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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1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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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가 그 아이를 다시 만난 건 며칠이 지난 토요일 오후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데 그날의 그 아이가 통통 발랄하게 뛰어가고 있었다. 원복을 입고 있던 며칠 전과 달리 아이는 활동이 편해 보이고 예쁜 물색의 셔츠를 입고 밑에는 역시 움직임이 편해 보이면서도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양육자가 신경 써서 입혀 놓은 듯한 옷이었다. 아이는 신나서 뛰어가다가 노부를 보고 활짝 웃으며 뛰어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안녕, 류세이."

언젠가 케이가 노부와 케이의 아들에게 붙여주고 싶다고 했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 심장이 지끈 조여왔다. 

"아저씨는 점심 먹었어요?"
"아니, 류세이는 밥 먹었니?"
"나 햄버거 먹을 거예요!"
"햄버거?"
"네, 어제 도깡 예방주사 맞을 때 안 울고 씩씩하게 잘 맞아서, 엄마가 오늘 햄버거 먹어도 된다고 했어요."

독감이 일상적인 단어가 아니라서인지 발음을 엉망진창으로 해 놓고도 햄버거를 먹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쁜지 히히 웃는 얼굴이 너무 귀여웠다. 

"주사를 맞을 때도 안 울었어?"
"네, 저는 씩씩하니까요!"
"정말 씩씩하네. 햄버거는 어디서 살 거야? 저기?"

마침 근처에 눈에 보이는 패스트푸드점이 있어서 가리키자 류세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가 햄버거 많이 먹으면 안 좋다고 평소에는 잘 못 먹게 하는데요! 오늘은 주사 잘 맞았으니까 먹어도 된댔어요. 히힛."
"그래, 가자, 아저씨가 사 줄게."
"엄마가 돈 줬어요."
"그래? 아저씨가 사 주면 안 돼? 아저씨도 햄버거 먹을 거야. 아저씨 햄버거 살 때 류세이 것도 사 줄게."

겨우 두 번째 보는 아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가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아이의 얼굴에서는 정말로 노부가 정말로 온마음으로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딘가 보이는 듯해서 한 마디라도 더 붙이고 싶었다. 아이는 노부의 말을 듣고 잠깐 고민하더니 유혹을 떨쳐내기가 힘든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엄마 거랑 내 거랑 사 가야 되니까, 엄마가 준 돈으로 사 갈게요. 대신 아저씨 햄버거 먹는 동안 같이 있어 줄게요. 엄마가 혼자 밥 먹으면 심심하대요."
"류세이는 엄마랑 같이 먹을 거야?"
"응, 엄마 방에 가서 같이 먹을 거예요. 나는 베이컨치즈버거 먹을 거고요. 엄마도 베이컨치즈버거 먹을 거예요. 엄마는 내가 먹는 거랑 똑같은 거 먹는 게 좋대요."
"엄마랑 집에서 먹을 거야?"
"아니요. 엄마 방에서요."
"엄마 방? 집이 아니야?"
"응, 엄마가 옷 만드는 방!"
"옷... 만드는?"
"응. 우리 엄마는 옷 그림도 그리고 옷도 만들어요. 되게 예쁜 옷!"
"... 엄마가... 옷을 만들어?"
"응! 이 옷도 엄마가 만들어 줬어요. 예쁘죠? 친구들이 다 부러워해요! 내가 우리 엄마가 만든 옷 제일 먼저 입으니까!"

[나중에 내가 디자이너로 유명해져서 우리 노부 꼭 호강시켜 줄게! 내가 만든 옷 우리 노부가 제일 먼저 입게 해 줄게!]

막막한 미래와 가난한 일상에 지칠 때마다 그렇게 말하며 힘을 내던 그의 아름다운 사람이 떠올라서 발 밑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탓만이 아니라 실제로 휘청거렸는지 꼬마는 급하게 호다닥 더 다가와 노부의 손을 꼭 잡았다. 

"아저씨, 아파요?"
"아니..."

노부는 제 커다란 손 안에 쏙 들어오고도 한참이나 남을 정도로 작은 아이의 손을 쥐고 아이의 동글동글 예쁜 눈을, 그가 여전히 온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닮은 예쁜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류세이 엄마 이름이 뭐야?"
"우리 엄마는... 고양이!"

... 응?





너무 엉뚱한 대답에 발 밑이 흔들리던 아득한 슬픔과 그리움까지 한순간 잊혀 버렸다. 배가 고픈지 노부를 잡아끄는 아이의 손에 이끌려 휘청휘청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가자 아이는 햄버거가 식으면 안 되니까 아저씨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문하겠다고 했다. 기다려 줄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아이는 약속한 건 지켜야 된다고 엄마가 그랬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노부는 아이에게 밀크쉐이크를 시켜주고 버거세트에 딸려 나온 감자튀김을 먹으라고 밀어 주었다. 아이는 조그만 손으로 감자튀김을 집어 케첩에 콕콕 찍어먹으며 방글방글 행복하게 웃었다. 

