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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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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날 이후로 마치다는 조금씩 변해갔어
“케이 이리 와.”
“네 도련님..”
이젠 노부가 부르면 그 옆에 멀뚱히 서있는 대신 쪼르르 다가와 품에 안기는 것 까진 할 수 있었지 물론 목에 팔을 두른다든지 입을 맞추는 대범함 따윈 없이 말 그대로 품에 안겨 있는 게 다였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게 어디야 잘 먹여도 여전히 마른몸이라 한 손에 조금 남는 엉덩이를 꽉 쥐면 화들짝 놀라 튀어 오르는 어깨를 턱으로 누르면서 노부는 설핏 미소 지었어
“요즘은 어때 괴롭히는 사람은 없어?”
“네 도련님 없어요. 다들 잘.. 해주세요.”
저를 도둑으로 의심한 하녀는 왜인지 보이지 않았고 식사때마다 다른 하인들이 저만 보면 멀찍이 떨어졌지만 저를 못살게 굴진 않았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지 혹여 꼬투리를 잡힐세라 눈치를 보는 마치다에 노부는 모른 척 넘어가 주었어 제가 받는 보고에도 별다를 게 없었거든 아랫것들에게 각별히 주의를 주었더니 마치다를 다들 피하는 모양이었지만 친하게 지내는 것보다야 나았으니까 마치다의 작은 거짓말쯤은 관용을 베풀기로 했지
그렇게 차츰 노부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녹아들어 가던 마치다는 시련을 맞이했어
갑자기 주인마님께서 자신을 찾으신다지 뭐야
아무리 제가 도련님의 몸종이라지만 주인마님께서 저를 왜 찾으시는 걸까 제가 어리숙한 몸종인 게 벌써 마님의 귀에까지 소문이 난 걸까 불안한 마음에 오들오들 떨며 안채로 들어선 마치다는 줄곧 바닥에 시선을 둔 채 납작 엎드렸어
그럼 머지않아 쯧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지 당장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눈을 꾹 감았는데 마님께선 뜻밖에 말을 하셨어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구나 고개 좀 들어보련.”
“.. 네? 네.. 마님.”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마주한 마님은 그린 듯 완벽한 모습이셨어 귀한 집안의 안주인에 걸맞은 기품과 위엄이 있으셨지... 도련님은 가주님을 닮으셨나 봐 잠깐 딴생각을 해버린 탓에 화들짝 놀란 마치다가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는데 다행히 화가 나신 것 같진 않으셨어 하지만 여전히 움츠린 자세로 굳어있는 마치다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으신 마님께서 이내 이마를 쥐고 한숨을 내쉬어서 마치다는 다시 납작 엎드리고 말았지
저런 칠칠치 못한 오메가가 대체 왜 좋을까 그녀는 이해가 가질 않았어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성격은 지 아비를 닮은 듯해 어느 날 갑자기 데려온 저 천한 열성 오메가를 제 반려로 삼고 싶다고 하여서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얼마나 요망한 것 이길래 제 아들이 이리 빠졌을까 싶어 불러내 경을 칠 생각이었는데
막상 마주한 오메가는 볼품없이 마르고 눈치만 보는 게 꼭 길에 버려진 새끼 여우 같지 뭐야 그 꼴을 보자니 마님은 왠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어 아무래도 저애는 제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거든
천성이야 더 볼 것도 없고 이왕 불렀으니 그동안 어찌 살았는지 물었는데 횡설수설하면서 들은 이야기는 생각보다 짠하기까지 했어 나 참. 스즈키 가문에서 저런 출신성분도 모르는 열성 오메가 따위를 반려로 들인다면 분명 주변 가문들에 비웃음을 살 일이겠지만 그래도 제 아들이 처음으로 한 부탁이니 기회를 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지
“글 공부요..?”
“그래 읽고 쓸 줄은 알아야 하지 않겠니?”
명색의 도련님의 몸종이니 글을 모르는 건 안된다는 마님의 말에 마치다는 고개를 끄덕였어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하인들 역시 글을 모르긴 마찬가지여서 신경 써본 적이 없었는데 마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왠지 글을 모르는 게 부끄러워졌지
분명 혼이 날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글공부를 하게 생긴 마치다는 그렇게 얼떨떨한 기분으로 안채를 나왔어
그리고 그런 마치다를 기다리고 있는 건 화가 난 도련님이었지
“너 어디 갔다 와?”
