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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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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요?"
"황제폐하의 조카분, 그러니까 대군마마께서 귀국하셨거든요."

아...미치에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 황실은 보통 장남에게 왕위가 이어지는 세습제도였으나 현 황제, 메구로 아키토는 왕세제의 몸으로 왕위에 올랐다. 장남이였던 메구로 나오히로 황태자가 왕위를 물려받기 직전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황실 내에서도 즉위전에 죽었으나 황태자였던 메구로 나오히로를 추존하여야한다는 황태자파와 실질적으로 황제가 공석인것은 용납할수없으니 새 황제를 세워야한다는 왕세제파가 살벌한 접전을 벌였었다고 하지...어쩐지...궁이 꽤나 시끄러워지겠네.

아니...차라리 다행인가, 지금은, 렌이랑 마주칠때마다 일어나는 정적이 더 숨막히는걸. 미치에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미치에다를 눈치채지 못한 빈궁전의 나인이 입을 열었다.

"어렸을때부터 외국에서 오래 지내신 분이라, 아마 이곳의 문화가 익숙하지 않으실거에요."

....라고는 했지만.

"처음 뵙겠습니다. 메구로 하루토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황궁에 계신줄 몰랐습니다."
"아...네...미치에ㄷ...아니, 메구로 슌스케라고 합니다."

미치에다는 인사와 함께 제 뺨에 입을 맞춰오는 이에 그대로 얼어버렸고

"대군, 여긴 미국이 아닙니다. 어릴때부터 외국에 나갔다고 황실 예법을 다 까먹은건 아니겠죠?"

농담과 함께 미치에다의 어깨를 끌어안는 렌에 주변에 서있던 어린 궁인들이 어머..!작게 탄성을 지르며 눈을 반짝였지만 미치에다는 익숙한 기시감에 눈을 깜빡였다.

"교수님이 M사를 좋아하시니까 그쪽으로 조사하는게 낫다니까?"
"이번 주제와 M사는 전혀 관련이 없잖아."
"저번 발표때 4조에서 M사 계열사 얘기 나오니까 교수님이 칭찬하셨던거 잊었어? 결국 점수 주시는건 교수님이야."

강의실 안에서 계속되는 설전을 멈춘것은 메구로였다.

"왜 싸우고들 그래."
"선배! 들어보세요!"
"얘가 자꾸 이상한 말 해서 그렇죠!"
"니가 너무 융통성 없는거야!"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는 두 사람을 메구로는 싱긋 웃으며 말렸고

"둘다 그만해."

미치에다의 고개가 메구로를 향했다.

"밋치, 왜 그래?메구로 선배한테 할 말 있어?"
"그냥...선배 짜증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것같아서."

미치에다의 말에 오오하시의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잉??누가??메구로 선배가??아까부터 계속 웃고 계신데??"

밋치- 매점 가자-제 팔을 흔드는 오오하시에 그제야 미치에다는 메구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저 사람, 짜증낼 줄도 알았구나. 신기하다.

"밋치, 오늘 학관에서 같이 밥 먹자!! 치즈돈가스는 안먹으면 안된다고!!!!!응?응??"

잔뜩 신나보이는 오오하시와 함께 학생식당으로 향하던 미치에다는 자판기 앞에서 피곤한 기색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메구로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핫슨, 나 잊은게 있어서. 먼저 학생식당 가있을래? 금방 따라갈게."
"응! 빨리 와야해?!치즈돈가스는 인기 많아서 금방 품절된다고!"

해맑게 팔을 붕붕 흔들며 학관을 향해 뛰어가는 오오하시를 뒤로한 미치에다가 자판기쪽으로 다가갔다.

"선배."
"어...미치에다?학관 안갔어? 오오하시가 오늘 치즈돈가스 나온다고 주변에 엄청 말하고 다니던데. 뛰어가봐야되는거 아니야?"

핫슨...너 말이야... 대체 돈가스에 얼마나 진심이였던거야...미치에다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딱히...돈가스를 그렇게까지 먹고싶다는 생각은 안해봤는데요."

그래? 작게 웃으며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는 메구로를 향해 미치에다가 입을 열었다.

"...M사 인도 IT 합동 프로젝트 얼마전에 무산됐어요."

음? 메구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어제 우연히 기사를 봐서요. 대신 3년뒤에 D금융쪽에서 해외 기업들이랑 글로벌 IT 인재 육성 프로젝트 공동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하니까 그쪽으로 조사하시는게 더 나을거에요. 츠키야마 교수님 최근에 금융쪽에도 관심 두고 계시기도 하고요."

그런 미치에다를 가만히 바라보던 메구로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판기의 버튼을 꾹 누르며 물었다. 너는...

