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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30 21:23
갑자기 두사람의 첫만남이 보고싶어서..

뭔가 시니어도 처음부터 슈슈에게 사랑을 주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어느새 정신차려보니 슈슈에게 무한정 사랑을 주는 게 좋음.

슈슈가 막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는 슈슈를 임시로 맡게된 시니어도 나라의 명령이니까 맡은 거지 사실 그 외에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듯.

게다가 시니어 다른 업무도 너무 많은 편일테니 슈슈가 저택에 도착했다는 고용인의 말에도 고개만 끄덕이면서 방으로 잘 안내하고, 간단한 식사나 좀 가져다주면 되겠다 하겠지. 딱히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책임감 있게 최소한의 케어는 해줘야겠다 생각하면서.

슈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선 따로 보고 받지 않았고 그저 문득 생각날 때마다 고용인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기만 할 듯.

그러고보니, 그가 온지 시간이 꽤 되었는데도 얼굴 한 번 못 봤다는 생각이 든 거지. 저택이 워낙 넓다고 해도 자기가 왔다갔다 하면서도 한 번을 못 마주칠 수 있나 싶었음. 슈슈에 대해 알고있는 건 그저 그가 눈한쪽과 손을 잃었다는 것 정도였겠지.

"식사는 잘 하고 있는건가?"
"네, 많이는 안드시는데 그래도 조금씩 먹기는 합니다."
"그래, 서재를 써도 된다고 말해주게. 책이라도 읽으면 좀 덜 무료할테니.."
"네..그런데 방에서 한발자국도 나오질 않으셔서.."

고용인의 말에 시니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음. 사실 슈슈에겐는 모든 게 낯설텐데 저택의 구조도 제대로 안알려주고 무책임하게 방치했나 싶었음. 아직까지 시니어는 일 때문에 바빠서 슈슈 얼굴도 못 본 상태니까..

인사나 할 겸, 집에 대해서도 알려줄 겸 모처럼 시간이 난 틈에 시니어가 슈슈의 방으로 향하겠지. 그리고 그 문 앞에서 왜인지 모르게 좀 망설였을거야. 이 문 너머의, 바로 그 유명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어떤 사람일까 긴장도 되고.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천히 문이 열리겠지. 뒤의 창문에서 스며드는 옅은 햇빛이 살짝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물들이고 있었고 깨끗하고 하얀 셔츠깃 사이로 고운 살결의 목덜미가 보였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니어의 호흡을 멈추게 한 건 슈슈의 강인하면서도 깨질듯한 유리처럼 빛나는 녹안이었겠지. 시니어는 멍청이라도 된 것 처럼 그자리에서 멍하니 서있었는데, 슈슈는 제 앞의 남자를 보자마자 이 저택의 주인이자 카잔스키가의 가주라는 것을 알았음.

"...토마스 카잔스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니. 시니어는 제 이름을 부르는 슈슈의 목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한채 그저 슈슈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기에 바빴겠지. 결국 슈슈가 다시 한 번 시니어에게 말을 걸었음.

"미안합니다..먼저 인사드려야 했는데 몸이 계속 좋질 않아서.."
"...나야말로 제대로 얼굴 한 번 보여주질 못했군."

다시 침묵이 이어지자 슈슈가 방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문을 열었고 시니어는 여전히 뭐에 홀린 사람처럼 슈슈에게서 눈을 못 떼며 방안으로 들어갔음. 슈슈가 의자를 빼어 시니어를 앉히고 마침 아직 식지 않은 차를 찻잔에 따라서 시니어에게 건넸음.

"아직 저도 입은 안댔으니 드셔도 됩니다."

슈슈가 아주 옅게 웃었는데 시니어는 그 모습에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음. 무슨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이렇게 정신못차리는 스스로의 모습에 시니어는 부끄러움을 느꼈겠지.

"좀 지낼만은 하시오?"
"이것저것 신경써주신 걸로 전해들었는데, 덕분에 편하게 지냅니다."
"내가? 오히려 제대로 챙겨준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안절부절 못하는 시니어의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슈슈는 또 한 번 미소를 지었겠지. 슈슈도 시니어의 모습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미국에 발을 딛은 이후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그가 얼마나 얼음장같고 가차없는 사람인지를, 대대로 이어지는 카잔스키가의 군사 통제권과 그가 미국에서 가지는 위치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음.