“그, 그게.. 마님께서 부르셔서..”
잠시 외출하고 돌아왔더니 텅 빈 서재를 마주하게 된 노부는 한껏 예민해졌어 케이가 돌아오자마자 자초지종을 듣기도 전에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지 마치다는 그런 도련님의 기세에 눌려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고 답하였어
“어머니께 불려갔다고?”
“네에..”
어머니께서 왜 케이를 부르셨는지는 노부가 더 잘 알았어
혹여 안 좋은 말이라도 들었나 싶어 절로 인상이 험악해진 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궁하였는데 예상외의
답을 듣게 되었지 글공부라니 적어도 당장 내쫓으실 생각은 아니신가 봐 제가 일전에 케이를 반려로 맞이하고 싶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유예임을 깨달은 그는 겨우 여유를 찾을 수 있었어 앞에서 울고 있는 케이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오자 노부는 짧은 한숨과 함께 마치다를 안아들었지
얘는 왜 이렇게 겁이 많은지 몰라 내가 꼭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제가 한 짓은 생각지도 않고 노부는 나간 김에 사 온 캐러멜을 케이 입에 넣어주면서 타박했어
“누가 보면 내가 널 잡아먹는 줄 알겠다.”
안채에서 마님이 했던 말을 도련님도 하자 마치다는 기분이 이상했어 그렇지만.. 도련님은 밤마다 저를..
차마 입 밖에 내뱉을 수 없는 생각과 함께 뽀로통 해진 마치다가 말없이 이마를 어깨에 기대자 그 귀여운 짓에 노부는 마냥 좋았지
그렇게 마치다는 마님이 붙여준 글선생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어
내실의 일은 오로지 어머니의 권한이니 케이가 글공부를 하는 것에 노부는 불만을 가질 수 없었지
게다가 제 앞에서 오늘 배운 히라가나 따위를 삐뚤빼뚤 쓰면서 자랑하는 마치다를 보는 것은 그에게도 기쁨이었고 말이야
그런데
“또 혼났어?”
“아, 그게.. 제가 잘못해서..”
절뚝거리는 마치다를 보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어
저도 케이를 혼내는 일이 종종 있다지만 그렇다고 타인에게까지 혼이 나는 걸 보고 싶진 않은데
굳은 표정으로 마치다를 침대에 눕힌 노부는 종아리에 붉은 줄이 죽죽 그어진 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지
날이 갈수록 이렇게 종아리를 맞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어
마치다의 말론 제가 잘못한 것이라 하지만
채 낫지도 않은 상처 위로 회초리를 맞아 엉망인 종아리를 보자 노부는 화가 치밀었지
“.. 죄송해요.. 귀찮게 해드려서..”
제 눈치를 보다 조용히 죄송하다 속삭이는 아둔함이 노부의 기분을 더 상한다는 걸 마치다는 알까 겨우 억누른 감정이 삐죽 튀어나와 약을 바르던 손에 힘을 실어 꾹 누르자 마치다는 화들짝 놀라 튀어 올랐어
이 정도도 못 참으면서 미련하긴 답답한 마음에 노부는 한숨을 내쉬었어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었지
‘이래서 열성 오메가들은 못쓴다니까.’
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었어
마치다는 억울하게도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지 제가 이렇게 멍청할 줄 몰랐거든
매번 외워오라는 단어가 늘어나고 분명 배운 적 없는 글자가 시험에 나왔지만 마치다는 그저 자신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라 여겼어 한 번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 없으니 지금 저를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편파적인지 알지 못했지 무서운 선생님보다도 마치다는 매번 매 맞은 곳에 약을 발라주는 도련님의 눈치를 보는 게 더 버거웠어
제가 글도 제대로 못 배워서 도련님을 귀찮게 만들다니
이런 몸종은 이제 필요 없다고 하시면 어쩌지?
어느새 도련님과 함께 보내는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진 마치다는 노부의 미움을 받는 것이 두려워졌어
계속 같이 있고 싶었지 이게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다에게 도련님은 유일한 안식처였어
—
“어머니 케이타의 글선생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주세요.”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란다. 내실의 일에 주제넘게 나서지 말렴. ”
다짜고짜 찾아와 한다는 소리가 겨우 저것이라니 그녀는 미간은 모았다 풀면서 제 아들을 바라봤어 그 오메가가 생각보다 영악한 구석이 있나 보군그래.
