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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6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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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는 명실상부 라센느제국 최고 최강의 보석술사고 마치다도 라센느에서 손꼽히는 보석가공사였다. 그 덕분에 노부와 마치다의 첫 아이 이치로가 태어나자 사람들은 이치로가 어느 쪽의 재능을 이어받았을지 몹시 궁금해했다. 정작 노부와 마치다는 이치로가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자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마치다의 부모님들은 슬쩍슬쩍 아이에게 보석을 보여주며 보석이 예쁘지 않냐고 물어봤고 쿠로사와는 종종 이치로에게 '아버지가 보석술 쓰는 거 보면 신기하지 않아? 따라하고 싶지 않아?' 묻는 모양이었다. 정작 이치로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방긋방긋 웃다가 마치다의 품으로 달려왔지만.
그리고 이치로가 어느 쪽의 재능을 타고 났는지 밝혀진 건 이치로가 5살이 됐을 때, 그리고 이치로보다 3년 늦게 태어난 노부와 마치다의 둘째 아이 고토가 2살이 됐을 때였다. 아빠를 잘 따르는 고토가 아빠의 수련실에 못 들어가서 침울해졌을 때였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노부와 마치다만의 공간이었던 별관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가득하게 됐는데 노부는 위험한 술법을 수련할 때는 아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그날도 노부가 화염 공격술을 수련하느라 수련실에 못 들어오게 해서 마치다가 공방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을 때였다. 이치로는 동생을 아주 많이 좋아하기 때문에 노부나 마치다보다도 더 살뜰하게 고토를 챙겼는데 고토가 침울해진 게 속상했던 모양이었다.
"고토, 고토, 이거 봐."
"웅?"
천성이 상냥한 고토는 침울하긴 해도 자길 걱정하는 형의 마음은 알고 있는지 입에 쪽쪽이를 문 채로 형을 돌아봤다.
"이거 봐."
이치로가 그렇게 말하면서 마치다가 가공하고 노부가 방어술을 담아 걸어준 블랙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손에 꼭 쥐더니 아이답지 않게 큰 손을 고토 앞에 펼쳤다. 그리고 아이치고는 크지만 그래도 아이라 자그마한 손바닥 위로 달콤한 향을 가득 품은 새하얀 재스민 꽃이 나타났다.
"와!"
"와아!"
아직 쪽쪽이를 떼지 못한 고토가 늘 입에서 빼지 않는 쪽쪽이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입을 크게 벌리는 동안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마치다도 마찬가지로 입을 크게 벌리고 탄성을 내질렀다. 세상에, 세상에, 우리 이치로 천재구나!
"노부!"
마치다의 공방과 노부의 수련실 사이에는 꽤 넓은 응접실이 있고 노부는 위험한 수련을 할 때는 마치다나 아이들이 갑자기 들어와서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결계를 쳐놓고 있는데도 마치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바로 달려왔다.
"케이! 무슨 일이에요?"
마치다는 공방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노부에게 고토가 형에게 받아서 들고 있는 재스민 꽃을 가리켰다.
"노부가 나한테 보여준 그거! 꽃 만들어내는 술법! 우리 이치로가 했어! 지금!"
"... 네?"
보석술로 꽃을 만들어내는 술법은 노부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평생 케이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공격술과 방어술, 치유술 등에만 힘을 써 왔던 노부는 마치다와 결혼하고 난 후로는 영상기록술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비전투 술법도 개발했다. 처음에는 전투에 유용하진 않아도 실용적인 술법들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빛을 만들어내는 술법이나 깨끗한 물이 없을 때 물을 정화하는 술법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실용성은 없지만 마치다를 기쁘게 해 주는 술법들이었다. 허공에 무지개를 만들어내거나 눈이 내리는 풍경을 만들어주거나 불꽃놀이를 해 주거나. 그리고 마치다가 제일 좋아햇던 것은 눈 앞에서 붉은 장미를 한 아름 만들어낸 술법이었다. 그때 아직 아기였던 (지금도 아기지만) 이치로가 함께 있었는데 그때 본 걸 익힌 모양이었다.
노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가와서 고토가 좋아하며 향기를 맡고 있는 재스민을 보더니 이치로를 보다가 마치다를 바라봤다.
"이치로가 언제 각성했죠?"
"... 어? 그러게?"
서둘러 확인해 보니 이치로는 보석술사로 각성한 상태였다. 다정하기는 하지만 워낙 조용한 아이라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각성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애 천재인가 봐!
"와, 그런데 5살에 벌써 꽃을 피워낸 것도 놀라운데."
고토는 그렇게 좋아하는 아빠가 왔는데도 형이 만들어준 재스민에 정신이 팔려서 아빠가 온 것도 모르고 좋아하고 있었고 이치로는 그런 동생을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마치다는 얼른 이치로를 꼭 끌어안았다.
