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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9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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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선물이야."

팔의 뼈는 붙었지만 다리 뼈는 아직 붙지 않아서 걷지도 못하는 데다가 복부를 꿰맨 자리의 실밥도 뜯지 않아서 기침을 할 때도 조심해야 하는 상태였지만 각인이 복구됐으니 금방 회복될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상자를 받아서 리본을 풀고 열어 보자 안에는 손등 쪽에 눈의 결정 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 은색의 장갑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소환사들은 대체로 자신의 속성에 따른 색의 장갑을 꼈다. 가끔 개성적으로 독특한 장갑을 착용하는 소환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화염의 소환사들은 붉은색, 전격의 소환사들은 푸른색, 질풍의 소환사들은 녹색 장갑을 착용하는 일이 많았고, 노부도 손등에 피닉스가 새겨진 붉은색 장갑을 착용했었다. 그러나 마치다가 선물한 건 반짝거리는 은색의 장갑이었다. 고개를 들자 마치다의 오른손에 똑같은 장갑이 보였다. 

"은색이네요?"
"넌 지명수배 중이야. 네 인상착의도 이미 알려졌으니까 네가 붉은 장갑을 착용하고 있으면 바로 잡혀갈걸."
"..."
"뭐, 나갈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잖아."

지금도 여전히 소환사들에게 스팸처럼 노부의 지명수배 공고가 매일 발송되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소환사라면 누구나 알아볼 것이었다. 그래도 소환사 각성 이후 줄곧 붉은 장갑을 꼈었는데 갑자기 은색 장갑을 끼려니 낯설고 미묘한 기분이 들어서 복잡한 기분으로 장갑을 착용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 앞에 노부처럼 미묘한, 아니, 노부와는 다른 결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치다가 보였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복잡한 표정으로 은색 장갑을 낀 노부의 손을 바라보던 마치다는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건 또 뭡니까?"
"선물."
"선물이 많네요... 감사합니다."

노부가 상자를 열어보자 안에는 길고 가는 체인이 하나 들어 있었다. 

"목걸이?"
"보석 걸라고."
"아..."

노부가 붉은 보석과 체인을 들고만 있자 마치다는 보석과 체인을 들고 가 버렸다. 그러더니 붉은 보석에 처음부터 달려 있었던 작은 고리에 체인을 걸고 노부의 목에 체인을 걸어 주었다. 환자복 위로 드러난 목에 마치다의 손가락이 닿자 어쩐지 가슴이 술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 이런 보석은 팔에 걸면 크기 때문에 거추장스럽고 가끔 도둑 맞기도 하기 때문에 목걸이로 걸기는 하는데. 이것까지 챙겨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해서 멍하니 마치다를 올려다보자, 마치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씩 웃었다. 

"고맙다고? 알았어."
"아... 고맙습니다."
"알았다고."

마치다는 방 구석에 있는 휠체어를 끌고 와서 노부를 부축해 휠체어에 앉히더니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데리고 갔다. 

"어디 갑니까?"
"네 피닉스 소환해 보라고. 각인 망가지고 피닉스가 계속 난동부리지 않았어? 불러서 소통 좀 해 봐."

소통이라고 해 봐야 소환수들은 말을 못하기 때문에 정확히 소통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말을 알아듣긴 했다. 말하는 상대가 자신과 계약을 맺은 소환사라면 더욱. 게다가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 노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다.

"옥상에는 못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건물 안에 피닉스를 소환할 만한 넓은 공간이 있습니까?"
"어."

마치다는 짧게 대답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 탄 다음 B1, B2.... 등 지하층이 표시된 아래에 *라고 표시된 버튼을 눌렀다. 

"건물이 큰가 봅니다."
"어. 크지."

말이 짧은 걸 보면 대답해 주기 곤란한 가 싶어서 입을 다물고 있자 곧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말도 안 되게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를 타러 나왔을 때 봤던 복도의 길이보다 훨씬 더 폭이 넓고 면적이 말도 안 되게 넓은 공간이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보면 지상은 5층 뿐이었는데 지하가 6층까지 있었다. 여기는 지하 6층 아래의 *라고 표시된 곳이었고. 지하 7층인가. 