평생 남에겐 관심 한 줄 없이 무감하게만 살아오던 아들이 고작 제 오메가의 글선생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놀라운 일이지만 지금 그녀에겐 탐탁지 않게 보였어
“내실은 어머니의 권한이시지만 그 아이는 제 몸종입니다. ”
“그래서?”
“.. 요즘 밤늦게까지 글자를 외우느라 잠도 잘 못 잡니다. 그런데도 그 애 종아리는 엉망이에요. 제 몸종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어머니께서 그리 명하신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
뜻밖의 말에 그녀는 잠시 침묵했어
전해 듣기엔 그 애가 글공부를 게을리 한대 수업태도가 좋지 않다며 난색을 하는 글선생의 말을 듣고 제 앞에서만 얌전한 척을 했나 싶어 괘씸한 마음에 부러 엄히 가르치라 하였는데 아들의 말을 들으니 그게 아닌 것 같았지 그 뒤로 글선생을 찾지 않았던지라 정확한 정황을 알기 위해선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았어
“너는 이만 돌아가고 그 아이를 데려오렴. 확인할게 있단다.”
케이를 다시 어머니와 독대시키고 싶지 않지만 이미 제가 내실의 일에 주제넘게 굴었으니 노부는 더 이상 맞설 수 없었어 그저 알겠다며 일어났지
—
“그래, 글은 잘 배우고 있니.”
“.. 네.. 네! 마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 선생님께 배우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멍청해서.. 죄송해요.”
계속 혼만 나던 마치다는 다시 마님께 불려오자 덜컥 겁이 났어 기껏 글을 배우게 해줬더니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며 꾸중을 들을 것 같았지
아니나 다를까 제 앞에 종이와 펜을 놓아주시지 뭐야 마치다는 오늘 쳤던 시험지에 수두룩하게 그어지던 틀린 글자들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았어
“겁먹지 말고 궁금해서 그러니 그간 배운 것들을 써보렴. 틀려도 괜찮아.”
“네 마님..”
마치다는 떨리는 손으로 배운 글자들을 써 내려갔어 제발 마님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고작 이것밖에 배우지 못했냐고 하시면 어쩌지 정말 내가 열성 오메가라 그런 걸까 울컥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조금 엉망인 글을 내밀자 마님께선 아무 말 없이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셨어
역시 형편없나 봐 어떡해
“.... 잘하고 있구나.”
“네? 정말요..? 감사합니다. 마님.. 그런데 자꾸 혼만 나서..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뜻밖에 칭찬을 받자 마치다는 눈물이 찔끔 맺혔어
적어도 야단을 치시진 않을 것 같았지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풀린 탓일까 꿇어앉아있던 종아리가 아파져 몸을 움찔거렸는데 불현듯 마님께서 일어나 마치다의 유카타를 걷어 보시는 게 아니겠어 파들 어깨를 튀면서 놀란 마치다가 황급히 종아리를 가려보았지만 이미 마님은 상처를 확인한 후였지
“아무래도 글선생이 조금 과했던 것 같구나. ”
“제가 잘 몰라서.. 그래서.. 죄송해요. 더 잘할게요..”
글씨체가 엉망이긴 해도 짧은 시간에 배운 것치곤 어려운 단어들이었어 그런데도 저 미련한 오메가는 계속 죄송하다고만 했지 그녀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기만 하는 마치다가 보기 싫었어 적어도 노부의 옆자리에 있으려면 가르칠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구나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져 한숨을 내쉰 마님이 단호한 눈으로 마치다를 바라봤어
“케이타.”
“..! 네 마님..”
“네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용서를 비는 건 보기 안 좋구나 고치도록 하렴.”
“네.. 죄, 아, 아니 명심할게요.”
이만 돌아가도 좋다는 말에 후들거리는 다리로 안채를 나오자마자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부가 보였어
익숙한 이를 봐서 그런 걸까 마치다는 눈물이 나오지 뭐야
“흐윽 도련님..”
“왜 그래? 어머니께 혼났어? 응? ”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 마치다는 자연스레 노부 품을 파고들었지
마치다는 마님의 호의를 얻었다!
