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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1 04:57

연반ㅈㅇ 알오ㅈㅇ



- 저기는 뭔가?

소년은 모서리가 깨지고 닳은 돌 제단과 그 위에 놓여 있는 빈 접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몽땅한 초, 그리고 제단 뒤에 있는 스산해 보이는 커다란 동굴을 가리켰다. 소년을 뒤따르던 늙은 내관이 소년에게 다가왔다. 

- 저곳은 청룡을 모시는 제단입니다. 
- 청룡?
- 네, 저하.
- 그런데 왜 저렇게 더럽지?
- 사람들이 신심을 잃었기 때문이지요, 저하. 
-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 네, 저하.
- 사람들이 잊어 버린 건가?
- 네, 저하. 

소년은 제단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청룡인데 저렇게 황폐하게... 소년은 그러다 작은 품 안에서 목면을 꺼내 낡은 돌 제단 위를 깨끗하게 닦고 이번에는 품에서 푸른 비단을 하나 또 꺼냈다. 그리고 먼 길 떠나기 전 소년의 어머니가 가는 길에 먹으라고 챙겨준 작은 양갱을 하나 꺼내서 비단 천 위에 곱게 올려놓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부모가 없는 살림에 입을 줄이고자 궁에 팔았던 소녀로 뒷배가 돼 줄 친정도 마땅히 없었다. 그래서 번쩍번쩍 화려하게 빛나는 궁 안에서도 늘 이리저리 치이고 무시당하고 있었지만 어린 아들은 애지중지 키웠다. 자신을 버렸던 부모와 달리 아들에겐 안심할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가 돼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어린 아들이 험난한 궁에서 무사히 살아남게 해 주고 맛있는 걸 먹이고 좋은 걸 입히고 싶어도 현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려서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색을 밝히는 왕의 눈에 띄어 몇 번 왕과 동침하고 아이를 임신한 이후로는 방치된 상태라 권력도 돈도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먼 길을 다녀올 어린 아들을 위해서 힘들게 돈을 긁어모아서 사다 준 양갱이었다. 소년은 어머니의 애정을 생각하며 아끼고 아껴 먹던 양갱을 곱게 제단 위에 올렸다. 

- 청룡님...

소년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가만히 제단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 제 어머니를...

그러나 소년의 입술은 다시 다물렸다. 늘 궁에서 무시당하고 따돌림당하는 어머니, 궁에 배정되는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숯도 충분히 살 수 없었기 때문에 기침이 멎을 날이 없는 어머니. 하지만 고작 당과 하나 내어놓고 어머니를 지켜달라 하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청룡이 나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긴긴 세월을 살아가는 그의 앞에 처음 보는 아이가 갑자기 나타나서 고작 당과 하나 놓고 우리 어머니를 지켜달라는 둥, 건강하게 해 달라는 둥 하면 얼마나 어이가 없겠는가. 게다가 전설에 따르면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수없이 많은 순간 지켜준 신수인데 고마움을 표해주는 사람도 없이 이렇게 잊혀져 있는 게 괜히 서러웠다. 그래서 소년은 제 소원을 삼키고 가만히 절을 했다. 

- 행복하세요. 청룡님. 

청룡과 주작, 백호와 현무가 대륙에서 사라진 지 벌써 수천 년은 흘렀다고 하지만, 이미 전설 속의 존재도 아닌 저잣거리에 나도는 이야기 책에나 나오는 존재들이라고 하지만. 소년은 그 존재를 믿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궁에서 어머니의 고단한 사랑 아래서 보호만 받고 있던 소년이지만 그래서 더욱 전설 속의 존재를 믿고 싶었다. 그래서 소년은 양갱을 곱게 올린 후 제단 앞에서 조그만 머리를 숙였다. 

- 행복하세요... 

행복하시고, 부디... 행복하세요.

그리고 소년은 일행이 출발한다는 말에 서둘러 늙은 내관의 손을 잡고 일행에게 돌아갔다. 소년은 명목상으로는 현재 수윤제국과 대륙을 양분하고 있는 또 다른 제국, 풍제국의 황자와 혼인을 하게 된 소년의 배다른 형, 연국 2왕자의 혼인에 참가하기 위해 축하 사절단과 함께 동행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음인인 소년을 미리 선보이는 자리였다. 연국 왕후의 소생인 2왕자는 태자는 아니지만 풍제국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소생이라 황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풍제국 황자의 정비가 되겠지만 왕후인 2왕자의 어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세력이 약한 어미를 둔 소년은 황위와는 아주 거리가 멀고 황제의 관심도 못 받는 황자의 측비가 되거나, 풍제국 황실 어떤 늙은이의 첩이 되겠지. 소년은 고작 6살이지만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어미가 속닥속닥 소년의 외가 사람들과 나누는 걱정, 궁인들의 걱정이나 한숨을 틈틈이 주워 들었으니까. 

