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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2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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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상사 때문에 업무가 잔뜩 늘어났다. 그 상사가 애인이라 퇴근 후엔 간호까지 해야 한다니, 피곤하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마치다는 그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병문안은 주말에만 잠시 다녀가는 걸로 충분하다고 했지만 노부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505호 환자 보호자인데요. 입원비 중간 결제 좀 하려고요."

마치다에겐 가족이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입원을 하게 돼도 칫솔이나 슬리퍼 따위를 가져다 줄 가족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인생에 대해 노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원무과 직원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505호 중간 결제 이미 하셨는데요?"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휠체어를 탄 환자 때문에 노부는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5층까지 성큼성큼 올라가면서도 숨이 차지 않는 게, 마치다의 끈질긴 권유로 금연에 성공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평생 끊을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힘들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앉아있는 데스크 앞을 지나 505호로 향했다. 아마 간호사들 사이에서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이 돌았을 것이다. 처음엔 형제인가 싶었겠지만 성이 다르니 애인 사이라는 걸 금세 눈치챘을 것이다. 어차피 오래 볼 사람들도 아니니 이러나저러나 상관 없었다.

"케이, 나 왔어요."

마치다는 초저녁부터 잠에 빠져 있었다. 침대 끝에 앉아 환자복 밑으로 삐져나온 발목을 어루만졌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환자복이 칠부바지처럼 볼품 없다고 툴툴대던 표정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저녁 먹고 바로 누운 거예요? 그러다 또 체하려고..."

아무 대답도 없이 잠만 자는 애인이 야속할 법도 한데 노부는 그저 이 고요함을 즐기고 있었다. 사고 당일엔 남는 병실이 없어 1인실에 들어왔지만 그 뒤로 다인실에 자리가 생겨도 옮기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돈벌이가 좋긴 한 것 같았다. 과장의 월급이 얼마인지 대리는 알지 못하지만, 언제나 자기 보다 나은 것들을 소지했고 그걸 아주 잘 유지했다.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 마치다가 네 살 때 집을 나갔기 때문에 얼굴도 모른다고 했고, 어머니는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가 남긴 유산이 상당했던 걸까. 이런저런 잡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노부는 정말 그런 것들이 궁금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또 애인에게 도움을 줄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었다. 중간 결제 금액이 얼마가 나오더라도, 카드 할부를 해서라도 대신 내주고 싶었다. 데이트 비용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게 하는 것도 미안했고 생일이나 기념일이 아니어도 종종 고가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게 난감했다. 애인 보다 직급도 낮고 딸린 식구도 있어 좋은 걸 해주지는 못하지만 이럴 때라도 멋지게 돈 한 번 쓰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마저 놓쳐 버린 게 속상했다.

"노부... 언제 왔어? 나 깨우지 그랬어."

정신을 차리니 병실 안이 캄캄했다.

"아, 나도 깜빡 잠들었나 봐요. 불 켤게요."
"아냐... 켜지 말자. 옆에 누울래?"

노부는 침대 끝에 걸터앉은 상태로 불편하게 상체만 기울여 벽에 머리를 대고 한 시간이나 자고 일어났다. 평소였다면 저녁도 먹고, 집에서 느긋하게 누워 TV를 봤을 시간이지만 애인이 다쳐서 이러고 있으니 병원 신세인 건 마찬가지였다.

"좁잖아요."
"내가 옆으로 가면 되지."

불편한 몸을 움직여 굳이 자리를 만드는 모습이 불안했다. 노부는 여전히 좁아 보이는 침대 위에 겨우 누워 다리를 쭉 폈다. 불편하면 말하라고, 언제든 비켜주겠다는 말에 마치다는 오히려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어두워서 노부는 보지 못했지만.

"요즘 회사 힘들지... 내가 할 일을 다 네가 하고 있다며."
"누가 그래요?"
"오늘 점심때 인턴 다녀갔어. 케이크까지 사 왔더라고. 어찌나 말이 많은지 좀 피곤했어 솔직히. 그래도... 어린애가 뭐 사서 병문안도 올 줄 알고 기특하더라. 아무튼, 일 좀 다른 직원들하고 나눠서 해. 너까지 병나려고 그래?"

