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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타카노가 태어나기도 전이자 임신한 상태로 어쩔 수 없이 노부를 떠나야 했던 그때. 혼자 시골에서 지내고 있을 그 무렵, 꿈을 꿨다. 

꿈속에서 마치다는 아담하게 지어진 집 앞 마당 데크에 마치다만을 위해 마련된 폭신한 1인용 카우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아이와 노부의 웃음소리. 그 기분 좋은 소리들을 배경 삼아 책을 읽고 있던 마치다는 '엄마!' 하는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꽤나 넓은 마당에서 노부를 꼭 닮은 남자아이가 노부와 신나게 놀다 말고 마치다를 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마치다는 밝게 웃으며 읽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아이를 받아안을 준비를 했지만, 아이는 마치다에게 닿기도 전 노부에게 붙잡혀 방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까르륵 거리며 또 한 번 노부와 마당을 뒹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 다시 책을 들었을 때, 이번엔 진짜 노부에게서 벗어난 아이가 마치다의 품에 뛰어들었다. 마치다는 겨우 다시 편 책을 테이블 위에 놓아야 했다.


'우리 아들. 아빠랑 재밌게 잘 놀았어?'

'응!'

'아들. 엄마는 아빠 거야. 저리 가. 아빠가 엄마한테 안겨있을 거야.'

'아니야! 엄마는 내 거야!'


아이의 뒤를 따라온 노부의 말에 아이의 미간이 찌푸려짐과 동시에 울먹거리기 시작했고, 마치다는 아이를 꼭 안아주며 노부에게 눈을 흘겼다.


'왜 나를 째려봐요, 케이? 케이는 내 거 맞는데!'


마치다가 노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품 안의 아들을 좀 더 세게 안자 아이는 엄마가 아빠가 아닌 자신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는지 노부와 마당에서 놀 때의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와 노부를 향해 혀를 내밀고는 마치다를 꼭 껴안았다.


'안되겠다. 아빠가 우리 아들하고 케이를 같이 안아버려야지.'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 보던 노부가 아이와 마치다를 함께 끌어안았고, 마치다와 노부의 품 안에서 다시 한번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마치다도 결국 노부를 흘기던 눈을 풀고 함께 웃었다.

마치다가 언젠가 이루고 싶던 미래의 모습이었다. 행복하기만 했던 그 꿈에서 깬 뒤 마치다는 상실감에 임신한 티가 나기 시작하던 배를 부여잡고 몇 시간을 내리 울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타카노가 태어났을 때, 갓 태어났음에도 마치 꿈속에 나와줬던 그 아이처럼 노부를 꼭 닮은 얼굴을 보며 안정이 필요한 몸으로 또 몇 시간을 울었다. 꿈에 네가 나와줬었구나. 꿈에서 노부와 함께 행복했던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와줄까.







[대표님.]


이 난장판 속에서 왜 그때의 꿈이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메시지가 온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이번엔 전화가 왔다. 핸드폰 화면에 뜬 대표의 이름에 마치다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통화 버튼을 누르게 될 순간 귀로 쏟아질 욕들이 귓가에 벌써 들리는 듯했다. 통화 버튼 위로 올라가있던 손가락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고 끊기기만을 기다렸다가 대표의 전화가 부재중으로 남자마자 핸드폰을 이불 위로 떨궜다. 단순히 욕을 듣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어떤 변명과 해명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패닉이라 차마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고요하고 평온해야 할 평일 오전 노부의 본가가 소란스러웠던 이유. 수많은 부재중과 메시지들이 핸드폰에 쌓여있던 이유. 

5년 만에 들어온 노부의 방에서 노부와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아주 잠깐 괜찮아졌던 마음이 금세 불안으로 쿵쿵 거리기 시작했다. 노부를 다시 만났을 때나, 어젯밤 노부에게 모든 걸 얘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불안함이었다.

