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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5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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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ㅇㅁㅇ+ㅅㅈㅁㅇ



“아얏!”

“으악, 미안!”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해가 긴 날보다 짧은 날들이 더 많은 북부는 큰 연회가 열리기 쉽지 않았다. 귀족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북부 전체의 큰 행사가 아니고서야 무도회가 열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말은 귀족들이 춤을 출 일이 별로 없다는 뜻이었고, 스즈키가 굳이 춤을 열심히 배워둘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즈키는 춤에 소질이 없었다. 검은 기가 막히게 휘두르면서 똑같이 몸을 쓰는 춤은 왜 못 추는 건지, 마치다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몇 명의 춤 선생들이 성인이 된 대공에게 쓴 소리를 하지 못해 결국 자진해서 사임을 하고, 스즈키의 춤 선생은 마치다가 맡게 되었다. 덕분에 마치다의 발등에는 멍이 빠질 날이 없었다.

 

“미안… …”

 

방금 외운 스텝을 그 사이 틀려서 한번 퍼부어줄까 싶으면서도, 금세 풀이 죽은 강아지같은 얼굴을 해버리니 마치다도 엄해질 수가 없었다. 어휴, 한숨을 뱉은 마치다는 푹 숙인 스즈키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어려운 게 아닌걸. 둘이 함께 걷는다고 생각해봐.”

“하지만…”

“언제는 얼굴만 봐도 내가 바라는 걸 알 수 있다며? 내가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지 맞춰봐. 그리고 따라오면 되는 거야.”

 

스즈키의 손을 끌어 제 허리에 감고, 마치다는 스즈키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맞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둘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둘, 셋, 마치다가 입으로 박자를 세며 고개를 끄덕이자, 스즈키는 아주 약간씩 느리게, 그러나 마치다의 방향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옳지, 마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노래에는 전혀 집중하지 않은 채 자신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스즈키가 웃겼지만, 효과는 꽤 좋았다. 처음으로 스즈키는 발을 밟지 않고 춤을 마칠 수 있었다.

 

“좋아, 이 정도만 하면 되겠지.”

“하아, 긴장했다-.”

“아하하, 이래서야 다른 영애분들과 춤은 출 수 있겠어요, 대공 전하?”

“안 출 건데?”

“응?”

 

마치다가 웃음을 그친 채 눈만 깜빡이자 스즈키는 가까이 다가와 마치다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 껴 쥐었다.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단단한 손의 힘이 느껴졌다.

 

“난 케이하고만 출 거야.”

“어… … 하지만 분명 다른 영애들이 기대할텐데…”

“알게 뭐람. 어차피 그 영애들과 다시 만날 일도 없을걸.”

 

난 케이만 있으면 되니까. 열띤 구애에 마치다의 귀끝은 어느 새 불타는 것처럼 빨개져 있었다. 속도 모르고, 스즈키는 마치다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눌러 맞추었다. 모른 체 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의미였다.

 

“…진심이야…?”

“난 늘 진심이었어.”

“하지만… 하지만, 노부…”

“케이. 내 반려는 케이 뿐이야. 다른 사람은 생각한 적도 없어.”

 

스즈키는 춤을 추지 않았다. 춤을 즐기지도 않거니와, 다른 영애들과의 만남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곁에 남을 이는 오직 마치다 케이타 뿐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스즈키는 줄곧 결심했었다.
 

북부의 기사단장 마치다 케이타가 스즈키 노부유키 대공과 혼인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

 

“긴장되시나요?”



아주 잠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미야무라의 물음에 마치다는 정신을 차렸다. 밖은 익숙한 북부의 숲이 아닌, 화려한 황궁을 향하고 있었다.



“아, 네… 아무래도, 실수할까 봐 걱정되네요…”



마치다는 연회가 익숙하지 않았다. 기사단의 일원이었기에 귀족 사회와 밀접하지 않았고, 제국의 연회에 비하면 북부의 그것은 소꿉놀이나 다름 없는 규모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치다 군. 제가 곁에서 충분히 도와드릴 테니까요.”