"처음에 쓴 술법이 꽃을 피워내는 거라니, 우리 이치로 아빠 닮아서 너무 로맨틱하다."
아직 로맨틱이란 말을 알기엔 너무 어린 이치로는 마치다가 안아서 쪽쪽 뺨에 입을 맞춰주니 그저 좋아서 마치다의 입술에 조그만 입술을 촉 부딪쳐왔다. 그리고 이 로맨틱한 천재 보석술사가 일을 낸 것은 같은 해 겨울이었다.
이제는 신성 라소르제국의 황제가 된 야마토가 마치다와 노부를 초대했다. 노부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래 전에 라소르제국에서 보석을 구매하기 위해서 상단이 대대적으로 움직일 때 노부가 호위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당시 황태자였던 야마토와 황태자비였던 노보루와 안면을 튼 적이 있다고. 마치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라소르제국에서 광산을 받을 때 이상하게 여겼던 점을 떠올렸다.
"내가 블랙 다이아몬드 광산을 받은 게 너 때문이었구나!"
노부는 머쓱하게 웃으며 마치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마치다를 폭 안고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사실 그때 야마토가 케이에게 연락한 건 내가 오래 전에 내가 각성한 게 케이 덕분이었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랬어?"
"네, 제가 야마토와 함께 있을 때 야마토와 노보루가 위험에 처해서 두 사람을 지키려다 조금 다쳤거든요. 그때 라소르의 치유사제들이 절 치유해주려 했는데 제가 신성력과 속성이 안 맞아서 혼절했어서."
라센느제국의 최고, 최강의 보석술사가 되기까지 위험과 고통이 왜 없었을까. 마치다가 노부를 잊고 있던 그 세월 동안 기댈 데도 없었던 노부가 이런저런 많은 고난을 겪으며 다치고 꺾이고 부서졌던 나날들이 많았을 것을 생각하니 속상해서 마치다도 노부를 끌어안고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었어요. 약간 부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저와 상극인 힘이 갑자기 들어오니까 힘이 충돌하면서 잠깐 기절한 거지."
"응."
그래도 속상한 건 여전해서 입술에 다시 입을 촉 맞춰주고 계속 귀를 기울였다.
"그랬더니 야마토가 황태자 부처를 구한 은인을 죽일 뻔했다는 이유로 치유사제를 처형하겠다고 해서 내가 혼돈의 힘으로 각성해서 신성력과 안 맞는 것 같다고 말해야 했어요. 죄없는 사람 죽을 상황이라..."
"그래, 잘했어."
"비밀을 반드시 지키라고 했는데 야마토도 노보루가 라소르 사제들한테 죽을 위기라 눈이 돌아갔었나 봐요. 나 몰래 혼돈의 보석술사를 수소문해서 케이를 찾아내고 불렀더라고요."
"응. 힘들게 찾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제가 화를 내니까 케이한테 블랙 다이아몬드 광산도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뭐 양심은 없는지 몰라도 센스는 있네."
당연히 케이는 당시 야마토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했다.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마치다도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한다고 지켜야 하는 이들이 생겼으니까. 노부와 이치로, 고토 모두. 말로는 양심이 있니 없니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때 몇 시간만에 바로 깨어날 수 있었던 게 노부 덕분이었구나?"
노부는 그냥 말없이 웃었다.
언젠가 마치다는 노부에게 그날 내가 기억을 다 잃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노부는 대답을 한참 망설였는데 한참만에 내놓은 대답은 그랬다.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펑펑 쏟고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 발작하던 케이에게 어머니가 남겨주신 에메랄드 목걸이를 걸어주고 아직 미숙했던 치유술을 마구 퍼붓자 에메랄드의 색이 검은색으로 변했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더 발작하던 케이가 갑자기 품에서 축 늘어졌다고. 그때 노부는 폭주가 끝난 건가 기대하며 마치다를 끌어안고 마치다의 이름을 불렀지만 마치다는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텅 빈 눈으로 노부를 바라봤었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의식을 잃었다고.
그때 본능적으로 알았다고 했다. 그때의 폭주가 마치다에게서 뭔가 커다란 걸 뺏아가 버렸다고.
노부는 마치다의 집을 몰랐기 때문에 케이를 몰래 업고 나가서 성벽 경비소 안에다가 눕혀놓고 몰래 숨어서 지켜봤다고 했다. 그리고 경비들이 마치다를 발견하고 마치다의 가족을 불러와서 데려가는 것까지 봤다고. 그리고 다음에 외숙부가 왔을 때는 노부의 실력이 엄청나게 발전해 있었기 때문에 외숙부는 노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고 교육도 시켰다고 했다. 그래서 교육을 받으러 왔다갔다 하는 동안 길에서 마치다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마치다가 노부를 보고 익숙한 느낌이 드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그냥 슥 지나가 버렸다고. 그때 확신했다고 했다. 마치다가 노부를 완전히 잊었다는 걸.