소년의 걱정대로 어머니의 우려대로, 소년보다 족히 50살은 더 많은 황실의 한 종친이 어린 소년을 보고 점찍었다고 들었다. 아무도 소년에게 직접 말해주지 않았지만 소년을 따라온 궁인들이 울면서 속닥속닥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그 말을 듣고도 괴롭지 않았다. 어차피 왕의 애정을 받지 못하는 한미한 집안 출산의 어머니에게서 난 소년의 미래는 한정돼 있었다. 그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을 어머니가 속상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게 슬펐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이 더 지나 소년이 10살이 되었을 때, 아직 음인으로서의 2차 발현도 하지 못했을 때, 소년에게 들어온 혼담은 풍제국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10살이 된 소년이 대전에 나가 아비인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들은 이야기는 소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왕은 얼굴을 볼 일이 별로 없었던지라 제 아들인데도 소년의 얼굴조차 낯선지 무척 흥미로운 낯으로 소년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기분좋은 목소리로 소년의 혼인 상대를 전했다. 

"풍제국에서도 너를 탐하더니... 귀엽게 생기기는 하였으나 절색인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지."

소년이 절색인지 모르겠다는 말에는 그러나 왕의 흡족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윤제국 태자의 정비로 너를 맞겠다 한다."
"... 수윤제국...입니까?"
"그래, 우리가 수윤제국과 연을 맺게 된 것은 네 덕분이구나. 가서 연국을 위해 네가 많이 노력해야 한다."
"네, 아바마마."

그 후로는 수윤제국에서 혼서와 함께 푸른 고급 비단과 새하얀 고급 비단, 진주, 청옥과 백옥, 청보석과 금광석, 황금과 은을 가득 보냈다면서 신난 궁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수윤제국과 연국은 한 번도 연이 없었고 연국은 계속 풍제국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러나 어린 아들이 풍제국 늙은이의 첩으로 가게 될 줄 알고 매일 울며 보내던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기 때문에 소년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수윤제국 태자의 비가 되는 것을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혼례를 치를 때 귀걸이를 해야 한다고 해서 생애 처음으로 귀를 뚫고 수윤제국에서 보낸 청보석 귀걸이를 걸었다. 푸른 비단으로 새 옷도 지었고 은으로 만든 관에 달린 은 사슬에는 작은 진주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허리에는 수윤제국의 상징인 청룡을 세공해 넣은 청옥 옥패가 걸렸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에 아직 덜 자라서 몸집도 작은 소년이 북쪽에 있는 수윤제국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두꺼운 비단으로 만든 무거운 옷을 입은 데다, 귀와 허리, 손목에 주렁주렁 장신구를 달고 온통 푸른 색으로 감싸고 있자 더욱 창백하고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그래도 소년은 무거운 옷을 입고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를 잔뜩 달고도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등을 펴고 서 있었다. 그 고운 옷을 입고 어머니의 궁 - 소년이 수윤제국 태자의 정비로 가게 되면서 왕은 소년의 어미에게 왕후 다음으로 좋은 궁을 내 주었다. 소년은 10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운 옷을 입은 어머니에게 곱다랗게 절을 올리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아마 소년은 눈을 감는 날까지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을 담아서 절을 올렸다.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많이 웃으시고 마음 편안히 사세요. 제 걱정은 마세요. 어머니. 

그리고 소년은 대전을 찾아가 아비인 왕에게도 절을 올렸다. 이번에도 마음 속으로 기원하기는 했다. 

우리 어머니를 잘 돌봐주세요. 전하. 우리 어머니가 울지 않게 해 주세요. 

아비의 건강을 빌지는 않았다. 수윤제국에서 소년을 태자비로 보내라고 하지 않았다면 아비는 어린 소년을 50살 이상 많은 풍제국 황실 노인네의 첩으로 보내버렸을 것이다. 4년 전 소년이 풍제국에서 열린 2왕자의 혼인 축하 사절단에 따라갔을 때 그 노인네가 소년을 보고 군침을 흘렸다는 말을 듣고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던 아비를 소년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신의 행복 따위. 

그저... 내 어머니의 안녕을 지켜주시길. 

그리고 소년은 수윤제국에서 직접 태자비를 모시러 온 호위 및 내관들과 함께 배다른 형의 혼인 축하 사절단으로 갈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화롭고 휘황찬란한 마차를 타고 북쪽 끝에 있는 머나먼 나라로 떠났다. 





수윤제국 황궁에 도착했을 때, 소년은 황궁 안에서는 황제와 황후, 태자 외에는 아무도 마차나 말을 탈 수 없다는 말에 궁의 입구에서 마차를 내렸다. 아직 작은 아이의 발로 얼마나 많이 걸어야 제가 지낼 궁이 나올지 짐작도 되지 않았지만 소년은 저가 말이 좋아 태자비지 볼모나 다름 없는 입장이라는 걸 작은 머리로도 알았기 때문에 군말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이 무거운 옷을 입고 거추장스러운 장식들을 걸치고 얼마나 걸어야 하려나. 그러나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그 불만은 곧 사라졌다. 아니, 불만 따위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소년의 눈 앞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잘 생긴 남자가 소년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태자 전하이십니다'라는 내관의 말이 귓가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시오, 나의 비. 오는 길이 많이 힘들지는 않았소?"