날카로운 빙하같다던 남자가 이런 모습을 가진 사람일줄은.

"옷도 일부러 자극이 덜하도록 실크로 골라주었다고 하던데요."
"내가...? 그랬었군."
"눈 한쪽이 안보이니, 안보이는 방향으로는 가구나 위험한 물건을 놓지 말라고도 했고.."
"...고용인이 그러던가?"

슈슈가 고개를 끄덕였음. 시니어는 사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 나름대로 슈슈를 신경을 써줬다는 사실에 안심했음.

시니어는 제 손에 쥐어진 따뜻한 찻잔의 온기를 느끼며, 슈슈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슈슈는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천천히 시니어에게 다가와 시니어 손의 찻잔을 도로 가져갔음.

"독같은 걸 타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슈슈의 세손가락이 찻잔을 부드럽게 감싸더니 이내 슈슈의 입술새로 찻물이 한 입 들어갔음.

"고용인에게 찻잔을 하나 더 달라고 하는 게 좋겠어요."
"아니 괜찮소."

시니어가 부자연스럽게 벌떡 일어나 다시 슈슈 손의 찻잔을 뺏어가더니 벌컥 그것을 들이켰지.

"당신을 의심해서가 아니라..내가 지금 좀 당황을 해서."

아니 당황은 포로 상태인 자기가 해야지 그 누구보다도 당당할 카잔스키가의 가주가 당황할 일이 뭐가 있을까.

"추태를 보인 거 같아 미안하군."

시니어는 혹시라도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고용인을 통해 얘가하라는 말을 남기곤 허둥지둥 방을 떠났음. 문 너머로 펄럭이며 사라지는 검은색 로브 끝자락을 보며 슈슈도 약간 놀란 모습을 감출 수 없었지.

혹시라도 지금 내 모습 때문에 그럴까.

괜히 제 눈과, 손이 없는 팔과, 세손가락밖에 남지 않은 다른 손을 만지며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말이야.

그런 슈슈의 마음을 모른채 시니어는 방에 돌아와서도 한참 슈슈를 생각했고 잠에 들면서도 (결국 잠에 들진 못했지만) 슈슈를 생각했고 아침 햇살이 창문을 두드릴때도 슈슈를 떠올렸음.

지금은 자고 있을까? 밥은 뭘 먹었을까? 그러고보니 못먹는 음식이 많은데 얘기도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날이 좀 추워졌는데 방이 추운 건 아닐까. 아직 몸이 아프다 그랬는데 그러면 의사라도 불러야했던 건 아닐까?

결국 24시간도 채우지못하고 시니어는 다시 슈슈의 방을 찾아갔음.

그런데 무슨일인지 닫혀있던 슈슈 방의 문은 살짝 열려져있었겠지. 마치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슈슈는 아직 몸이 좋지 않은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채로 책을 읽고 있었음. 아마 고용인이 아직 서재 위치를 모르는 슈슈를 위해 몇 권 뽑아다 가져다준 모양이었음.

"좋은 아침입니다."

슈슈가 살짝 웃었고 시니어는 다시 주책맞게 뛰는 제 심장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슈슈의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았음.

"아직..저택 구조에 대해 알려준 적이 없었더군."
"아..."
"그래서 당신만 괜찮다면 좀 알려주고 싶은데."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스터 카잔스키."

슈슈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얘기했지만 시니어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음. 이대로 돌아가봤자 또 어제처럼 하루종일 슈슈 생각에 일도 제대로 못 할 거 같았거든.

"나를 위해서일세."

슈슈 못지않게 단호한 시니어의 말에 슈슈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이불을 걷고 일어났고 살짝 휘청이는 슈슈를 부축하며 시니어가 복도로 나왔음.

시니어는 슈슈를 옆에 끼고 저택에 있는 수많은 방들과 서재들을 하나씩 보여주었겠지. 그리곤 제 집무실까지도 보여주었음. 슈슈는 한사코 안들어가겠다 했지만, 내가 뭐 안에 대단한 걸 둔 것도 아닌데 못보여줄 이유가 없다며 시니어도 고집을 피웠겠지.