마치다는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며 노부를 쓰다듬었다.
너는 너를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는 나를 보는 게 괴로워서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 못하고 늘 숨어서 날 지켜주려 했던 걸까.
노부는 대화가 무거워지는 게 싫은지 마치다의 입술에 입을 촉 맞췄다.
"초청 받아들일까요?"
"그래, 뭐... 노보루는 멀쩡한지도 한번 보고 싶기도 했고. 요즘 겨울이라 너무 추우니까 애들 데리고 따뜻한 곳에서 잠시 쉬고 오는 것도 좋지."
"그래요."
그래서 마치다와 노부는 황태자 부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마치다가 직접 가공한 보석으로 이제는 쿠로사와와 부부가 된 야오토메 류세이가 예쁘게 만들어 준 브로치를 챙기고 이치로와 고토에게 도톰한 옷을 껴입힌 다음 라소르 제국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노보루는 아주 건강했고 이치로보다 두 살 많은 아들과 네 살 터울인 아들까지 아들도 둘 낳았다고 했다. 아직 노부와 마치다의 아이들이 어려서 밤 늦게까지 이어지는 만찬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마치다와 노부는 만찬을 열어주겠다는 황제에게 오찬을 부탁했고 노부와 마치다 가족은 황제의 가족과 함께 오찬을 즐겼다. 야마토는 어째서인지 노부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고 노부와 마치다가 가족을 이루고 아이들까지 낳은 걸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안심하는 듯했다. 노부가 그때 마치다를 불러온 일로 화를 좀 낸 것 때문에 쫄았나? 노부처럼 점잖고 온화한 사람이 화 좀 냈다고 쫄기는. 그리고 오찬이 끝난 후 온실에서 티타임을 가질 때였다. 황궁의 온실인 만큼 겨울인데도 푸른 풀과 나무들이 가득했는데 또래 친구가 없는지 이치로에게 살갑게 굴던 라소르제국의 제1황자 아마미야가 이치로를 데리고 온실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고 있을 때였다.
"지금은 한겨울이라서 꽃이 없어서 아쉽다. 꽃이 피려면 좀 더 있어야 된대. 꽃이 피어 있으면 더 예쁠 텐데."
마치다가 보기에도 황후를 닮아서 예쁘장하게 생긴 제1황자의 조그마한 얼굴이 시무룩한 게 귀여우면서 안쓰럽긴 했다. 이치로도 그랬는지 고토의 손을 꼭 잡고 아마미야를 따라다니던 이치로가 목에 걸고 있던 블랙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손을 올리고 아마미먀의 손 위로 다른 손을 올렸다. 그러자 아마미야의 손 위로 노란색이 예쁜 프리지아가 한 아름 생겨났다.
"와아!"
함께 지켜보고 있던 황제 부부도 물론 놀랐지만 아미미야는 진짜 기적을 목격한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짧은 팔로 꽃을 품 안에 가득 끌어안았다. 꽃과 이치로를 번갈아 바라보는 아마미야의 눈동자가 심하게 반짝이는 걸 보던 마치다는 노부에게 작게 속삭였다.
"우리 이치로가 로맨틱한 건 좋은데 너무 과하게 로맨틱하네."
노부는 웃기만 했다. 황태자비도 보석술사로 각성하면 신전에 의해 죽을 수도 있는 나라에 우리 귀한 이치로를 부마로 보낼 수는 없지. 저 어린 황자가 다 자랐을 때도 저 눈동자의 반짝임이 꺼지지 않으면 라소르의 제1황자를 우리 집으로 데려와야겠네.
뭐... 아직은 먼 미래의 고민이었다.
다시 라센느로 돌아와서는 매일매일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들이 다시 이어졌다. 고토는 형과 달리 보석을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걸 보니 마치다를 닮아 보석가공술 쪽으로 재능을 타고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노부의 술법 수련을 종종 보러 가는 이치로와 달리 고토는 마치다의 공방에 따라와서 보석들을 가지고 놀곤 했다. 그렇게 평온하지만 함께라서 더 즐거운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을 때, 노부가 마치다와 아이들을 데리고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마차로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은 마치다에게도 익숙한 곳이었으나 익숙한 모습이 아니었다.
"어... 여기..."
마치다가 기어들어갔던 숲 울타리는 어린애가 지나가기에 너무 힘들었던 빽빽한 울타리가 아니라 예쁜 덩굴 울타리로 바뀌어 있었고 어린 노부와 마치다가 앉아서 노닥거리던 자리에는 예쁜 티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눈비가 올 때를 대비해서인지 기둥을 세워 위에는 넓은 지붕도 얹어 놓았다.