"그걸 나한테 왜 알려주는거야?"
"네?"
"우리 같은 조도 아니고...그렇게 좋은 주제는 네가 발표해도 될텐데."
"저는 다른 주제 생각해둔거 있거든요. 강의실 시끄러운것도 싫고."

시니컬하다못해 차가운 대답에 피식 웃어버린 메구로는

"그리고...선배가 짜증낼 정도면 어지간하다싶기도 해서요."

무심하게 뱉어지는 미치에다의 말에 조금 놀란 눈을 떴다. 이내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미치에다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밋치!!!어디야!!!왜 안와-죠랑 나랑 기다리고 있는데!!]

핸드폰 너머로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오오하시의 성량에 미치에다와 메구로는 동시에 웃어버렸다. 알았어- 금방 갈게-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은 미치에다가 메구로를 향해 고개를 까딱해보였다. 그럼 전 가볼게요.

"미치에다."

미치에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잘 받아."

한마디와 함께 제게 날아오는 음료수캔을 받아낸 미치에다가 영문을 알수없는 얼굴로 메구로를 쳐다보자 메구로가 웃었다.

"자판기에 새로 들어왔는데...너 닮은거 같아서."

그러니까...딸기주스가요..? 그대로 사라지는 메구로의 뒷모습을 보며 미치에다는 정말 알 수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슌."

미치에다를 돌아본 렌이 싱긋 웃어보였다. 어쩐지...그때랑은 비교도 안되게 훨씬 짜증나보이는데...괜찮은건가.

"황후궁에서 연락 못받았어? 어머니가 찾으셨는데."
"황후마마께서요?저를요?"
"곧 있을 황실 행사에 기업들이 자사 제품 협찬을 제안했나봐. 같이 검토해주면 좋을것같다고 하시던데."
"아 네, 가볼께요."
"황후궁까지 데려다줄까?"
"됐어요. 제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그리고 누가 집에서 길을 잃어요."

미치에다의 대답에 메구로는 웃었다.

"하긴, '집'에서 길을 잃을 리는 없지?"

다녀올게요. 미치에다가 사라지자 하루토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어보였다.

"아무리 태자비마마가 아름답다고해도 그렇지, 너무 꽁꽁 싸매는거 아니야?"

렌 역시 대번에 얼굴에 띄고있던 미소를 거두고는 서늘한 눈동자로 하루토를 마주보았다.

"뭐...대례식에서도 봤지만 실제로 보니 훨씬 아깝긴 하네. 원래대로라면 슌스케군은 나와 결혼했을텐데 말이지."
"대군, 나는 대군이 내 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한적 없는것같은데."

렌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도 하루토는 여전히 이죽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건방지긴. 내 자리를 빼앗은 주제에 다들 황태자라고 떠받들어주니 기세등등해하는 꼴이라니."

꽉 다문 잇새로 씹어뱉듯 말하는 하루토에 렌은 씩 웃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맞아요. 모두 황태자라고 떠받들어주니 무서울게 없더군요. 그 옛날과는 다르게요."

저에게도 궁에서 내쫓기듯 외국으로 도망친 황족 하나 처리하는것쯤은 이제 무섭지도 않을 정도의 힘이 생겼으니까요. 렌의 냉소 섞인 속삭임에 하루토는 눈을 크게 떴다. 너 지금...무슨!!!

"조심하세요, 대군. 혹시 모르지않습니까. 제가 이 권력을 시험해보고싶어지는 날이 올지."
"태자비는 알고있나? 진짜 네 성격."

렌은 싱긋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대군.

"슌은 저보다 저를 더 잘 알아요."

할말을 찾지 못해 분한듯 발을 구르며 동궁을 벗어나는 하루토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렌은 이내 황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어, 태자비마마-안녕?"

미치에다는 저를 기다리기라도 한듯, 빈궁전의 근처에서 손을 흔들어보이는 하루토에 저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좁혔다. 별로 가까이하고싶진 않은 타입의 인간이긴한데...일단은 대군마마시고...황족이니까 적당히 상대해주지않으면 곤란하겠지. 미치에다는 작은 한숨과 함께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대군마마를 뵙습니다."
"으음 너무 그렇게 거리 두지마. 서운하잖아"

니가 뭔데....미치에다는 목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꾹 참아냈다.

"렌이 아니였으면 나랑 부부가 되었을 가까운 사이인데 그렇게 내외할 필요없지않아?"

그거였군. 미치에다는 비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아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죄송하지만 대군마마.

"렌이 아니였으면 국혼같은거 안했을겁니다."
"아아 그래? 할아버님의 약조를 깰수있을 거라고 생각한건가?"