소년이 수윤제국에 오기 전에 미리 배운대로 허리를 숙여서 인사하려고 하자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 남자가 소년을 붙잡아서 일으켰다. 남자는 소년이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느라고 귀 앞으로 넘어온 관의 은사슬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빙긋 웃었다. 

"태자비의 궁은 내궁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걸어가기엔 너무 멀 것이오. 나의 비."

연국의 작은 궁과 비교해서 수윤제국의 황궁은 얼마나 더 클지 짐작도 안 되는데 가장 깊숙한 내궁에 있다니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소년은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폐하께 허락을 받았으니 가마를 타고 그대의 궁으로 가시오."
"... 그래도 됩니까?"

황궁 안에서 가마를 탈 수 있는 것도 황제와 황후, 태자밖에 없다고 했다. 아니면 황제가 허가한 후궁들이나 황자, 공주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묻자 태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내 품에 고이 안고 데려가 주고 싶으나, 폐하께서 혼인 전에는 자중하라 하시어서..."

참인지 농인지 모를 말에 소년의 귓볼이 붉어지자 남자는 빙긋 웃고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잡아줄 테니 가마에 오르시오, 나의 비."
"감사합니다. 전하."

소년이 남자의 부축을 받아서 남자와 함께 도착한 호사스러운 가마에 오르자, 남자는 가마의 휘장을 걷고 빙긋 웃었다. 

"그대의 여독을 풀기 위해서 혼례까지의 시간을 넉넉히 잡았는데..."
"감사합니다. 전하."
"좀 더 일찍 잡을 걸 그랬소. 나의 비가 이리 미인으로 자랐을 줄은 몰라서."

음인이라고는 하나 고작 10살의 소년이라. 희롱이나 구애에 전혀 면역이 없는 소년은 온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허둥지둥하느라고 '자랐을 줄은'이라는 말을 놓쳤다. 

"그대의 궁에 그대를 보필할 이들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으니, 어려움이 있거든 무엇이든 말하시오. 혼례 날 봅시다. 나의 아름다운 비."
"네, 전하...."





소년이 기거하게 될 태자비의 궁은 소년이 연국시절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어머니의 작은 궁을 한 10개, 아니 20개는 넣고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향긋한 향기를 두르고 있는 예쁜 화분들이 곳곳에 보기 좋게 장식돼 있고 햇살이 잘 드는 침궁은 무척 넓었는데도 아늑했다. 책 냄새가 가득한 넓은 장서관에는 수윤제국을 잘 모르는 연국 출신의 태자비를 위해 준비해 놓은 건지 수윤제국의 역사에 관한 서책도 많았으나 소년 또래의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이야기책들도 잔뜩 갖춰져 있었다. 정원은 또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지. 크기가 조금 작은 숲처럼 나무가 우거진 곳도 있었고 이름 모를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난 정원의 한쪽에는 통통한 잉어들이 헤엄쳐 다니는 넓은 못도 있었다. 그렇게 궁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태자비 궁을 탐방하던 소년은 흙먼지가 날리는 황토만 가득 펼쳐진 넓은 땅을 보고 멍하게 서 있었다. 

"이곳은 무엇인가?"
"연무장입니다. 마마."

궁인들은 소년이 태자와 혼례를 치르면 '태자비 전하'가 되겠지만 혼인 전까지는 마마라고 부를 것이라 했다. 그건 좋은데...

"내가 무예를 익혀야 하는가?"
"아닙니다. 혹시나 무예를 익히고 싶으시다면 사용하실 수 있도록 만든 곳이며, 꼭 무예를 단련하셔야 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래..."

소년의 나이에 걸맞은 이야기책도 많고, 소년이 좋아하는 역사책도 많아서 역시 수윤제국의 태자가 어떤 경로로든 소년에 대해서 알고 있어서 혼담을 넣은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걸 보면 또 태자는 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왜 자신에게 혼담을 넣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연무장이라니, 소년은 단 한 번도 무예를 익힌 적이 없는데. 태자비 궁 안에 소년이 다룰 줄 모르는 악기도 잔뜩 있었고 말이지. 어머니는 소년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고 싶어하셨지만 아비인 왕은 소년의 교육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따로 무예를 가르쳐 줄 스승도, 악기를 가르쳐 줄 스승도 찾을 수 없었다. 검이나 활, 창 혹은 악기를 구하기 힘든 건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궁의 장서관에서 빌려 온 책만 주구장창 읽으며 자란 소년은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악기를 잘 다루시는가?"
"네, 금과 피리, 퉁소를 능숙하게 다루십니다."
"음..."

나도 뭐 하나라도 배워야 하나.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가 하나도 없는 소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시 침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애써 넓은 궁을 다 돌아본 보람도 없이 궁에 적응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혼례복을 맞춘다, 혼례 절차를 익힌다, 황실 족보를 익힌다 하며 하루 12시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한 달이 지나갔다. 그 한 달간 소년은 법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을 맞아주었던 그 남자, 자신의 반려가 될 태자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고 혼례날을 맞이했다. 




#노부마치수수께끼의황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