오랜만에 듣는 상사다운 말투에 괜히 실소가 터졌다. 어디 과장님이 말씀하시는데 웃냐며 옆구리를 꼬집는 행동도, 목에 닿는 간지러운 머리카락도, 자리가 좁아 자꾸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발도 전부 사랑스러웠다. 이런 사람을 돌봐줄 가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문득 노부의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퇴원하면 나랑 같이 살래요?"
"그러게 누가 너랑 살아준댔냐고."
"진지하게 하는 말이에요."
"......"
"싫어요?"
"넌 유우가 있잖아. 대학교 들어갈 때까진 네가 같이 있어 줘야지."

진통제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손등을 아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노부는 잠시 말을 골랐다. 동생이 있다는 걸 자꾸만 잊었다. 잊을 존재가 아님에도 가끔은 마치다와의 미래를 상상할 때 유우가 떠오르지 않았다.

"유우도... 이해해줄 거예요. 케이가 가끔 사서 보내주는 마카롱을 엄청나게 좋아하거든요."
"그건 날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셋이 같이 살면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 정도는 밝혀야 할 텐데. 그건 좀 어렵지 않겠어?"

현실적인 부분을 떠올리면 노부는 늘 숨이 탁 막혔다.

"가족이 있다는 거, 가끔은 싫어요."

이 말을 뱉고 아차 싶었다. 누군가는 너무 빨리 잃어버린 가족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가족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비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한 박자 늦게 들었다.

"미안해요... 케이는 이런 말 들으면..."
"괜찮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마치다는 노부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꽉 안아주고 싶어도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같이 살자고 하는 이유가, 내가 먹는 약들 때문에 또 이런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야?"
"아니라고는 말 못 해요..."
"걱정 안 해도 돼. 의사랑 상담하고 적정량 먹는 거니까. 이번엔 내가 너무 오랜만에 갑자기 먹어 버려서... 최근에 무리해서 일하기도 했고... 내가 안일했던 거야. 약 자체가 위험할 건 없어."

아무런 대꾸도 없이 천장만 보는 옆얼굴이 슬퍼 보였다. 마치다는 괜히 가벼운 뽀뽀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뺨에 입술 도장이 여러 번 찍혀도 노부는 살짝 미소 지을 뿐 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너랑 사는 게 싫은 게 아냐. 현실적인 걸 얘기하는 거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알아요."
"만약에... 유우가 허락한다면 생각은 해볼게."

뽀뽀에도 반응하지 않던 고개가 마치다 쪽으로 휙 돌아갔다.

"그 말 진심이에요?"
"응. 그런데 유우는 아무래도 여자애고... 집에 모르는 아저씨 한 명이 들어와 사는 거 당연히 싫다고 할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요. 제가 잘 설득할게요."
"그리고 너도 잘 생각해 봐. 나랑 같이 사는 거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어."

상체를 일으켜 앉은 노부는 마치다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대답했다.

"난 행복해지려고 케이랑 살려는 게 아니에요. 이미 당신을 만나서 행복해요. 그냥, 내가 가족이 되어주고 싶어서 그래요."
"나 울리려고 작정했구나."
"내가 다 맞출게요. 백 번 싸워도 백 번 다 질게요. 케이가 나 꼴 보기 싫다고 하면 그날은 세탁실에서 잘게요."
"그게 뭐야. 벌써 싸울 생각 하는 거야...?"

마치다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려고 노력해 보지만 이미 노부의 손가락이 눈물을 대신 닦아주고 있었다.

"내가 잘하겠다는 소리예요. 같이 살아요."
"유우가 허락하면..."
"그래요. 유우가 허락하면."
"응. 근데 아마 절대 싫다고 할 걸."
"그건 두고 보죠."

혈압을 체크하러 들어온 간호사가 헛기침하며 불을 켰고, 노부는 침대에서 서둘러 벗어났다.

"아... 그, 지금 맥박이 너무 빠르셔서... 조금 있다가 다시 와서 잴게요."

간호사가 나간 뒤, 노부는 마치다에게 다가가 바로 입을 맞췄다.

"왜 맥박이 빨라졌어요? 나랑 같이 사는 거 기대돼서?"
"아니거든. 아침에도 맥박 빠르다고 다시 쟀어. 난 원래..."
"그냥 그렇다고 해주면 안 돼요?"
"그래... 너랑 같이 살 생각하니까 너무 좋아서 그랬다. 됐어?"

마치다는 심장 박동이 조금 더 빨라지는 걸 느끼면서, 간호사가 조금만 더 시간 여유를 두고 와주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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