마치다 군. 미야무라는 부러 마치다를 그렇게 불렀다. 마치다는 고작 며칠 전, 마치다 가의 한 친척에게 입양되었다. 성이 없던 노보루는 이제 마치다 노보루가 되었다. 노보루 군, 하고 불러왔던 미야무라는 그를 마치다 군, 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미야무라의 기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으나, 마치다는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화려한 마차에서는 수없이 많은 영애들이 아름다운 치장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노보루는 아무리 미야무라 가에서 열심히 꾸몄다지만 남부의 평범한 평민의 얼굴이었다. 황제에게 인사라도 올릴 수 있으면 다행인 오늘, 과연 뭐라도 해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될 따름이었다.


마치다는 미야무라의 도움을 받아 성문 앞에 내렸다. 거대한 황궁을 마주하니 마치다는 더욱 주눅이 되었다. 많은 손님들이 하나 둘 인사를 받으며 들어섰다. 마치다와 미야무라의 차례가 되자, 마치다는 긴장되어 숨을 참았다.



“미야무라 공,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황태자님. 초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미야무라 공께서 초대장을 전부 만들어주신 걸 제가 알고 있는걸요.”



부드러운 인상의 소년이 입구에서 둘을 맞이하였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의젓한 태가 나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다는 오늘이 긴장되었던 두 번째 이유를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치다 공. 스즈키 유이치입니다.”


‘이름은 유이치가 좋겠어.’

‘유이치, 내년 생일에는 꽃으로 연회장을 가득 채워줄게. 그때까지는 봐줘. 아가니까, 기억 못하겠지?’

‘제발, 아이는 살려줘, 노부...’



짧게 지나간 단상 사이로, 황태자의 얼굴이 반짝였다. 마치다는 겨우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태자님.”

“미야무라 공의 초대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모쪼록, 편히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아이의 말은 전부 어른스럽기 그지없었다. 정작 아이였던 시절은 하나도 보지 못하였는데도. 마치다는 애써 웃으며 화답하였다.


이 순간만큼은 건강히 자란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무언가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었으나, 사실상 초면인 상태에서 어떤 말도 덧붙이기가 어려웠다. 결국 마치다는 미야무라와 황태자가 어색해 하기 전에, 황급히 인사를 마쳤다.



“온 제국이 황태자님의 생신을 경하드리길 바랍니다. 정말로, 정말로 축하드려요, 유이치 황태자님.”



놀란 듯 눈을 깜빡이는 황태자를 두고, 마치다는 황급히 미야무라를 쫓아 나섰다.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참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입장하고 있었다.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 망토와 화려한 장신구, 스즈키 황제의 등장은 그야말로 제국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았다.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장엄한 음악에 제국의 모든 귀족들의 그의 등장에 예의를 표했다.



‘노부…!’



이제는 함부로 부를 수 없는 호칭을 남몰래 속으로 삼키며, 마치다는 그리운 얼굴을 살폈다. 과연 10년이 흘렀다는 것은 사실이어서, 스즈키의 얼굴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때보다 훨씬 성숙하고 어른스러웠다. 미야무라의 말이 틀린 것도 없이, 속을 알 수 없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이 자신이 알던 스즈키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다는 자연스레, 스즈키의 옆자리를 살폈다. 황후의 자리로 마련되어있어야 할 의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스즈키의 곁에 있을 황후가 없다는
뜻이었다.


순간 부끄럽게도, 마치다는 안도하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차오르는 기대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마치다는 애써 가슴께를 꾹 눌렀다.



“나의 아들, 유이치 황태자를 축하하기 위해 자리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네.”



짧게 이어진 황제의 축하사는 하나 뿐인 아들을 축하한다기엔 사무적이기 그지없었다. 유이치를 바라보는 표정도 마치, 그곳에 있기 때문에 눈에 들어왔다는 듯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다는 조금 당황해서 황제에게 절을 하는 유이치를 살폈다. 유이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이것이 일반적인 황제와 황태자의 관계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마치다를 뒤로 한 채,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 흘렀고, 황제 역시 회장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많은 영애들 사이에 긴장이 흘렀다. 사실상 본 연회에 참석한 주 목적인,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함이었다. 이곳에서 눈에 든 영애들은 후궁이 될 확률도 높았다. 아니, 높을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일년도 채 되지 않아 제국을 삼킨 황제의 위압감은 어린 영애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황제의 첫 춤 상대가 되려는, 그러나 황제의 앞에 먼저 나설 용기는 없는 영애들은 그저 홀 한 가운데를 비워둔 채 존재감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조용히 흔들리는 드레스의 움직임들을 스즈키는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눈.