복도와 복도를 오고다니며 시니어는 슈슈에게 질문을 퍼부었음.

"못 먹는 음식은 있소?"
"딱히 없는 거 같습니다."
"좋아하는 건?"
"...달달한 건 입맛에 잘 맞더군요."
"알았소. 내가 혹시 못챙기더라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고용인에게 얘기하시오. 몸은 어떻소?"
"처음 왔을 때 보다는 괜찮아졌습니다."
"의사가 내 검진 때문에 주기적으로 오는데, 그때 당신도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소."
"..."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저택 뒷문과 연결된 정원이었는데, 정원은 정원사에 의해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지만 막상 시니어는 일에 바빠서 제대로 와본 적 조차 없었겠지.

날이 좋아서 정원의 꽃들과 나무는 생생하게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고 슈슈는 그것을 어느새 한없이 눈에 담고 있었는데, 그런 슈슈를 눈에 담는 것은 시니어였음.

"정원이..마음에 드나보오."

슈슈는 고개를 끄덕였고 시니어는 속으로 정원사에게 일러 정원을 더 가꾸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음.

"정원은 당신 마음대로 쓰시오. 나는 잘 오질 않으니.."
"..고맙습니다."
"의자가 따로 없어서, 내가 내일 벤치를 좀 가져다 놓으라고 얘기를 하겠소."
"...."
"지금 방은 정원에서 멀텐데 당신만 괜찮다면 정원 가까이로 방을 옮겨도 괜찮겠군."
"...."
"화병도 아마 저택창고에 많이 있을거요. 어머님이 꽃을 좋아했어서..그것도 내일 좀 꺼내놓으라고 하겠네."

여전히 말이 없는 슈슈에 시니어는 초조하게 슈슈의 대답을 기다리며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아름다운 녹안을 내려다보았음. 슈슈는 정원 너머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 하더니 이내 저를 바라보고있던 시니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음.

슈슈도 몇 번을 망설이면서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조용히 얘기하겠지.

"카잔스키..타국의 포로에게 너무 과한 친절을 베풀지 마십시오"

어쩐지 슬퍼보이는 그의 눈에 시니어는 심장이 아래로 내려앉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슈슈의 옷자락을 붙잡았음.

"내가 당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그리고 고작 애꾸에 손도 없는 포로에게 잘해줘도 당신이 얻을 것은 없으니."

짓씹듯 말을 뱉으며 슈슈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 차라리 당신이 나쁜 사람이었으면, 사람들이 말하던대로 날카로운 빙하같은 사람이었으면..왜 당신은 나에게는 그런사람이 아니라서 나를 단 이틀만에 뒤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것인지.

"그러게 말이오."

계속 슈슈에게 눈을 떼지 않던 시니어의 눈이 그제야 슈슈를 떠나 정원 이곳저곳에 머물렀음. 이제는 반대로 슈슈의 흔들리는 눈이 시니어를 좇았음. 노을빛에 그의 금발이 주황색을 머금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고 잘생긴 이목구비를 따라 햇빛이 흘러내렸지. 모든 걸 통과시켜 버릴 듯한 옅은 회색 눈이 유리알처럼 빛났음.

"서로 얼굴 본 지 이틀만에 이런얘기하는 게 미친사람처럼 보일 순 있겠지만-"

시니어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슈슈에게로 시선을 돌렸음. 괜히 저릿해지는 손끝에 굳어버린 건 슈슈일거야.

"약점이든..포로든..과한 친절이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겁먹지 말라는 것일까, 시니어가 한껏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어느새 흐트러져 내려와 슈슈의 눈가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깃털이라도 만지듯이 아주 조심스레 쓸어올려주었음.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에게 다가가는 나를 막을 사람은 없어."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외에는. 슈슈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놀란 모습으로 서있다가 이내 시니어의 뜨거운 시선을 피했음.

"미친사람처럼 보이긴 하는군.."

중얼거리는 슈슈의 말에 시니어의 웃음이 터져버리고 슈슈는 시니어의 눈길을 피해 애꿎은 정원의 꽃들만 노려보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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