노부마치
1
그날 이후로 마치다는 조금씩 변해갔어
“케이 이리 와.”
“네 도련님..”
이젠 노부가 부르면 그 옆에 멀뚱히 서있는 대신 쪼르르 다가와 품에 안기는 것 까진 할 수 있었지 물론 목에 팔을 두른다든지 입을 맞추는 대범함 따윈 없이 말 그대로 품에 안겨 있는 게 다였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게 어디야 잘 먹여도 여전히 마른몸이라 한 손에 조금 남는 엉덩이를 꽉 쥐면 화들짝 놀라 튀어 오르는 어깨를 턱으로 누르면서 노부는 설핏 미소 지었어
“요즘은 어때 괴롭히는 사람은 없어?”
“네 도련님 없어요. 다들 잘.. 해주세요.”
저를 도둑으로 의심한 하녀는 왜인지 보이지 않았고 식사때마다 다른 하인들이 저만 보면 멀찍이 떨어졌지만 저를 못살게 굴진 않았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지 혹여 꼬투리를 잡힐세라 눈치를 보는 마치다에 노부는 모른 척 넘어가 주었어 제가 받는 보고에도 별다를 게 없었거든 아랫것들에게 각별히 주의를 주었더니 마치다를 다들 피하는 모양이었지만 친하게 지내는 것보다야 나았으니까 마치다의 작은 거짓말쯤은 관용을 베풀기로 했지
그렇게 차츰 노부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녹아들어 가던 마치다는 시련을 맞이했어
갑자기 주인마님께서 자신을 찾으신다지 뭐야
아무리 제가 도련님의 몸종이라지만 주인마님께서 저를 왜 찾으시는 걸까 제가 어리숙한 몸종인 게 벌써 마님의 귀에까지 소문이 난 걸까 불안한 마음에 오들오들 떨며 안채로 들어선 마치다는 줄곧 바닥에 시선을 둔 채 납작 엎드렸어
그럼 머지않아 쯧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지 당장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눈을 꾹 감았는데 마님께선 뜻밖에 말을 하셨어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구나 고개 좀 들어보련.”
“.. 네? 네.. 마님.”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마주한 마님은 그린 듯 완벽한 모습이셨어 귀한 집안의 안주인에 걸맞은 기품과 위엄이 있으셨지... 도련님은 가주님을 닮으셨나 봐 잠깐 딴생각을 해버린 탓에 화들짝 놀란 마치다가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는데 다행히 화가 나신 것 같진 않으셨어 하지만 여전히 움츠린 자세로 굳어있는 마치다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으신 마님께서 이내 이마를 쥐고 한숨을 내쉬어서 마치다는 다시 납작 엎드리고 말았지
저런 칠칠치 못한 오메가가 대체 왜 좋을까 그녀는 이해가 가질 않았어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성격은 지 아비를 닮은 듯해 어느 날 갑자기 데려온 저 천한 열성 오메가를 제 반려로 삼고 싶다고 하여서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얼마나 요망한 것 이길래 제 아들이 이리 빠졌을까 싶어 불러내 경을 칠 생각이었는데
막상 마주한 오메가는 볼품없이 마르고 눈치만 보는 게 꼭 길에 버려진 새끼 여우 같지 뭐야 그 꼴을 보자니 마님은 왠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어 아무래도 저애는 제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거든
천성이야 더 볼 것도 없고 이왕 불렀으니 그동안 어찌 살았는지 물었는데 횡설수설하면서 들은 이야기는 생각보다 짠하기까지 했어 나 참. 스즈키 가문에서 저런 출신성분도 모르는 열성 오메가 따위를 반려로 들인다면 분명 주변 가문들에 비웃음을 살 일이겠지만 그래도 제 아들이 처음으로 한 부탁이니 기회를 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지
“글 공부요..?”
“그래 읽고 쓸 줄은 알아야 하지 않겠니?”
명색의 도련님의 몸종이니 글을 모르는 건 안된다는 마님의 말에 마치다는 고개를 끄덕였어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하인들 역시 글을 모르긴 마찬가지여서 신경 써본 적이 없었는데 마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왠지 글을 모르는 게 부끄러워졌지
분명 혼이 날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글공부를 하게 생긴 마치다는 그렇게 얼떨떨한 기분으로 안채를 나왔어
그리고 그런 마치다를 기다리고 있는 건 화가 난 도련님이었지
“너 어디 갔다 와?”