"류세이 엄마가 왜 고양이야?"
"아저씨! 우리 엄마 몰라요?"

류세이도 이제야 두 번째 본 마당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의 엄마를 알 리가 없는데 류세이는 노부가 자기 엄마를 모른다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외치듯이 물었다. 

"우리 엄마 왜 몰라요?"

당황스럽긴 했지만 노부가 자기 엄마를 모른다는 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감자튀김을 먹는 것도 잊고 놀란 얼굴로 보고 있어서 노부는 아이의 입에 밀크쉐이크의 스트로를 물려주며 사과했다. 이렇게 어린 아이에겐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일 텐데 자기 엄마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납득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아저씨가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몰랐어. 미안해."

사실 대학 졸업하고 1년 후에 이 지역에서 창업을 한 터라 온 지는 2년이 됐지만 '얼마 안 됐다'고 얼버무리자, 아이는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로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는 라시아또에에요. 그래서 고양이에요."

아이는 아직 어리다보니 발음이 군데군데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지만 노부가 모를 리 없는 단어였다. 오래 전 막막한 미래에 지치고 힘든 공부에 지친 케이를 힘내게 해 주기 위해서 케이와 함께 침대에 엎드려 다리를 동당거리며 나중에 케이의 브랜드를 만들면 어떤 이름을 지을까 이야기했었다. 그때, 노부가 케이에게 권했던 이름이었다. 

[La chatonne 어때요?]
[라샤또네? 그게 뭐야?]
[아기고양이란 뜻이래요. 프랑스어로 아기고양이.]
[오, 귀엽네. 그런데 왜 고양이야? 그것도 아기고양이?]
[케이가 아기고양이같아서.]
[뭐? 야!]

케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베개를 집어들고 노부를 때리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케이는 정말로 아기고양이 같았다. 호기심이 많은 것도,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마구 휘두르다가도 내킬 때만 생글생글 웃으며 애교를 부리는 것도, 제멋대로 굴기만 해도 어째서인지 사랑스럽기만 한 것도. 

[좋죠, 라샤또네?]

노부의 아기고양이는 고양이 취급이 싫은지 입술을 앙다문 채 삐죽 내밀고 노부를 노려봤지만 라샤또네가 확실히 마음에 들긴 했는지 아무말없이 노부에게 달려들어서 입을 맞췄다. 그날의 달콤한 입맞춤 끝에 입술을 깨물리기는 했다. 아기고양이라고 한 걸 그냥은 용서해줄 수 없는지 노부의 입술을 꼭 야무지게 깨문 노부의 아기고양이는 깨물었던 곳을 혀로 핥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아, 라샤또네! 내가 나중에 라샤또네를 만들면 라샤또네의 성인 남자용 옷은 꼭 우리 노부가 제일 먼저 입게 해 줄게!]
[성인 남자용? 어린이용도 만들려고요?]
[응. 나중에 우리 류세이 옷도 만들어줘야지.]
[다이키치 옷도 만들어줘요.]

케이가 노부를 닮은 아이를 낳으면 류세이라는 이름을 붙이겠다고 했을 때, 노부는 케이를 닮은 아이를 낳으면 다이키치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했었다. 아이의 인생에 언제나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케이는 그걸 기억하고 있는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우리 다이키치도 예쁜 옷 많이 만들어서 곱게 입혀줘야지. 라샤또네 옷은 우리 노부랑, 류세이랑 다이키치가 제일 먼저 입게 해 줄게. 정말로 예쁜 옷만 만들어줄게.]

노부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라샤또네...'라고 중얼거리자 류세이의 눈이 커졌다. 

"아저씨도 라시아또에 알아요?"
"응. 아기고양이란 뜻이지?"

류세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더니 자기처럼 귀엽고 작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우리 엄마 이름표예요. 이름표에 고양이도 있어요."

류세이는 명함이라는 말은 모르는지 엄마의 이름표라며 우아하고 세련됐으면서도 귀여운 고양이 로고가 찍혀 있는 연한 금빛의 명함을 보여주었다. 명함에는 'La chatonne 마치다 케이타라는 이름과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노부가 지난 6년간 그렇게 찾으려 했던 그 사람이, 노부의 케이가... 

노부는 노부를 많이 닮은, 그러나 눈만은 노부가 사랑하는 케이를 꼭 닮은 류세이를 보며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뗐다. 

"류세이... 몇 살이니?"

류세이는 입술을 귀엽게 앙다문 채로 삐죽 내밀었다. 케이가 삐질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아저씨 바보예요? 우리 반 아이들은 전부 6살이에요."

맙소사,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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