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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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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을 뒤로하고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허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빼입고 배질 웨더로 향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아버지와 함께 갔어야 하는 자리지만 요새 급격히 몸이 안 좋아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자 나서야 했다. 
 
혼사를 논하는 자리에 부모 없이 본인만 가다니... 허니는 실소가 나왔다. 형들이나 누나였어도 그랬을까? 아닐 것이다. 지팡이를 짚든 하인들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든 어떻게든 밖을 나섰겠지. 심드렁한 얼굴로 삐딱하게 앉아있던 허니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혼사고 뭐고 인생 자체가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데 이제 와서 이런 것에 마음 상하기에는 사치였다. 
 

 
"아~지루해."
 

 
내 인생아 어디로 흘러가니.
 
 
 
 
 
 
 
 
 
 
 
 
 
 
 
 
 
 
 
 
 
 
 
 
"반갑습니다, 레이디 튜크스베리."
"반가워요, 미스터 비."

 
 
그의 어머니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내빈실에 앉아 기다리던 허니는 뜨겁게 김이 오르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의 삼촌 웜브럴 튜크스베리 경이었다.
 

 
"부친께서 빨리 쾌차하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부득이하게 혼자 오게 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표정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닌 거 같은데. 하긴 이런 집안에서 첫 혼사 얘기부터 이렇게 돼버렸으니 심 상하겠지. 허니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유감을 표했다. 

 
 
"거처에 대해 생각해 둔 곳이 있나요?"
"네?"
 

 
그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허니는 눈을 꿈벅 거리다가 뚫어져라 날아드는 시선에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아, 저택. 저택 말씀이시죠. 아니 아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불과 며칠 전이라서..."
"그렇죠. 내가 너무 서둘렀군요."
"아니요, 당연히 걱정하실 일이죠. 그건 함께 논의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찻잔을 먼저 내려놓은 웜브럴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허니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빨랐지만, 기민한 허니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자네가 이곳에 들어와주었으면 하네."
 

 
아 그건 또 신박한데. 데릴 사위 뭐 그런 건가. 하긴 배질 웨더인데 뭘. 
 
허니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쪽 집안에서는 당연히 우리 아이를 들이려고 하겠지만 영 내키지가 않아서 말이네."

 
 
다소 오만하고 상대를 밑으로 보는듯한 말투. 허니는 그것이 자신의 집안을 향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후작과 남작의 격이 차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허니의 출생과 배경일 것이다.
 

 
"아니면 아예 거처를 따로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네만."
"웜브럴,"
"아뇨, 형수님. 어차피 언젠가 할 얘기가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지금 바로-"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허니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지레짐작했던 일이긴 하니까 놀랄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너네 집안에 우리애를 차마 들여보내지는 못하겠으니 아예 밖에 따로 자택을 구하거나 네가 들어와서 살아라- 이거잖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말인가요?"
"후작과 대화해보겠습니다. 그도 원한다면."
"부친께서 탐탁지 않아 하실 텐데요."
"중요한 건 우리 두 사람 의견이니까요."
 

 
그러니까, 허니 비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니 만약 우리 둘 다 싫다 하면 더 이상 강요하지 마라'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 집안에 고개를 수그리고 납작 엎드려야 하는 처지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아는 허니 비지만 약간의 성질머리는 보여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노예 취급은 싫거든.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찻잔을 들어 식어버린 차를 목으로 넘겼다. 처음 온 사람들이라면 기가 죽을 만큼 웅장하고 넓은 내빈실에 앉아 마시는 고급차는 맛이 끝내줬고 허니 비의 속은 생각보다 조금 더 쓰라렸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미안해요,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는데. 너무 실례했네요."
"괜찮습니다."

 
 
상원 의원의 신분으로 의회에 출석했던 튜크스베리는 오전이 지나 약속시간인 점심때가 될 때까지도 오질 않았다. 아미 의회 회의가 길어져서 그런 거라고 다들 알고 있었고 그게 사실이었지만 하필 오늘 같은 날이라니. 