마치다는 아직 노부의 마음이 어떤지조차 몰랐다. 어젯밤 노부를 붙잡고 모든 이야기를 쏟아냈으나 돌아온 말은 없었고 노부는 그대로 마치다의 손을 풀어버린 뒤 등만 보인 채 본가를 떠났다. 과거의 일들과 관련해 노부와 제대로 정리조차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스캔들은 노부뿐만이 아니라 스즈키 그룹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끼칠게 분명했다. 그리고 타카노. 5년 만에 만난 소중한 우리의 아들. 노부가 5년간 꽁꽁 숨기고 보호해온 타카노가 기사에 함께 언급됐다. 모자이크 처리가 됐고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도 타카노까지 언급된 이상 노부가 타카노를 더 이상 숨기는 건 힘들어질 테고, 이번 스캔들로 인해 가장 상처받을 사람은 어쩌면 노부나 마치다가 아닌 타카노일지도 몰랐다. 노부가 지금까지 타카노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 온 만큼, 원치 않게 타카노가 공개된 것에 대해 마치다가 느끼는 절망감보다도 더 큰 좌절감을 느끼고 있을 노부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제가 욕을 먹고 잘못되는 건 상관이 없었지만 저 때문에 스즈키 그룹과 노부, 타카노가 상처를 받고 타격을 받는다면 마치다도 무너질 것 같았다. 모든 게 제 잘못이었다. 

마치다에겐 유일한 사랑인 노부와 다시 잘 해보고 타카노와 셋이 함께 행복하기 위해 용기를 냈던 게, 최악의 결과가 되어 돌아온 느낌이었다. 행복하게 지내왔을 노부와 타카노의 사이에 내가 끼어들면 안 됐던 게 아닐까. 하지만 노부가 곁에 없는 삶은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고 노부의 사랑과 따뜻한 품이 그리웠다. 노부에게 돌아가고 싶어도 아이를 버리고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돌아가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뒤로하고 충동적이었어도 5년 만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타카노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만약 타카노를 화장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타카노가 노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잘 크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 곁에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을 쉽게 버릴 수 있을까 생각하면 마치다는 자신이 없었다. 일이 다 틀어져 버린 지금도 마치다는 노부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제 사랑은 이토록 이기적이었다.

여전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눈물이 차오르려는 눈가를 벅벅 문지른 마치다가 협탁 위에 있는 휴지로 링거가 빠지며 맺혀있던 손목의 핏방울들을 닦고 일어났다. 모든 게 제 잘못인 이 상황에서도 노부를 포기할 수 없으니, 계속 누워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젠 너무 멀리 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아까 노부유키한테 연락이 왔단다."


마치다가 방 밖으로 나왔을 땐 집안의 소란스러움이 많이 줄어있었고, 아주 조금 어수선함이 남아있는 느낌이긴 했어도 평소 마치다가 알고 있던 노부의 본가 모습이었다. 사용인들이 마치다를 대하는 모습도 특별할게 없었다. 마치다가 나오자마자 리빙룸에 있던 노부의 어머니가 바로 마치다에게 달려와 괜찮냐며 하루 사이 크게 수척해진 마치다의 얼굴을 여러 번 쓸어주었고, 그 따뜻한 손길에 마치다는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괜찮아졌다. 마치다의 표정이 조금 나아지자 바로 소파에 앉힌 후 마치다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용인을 시켜 따뜻한 물 한 잔을 내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노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스캔들이 터지고도 마치다에게는 아무 연락이 없던 노부가 어머니에게는 연락을 했다. 어제 마치다에게 등을 보인 노부이니만큼 마치다에게 연락이 안 오는 건 당연했다. 아마도 스캔들 때문에 연락을 했을 텐데, 저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어머니에게는 연락을 해준 마음이 고마웠지만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아 어머니 덕분에 겨우 괜찮아진 마음이 다시 두려워지고 긴장되기 시작했다.


"너도 일어나서 기사를 봤을 것 같은데.. 노부유키가 널 집에 보내지 말고 일단은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 하라더구나. 네가 걱정되나 봐."


