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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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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니 참 이상하지.
자신의 인생을 지독히도 갉아먹었던 이 말더듬이 오랜만이라는 이유로 반갑게 느껴지기도 하는 걸까.

마치 그날 교실안, 자기 이름조차 말하지 못해 대책없이 더듬어버렸던 그순간, 키요이로부터 처음 구원받았던 10대로 돌아간 기분이야.


"담배도 피우네."

키요이는 한 사람 정도 앉을 정도의 거리에 떨어저 앉아 건너편 시선은 멀리 다른 곳에 두고 말을 걸었어. 숨이 멎도록 아름다운 옆 모습. 꽃잎처럼 싱그러웠던 모습은 세월에 예리하게 벼려지고 프로 연예인으로서 관록이 우러나와 더욱 섬세하게 아름다워져 있었어. 세상과 교차하지 않은 것처럼 초연하고 독보적으로 아름다웠던 모습은 어딘지 덧없고 고독한 느낌에 퇴폐미까지 느껴졌지. 그런 옆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던 히라는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쑤셔넣으며 허둥지둥 대답했어.

"뭐... 그렇지."
"언제부터?"
"음.... 대학생.. 때부터?"

아마도, 키요이가 처음 스캔들이 터졌을 때였어. 매일같이 티비에서는 키요이 이름을 도마에 올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조롱하고 멋대로 추측했지. 학교에서도 전철안에서도 식당에서도, 그 어디를 가도 키요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댔고, 인터넷에선 매일 쓰레기같은 기사가 쏟아졌어.

히라는 조용히 사진부실에서 도시 풍경속 사람들을 지워갔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너네 같은 건 다 사라져버려. 히라가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유일한 저주. 유일한 화풀이 방법. 당시 사귀고 있었던 코야마도 그런 히라를 말없이, 조금은 걱정하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어. 시선을 느꼈지만 괜찮은 척할 여유따위 당시 히라에겐 없었어. 그러다 사진부 선배가 히라의 등을 토닥이더니 잠깐 나가자고 했어. 얼떨결에 따라나가니 흡연구역에 데려가 담배 한대를 건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고있으니 라이터 불도 건네길래 일단 말없이 물고 내밀어진 불을 붙였어. 신기하게도 고슴도치 가시처럼 온몸에 돋아났던 증오와 신경질이 연기와 함께 가라앉는 걸 느꼈어. 연기 너머 언제나처럼 유유히 더러운 강 위를 떠다니는 오리대장의 뒷모습이 보였지. 아아 그래.

그때부터 자주 피우지는 않았지만 항상 담배한갑을 챙겨 다니게 됐어. 가끔씩 견딜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 다시 더러워도 고요한 강으로 돌려보내주는 아주 쉬운 방법이었지.

지금도 그랬어. 무대 위의 키요이를 보고,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라서... 도망치듯 이곳을 찾아 담배를 물고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지. 그랬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내 눈 앞에 키요이가...



"연극은... 잘 봤어?"
"ㅇ..으응."
"... 어땠어?"
"키요이가 정말 아름다웠어."
"... 기분 나빠. 여전히 기분 나쁘네 너."
"미안. 하지만 정말 아름다웠으니까.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

영원히 키요이를 비추는 조명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만 했어. 다신 바라볼 자격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 주제에. 그래도 다시 태어나 키요이의 것이 되고 싶었어.


"결혼... 했다며?"


조명에 빙의해 행복한 상상을 하던 히라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튀어올랐어. 그걸 키요이가 어떻게???

"ㄱ그그그그"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끄덕끄덕)
"뭐... 쨌든 동창이니까?"
"아아... 뭐. 그치만 이혼했으니까."
"뭐????"

이번엔 키요이가 펄쩍 뛰며 놀랐고 덩달하 히라도 놀라 키요이를 쳐다봤어.

"언제...?
"한... 3년 됐어."
"하.... 아이라던가는..."
"아이... 있다고 해야하나.."
"하? 무슨 말이야?"
"그게... 내 아이가 아니었어서."
"하아?????"



아무리 키요이라도 지나치게 프라이빗한 얘기에 히라는 조금 부끄러워졌어. 조금은 곤란한 내색을 보이는 히라의 얼굴에 키요이도 민망해져 헛기침을 했어.

"미안..."
"아니야. 뭐 나는 괜찮으니까."
"지금은 그럼.. 혼자 살아?"
"그렇지."
"그때, 그 집에서?"


아아 그 집. 키요이와 둘만의 시간을 만들었던, 늦 가을이면 달고 시큼한 금목서 향기가 퍼졌던 그 집.


"아니. 그 집엔 지금 다른 친척이 살고 있어."
"그렇구나.."


모든 건 과거가 되었다. 우릴 기억하던 모든 것들이 흩어져가고 있었다.


"사진은.. 요즘도 찍어?"
"아.. 그렇네. 대학 졸업하고 별로 카메라를 꺼낸 적이 없네."
"왜...?"
"글쎄. 원래도 별로 찍고 싶은 건 없었어. 그냥 습관 같았던 거라."


그냥 옛 취미일 뿐이었지. 대학 때 사진부를 하기도 했고 사진전 출품을 여러번 제안 받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찍은 사진이 아니기 때문에 관뒀어. 나같은 게 될 리도 없고, 나와 상관없는 얘기라 생각했고. 키요이를 찍을 수 있어, 정말 행복했던 때도 있었는데.


"목 마르다."
"사올게. 진저에일이면 될까?"

히라가 기쁜 표정으로 번쩍 일어나서 지갑을 챙기자 키요이가 기겁하며 히라의 손목을 잡았어.

"아직도 빵셔틀이냐? 됐어. 오늘 금요일인데, 내일 일 있어?"
"아, 아니?"
"우리집 가서 술이나 한잔 할래?"
"지지지지지지지ㅣㅣㅣㅣ집."
"싫어?"
"갈래요... 부디 가게 해주세요."


피식 웃는 키요이의 얼굴이 너무 예뻐 히라는 관자놀이가 다 아찔해 잠시 휘청였어. 아아. 남들처럼 대학을 가고, 친구들을 만들고, 비록 서로 상처만 남았지만 연애도 하고, 취직을 하고, 이혼했지만 결혼도 하고.... 하나 같이 자신 답지 않았던 삶. 다른 사람들을 따라 공장 레일에 올라 다른 사람을 허둥지둥 따라하며 쌓아올린, 겉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불안하고 엉망진창인 성이 키요이라는 봄의 폭풍에 한없이 무너져내리는 걸 히라는 황홀하게 지켜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