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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9 00:50
재업

아이의 몸이 펄펄 끓었다. 딘은 보기 드물게 당황한 모습으로 연신 그로구의 주위를 서성였다. 애들은 아플 때 뭘 어떡해야 하지? 지나치게 당황한 탓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로구 역시 딘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그에게 손을 뻗으며 칭얼거리다가도 숨을 죽이고 그의 눈치만 보았다. 귀를 축 늘어뜨린 채 눈만 간신히 뜨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또 미어졌다. 일단 어디라도, 뭐라도... 딘은 눈에 보이는 옷가지들을 전부 요람에 쑤셔넣으며 문 밖으로 나섰다.


"아이 종족이 어떻게 되죠?"

두꺼운 안경을 쓴 의사는 한참이나 그로구를 훑어보았다. 그 물음에 딘은 연신 쏟아내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어쩔 줄을 모르는 딘을 달래듯 헛기침을 했다.

"뭐, 종족이 어떻든. 애들이 열이 나는 게 다 비슷비슷해요."
"무슨 이유입니까?"
"아무 이유도 없어요. 안 아프고 크는 애가 어딨습니까. 그러니 보호자 분도 너무 걱정 마시고요. 이런 건 그냥 열 좀 식히고 하룻밤 자면 싹! 알겠죠?"

의사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위로였지만 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애 몸에서 김이 나는데, 새싹같던 피부가 벌겋게 죽어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허, 이렇게 생긴 종족은 본 적이 없는데..."

의사의 혼잣말이 딘의 귀를 날카롭게 찔렀다. 딘은 조용히 혀를 깨물며 치미는 불만을 꾸역꾸역 삼켰다. 이제와서 누구를 탓하겠나. 다 그의 잘못이었다. 루크의 스승이 그로구와 같은 종족이라고 하던데 그때 좀 자세히 물어볼걸. 좀 더 찾아볼걸.

"차가운 수건으로 땀만 계속 식혀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죽을상으로 있지 마시고. 그러고 있으면 애도 불안해서 못 쉬어요."
"알겠습니다."

딘은 힘주어 아이가 잠든 요람을 끌어당겼다. 의사의 말이 맞았다. 그가 정신을 차려야 했다. 루크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 딘. 레아에요. 사람들한테 물어봤는데 찬 수건으로 계속 온 몸을 닦아주면 된대요. 두어시간 지나면 열도 좀 떨어질 거라네요. 루크는 아직도 연락 없어요? ]
"모레쯤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굳이 말하진 말아 주십시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 어떻게 그래요. 애인 자식이고 자기 제잔데! ]
"그래도요. 제가 잘 보고 있겠습니다."
[ 그런 뜻이 아녜요. 휴...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라도 꼭 연락하기에요. 꼭! 한에게도 말해둘게요. ]
"감사합니다."


창 너머로 방안을 물들이던 해마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여전히 열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딘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땀을 식혀주는 것뿐이었다. 혼곤한 정신속에서도 그로구는 기꺼이 냉기를 반겼다. 차가운 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바람에 한참을 애먹기도 했다. 딘의 맨손은 계속 얼음물과 아이의 몸을 오간 끝에 하얗게 질려있었다. 늘 갑옷에 싸여있던 손가락이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편이 더 나았다. 아이의 고통을 나눌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아파야 마음이 좀 편했다. 방안은 춥지도 덥지도 않았지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자꾸 가슴이 시렸다. 지친 몸은 쓰러질라 치다가도 바람이 문고리를 치는 소리에 퍼뜩 촉각을 곤두세웠다. 꼭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땀에 젖은 등이 식어가자 혼자라는 게 더 사무쳤다. 늘 등 뒤에서 껴안아 오던 팔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아서.
루크는 언제쯤 올까.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짙은 어둠이 아주 조금 걷힐 때가 되어서야 겨우 그로구도 열이 내렸다. 혹시나 차가워진 손 때문에 잘못 판단했을까봐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손끝에서부터 팔, 뺨과 이마까지 차례로 대본 후에야 딘의 긴장도 풀렸다. 신선한 공기가 간절했다. 딘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담요도 빈틈없이 눌러준 후 요람 뚜껑을 닫았다. 

창문을 활짝 열자 새벽공기가 그의 얼굴, 목, 옷과 피부 사이 빈 공간으로 쏟아졌다. 이 집에서 창문을 여는 건 늘 루크의 몫이었다. 딘이 오랫동안 크래프트에서만 산 탓에 창문이 열리는 걸 종종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딘은 창문을 열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루크가 지금 그의 곁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걱정 아래로 눌려 있던 서글픔이 조금씩 흘러나와 딘을 적셨다. 아주 오래 전, 기억도 희미한 어렸던 그때처럼.


딘은 창틀에 기대 앉아 오래된 멜로디를 불러보았다. 그가 가장 깊고 안전한 곳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 그의 보호자가 불러주던 노래였다. 기억 한 구석에 묻혀 가사도 음정도 분명하지 않은 그 노래. 늦은 밤 자는 척 눈만 꼭 감고 있던 그에게 모르는 척 불러주던 자장가. 그날처럼 눈을 감고 있으면 누가 와서 내 머리를 쓸어줄까. 좋은 꿈을 꾸라고 가슴을 토닥여 줄까. 기억나지 않는 이 멜로디의 끝을 이어줄까.

한마디씩 부를 때마다 밤공기 사이로 흩어지는 음악이 아쉽고 아까웠다. 딘은 희미한 멜로디에 맞춰 그를 다독이던 느린 손길을 떠올려 보았다. 꼭 들리는 것처럼 생생한 그 손길. 그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딘."

그를 부르는 것처럼.

닫혀있던 딘의 눈동자가 빛을 되찾은 순간 그가 간절히 원했던 단 한 사람이 보였다. 차마 기대하지 못했던 유일한 바람이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바람 냄새를 잔뜩 묻힌 채로 그의 사랑이 중얼거렸다. 어느새 맞닿은 가슴 너머로 엉망으로 쿵쿵대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딘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조용히 잊혀져 가는 멜로디를 다시 불러 보았다. 귓가에 울리는 거센 심장소리가 천천히 잦아들 때까지. 그래서 그가 기억하는 자장가의 끝을 이을 수 있을 때까지. 

끝내 따뜻하고 단단한 품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허밍이 끝나지 않는 노래가 되었다. 그제서야 딘은 지친 몸을 기대어 잠들었다. 웅크려 안긴 품 위로 느린 손길이 그를 토닥여 주었다.

길고 외로웠던 불면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