잠깐이었지만 두려움으로 굳어있던 몸이 탁 풀렸다. 낮은 숨을 터트림과 동시에 심장이 지끈거려 절로 손이 가슴으로 올라갔다. 그 행동에 어머니가 놀란 듯 마치다의 나머지 한 손을 붙잡으며 사용인을 부르려 하는 걸 마치다가 막았다.


"저 괜찮아요, 어머님. 그냥,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서..."


걱정이 아닐 수도 있었다. 마지막 말은 어머니의 추측일 뿐이었다. 단순히 더 이상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거나 마치다 혼자 괜한 사고를 칠까 못 미더워 이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걱정이 되어 배려를 했던 거라면, 이런 노부의 배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줄곧 정신이 없던 머리가 더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노부는 미치도록 미울 저에게 어떻게 이런 배려심을 보여줄 수 있을까. 복잡해지는 마음에 말을 잇지 못하는 마치다에게 어머니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희 집 앞에 기자들 많을 텐데 가봤자 기자들 때문에 힘들 거 아니니. 여긴 보안도 훨씬 철저하고 안전하니까 엄마도 네가 노부유키 말대로 했으면 좋겠어. 여기 있으렴. 엄마도 걱정돼서 그래."

"....죄송해요."


제대로 된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부터 하는 마치다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노부의 어머니가 마치다의 손을 잡아왔다. 어머니에게 잡힌 손만 바라보고 있던 마치다가 겨우 고개를 다시 들자 마치다의 눈에 보인 노부의 어머니는 이런 스캔들에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꽤 신나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난 전혀 몰랐지, 뭐니. 너희 둘이 따로 그렇게 만나고 있을 줄."

"아니에요! 따로 만난 게 아니고 타카노 때문에...."


당황해서 어머니에게 잡혀있던 손까지 빼서 휘휘 내젓자 어머니는 이번엔 소리 내 웃고 가벼운 어투로 마치다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난 너무 좋은데?"

"네?"

"엄마는 너희가 여전히 마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서 좋다고. 어제까지만 해도 노부유키 마음을 모르겠더니 이제야 엄마 속이 다 시원하네. 당연히 큰 이유는 타카노인데, 과연 백 프로 타카노 때문이겠니. 노부 걔도, 여전히 네가 좋으니까 만난 거지. 싫었으면 아무리 타카노가 있었어도 너희 집까지 가는 행동 안 하고 확실히 선 그었을 애야. 엄마 눈엔 다 보인다?"

"아닌데.. 그게 진짜 아닌데, 노부는 절 미워하는데..."


타카노의 손에 이끌려 노부의 집에 처음 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가끔은 노부도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혼자 생각하며 설렜지만 결국은 아니었다. 몇 번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고 무엇보다 어제 확실히 알게 됐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마치다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지만 노부의 어머니는 그저 웃으며 다시 마치다의 손을 잡아왔다.


"그러니까, 케이타. 노부유키가 무섭게 굴어도 너무 주눅 들지 말고 용기를 내서 계속 문을 두드려봐. 다 잘 될 거란다."

"계속 두드려볼게요.."


마치다는 뜨거워지기 시작한 마음을 겨우 누르며 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쩌면, 모든 일이 틀어져 버린 게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이 솟기 시작했다. 잘못한 게 이렇게나 많은데도 든든하게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노부의 어머니와 아버지 최소한 두 명은 있었으니까.










톡, 톡.

노부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통창으로 이사실 가득 들어오는 햇살을 찌푸림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층에 위치한 이사실에서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작게 보이는 빌딩 숲과 하늘뿐이었다. 스즈키 그룹 본사 바로 앞까지 몰려온 기자들은 노부가 앉아있는 자리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노부의 위치는 그런 위치였다. 직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기자들을 정리해달라는 지시를 내린 지 몇 시간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회사 앞에 있던 기자들은 이미 돌아갔겠지만, 어쨌든 노부에게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었다. 정리가 됐을 회사 앞과 다르게 이사실 바로 앞에서 이사실을 보필하는 비서진에게는 계속해서 전화가 오고 있을 테니 이사실 밖은 여전히 전쟁터일게 뻔했다. 하지만 육중한 문을 사이에 두고 완벽한 방음을 자랑하는 고요하기만 한 이사실에서 들리는 소리는 노부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뿐이었다.