집안도 형편없고 빽도 뭣도 없는 오메가가? 이젠 대놓고 제게 비아냥대는 하루토에 미치에다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의 수가 너무 빤히 보여서 웃음이 터지지않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나에 대해서. 그리고...렌에 대해서도.

"대군마마, 제가 렌이랑 결혼하기전에 누구랑 결혼할뻔했는지 아시나요?"
"H그룹의 회장의 첩으로 들어가려고 하지않았나?"
"맞아요. 렌의 청혼을 거절하고, H그룹으로 들어가려고 했죠. 왜였을까요?"

미치에다의 아름다운 얼굴에 고혹적인 미소를 띄우고는 가까이 다가가자 하루토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미치에다는 저보다 한뼘 작은 하루토의 키에 맞춰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그에게만 들릴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로 돈을 노리려면 젊고 건강한 황태자보다는 늙고 병들어서 언제 별세 보도가 나도 이상하지않을 대기업 회장 쪽을...쥐도새도 모르게 보내버리는게 덜 의심스럽잖아요."

조심하세요. 저는 아직도 속물이라서요. 미치에다의 서늘한 목소리에 하루토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지금 무슨 말을 한건지 알아?"
"뭘요?"
"날 협박하겠다는거냐?"

대군마마께서 협박으로 느끼셨다면...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신거겠죠.

미치에다의 말에 하루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식이...널 선택한 이유가 있었어.

"여기 있었네."
"...렌."
"하루토가 빈궁전에 왔었다고 하던데, 무슨 일 없었어?"

잠시 망설이던 미치에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일도 없었어요.

"미안해, 대군을 조심하라고 진작 얘기해줬어야했는데."
"뭐...별로요. 마츠우라 선배보다 양반이던데요."

마츠우라? 아아 그 놈...익숙한 이름을 떠올린 메구로가 미간을 구겼다. 그러고보니 그뒤로 너한테 연락오거나 찾아온적 없지?

"황실 법무인을 써서 보내버리신분이 물어볼건 아닌것같은데요."
"널 건드린게 잘못이지."

나는 아까워서 손도 못대는데.

"산책?"
"아아 네. 방안에만 있으니까 답답해서요."
"같이 걸어도 될까?"

아까는 전혀 의식되지 않았는데, 어쩐지 단둘만 남게되자 미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저기..."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먼저 얘기해."
"아니에요 렌이 먼저 얘기하세요."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끝에 메구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네..?"
"그...날...무서웠지."

아...그 날...말하는거구나.

"내가 갑자기..이성을 잃었어. 미안해."

미치에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안 무서웠어요.

"무서워서 날 피해다닌거라고 생각했어."
"정말 그런거 아니에요."
"...슌이 아니라면 다행이야. 다시는 그럴일 없을거야, 약속할게."

녹음이 진 정원을 걷던 미치에다는 힐끗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잠시 머뭇거리다 메구로의 손을 붙잡아 깍지를 껴오는 미치에다에 메구로의 눈동자가 커졌다. 슌..?

"...손끼리 자꾸 부딪혀서 어쩔수없었어요."

민망한듯 헛기침을 하는 미치에다에 메구로는 결국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너 진짜 자꾸 귀여울래?

머리맡에서 부서지는 햇빛 덕분인지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잡고 있는 손이 따뜻한 덕인가. 그때였다. 미치에다의 머리 위로 그늘이 진것은. 메구로의 커다란 손이 차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 부시지않아?"

양산이라도 가지고올걸 그랬네- 제 염려만이 가득 담긴 눈동자를, 미치에다는 한참을 마주보았다.

"렌."
"응?"

불러놓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미치에다를 메구로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려주었을 뿐이다. 미치에다는 고개를 저어버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왜, 뭔데 그래 슌."
"할 말 있었는데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렸다고? 너가? 믿을수가 없는데..."
"그럴 수도 있죠."

나중에요, 아주 나중에 말해줄게요. 시간이 지나서, 렌을 놔주는게 아프지 않을것같을 때.

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다 네가 자초한거야."

이렇게 될줄은 몰랐네.

"네가 네 주제만 파악했어도 이렇게까진 안됐다고 알아?!!!"

내 주제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는데. 결박된 양 손목과 발목을 내려다보며 미치에다는 생각했다.

"가만히 있어, 허튼짓하지말고!"

최악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정도로 밑바닥일줄은 몰랐는데 그걸 기어코 보여주는구나.

쾅- 철컥- 잠금장치가 단단히 잠그어진 방 안엔 정적이 찾아왔다.

이럴줄 알았으면.... 역시...그때 단 둘이 있을때 말해주고 올걸.

....당신이 좋아져버렸다고.

지금은 입이 틀어막혀서 말해주지도 못하겠지만. 미치에다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메메밋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