쓸어냈어. 마크도 마일스와 같은 마음이겠지.

“곧 주말이네요.”

마크가 이야기했어. 마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금 소리 높여 이야기했어.

“늘 가는 시간에 찾아 뵐게요, 레이놀즈씨.”

마크는 마일스를 조금 더 짓궂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어. 구두닦이 거리는 마일스를 시샘하는 시선으로 넘쳤지만 괜찮아. 어머니와 마크가 있으니까 다 견딜 수 있어.



주말에 친구와 함께 놀러가기로 했다는 말에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마일스는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어. 자기가 어머니 옆에 있는 걸 그녀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여태까지 미안해서 말을 못했을 뿐이지 본인 옆에 얽매여있는 아들이 너무 가여웠던거야. 게다가 마일스가 없는 동안 간병인까지 붙여준다니. 그 친구 참 가진 것만큼 아량이 넓구나. 좋은 사람인가보다. 하는 어머니의 말에 마일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어. 마크는 정말 그대로인 사람이니까.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반겨서 다행이었어. 그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는 건 또 별개의 이야기겠지만 언젠가 엄마에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나와 마크를 이해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바람은 속으로 집어삼키고 그저 어떤 친구냐는 엄마의 물음에 마일스는 상투적인 대답만 내놓았어. 직업이 어떻고, 어떻게 만났고, 그런 거. 조금 떨떠름했지만 마일스는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했어.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어떤 아이인지 잘 알아. 부디 그 부자 친구가 이 아이의 선량함을 노리고 휘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신에게 기도할 뿐이었지.



주말이 시작되고 마일스는 간병인이 아침 일찍 도착하는 것을 맞이했어. 그래도 요새 벌이가 좀 나으니까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길에 꽃이라도 한송이 사서 가라는 어머니의 말에 마일스는 알겠다고 했어. 아무래도 그의 가족을 염두해두고 한 말 같았지. 마일스도 무언가 선물이 될만한 걸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꽃… 마크가 좋아할까? 게다가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는 고작 몇 송이 밖에 사지 못할텐데. 마일스는 고민에 빠졌지. 하지만 꽃집 앞에 다다라서는 기분이 좋아졌어. 마크에게 어울리는 꽃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한참 앞에서 결정을 못하고 있는 마일스에게 주인이 물었어.

“연인에게 선물하실건가요?”

마일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지. 사실이잖아. 마크는 자기 연인인 걸.

“그렇다면 붉은 장미만큼 좋은 건 없죠.”

한송이 장미를 마일스의 앞에 가져다주는데 코 끝에 향기가 스치자 기분이 좋아졌어. 마일스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보이며 이만큼이면 몇 송이나 줄 수 있는지 물었어. 주인은 마일스를 가만히 보다가 일곱송이의 장미를 꺼내서 가시를 손질해서 내밀었어.

“오늘 당신만큼 당신의 연인도 운이 좋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두 송이는 내가 선물하는 거예요. 다음엔 없어요.”

인심 좋게 웃는 주인에게 마일스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 장미를 받은 마크의 얼굴을 상상하니 더 기분이 좋아졌지. 짙은 향기가 마크와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리고 마음씨 좋은 꽃 집 주인을 만나 운이 좋았다고 이야기 해 줄거야. 그러면 마크가 또 환하게 웃어주겠지?
마일스는 마크의 집 앞에 서서 노크를 하고 기다렸어. 실은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어. 마크가 거의 바로 문을 열어줬거든. 그리고 뒤에 숨기고 있던 장미를 꺼내서 보여줬어. 꽃을 본 마크의 표정이 묘했어.

“…나 주려고 사 온 거예요?”
“꽃 안 좋아하세요?”
“아니요. 꽃은 선물하기만 해봤지 받아 본 적은 없어서.”

사실 그래. 남자가 꽃을 받을 일이 뭐가 있겠어. 다들 사랑하는 여인에게 선물이나 했지 군인의 사무실에 꽃바구니가 놓이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마크는 조심스럽게 포장도 되지 않은 꽃의 줄기를 받아 들었어. 그리고 마일스를 집 안으로 들였지. 그리고 장미를 한참이나 들여다봤어. 좀 더 쓸모 있는 걸 사오는 게 좋았을까. 마일스는 괜히 심장이 쪼그라들었어. 마크는 오른손에는 장미 일곱송이를, 왼손에는 마일스의 오른손을 잡고 아무것도 놓지 않았지. 장미를 뚫어져라 보다가 깊게 냄새를 맡고는 그대로 마일스를 쳐다보았어.

