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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9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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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권력을 가지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았다. 누군가를 올려다 보는 일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을 첨아야 하는 일 없이. 그러니 자신의 아들 쿠로사와 유이치도 그런 인생을 살기 바랐다.

“어다치는 손도 곱구나.”

어머니가 덥썩 아다치의 손을 잡았다. 눈에 띄지 않게 깜짝 놀란 아다치는 또 눈만 도록도록 굴리며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만 했다. 쿠로사와는 항상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와 자신의 사랑인 아다치를 뿌듯하게 보고 있었다.

“이게 그 반지니?”
“맞아요. 알아보시네요. 어머니.”
“어머. 세상에. 너무 예뻐.”

바람처럼 하늘거리는 목소리는 한번도 울어본 적 없는 것처럼 해맑았다. 아다치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다시 허벅지 위로 올려놨다. 자신이 인형이라도 된 것 같았다.

“정장은 골랐어?”
“저와 같은 것으로 입으먼 돼요.”
“남성체 오메가라 그런지 드레스 고르는 데 시간 아껴서 좋구나.”

아버지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는 원래 술을 좋아하지만, 몸이 나빠진 이후엔 손에도 대지 않았다. 그걸 아는 어머니는 일부러 집에 있는 모든 술과 술병을 버렸다. 쿠로사와가 회사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것도, 타니가 본가에 더 자주 들리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네 아버지를 만난 게 벌써 10년도 넘었구나.”
“아, 네…….”
“그동안 연락 한 번 없더니. 대신 아들을 보냈군.”

아버지의 말투엔 서운함이 섞였는데,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가장 빛났던 순간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때였다. 위기의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 순간마다 솟아날 구멍은 꼭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아다치의 아버지였다.

“네 아버지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니 이 결혼 허락한 거다. 명심하거라.”
“아버지.”

쿠로사와 역시 아버지를 닮았다. 특히 자신의 것이 위협받을 때 그 성격이 빛을 발한다. 쿠로사와는 매서운 눈빛으로 아버지를 쳐다봤고, 아버지는 스윽 아다치를 쳐다보았다. 똑똑해 보이지는 않아도 참 고운 오메가였다. 쿠로사와의 짝으로 매우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타니는 만나 봤어?”

쿠로사와가 아다치의 손을 잡았다. 고집스런 아버지는 아들의 고민 따윈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다과 하나를 아버지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왜? 엄밀히 따지자면 반쪽은 네 동생 아니냐?”

집안 사정 이야기다. 아다치도 다 알고 있었다. 어렸을적 쿠로사와는 갑자기 생긴 동생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다치는 쿠로사와의 동생과 함께 놀고싶다고 했지만, 쿠로사와는 나중에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만 남기고 빠르게 사라졌었다. 여름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아다치는 혼자가 되었다.

“너희 결혼하면 료헤이에게도 쿠로사와 성을 줄 생각이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쿠로사와는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이 집안 문제에 대해 할 얘기가 없던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잡힌 손을 계속 꼼지락댔다. 아버지는 굉장히 불퉁한 표정으로 쿠로사와를 보고 있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져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집안에 경찰 하나 있는 것도 좋잖냐.”
“그래요.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상관 없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그 얘기 하려고 불렀다.”

아버지의 입에서 먼저 타니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다. 쿠로사와는 이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그 일’을 언급하는 것은 쿠로사와의 계획에 없었다.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아버지의 허벅지를 톡톡 쳤다. 아주 간단한 손짓이었는데도 애교가 묻어 있었다.

“당신도 참. 그 얘기만 하려고 부른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서 어머니는 소파 옆에 있던, 아다치가 미쳐 보지 못한 작은 쇼핑백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 브랜드의 팔찌였다. 팔찌는 무겁고 빛나서 아다치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쿠로사와가 아다치의 손을 어머니께 내밀었다. 어머니는 아다치의 왼쪽 손목에 직접 팔찌를 채워주었다. 아다치의 허락은 필요 없었다.

“아다치.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란다.”
“이, 이런 건, 아, 안 주셔도……!”
“아니야. 내가 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어머니는 아다치의 하얀 손등을 몇 번이나 쓰다듬은 다음에 아다치와 눈을 맞췄다.