노부조차 예상하지 못한 기사가 이른 아침에 터지는 바람에 노부는 오늘 스즈키 그룹 이사로서 계획되어 있던 모든 일정을 다 취소했다. 차라리 출근 전에 기사가 터졌더라면 타카노와 함께 집에 있었을 텐데, 하필 노부가 평소 출근시간보다 1시간 이른 시간에 출근하자마자 기사가 터지는 바람에 오전 내내 이사실에 꼼짝없이 갇혀있는 신세가 됐다. 타카노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은 아직 공개된 적 없으니 문제없겠지만 혹시 몰라 집의 보안을 좀 더 신경 쓰라는 지시를 내렸고, 본가에 있는 마치다도 이미 기자들에게 털려버린 집으로 돌아가서 곤욕을 겪지 않도록 어머니에게 연락을 해놨다. 노부는 출근 직후 스즈키 그룹 회장인 할아버지에게도 불려가 한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혼난 건 아니었다. 


'케이타와 확실히 다시 만나는 거냐.'


묵직한 한마디에 노부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노부의 모습에 할아버지는 혀를 한번 차며 그룹 차원에서 대응하게 해줄 테니 우선 마치다와의 관계부터 확실히 하라는 말만 남기셨고, 노부는 그대로 회장실을 나왔다. 그것도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다.

마치다의 집 근처에서 느껴지던 낯선 시선. 노부는 재벌가 3세로 태어나 자라며 어렸을 때부터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포착하는 데에는 아주 익숙했다. 마치다의 집 근처에서 느껴지던 시선도 노부는 바로 느꼈었다. 분명 누군가가 몰래 지켜보는 느낌이었고 그때 바로 조치를 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무시한 게 잘못이었다. 타카노와 함께 마치다의 집에 갔던 것이니 만큼 마치다의 집 근처 경호도 좀 더 신경 써야 했다. 낯선 시선도 무시하고 경호도 신경 쓰지 못한 건 분명 스즈키 가 3세로 살아온 저답지 못한 모습이었다. 어젯밤, 마치다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고 나자 드디어 보였다. 마치다와 타카노와 함께 있었던 그 순간이 깨고 싶지 않을 만큼 좋았다. 그랬기에 낯선 시선은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무시했다. 그게 이제서야 보였다.

하지만 마음을 인정한 것과는 별개로 오늘 새벽까지도 마치다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던 노부는 악질적인 스캔들이 터짐과 동시에 마음을 정했다. 노부가 생각할 때 마치다를 위해서도, 타카노를 위해서도 노부가 지금 정한 이 마음이 최선의 선택이었고, 이 선택 말고는 스캔들에 맞설 방법이 없었다. 할아버지께도 그룹 차원에서 대응을 하게 해준다는 말을 들었고, 모자이크가 되어있는 타카노까지 찍혔으니 대응을 해야 했다. 그리고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오후 1시. 스캔들이 터진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이 정도면 마치다도 나름 생각할 시간을 가졌을 거라 생각한 노부는 바로 호출버튼을 눌러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네, 이사님."

"지금 밖에 기자들 있습니까."

"없습니다."


톡, 톡, 톡. 지금까지도 계속 책상을 두드리고 있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서실장을 향해 한마디 더 던졌다.


"케이를 만나야겠어요. 당장 차 준비해 주세요. 본가로 가죠. 기자들 따라붙지 않게 조심해 주시고."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어머, 네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니?"