"지상보다 지하 공간이 더 넓은 겁니까?"
"응."
"허가받은 건축물인 건 맞습니까?"
"응."
"아..."
"지하 3층까지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휙 돌리려고 하자, 마치다가 휠체어를 멈추더니 굴러가지 않도록 고정해 주고 두어 걸음 옆으로 떨어져 선 채로 팔짱을 꼈다. 

"피닉스 소환해서 달래 줘. 상황도 좀 설명해 주고."

그래, 중요한 건 지금 각인이 훼손돼서 보름 넘게 혼란에 빠져 있었던 피닉스를 달래는 거니까. 

노부가 장갑을 착용 중인 오른손 손바닥에 왼손 손가락을 대고 정신을 집중하자 곧 지하가 환하게 밝아지더니 노부와 마치다의 앞에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채 날개를 쫙 펼친 피닉스가 나타났다. 이글거리는 불길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피닉스는 커다란 날개를 접으며 노부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부의 품에 커다란 머리를 집어넣고 마구 부비기 시작했다. 어릴 때 부모를 잃었고 스승님 아래에서 자라면서도 매일 혹독한 훈련을 받느라 바빴기 때문에 반려견을 기를 여유는 없었지만 몬스터들한테 쫓기면서도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어떻게든 안거나 끌고 달아나는 사람들을 가끔 봤었다. 그들을 구해주고 몬스터를 처치하면 안심한 이들은 대체로 반려동물부터 끌어안고 다친 곳이 없는지 허둥지둥 살폈다. 그럴 때 덩치가 커다란 반려견들이 제 덩치를 모르고 제 주인의 품에 커다란 몸을 마구 구겨넣으며 안겨드는 걸 보고 웃기고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피닉스가 그러고 있었다. 노부에게 제 몸을 마구 부벼대는 녀석은 왜 저와의 계약의 증표인 각인이 망가지는 걸 내버려 두고 있었냐고 항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각인이 훼손돼서 만날 수 없었던 시간 동안 외롭고 무섭고 불안했다고 토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각인이 훼손될 정도로 다쳤던 노부를 걱정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을까. 

그렇게 한참이나 제 큰 몸을 아직 환자인 노부에게 원하는 만큼 부벼대던 피닉스는 한참 후에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마치다에게 다가갔다. 마치다가 각인이 새겨져 있지 않은 왼손을 들자 마치다의 왼손에 머리를 비벼대는 태도는 노부의 품에 안겨들 때와는 달리 제법 젠틀하고 정중했다. 

소환수 주제에 사람 차별하네. 

노부가 어이없는 얼굴로 보고 있을 때, 마치다는 왼손으로 피닉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스즈키는 일부러 각인을 훼손하려 했거나, 일부러 널 불러내지 않은 게 아니야, 알지?"

피닉스는 큰 눈을 꿈벅거리며 마치다의 손에 머리를 비벼대고 있기만 했지만 마치다는 불길이 넘실거리는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속은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야. 속인 사람이 잘못한 거지. 너도 알지, 네 전 계약자, 스즈키의 스승님이 돌아가셨을 때 스즈키가 얼마나 외로워했었는지. 그때 스즈키는 너무 외롭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서, 그래서... 속은 거야. 네 잘못도 아니지만, 스즈키의 잘못도 아니야."

노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마치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피닉스가 아니라 노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아려왔다. 몇 년 전에 마치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내내 옆에 있어주시던 스승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너무 슬프고 황망하고 외롭다는 이야기. 마치다는 그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노부에게 따뜻한 차와 달콤한 간식을 사 주었고 노부가 울적해질 때마다 옆에 있어 주었다. 어느 날 스승님의 유언이 '넌 잘 할 수 있을 거다'였다는 말을 했을 때, 마치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넌 정말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갑자기 혼자 남겨진 게 불안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묻자 마치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었다. 

[널 보면 네 스승님이 널 정말 아끼며 가르쳤다는 게 확 티가 나. 그 정도로 잘하고 있어."
[말이라도 고맙네.]
[진심이야. 왜 네 스승님이 널 그렇게 아꼈는지도 알겠고.]
[무슨 말이야?]
[좋은 사람이라고, 너.]