“우리 유이치를 잘 부탁한다는 뇌물이야. 항상 곁에 있어달라는 뜻으로.”

부드러운 미소에 감춰진 가시같은 말은 아다치를 쿡쿡 찔렀다. 그런 아다치가 그저 소중하기만 한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어깨를 끌어안아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주었다. 어머니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자신의 아들이 진짜 사랑을 찾은 것 같아서.

“료헤이는 좀 어때?”
“그 녀석이야 항상 똑같죠. 그러니 그만 얘기…….”
“혹시나 형수에게 함부로 못 하게 네가 잘 가르쳐라. 그 여자가 타니를 포기한 건, 원래 그런 여자라서 그런 거니까.”

눈만 깜빡이던 아다치가 고개를 들었다.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손을 꼭 붙잡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당연히 알아서 잘 해요.”
“그 녀석을 너무 놓아줬어. 이젠 좀 가르쳐야겠다.”
“알았다구요. 아버지.”
“이제 알겠냐? 키요시. 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료헤이는 여기 없었을 거다.”

아버지는 아다치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쿠로사와가 재빨리 아버지의 말을 잘랐고, 어머니는 새아가 앞에서 좋은 이야기만 하자고 했다. 불편한 티타임이 더 진행되었다. 아다치는 아버지의 말을 계속 곱씹으며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팔찌가 팔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무슨 뜻이야?”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쿠로사와는 집요하게 아다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다치는 멍하니 창밖을 보며 물었다. 쿠로사와는 턱근육이 꿈틀대도록 이를 물더니 대답을 회피했다.

“집에 가서 쉬자. 쉬고 내일 이야기 하자. 응?”
“지금 알고 싶어. 타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입에서 나오는 타니 료헤이 이름이 그렇게 질투날 수가 없었다.

“너는 몰라도 돼.”
“아니야. 나랑 상관 있는 일이잖아. 유이치.”
“키요시. 이제 그만.”
“혹시.”

전혀 맞지 않아 조각으로만 존재했던 사실들이 하나 둘 모여 그림을 이루기 시작했다. 아다치는 정말 싫지만, 사실이 아니었으면 했지만. 입밖으로 꺼내기도 무서운 말을 뱉어냈다. 쿠로사와가 차를 세웠다. 아다치는 막힌 숨를 몰아쉬며 붉어진 눈으로 쿠로사와를 뽑고 있었다.

옛날에. 아다치의 아버지는 멀리 일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학교도 떠나 방학 내내 집에 돌아오지 못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대신 쿠로사와가 별채에 왔다. 어린 아다치는 아버지의 출장과 쿠로사와의 등장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몰랐다. 시간이 많이 지나 어른이 되어 들은 소식에 ‘설마’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버지는 청렴하고 바른 분이었기에 진실을 파헤칠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타니의 엄마……. 엄마를……. 우리 아빠가…….”

쿠로사와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기사 한 줄이 떴다. 무명가수 A씨가 갑작스런 이민으로 활동을 중단했다고. 그녀에게 돈을 빌려줬던 소속사와 주변 동료들이 소송을 걸었다고. 뉴스를 보던 아버지는 당장이라도 화면을 끌 것처럼 리모컨을 들었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다치는 아버지에게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어 모른다는 대답을 했다. 아버지답지 않게 딱딱한 말투였다.

“키요.”
“설마. 아니지? 아니지, 유이치?”

아다치가 몸을 돌려 쿠로사와의 옷깃을 붙잡았다. 구슬처럼 동그란 눈물이 바지 위로 뚝뚝 떨어졌다. 쿠로사와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타니 료헤이는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자라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가 작았다. 학교도 성실하게 다니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불량했다. 쿠로사와는 그때도 지금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타니를 찾지 않았다면, 타니는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다치의 아버지가 옳은 일을 한 것이다.

“알고 있었어?”