그를 최초로 뒤흔든 것은, 미야무라에게 떠밀린 마치다였다.


악, 소리도 내지 못했다. 홀의 한 가운데에서 황제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 마치다는 감히 아는 척도, 피할 수도 없었다. 모든 참석자들이 이름 모를 용감한 영애에 대해 소근거렸다. 그가 황제의 관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몸을 굳혔으리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마치다는 다시 눈을 떴을 때부터 이 순간을 계속해서 상상했었다. 스즈키와 다시 마주하는 상상.


정작 현실로 닥치고 나니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자켓만 쥐어뜯으며 반짝이는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앞에 황제의 신발이 나타났다.



“… …”

“황제의 앞에서 입만 다물고 있을 건가.”

“마,마치다 케, 아니, 노보루라고 합니다, 폐하.”

“마치다 가인가… 그대의 이름은 들었다.”

“황송합니다…”

“추겠나. 춤.”



황제의 손이 내밀어졌다. 이를 두고 쑥덕이는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마치다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치다는 떨리는 손을 황제의 손 위에 올렸다. 그는 순식간에 자신의 쪽으로 마치다를 끌어당겼다. 무슨 음악인지, 무슨 정신으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다는 그저 스즈키가 이끄는 대로 발을 옮길 뿐이었다.


스즈키는 키가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몸도 좋아진 건지, 자신의 등을 감싼 팔도 괜히 더 힘이 들어간 듯 했다. 얼굴도 많이 바뀌었을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마치다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려 스즈키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스즈키는 마치다를 여전히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마주했을 뿐인데도, 거진 사냥감을 바라보는 듯 집요했다. 다만 그 시선에는 이전에 자신에게 향하던 다정함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인데, 마치다는 그 시선만으로 가슴이 철렁하고 떨렸다.


스즈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지금 슬플까, 화가 날까,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없을까. 노보루의 얼굴은 그의 시선에 들었을까. 아니면 마치다라는 옛 가문에 대한 예의일까. 그의 눈 속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마치다는 더 이상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뻔히 읽혔던 것이 읽히지 않았다.



“이제야 나를 보는군.”

“아, 송구합니다… 긴장이, 되어서…”

“춤을 배웠다지.”

“네, 미야무라 공께서 좋은 선생님을 붙여주셔서...”

“그 선생님은 상대를 똑바로 보라고 가르치지 않던가.”

“그,그게…”

“그래야 상대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 수 있으니까.”



휙, 하고 스즈키가 손을 들어 마치다를 한 바퀴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턴을 한 마치다는 또 한번 자연스럽게 스즈키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마치다는 숨을 삼켰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리고 그토록 살아있기를 바랐던. 스즈키의 숨이 닿았다.


지금뿐이어도 좋았다. 마치다는 오롯이 스즈키의 눈을 마주한 채,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마치 아주 잠깐 허락된 꿈을 꾸는 것처럼.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둘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먼저 스즈키의 손을 놓은 마치다가 절을 올렸다.



“폐하의 춤에 비하면 아직 배울 길이 먼 듯 합니다.”

“나 역시 좋은 선생에게 배웠을 뿐이다.”



황제는 마치다가 고개를 들 때까지 발을 떼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형용하기 어려운 무게의, 긴 시선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걸까. 아니면, 뭔가 말을 해야 하는가. 마치다가 쉽게 말을 떼지 못하는 사이, 황제 역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마치다… ”

“네, 폐하.”



스즈키는 몇 차례 입을 열었다가, 또 그만두었다. 마치 목소리를 내는 일이 힘겨운 것처럼.



“… … 또 보지.”