“그, 그게.. 마님께서 부르셔서..”
잠시 외출하고 돌아왔더니 텅 빈 서재를 마주하게 된 노부는 한껏 예민해졌어 케이가 돌아오자마자 자초지종을 듣기도 전에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지 마치다는 그런 도련님의 기세에 눌려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고 답하였어
“어머니께 불려갔다고?”
“네에..”
어머니께서 왜 케이를 부르셨는지는 노부가 더 잘 알았어
혹여 안 좋은 말이라도 들었나 싶어 절로 인상이 험악해진 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궁하였는데 예상외의
답을 듣게 되었지 글공부라니 적어도 당장 내쫓으실 생각은 아니신가 봐 제가 일전에 케이를 반려로 맞이하고 싶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유예임을 깨달은 그는 겨우 여유를 찾을 수 있었어 앞에서 울고 있는 케이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오자 노부는 짧은 한숨과 함께 마치다를 안아들었지
얘는 왜 이렇게 겁이 많은지 몰라 내가 꼭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제가 한 짓은 생각지도 않고 노부는 나간 김에 사 온 캐러멜을 케이 입에 넣어주면서 타박했어
“누가 보면 내가 널 잡아먹는 줄 알겠다.”
안채에서 마님이 했던 말을 도련님도 하자 마치다는 기분이 이상했어 그렇지만.. 도련님은 밤마다 저를..
차마 입 밖에 내뱉을 수 없는 생각과 함께 뽀로통 해진 마치다가 말없이 이마를 어깨에 기대자 그 귀여운 짓에 노부는 마냥 좋았지
그렇게 마치다는 마님이 붙여준 글선생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어
내실의 일은 오로지 어머니의 권한이니 케이가 글공부를 하는 것에 노부는 불만을 가질 수 없었지
게다가 제 앞에서 오늘 배운 히라가나 따위를 삐뚤빼뚤 쓰면서 자랑하는 마치다를 보는 것은 그에게도 기쁨이었고 말이야
그런데
“또 혼났어?”
“아, 그게.. 제가 잘못해서..”
절뚝거리는 마치다를 보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어
저도 케이를 혼내는 일이 종종 있다지만 그렇다고 타인에게까지 혼이 나는 걸 보고 싶진 않은데
굳은 표정으로 마치다를 침대에 눕힌 노부는 종아리에 붉은 줄이 죽죽 그어진 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지
날이 갈수록 이렇게 종아리를 맞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어
마치다의 말론 제가 잘못한 것이라 하지만
채 낫지도 않은 상처 위로 회초리를 맞아 엉망인 종아리를 보자 노부는 화가 치밀었지
“.. 죄송해요.. 귀찮게 해드려서..”
제 눈치를 보다 조용히 죄송하다 속삭이는 아둔함이 노부의 기분을 더 상한다는 걸 마치다는 알까 겨우 억누른 감정이 삐죽 튀어나와 약을 바르던 손에 힘을 실어 꾹 누르자 마치다는 화들짝 놀라 튀어 올랐어
이 정도도 못 참으면서 미련하긴 답답한 마음에 노부는 한숨을 내쉬었어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었지
‘이래서 열성 오메가들은 못쓴다니까.’
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었어
마치다는 억울하게도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지 제가 이렇게 멍청할 줄 몰랐거든
매번 외워오라는 단어가 늘어나고 분명 배운 적 없는 글자가 시험에 나왔지만 마치다는 그저 자신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라 여겼어 한 번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 없으니 지금 저를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편파적인지 알지 못했지 무서운 선생님보다도 마치다는 매번 매 맞은 곳에 약을 발라주는 도련님의 눈치를 보는 게 더 버거웠어
제가 글도 제대로 못 배워서 도련님을 귀찮게 만들다니
이런 몸종은 이제 필요 없다고 하시면 어쩌지?
어느새 도련님과 함께 보내는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진 마치다는 노부의 미움을 받는 것이 두려워졌어
계속 같이 있고 싶었지 이게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다에게 도련님은 유일한 안식처였어
—
“어머니 케이타의 글선생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주세요.”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란다. 내실의 일에 주제넘게 나서지 말렴. ”
다짜고짜 찾아와 한다는 소리가 겨우 저것이라니 그녀는 미간은 모았다 풀면서 제 아들을 바라봤어 그 오메가가 생각보다 영악한 구석이 있나 보군그래.