아다치의 아버지는 옛 동료에게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받았다. 시나리오를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가진 게 많은 의뢰인은 혼외자 자식마저 가지고 싶었고, 그걸 방해하는 것들은 전부 치우고 싶어했다. 시나리오는 섬세하게 짜여야만 했다. 기사. 목격담. 주변 평판과 신용 조작. 아다치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이 복잡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말 안, 안 했어?”
“말하면?”

쿠로사와는 이 방법을 지금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 아다치는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있었다. 더 반항하거나 계속 거부하면 그때 마지막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차가운 쿠로사와 말에 아다치의 표정이 굳었다.

“키요. 타니의 엄마는 타니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어. 그러니 돈을 받고 타니 료헤이를 넘긴 거야.”
“설마. 그게, 그게 진짜야? 약속할 수 있어?”
“진짜야.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셔.”
“하지만 나는, 그것도 모르고. 돌아가라고 해버렸는데…….”

쿠로사와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쿠로사와는 큰 손으로 아다치의 허벅지를 콱 잡았다. 강한 악력에 ‘윽!’하는 소리를 낸 아다치가 쿠로사와의 손목을 붙잡고 떼어 내려고 노력했다. 그럴수록 쿠로사와의 힘은 더 강해졌다. 아다치의 입에서 ‘제발’이라는 말이 나왔다.

“키요. 타니 생각은 이제 그만 해. 네가 신경써야 할 사람은 오로지 나야.”
“유이치. 아파. 그만해!”
“타니 료헤이가 아니었으면, 우린 만나지도 못했어.”

쿠로사와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그러니 아다치와 대화가 될 리 없었다. 아다치는 이제 몸을 비틀어 쿠로사와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쿠로사와는 남은 손으로 아다치의 어깨를 붙잡았다.

“넌 내가 데려왔어. 내 아내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넌 이제 쿠로사와 키요시야.”

이제 곧 닥칠 현실이었다. 그게 아다치의 복잡한 머릿속을 뻥 터트려 주었다.

“그건 싫어!”

아다치가 소리를 질렀다. 쿠로사와는 벼랑끝에 몰린 아다치를 보고 깜짝 놀라 손을 떼고 말았다. 아다치는 차에서 내려 차도를 빠르게 걸었다. 눈물이 차올라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길은 너무 낯설었다. 아다치를 위로해줄 사람도 없었다. 아다치는 빠른 걸음으로 언 도로를 걷다 다리를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발목이 꺾였는데도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마음이 더 아팠다. 아다치는 끙끙대며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키요시!”

아다치를 따라오던 쿠로사와가 바닥에 주저앉은 아다치를 일으켜 주었다. 아다치는 흐릿한 눈으로 쿠로사와를 올려다 보았다. 참았던 서러움이 터져나왔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집애 돌아가고 싶었는데. 이젠 자신이 생각하는 그 ‘집’이 진짜로 존재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쿠로사와의 말이 맞았다. 아다치는 쿠로사와가 데리고 왔다. 곧 가족이 될 테고, 그러면 아다치의 곁에 쿠로사와만이 남게 될 것이다.

“왜……. 나한테 왜 그러는거야…….”

그때가 되면 아다치는 원하지 않아도 쿠로사와에게 기대게 될 것이다. 그게 쿠로사와의 가장 마지막 목표이기도 하다. 아다치가 목놓아 울었다. 쿠로사와는 아다치를 폭 안아주고 살살 달랬다. 아다치도 너무 서러운 나머지 쿠로사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소리질러서 미안해. 키요. 내가 잘못했어.”
“흐으. 윽. 으으. 흐으으…….”
“네 마음도 모르고. 내가 나빴어. 응?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말아줘. 다른 사람은 신경도 쓰지 말아줘.”

나만 봐줘. 나만 생각해줘.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어줘. 그럼 내 전부를 줄게. 쿠로사와는 무서운 말은 삼키고 아다치를 달랠 수 있는 달콤한 말만 했다. 아다치는 서럽게 끅끅대며 쿠로사와의 어깨를 눈물로 적셨다. 팔찌가 너무 무거워서 손을 올릴 수도 없었다. 그럴수록 아다치는 타니에게 사과하고 싶어졌다.









쿠로아다 타니아다 마치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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