아침까지 먹은 후 다시 노부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마치다를 붙잡은 어머니는 혼자 있으면 잡생각이 더 많아진다며 점심을 먹고 난 지금까지 마치다와 리빙룸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어지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가볍게 웃어가며 어머니와 과일을 먹고 있을 때, 집에 온다는 얘기도 없던 노부가 본가로 찾아왔다. 노부가 집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 이사님이 도착하셨다는 사용인의 말을 듣자마자 마치다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채로 굳었다. 괜찮다고 달래는 어머니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여유 없는 걸음으로 집안에 들어와 굳어있는 마치다와 마치다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어머니를 힐끗 본 노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인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노부의 방으로 향하며 얘기했다.


"케이랑 얘기 좀 할게요."

"나랑...?"

"들어와요, 케이."


무표정에 어머니와 마치다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지만 어제만큼 화나 보이지도 않았고, 냉랭한 분위기가 풍기 지도 않았다. 들어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노부는 본가에서 살던 시절의 자신의 방이 있는 쪽으로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사태 파악을 하느라 아직 어안이 벙벙한 마치다의 귓가에 어머니가 속삭였다.


"쟤 기분 나쁜 것 같지 않지? 들어가 봐, 어서. 파이팅!"


어머니가 마치다의 등을 살짝 밀며 어서 들어가 보라고 재촉했고 마치다가 주춤하며 어머니를 돌아보자 노부의 어머니는 마치다와 반대로 잔뜩 기대되는 표정을 한 채 마치다에게 들어가 보라고 손짓하며 노부에게 소리쳤다.


"아들! 차 준비하라고 할까?"

"됐어요."

"차는 됐대. 어서 들어가 봐."


마치다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노부가 사라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노부가 이 시간에 마치다를 찾아온 건 스캔들 때문이 확실하고, 이렇게 된 이상 노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노부와 이 정도로 빠르게 대화를 하게 될 줄 몰랐기에 당황스럽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노부를 포기할 수 없으니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아침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막상 둘이 대면하려니 어제 노부에게 내쳐졌던 일이 떠오르며 오늘 아침에 느꼈던 불안함이 다시 몸을 감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노부의 분위기가 확실히 어제와는 달랐다는 것. 잘하면 어제 했던 말들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치다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노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부는 마치다가 하룻밤 몸을 눕혔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침대를 바라보고 서 있다 마치다가 들어오자 자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 넓은 방 한쪽에 있는 넓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왜 그러고 섰어요? 앉아요."


문을 닫은 후 문 근처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노부만 마라 보고 있던 마치다에게 노부가 침대로 턱짓했다. 마치다는 주춤거리며 침대에 엉덩이만 겨우 걸쳤다.


"케이가 어제 나한테 분명히 그랬죠. 그만 둘 생각했었다고."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고민하며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기 무섭게 노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의 틈도 없이 바로 들려온 의미 모를 노부의 말에 마치다가 노부를 쳐다보자 노부는 눈도 깜빡이지 않는 모습으로 마치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배우 활동."

"아..."

"보육원에서 타카노 찾아온 후 은퇴 생각했었다면서요."


마치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다. 그 작품으로 뜨고 난면 은퇴를 하고 바로 아이를 다시 찾아서 노부에게 돌아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터진 스캔들과 그때 은퇴를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어제 했던 얘기에 대한 답변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두 번째 문제였고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건 당장 오늘 이른 아침 터진 스캔들이었다. 마치다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이번에도 흔들림 없이 노부가 바로 질문해왔다.


"그럼 지금이라도 배우 그만둘래요? 그럴 수 있어요? 지금 케이는 그때랑 다른 톱배우인데, 그 위치에서 당장 은퇴할 수 있어요?"


도무지 지금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마치다에게 노부는 답변을 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난 지금 케이한테 모든 걸 다 내려놓고 타카노의 엄마가 될 수 있냐고 묻는 거예요."


타카노의 엄마. 순간 모든 사고의 회로가 멈추는 것을 느끼며 노부를 바라봤다. 노부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진지한 모습으로 마치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대화의 흐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케이가 톱배우로서 누리고 있는 모든 걸 버리고 내 아내로, 스즈키 가의 안주인으로 살 생각이 있냐고. 대답해 봐요."


숨조차 쉬어지질 않았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