평생 남에겐 관심 한 줄 없이 무감하게만 살아오던 아들이 고작 제 오메가의 글선생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놀라운 일이지만 지금 그녀에겐 탐탁지 않게 보였어
“내실은 어머니의 권한이시지만 그 아이는 제 몸종입니다. ”
“그래서?”
“.. 요즘 밤늦게까지 글자를 외우느라 잠도 잘 못 잡니다. 그런데도 그 애 종아리는 엉망이에요. 제 몸종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어머니께서 그리 명하신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
뜻밖의 말에 그녀는 잠시 침묵했어
전해 듣기엔 그 애가 글공부를 게을리 한대 수업태도가 좋지 않다며 난색을 하는 글선생의 말을 듣고 제 앞에서만 얌전한 척을 했나 싶어 괘씸한 마음에 부러 엄히 가르치라 하였는데 아들의 말을 들으니 그게 아닌 것 같았지 그 뒤로 글선생을 찾지 않았던지라 정확한 정황을 알기 위해선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았어
“너는 이만 돌아가고 그 아이를 데려오렴. 확인할게 있단다.”
케이를 다시 어머니와 독대시키고 싶지 않지만 이미 제가 내실의 일에 주제넘게 굴었으니 노부는 더 이상 맞설 수 없었어 그저 알겠다며 일어났지
—
“그래, 글은 잘 배우고 있니.”
“.. 네.. 네! 마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 선생님께 배우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멍청해서.. 죄송해요.”
계속 혼만 나던 마치다는 다시 마님께 불려오자 덜컥 겁이 났어 기껏 글을 배우게 해줬더니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며 꾸중을 들을 것 같았지
아니나 다를까 제 앞에 종이와 펜을 놓아주시지 뭐야 마치다는 오늘 쳤던 시험지에 수두룩하게 그어지던 틀린 글자들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았어
“겁먹지 말고 궁금해서 그러니 그간 배운 것들을 써보렴. 틀려도 괜찮아.”
“네 마님..”
마치다는 떨리는 손으로 배운 글자들을 써 내려갔어 제발 마님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고작 이것밖에 배우지 못했냐고 하시면 어쩌지 정말 내가 열성 오메가라 그런 걸까 울컥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조금 엉망인 글을 내밀자 마님께선 아무 말 없이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셨어
역시 형편없나 봐 어떡해
“.... 잘하고 있구나.”
“네? 정말요..? 감사합니다. 마님.. 그런데 자꾸 혼만 나서..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뜻밖에 칭찬을 받자 마치다는 눈물이 찔끔 맺혔어
적어도 야단을 치시진 않을 것 같았지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풀린 탓일까 꿇어앉아있던 종아리가 아파져 몸을 움찔거렸는데 불현듯 마님께서 일어나 마치다의 유카타를 걷어 보시는 게 아니겠어 파들 어깨를 튀면서 놀란 마치다가 황급히 종아리를 가려보았지만 이미 마님은 상처를 확인한 후였지
“아무래도 글선생이 조금 과했던 것 같구나. ”
“제가 잘 몰라서.. 그래서.. 죄송해요. 더 잘할게요..”
글씨체가 엉망이긴 해도 짧은 시간에 배운 것치곤 어려운 단어들이었어 그런데도 저 미련한 오메가는 계속 죄송하다고만 했지 그녀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기만 하는 마치다가 보기 싫었어 적어도 노부의 옆자리에 있으려면 가르칠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구나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져 한숨을 내쉰 마님이 단호한 눈으로 마치다를 바라봤어
“케이타.”
“..! 네 마님..”
“네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용서를 비는 건 보기 안 좋구나 고치도록 하렴.”
“네.. 죄, 아, 아니 명심할게요.”
이만 돌아가도 좋다는 말에 후들거리는 다리로 안채를 나오자마자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부가 보였어
익숙한 이를 봐서 그런 걸까 마치다는 눈물이 나오지 뭐야
“흐윽 도련님..”
“왜 그래? 어머니께 혼났어? 응? ”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 마치다는 자연스레 노부 품을 파고들었지
마치다는 마님의 호의를 얻었다!
노부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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