결국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스즈키는 자리를 떴다. 뒤이은 영애들이 하나 둘 쫓아갔으나, 어떤 말도 없이 그들을 피해갔다. 졸지에 홀 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마치다는 눈치를 보다가 구석 자리로 숨어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는다고 숨었으나, 사실상 소용 없는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온통 마치다의 얘기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다가 춤을 춘 사람은 그냥 스즈키가 아니라, 황제였으니까. 더군다나 황제의 첫 춤 상대로 처음 듣는 이름의 영애가 나타났으니, 모두가 나서서 마치다의 정체와, 그가 어떻게 황제를 꼬셔냈는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사교계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마치다는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었다. 주위의 수근거림에 결국 참지 못해 그는 미야무라에게 말을 걸었다.



“잘 한 건지 모르겠어요... 모두가 떠들어 대는데요.”

“아니요, 잘 하셨습니다. 폐하의 눈에 충분히 띄었으니까 목적은 이룬 거죠.”

“하지만 이렇게까지 모두가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곧 마치다 군은 누구도 쉽게 견제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를 테니까.”



미야무라는 마치 이곳에 와서 춤을 춘 것이 후궁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사실 스즈키를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었기에 마치다의 심장만 거칠게 뛰었을 뿐, 노보루에게 보인 스즈키의 태도는 지극히 건조했기에, 마치다는 모든걸 다 안다는 듯한 미야무라가 오히려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확신하세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말하자, 미야무라는 마치다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정말로 춤을 추지 않는 분이세요. 저는 연회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이죠.”

“그래도…”

“노보루 군. 오늘 폐하가 관심을 표한 이는 당신 뿐이랍니다. 심지어 폐하께서는, 황태자님과도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어요.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죠.”



하지만… 마치다는 석연치 않은 기분에 다른 말을 꺼내는 대신 고개를 틀어, 황태자를 찾았다. 그는 집사로 보이는 이 곁에 서서, 가만히 연회를 보고 있었다. 황태자의 탄신 연회였는데도, 황제가 사라진 순간 목적을 다했다는 듯 귀족들은 적당히 시간을 축이고 있었다. 이곳은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마치다도, 황태자마저도.


이것이 황궁의 모습이었다.



*


온 제국의 사교계가 떠들썩했다. 황제가 드디어 후궁인 황비를 들이고자 동궁을 꾸미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일체의 기별이 없던 황가의 움직이었기에 모두가 입을 모아 어떤 영애가, 혹은 영애들이 동궁에 머물게 될지 떠들었다. 그 동궁의 주인이, 사교계에 나타난 적도 없는, 작은 북부의 영토만 가진 마치다라는 가문의 한 영애일 것이라는 소문은 더욱 자극적인 촉매제가 되었다.
 

미야무라의 조언도 있고, 애초에 누군가 등떠밀지 않는 이상 굳이 사교계에 발을 들일 생각이 없던 마치다도 이쯤 되니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황후가 없는 황궁에 나타난 황비였다. 마치다 가라고는 하나 그 마치다 가문도 10년 전이지, 사실상 북부의 노쇠한 가문에 주목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힘이 되어줄 이라고는 아무도 없이, 그는 홀로 궁에 들어가야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치다가 궁에 들어가는 일은 아무런 축하연도 없이 진행되었다. 아무리 황비의 입궁이라고는 하나, 황제의 첫 반려를 들이는 일이니만큼 성대한 축하가 이뤄질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태자의 축하연이 가까웠으므로 또 다른 연회는 사치라고 일축했다. 결국 마치다는 역사상 가장 조촐한 입궁식을 하게 되었다.
 

홀로 방에 누워있다보면 마치다는 야마토의 일도 신경이 쓰였다. 노보루의 몸은 각인된 대상이 사라진 날부터 조금씩 기운이 없어지고 있었다.