"세상에."
마치다가 입을 틀어막고 감탄하고 있자 고토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노부를 올려다봤다.
"압빠, 여기 어디야?"
"여기, 엄마랑 아빠가 만난 곳이야."
고토는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와아! 하고 말았지만 이치로는 엄마아빠가 처음 만난 곳이 여기라니 신기한지 눈이 반짝반짝했다. 둘 다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외부인의 시선과 출입을 막기 위해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놓기만 했던 울타리와 달리 지금은 예쁘고 튼튼한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고 조그마한 낡은 집이 있던 자리에는 보기에도 아주 큰데도 위압적이지 않고 우아하고 차분해 보이는 저택이 세워져 있었다. 게다가 정원이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했던 풀밭 대신 정말로 아름다운 정원도 꾸며져 있었다.
아이들이 노부와 마치다 가족이 오는 시간에 맞춰 별장 관리인들이 정원 티테이블에 미리 마련해 놓은 간식을 먹으며 예쁜 정원과 저택을 구경하는 동안 노부는 마치다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때요?"
"너무 예쁘다. 근사하게 바꿨네."
"그때보다 더 예뻐요?"
집은 확실히 그때보다 더 예뻤다. 그때 당시에 노부가 생활을 돌봐주던 할머니와 살던 집은 작지만 포근한, 소박하지만 안락한 등등 그런 형용사가 어울리는 집이 아니었다. 정말로 작고 낡고 허름한 집이었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노부를 살뜰히 돌봐줬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고. 겉보기도 그렇고 그 안에서의 생활도 그렇고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노부는 매일 마치다를 기다리며 지냈겠지. 그런 만큼 당연히 노부가 가족을 향한 애정을 가득 담아 만든 저 저택이 훨씬 더 예쁘고 좋았다. 게다가 마치다가 매일 노부와 앉아서 노닥거리며 놀던 정원도 말이 정원이지 그냥 풀밭이었다. 당시 두 아이는 풀밭에 그냥 앉아서 놀았다. 그때는 저런 예쁜 티테이블이나 의자 같은 것도 없었으니까.
마치다가 그냥 웃기만 하자 노부는 여전히 마치다의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때 그 허름하던 집이 이렇게 바뀐 것처럼, 케이도 그때의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던 아이를 이렇게 바꿔줬어요. 예쁘게 만든 이 저택도 그리고 케이가 라센느 최고의 보석술사로 만들어준 나도 케이에게 다 줄게요."
그런 말을 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평생 행복하게 같이 살기로 한 부부인데 이 집을 준다 뭐 그런 것때문이 아니라 그때 노부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마치다 덕분에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할 것 같아서. 속상하게.
"일단 집 고마워. 여기를 우리 별장으로 할까?"
"그래요. 대공저와도 가까우니까 가끔 쉬러 와요."
"그리고 그때 노부 넌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지도 않았어. 넌 그때도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고 내가 본 어떤 보석술사들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걸. 몰랐어?"
마치다는 희미하게 웃는 노부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일부러 뾰족해진 목소리로.
"그리고 너... 라센느 최고의 보석술사인 너를 나한테 준다니..."
마치다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겠는지 눈동자가 흔들리는 노부를 바라보던 마치다는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며 노부의 가슴을 쿡콕 찔렀다.
"이미 나한테 다 준 거 아니었어? 난 이미 네가 내 거인 줄 알았는데?"
그제야 노부도 환하게 웃으면서 마치다를 끌어안았다.
"맞아요, 오래전에 케이한테 다 줬지."
마치다가 '나도 너한테 나 다 준 거 알지?' 그러면서 입을 맞추자 노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엄마아빠가 꼭 끌어안고 속닥속닥거리고 있자 같이 끌어안고 싶은지 이치로가 고토의 손을 잡고 도도도 다가왔다. 고토가 노부의 다리에 매달리고 이치로가 마치다의 다리를 끌어안으며 끼워달라고 하자 노부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더 환하게 웃었다.
마치다는 아이 둘을 한꺼번에 안아올려 품에 안고 웃는 노부를 끌어안으며 함께 웃었다.
그때 늘 나만 기다리며 외로워하던 네가 이제는 외롭지 않아서 다행이다.
네가 기억을 잃고 널 잊은 날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내게 다가와줘서 정말 다행이야.
사랑해.
그러자 그 속마음을 들은 것처럼 노부가 마치다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사랑해요."
어린 시절 이곳에 오면 늘 풍기던 풀내음이 다시 코 끝을 스쳤다. 오래 전 그때의 기억보다 훨씬 더 싱그럽고 훨씬 더 상큼하게. 훨씬 더 행복한 향으로.
읽어 준 부케비들 ㅋㅁㅋㅁㅋ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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