 
차만 벌써 3잔째 마셨더니 이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허니 비는 한숨을 내쉬지 않으려고 잠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봐. 아버지한테도 바람맞고 약혼자한테 바람맞고. 장하다 허니 비... 

 
저택 문 앞에서 배웅을 받고 나온 허니는 대문 앞에서 기다리는 알파드와 마부에게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거렸다.
 

 
"손은 내리세요, 좀. 아직 보는 눈이 많다고요, 도련님."
"아아~ 알겠어."
"질 만나고 오셨어요?"
"아니. 차만 3잔 마시고 왔는데?"
"네?"
"의회 회의가 길어지나 봐."
"세상에. 바람맞으신 거예요?"
"뭐, 아버지 일도 있으니까 맞바람이라고 치자. 암튼 나 배고프니까 빨리 가자고. 식사를 권유하긴 했는데 어우.. 거기 더 앉아있다가는 기절할 거 같아서 얼른 나왔지."
"잘하셨어요. 얼른 타세요."
 

 
갑갑한 타이를 약간 느슨하게 풀어헤친 허니는 마차에 올라타며 곧바로 늘어지듯 앉았다. 옆에서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 그래도 예쁜 얼굴 못 봐서 아쉽네."
 
 
 
 
 
 
 
 
 
 
 
 
 
 
 
 
 
 


 
 
허니가 탄 마차가 배질 웨더 정문을 빠져나가고 갈래 길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마차가 있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마차는 갑자기 급정거했고, 안에서 내린 이는 허니가 반나절 동안 기다리던 튜크스베리 후작이었다. 
 
 
그는 비 가문이 인장이 찍힌 마차가 멀어져 가는 것을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침에 시작했던 회의는 끝날 줄을 몰랐고, 약속시간이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난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급히 달렸는데 간발의 차이로 놓쳐버린 것이었다. 
 

 
"아, 정말..."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미안함과 민망함이 동시에 들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제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져 버린 마차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고. 그는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쫓아가야 할까 고민했지만 지금 가봐야 뭘 하겠나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마차에 다시 올라타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모자와 재킷을 받아 챙기던 집사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공손히 건넸다.
 

 
"이건 뭐지?"
"좀 전에 떠나신 미스터 비께서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네."

 
 
받아든 것은 두 팔 안에 가득 들어차는 중간 크기의 나무 상자였다. 심플하기 그지없는 상자는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방으로 걸어가며 조심히 상자를 열어보았고, 안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열자마자 확 펴지는 향기와 함께 눈에 들어온 것은 꽃과 메시지 카드였다. 그가 들고 있는 상자 안에는 노란 안개 꽃이 가득 차있었다. 마치 방금 넣어놓기라도 한 듯 시들어짐 없이 싱그러웠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깜짝 놀란 그는 주변을 살피며. 꽃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워져있는 카드를 살살 빼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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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튜크스베리 경.

 
저번에 말했던 꽃입니다.
 
그때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때 당신의 반응으로 보아(물론 제 짐작입니다만) 꽃을 싫어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이렇게 준비해보았습니다.
 
많은 꽃들 중에 하필 안개 꽃인 이유가 궁금하신가요?
 
장미는 너무 식상하잖아요.(물론 농담입니다)
 
첫 번째는, 당신에게 이 꽃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름다운 꽃을 가능한 만큼, 품안 가득히 당신에게 안겨주고 싶어서.
 
안개 꽃에는 꽃말이 여러 가지죠. 
 
노란 안개 꽃은 기쁨과 성공입니다. 
 
상원 의원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때, 앞으로 당신에게 기쁨과 성공이 가득한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럼, 이만.
 
From . 비 
 
 
 
 
 
 
 

 
그 선물이 튜크스베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허니 비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코끝에 맡아지는 향기는 근래에 맡아본 어떤 꽃향기보다 더 향기로웠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어린 영주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지나치게 날이 좋은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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