마치다는 스즈키를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을 뿐, 그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노보루의 몸에는 각인이 남아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를 아는 미야무라도 그렇게까지 진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황비라니. 각인한 오메가가 다른 짝을 들이지 않는 건 오메가의 의사보다는 알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권위 높은 알파의 황비가 될테니 각인은 새로이 덮어쓰면 될 뿐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야무라는 이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이로써 야마토의 곁에 돌아갈 방법은 훨씬 더 복잡해지고 말았다. 스즈키에게 황후가 생기지 않고서는 이혼할 빌미도 없을 것이다. 졸지에 노보루와 야마토의 사이를 벌려놓은 장본인이 되어 마치다의 마음은 괴로웠다.
 

정작 이 모든 일을 벌인 미야무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치다보다 빠르게 마치다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여태껏 마치다의 보호자 역할을 해온 미야무라였기에, 그가 없는 황궁 생활은 더욱 더 걱정스러웠다.
 

하루하루 시름시름 앓다 못해 결국 침대에 드러누운 마치다의 이야기를 듣고, 미야무라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식사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조차도 송별회나 마찬가지라, 만찬이 차려진 앞에서 마치다는 깨작대며 제 앞의 콩을 괴롭힐 뿐이었다.

 

“마치다 군,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자주 보러 갈게요.”

 

미야무라가 위로의 말을 건넸으나 마치다는 작게 한숨을 뱉을 뿐이었다.

 

“공작님, 어째서 절 데려가기로 하셨죠?”

 

작은 투정이었으나, 미야무라는 그 말이 이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의 말처럼 들렸다. 미야무라는 들었던 잔을 내려놓은 채, 가만 말을 골랐다. 미야무라는 진지한 얼굴로 고쳐앉았다.

 

“노보루 군, 물론 정치적인 이유도 있습니다만, 제가 당신을 꼭 폐하의 앞에 데려간 이유는 다른 것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 마치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노보루 군은, 황가에 내려오는 전설을 아십니까?”

“전설이요…”

“이제야 알파와 오메가는 반려의 의미를 주로 갖는다지만, 황가의 경우 다릅니다. 알파와 오메가, 상반된 두 영혼이 완벽히 결합하는 순간 완벽해진 황가의 영혼에 신의 축복이 깃들고, 나라가 번성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제국은 황제만큼이나, 황후의 자리 역시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스즈키 황제는 이전 황제의 자리를 밀어내고 자리한 새로운 흐름. 부패한 황제를 밀어냈으니 정당성은 충분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를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원로 가문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마치다도 이전 황제를 기억했다. 그는 사리사욕에만 열중하였고, 제국 전체를 돌보는 데엔 관심이 없었다. 중앙의 권력과 질서가 미비하니, 각 지역에서는 귀족들의 이권다툼이 치열했다. 북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즈키 대공의 자리를 넘보는 귀족 가의 연합이 그들의 영토를 침범하였다. 마치다가 숨을 거두었던 전투였다.

하지만 그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원로 가문의 인정을 받고자 한다면, 더더욱 스즈키의 단 하나의 반쪽을 찾아야 했다. 노보루는 이미 야마토와 각인을 했다. 적어도 노보루는 스즈키의 완벽한 오메가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보다 나은 이가 있을텐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미야무라의 손이 마치다의 손을 덮었다. 미야무라의 시선은 매우 곧았다. 마치다마저, 설득될 정도로 확신하는 눈이었다.

 

“지금 스즈키 폐하께 필요한 건, 아마… 당신일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미야무라는 잠시 목을 축였다.


"폐하께서도 한때 그러한 반려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반려를 잃고 지금은 혼자가 되셨지요."
"... ..."
"폐하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시지만, 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세요. 그렇겠지요. 그분과는 어떠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전쟁 속에서 이별하셨을 테니까요."


미야무라가 마치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그야말로 충신의 눈이었다. 자신의 주군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듯한.


"마치다 군. 저는 당신께서, 살아있는 과거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살아있는, 과거요...?"
"당신은 마치다 경과 닮았어요. 그러니 바라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이별도 할 수 있는 과거가 되어주세요. 폐하께서 다시금 미래를 맞이하실 수 있도록요."


아, 마치다는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노보루가 각인한 오메가였어도, 평민 집안이었어도 미야무라가 개의치 않았던 이유를.
미야무라는 스즈키를 진정으로 보필하고 싶어하는 이였다. 마치, 과거의 마치다처럼.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