“…연인에게 꽃을 받으면 이런 기분이군요. 당신에게 진작 선물해줄 걸 그랬어요.”

마크가 마일스의 손을 끌어 당겨서 밀착했어. 둘 사이에 장미가 있긴 했지만 충분히 밀착했다고 할만한 거리였지. 둘의 얼굴 사이에서 장미향이 어지럽게 퍼져나갔어. 서로의 숨이 닿을 것처럼 아주 가까웠지.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마일스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어색하게나마 웃으면서 말했어.

“향기를 맡으니까 당신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이 향기를 맡으면 당신이 생각나요, 마일스.”

연인에게 선물하기 좋은 꽃이라더니 정말 그런걸까? 마크도 싫지만은 않은 눈치라서 마일스가 겨우 안도했어. 그리고 용기내서 그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가 쪽 소리나게 한 번 입맞추고 다시 볼을 대었어. 잡혀있는 손은 어쩔 수 없었지만 자유로운 손으로 마크의 허리를 감아서 안았어. 열흘 넘게 닿고 싶은 걸 참았으니까 이정도는 욕심내도 괜찮지 않을까? 되안아 줄 것 같았던 마크가 오히려 크게 숨을 들이쉬는 걸 느끼고 잠깐 몸을 떨어뜨리고 마크의 표정을 살폈지. 그는 뭔가 고민하는 얼굴이었어 뭐 실수라도 한 걸까? 그냥 뭐라도 그에게 잘해주고 싶고 잘 보이고만 싶은데 연애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이 또 무언가 어긋나게 행동했을까봐 마일스는 늘 마음을 졸였어.

“…그렇게 보지 말아요. 지금 당신을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싶은데 당신이 사 온 장미가 너무 소중해서 아무렇게나 내려 놓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이대로 망가뜨리기도 싫어서 스스로 딜레마에 빠져있으니까요.”

그리곤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어. 마일스가 편하게 웃자 이번엔 마크의 입술이 마일스의 볼에 마구 와서 부딪쳤어 .자기도 모르게 으악 소리를 내면서 마일스가 도망 가려다가 마크의 팔에 붙잡혔지. 어딜가든 내 집 안이니까 도망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래. 마일스는 꺄르륵 소리가 날 것처럼 웃으면서 겨우 마크의 손에서 벗어났어. 그대로 화병이 있을 법한 장으로 가서 주둥이가 긴 화병을 꺼냈지. 금세 마크가 그 뒤로 따라와서 테이블 위에 장미를 내려놓고 마일스의 허리를 다시 끌어안았어.

“어차피 시들어버릴텐데요.”
“그래도 여기에 두고 보는게 좋지 않을까요?”
“이파리가 다 떨어질 거예요. 그러면 내 심장도 같이 떨어질거고.”

정말 못살겠어. 마일스가 화병에 물을 담다가 마크를 바라봤지.

“당신에게 받은 선물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아요.”
“그럼 다른 방법이 있어요?”
“말리면 되죠.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이파리 하나 떨어지지 않고 이 모습 이대로 간직하는 거예요.”
“화병에 두는 거랑 많이 달라요?”

마일스의 물음에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어.

“계속 물을 먹고 꽃이 다 피어버리면 줄기 말고 남는 게 없어요. 그러면 내 사용인들이 그 꽃이 다 피기도 전에 안 보이게 치워버리겠죠. 보기 싫어지기 전에요.”

마일스는 마크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 생각해보니 꽃을 바라보고 산 적이 없었던 것도 같아서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야.

“잘 마른 꽃도 예뻐요. 색은 좀 바라지만 형태는 그대로 유지되니까 언제나 꽃의 모양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다음에 보여줄게요. 저걸 예쁘게 말려서.”

마크의 말에 마일스는 얌전히 화병에 든 물을 다시 쏟아냈어. 그리고 이제 마일스는 마크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대신 다르게 말할 줄 알았어. 마크가 아주 좋아하는 방식으로.

“…기대하고 있을게요.”

마크는 마일스가 보는 앞에서 리본을 찾아 꽃 줄기를 엮어 묶었어. 그리고는 본인의 서재 벽 한 쪽에 걸린 못에 리본을 걸었지. 거꾸로 걸린 꽃을 보고 마일스가 혼자 생각했어. 정말 영원히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걸까? 마크가 다가와서 볼에 입을 맞추는 바람에 생각하기를 멈춰버렸지만.














본햎열린거 넘 늦게알았다
행맨밥 파월풀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