그때 노부가 마치다에게 당신도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스승님이 자랑스러워하고 아꼈을 것 같다고 하자, 마치다는 흐린 얼굴로 웃었었다. 

[스승 없었는데? 전대 계약자가 누군지도 몰라. S급 빙결의 소환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빙결의 은빛드래곤과 계약을 한 거야.]
[아...]
[난 좋은 사람도 아니고.]

당황해서 잠시 말을 잃었던 노부가 아니라고,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서둘러 말하자 마치다는 소리내서 웃었다. 

[날 우유 귀신이라고 부르는 녀석들이 들으면 경악할 말이긴 하지만, 그 녀석들에게 꼭 전해 줄게. 날 좋은 사람이라고 해 주는 사람도 있다고.]

그때는 우유 귀신이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아마 고토나... 키가 안 큰다고 마치다가 억지로 우유를 먹였던 동생들이 마치다를 우유 귀신이라고 불렀던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칭얼거리듯이 마치다의 손에 얼굴을 좀 더 부비던 피닉스는 다시 노부에게 달려와서 노부의 가슴에 머리를 부벼대기 시작했다. 마치다의 조언을 듣기 전보다 훨씬 더 얌전해지고 상냥해진 태도였다. 

"미안해."

피닉스는 그제야 스즈키의 사과를 받아들여주기로 했는지 조금 더 애교를 부렸고, 노부는 잠시 피닉스와 놀아주다가 피닉스가 충분히 진정된 후에 피닉스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까칠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치다를 돌아봤다. 

"요즘 토벌전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알아냈습니까?"
"알아내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당연한 거지."
"네?"
"당연하잖아."
"고토 상은 아직 모른다고 하던데."
"고토는 아기니까 그런 거고. 생각해 봐. 네 각인이 깨져서 피닉스가 날뛰고 있었기 때문에 화염의 신수들 다 통제가 안 됐지. 질풍의 소환사가 죽어서 당연히 질풍의 소환수들은 더 통제가 안 되고 있지. S급 전격의 소환사도 각인이 깨졌잖아. 게다가 그쪽은 푸른 늑대에게 강제로 네 각인을 공격하게 했다며. 소환수가 다른 소환수나 소환사를 공격하는 건 금기야. 소환수가 정당한 이유 없이 자기 소환수가 금기를 깨게 한 거라고. 계약의 바탕인 신뢰 자체가 흔들리고 있으니까 푸른 늑대가 피닉스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 게 당연하잖아. 전격의 소환사들 말로는 소환수들이 전부 다 전혀 통제가 안 된다더라."
"네...?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토벌전에 나갈 수 있는 게 빙결계 소환사들 뿐이라서 내 출동이 잦은 것뿐이야. 몬스터와의 속성 어쩌고를 따지기 전에 일단 소환수들이 제대로 통제가 되는 게 기본 속성들 중에선 빙결계 뿐이니까."
"아..."
"이제 네 각인이 회복됐으니까 화염의 소환수들도 통제가 되겠지."
"다행이네요."
"다행이라고?"
"네?"

마치다는 고작 두어 걸음 떨어져 있을 뿐이었는데 아주 천천히 노부에게 다가왔다. 겨우 두 걸음을 걸어오는 동안 노부의 가슴은 뭔지 모를 불안으로 거칠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다는 노부가 앉아 있는 휠체어의 양쪽 팔걸이를 잡은 채 고개를 숙여 노부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마치다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댄 채로 잠시 마주보고 있었다. 사실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영겁같던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마치다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어째서인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나 마치다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아주 느릿하고 스산한 말투로 그 말투만큼 스산한 내용을 들려 주었다. 

"협회 쪽에도 화염의 소환사들이 있지."
"...그렇죠."
"당연히 그쪽도 네가 회복됐다는 걸 알았겠지."

마치다는 노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들은 널 죽이기 위해서 총출동할 거야."

노부가 그대로 굳은 채 마치다를 바라보자 마치다는 씩 웃으며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노부의 뺨을 콕 찔렀다. 

"전처럼 방심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야. 이제 피닉스도 있고."
"..."
"나도 있고."

마치다는 똑바로 일어서서 여전히 멍한 얼굴의 노부를 바라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걱정마. 내가 다 이겨줄게."




#소환사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