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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9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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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혹시 그거 기억나요? 12:45]
[어떤 거? 12:45]
[서른 넘어서도 싱글이면 결혼하기로 한 거. 12:45]
[기억 나. 근데 너 아직 스물아홉이잖아. 12:47]
[에. 나 다음주에 서른 돼요. 12:47]

[왜 갑자기 답이 없지? 12:51]

[케이? 뭐 예물이라도 맞추러 갔어요? 12:55]

[재주 좋으면 다음주 내 생일 전까지 애인 만들어 보던지요. 12:56]



기다란 초가 스무 개 꽂힌 생일 케익 앞에서 던진 말이었다. '내가 서른이 될 시점에 우리 둘 다 싱글이면 결혼할래요?' 마치다는 '소원 빌라고 했더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라고 핀잔을 줬지만 이내 귀찮다는듯 그러자고 대답했다. 몇 년을 잊고 지내다 문득 그 얘기가 떠오르면 피식 웃음이 나올 만큼 가벼운 얘기일 뿐이었다. 오늘 아침 갑자기 라인이 오기 전까지는.



마치다는 성가심 반 놀람 반의 마음으로 핸드폰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평화로운척 해봤지만 머리가 점점 복잡해졌다. '진심인가? 얜 무슨 10년 전에 한 얘기를 아직도 기억하는 거야. 애초에 너랑 나랑 결혼을 할 수 있겠냐고. 바보 아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무덤 파고 나오시겠네.' 마지막으로 도착한 라인을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머리를 젓는 것으로 황금 같은 일요일 오후를 다 써버렸다. '내일 학교 가기 싫다. 그래도 가야겠지... 내가 선생이니까...' 저녁도 먹지 않고 침대로 기어 들어가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어보지만 노부의 얼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애틋한 감정은 아니었고, 얄미웠다.



아침 일찍 교무실에 도착해 책상 위에 풀썩 엎드렸다. 이정도로 일찍 출근할 때는 마치다가 기분이 안 좋을 때 뿐이어서 동료 교사가 슬쩍 초콜릿을 내밀었다. 



"오늘 시험 채점하는 날이라 그래?"
"그런 거 아냐. 다른 일. 있지, 너 결혼했지?"
"응. 3년 됐어."
"7년 연애했다고 했나? 대단하네."
"대단은 뭘. 어쩌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지. 잠깐, 마치다 너 결혼 해? 결혼 할 사람 있는 거야?"
"아니야. 결혼하자는 놈은 있지만."
"놈?"
"아."



모든 걸 다 털어놓게 하는 희한한 재주가 있는 동료였다. 마치다는 상대가 남자라는 걸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니라 걱정되진 않았다.



"마치다 선생님. 점심 시간 전에 채점 다 끝나죠?"
"가능할 겁니다."
"그럼 음악 과목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음악 선생님이 오늘 갑자기 병가를 내셔서요. 음악은 문항수가 적어서 빨리 끝날 거예요."
"아... 네. 알겠습니다."



거절하는 게 어려운 마치다는 종종 다른 선생님의 일까지 떠안아야 했다. 노부에게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딱 잘라 쳐내지 못한 것도 그런 성격 탓이었다.



[수학 선생님 바빠요? 10:22]
[징그러우니까 선생님이라고 하지 마. 10:22]
[오늘 저녁 같이 먹어요 선생님. 10:22]
[안 돼. 나 오늘 바빠. 야근이야. 10:25]
[거짓말. 내가 청혼할까봐 겁먹었구나. 10:30]
[진짜야. 음악 채점해야 돼. 10:31]
[또 남의 일 부탁 받았어요? 케이는 너무 물러서 탈이라니까요. 몇 시에 끝나는데요. 데리러 갈까요? 10:35]
[나 바쁘니까 이제 그만 보내. 10:42]



수학 과목이 마지막 교시에 배정된 요일은 학생들도 마치다도 모두 힘들었다. 그런 요일은 그 수업이 끝난 후에 학생들과 함께 퇴근하는 게 제맛이지만 오늘은 아쉽게도 야근 당첨. 거절 못하는 성격을 고치고 싶은 욕망은 대학때부터 쭉 있어왔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젠 그냥 포기하고 남의 일도 나의 일! 이라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닌다.



"선생님, 수고하세요. 저 먼저 들어갈게요."
"아, 네. 내일 뵙겠습니다."



잊고 있었다. 음악 과목은 학년 구분 없이 한 명의 선생님이 가르치기 때문에 채점할 시험지도 세 배였다는 것을. '죽일까.'라고 남몰래 험한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고개를 젓고 채점에 몰두했다. 그나마 문항수가 적은 게 다행이었다. 채점을 모두 마치고 음악 선생님 자리에 시험지를 올려둔 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였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는 기분은 보통 유쾌하지 않았지만 어떨 땐 학창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축구를 좋아했고 육상부에서 꽤 잘 나갔던 학생. 자신이 수학 선생님이 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마치다 본인은 아주 어릴 때부터 예상했지만. 그야 평생 꿈이었으니까. 엄마 아빠처럼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케이!"
"... 노부?"
"빨리 와요. 나 배고파."



교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덩어리가 일어나니 길쭉해졌다. 노부는 가끔 곰 같기도 하고 기린 같기도 했다.



"내가 오지 말랬지."
"오지 말라고 안 했어요. 라인 확인해 봐요."
"차도 없는 게 뭘 데리러 온대. 이건 그냥 우리 둘 다 버스 타고 가는 거지, 이게 무슨 데리러 오는 거야. 적어도 자전거라도 끌고 오라고."
"말 많은 거 보니 배 안 고픈가 보다. 그럼 메뉴는 내가 정해도 되죠?"
"그러던가."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 자기가 싫어하는 건 피해서 고를 거란 걸 알기에 마치다는 순순히 그러라고 했다. 노부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 보다 훨씬 배려심이 넘치는 아이였다. 이제 서른이라니 더이상 아이라고 부를 수 없겠지만. 오늘따라 더 가깝게 붙어서 걷는 게 신경쓰였지만 가끔 스치는 팔뚝이 그리 싫지도 않았다. 누군가와 몸을 맞댈 만큼 가깝게 지내본 것도 다 오래전 일이었다. 4년 전 했던 마지막 연애에서 똥차에게 호되게 당한 마치다는 다시는, 평생, 절대로 연애 따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갑자기 노부의 타겟이 되었으니, 마음이 쓸데없이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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