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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5 22:55
#플로이드길들이기

마크의 방은 복잡한 미로 같았다. 메이저는 손님이 가져온 우산처럼 문 옆에 덩그러니 서 있었고.

흐트러짐 없이 제자리에 곱게 놓여 있는 물건들 위로 마크의 모습을 그려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나 몰래 그려보던 마크의 방인데도 전혀 다른 사람의 공간에 와있는 듯한 불편함이 계속 메이저를 찔렀다. 그때 골동품 가게에서 주고 싶었던 외눈박이 선장 인형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곳에는 놓을 자리가 없어 보였다. 지금 메이저가 이 곳에 있는 것처럼. 하긴, 칠이 바랜 플라스틱 인형은 이 집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지. 메이저는 편하게 앉지도 꼿꼿하게 서 있지도 못한 채로 시계만 자꾸 흘끔거렸다. 마크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있다 메이저는 깨달았다. 자신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고 마크의 방을 자유로이 볼 기회가 아마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름을. 메이저는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곳에 그가 모르던 마크의 흔적들이 있었다. 읽어도 해석하지 못하는 어려운 용어로 둘러싸인 책들과 묵직한 책상 위에 짙게 밴 시가 향기. 그리고 빳빳한 종이 위에 인쇄된 플로이드의 이름이 찍힌 서류 봉투.

이게 뭐지?

메이저는 괜히 숨죽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도 손에 땀이 고였다. 서류 봉투 안을 들춰보니 프로필이 들어 있었다. 메이저는 홀린 듯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로버트 플로이드. 스물 다섯. 미 해군 소속 무기 관제사. 대령.

공적이며 정제된 언어로 이루어져 있던 정보는 차츰 사적이고 은밀한 곳으로 퍼져갔다. 로버트의 성격과 평판, 대인관계와 취향까지 낱낱이 까발려져 있는 문장들을 보자 메이저의 가슴이 쿵쿵거렸다. 마크는 이걸 왜 봤지? 이걸 보며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완벽한 적도 완벽한 아군도 될 수 없는 인물. 그러므로 탁월하지는 않지만 적합한 인물.

메이저의 손에 잡힌 서류는 세 장이었다. 이 뒤에 뭐가 있지? 밥에 대한 또 다른 정보일지 메이저나 댄에 관한 것이 나올지 봐야 하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밥은 이미 적합한 상대라는데, 마크가 그걸 알고 있다는데 자신이 더 할 말이 있을까? 

하지만 이건 둘도 없는 기회다. 아마 마지막이 될. 허락도 없이 마크의 방에 들어와 그의 물건을 헤집고 있다니 들켰다가는 당장 맨발로 쫓겨나 다시는 얼굴조차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또 다른 메이저가 속삭였다. 마크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네가 탁월한지, 적합한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지. 물론 넌 그 무엇도 아니겠지만 말야. 메이저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 무엇도 아니라는 건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굳이 마크에게 확인받지 않더라도.

메이저는 조심스레 서류를 봉투에 다시 넣으며 생각했다. 지금 마크가 들어오면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아니, 마크에게 물어볼까? 나는 어느 쪽이냐고. 어느 쪽에 들어가기는 하냐고... 하지만 서류를 집어넣고 다시 책상에 놓는 그 순간까지도 메이저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미동조차 않았다. 메이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나갔다. 마치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조심스레.

 

잠시 후 메이저는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손님으로서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냐는 말에는 제이크와 왔다고 어물거렸다. 뒷일은 알아서 하겠지. 이제 와 누군가를 신경 쓰기에 메이저의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한참이나 창문 너머를 보고 있으니 저 멀리서 분주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크였다.

"메이저, 집 구경은 잘 했나요?"

"음... 네. 뭐어..."

"어땠나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마크의 부드러운 물음에도 메이저는 답할 말이 없어 눈만 굴렸다. 무엇이 어떻게 마음에 드냐고 한단 말인가. 그가 본 거라고는 형에 대한 합격판정 뿐이었는데. 그러나 마크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마음에 들 거에요. 마크가 있는 곳인걸요..."

그 말에 마크는 더 활짝 웃으며 메이저의 맞은 편에 앉았다. 사용인들이 다과를 내오고 차를 따른 후 물러나자 다시 사방이 조용해졌다.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메이저는 일부러 바깥을 흘끔거렸다.

"제이크가 당신을 데려다주었다면서요."

"네에..."

"그 애 말로는 당신이 먼저 연락했다던데."

여전히 다정한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인데도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메이저는 마크를 놀래켜줄 생각이었는데, 그러면 마크는 분명 도움을 주어 고맙다고 웃으며 인사했을 텐데 그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멍청이 메이저,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구나. 하지만 마크가 정말로 메이저를 그렇게 생각하면 속이 상하다 못해 타버릴지도 몰라, 메이저는 안주머니에 고이 모셔두었던 봉투를 꺼냈다.

"...집에서 발견한 거에요.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 이름이 있어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내가 도움이 되면 당신이 나를 좀 더 알맞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줄 수도 있잖아요.

"이건... 고마워요."

애매한 마크의 표정과 무덤덤한 인사. 메이저는 다시 고개를 떨궜다.

역시 메이저 메이저 플로이드는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집을 구경시켜주겠다는 마크의 제안을 뿌리치자 저녁이라도 하고 가라는 말이 돌아왔다. 제이크도 올 거라는 말에 메이저는 제이크랑 셋이 할 말도 없다며 마크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버렸고, 택시를 타고 다냐 마냐로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부루퉁한 얼굴로 마크의 차에 올라탔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받은 게 뭐 대수라고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는 자신도, 영문도 모르고 자신의 짜증에 장단을 맞춰주며 눈치를 살피는 마크도. 말없이 한참을 정원과 한적한 도로와 꽉 막히는 시내를 지나 메이저의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메이저는 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을 열었다간 어떤 끔찍한 말이 새어 나갈지 몰라서.

"편히 쉬어요."

마크는 다정하게도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저에게는 그 말이 꼭 마지막 인사 같아서... 결국 하지 않아도 될 말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우리는 좋은 친구지요... 그렇죠?"

왜 가만히 있지 못했을까. 결국 이렇게 형편없는 말로 마크를 실망하게 할 거면서.

"당신이 원한다면요."

마크는 성실히 대답했지만, 결국 눈을 맞춰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메이저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밥을 찾아갔다. 그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싶었다. 마크는 좋은 사람이니 틀림없이 넌 행복할 거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도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면 메이저에게도 좋은 일일 테니까. 그래서 대답이 없는데도 방문을 열고, 깜깜하고 막막한 어둠을 헤쳐 나가 자는 밥의 손을 잡고 읊조렸다. 나는 너랑 마크를 좋아하니까, 둘은 잘 어울리니까 꼭 행복해야 한다고. 그렇게 정신없이 고해하듯 침대맡에 주저앉아 기도하고 있을 때 메이저의 머리 위로 음성이 내려왔다.

"그게 정말 형이 원하는 거야? 이 밤에 나를 찾아올 정도로?"

메이저가 고개를 들자 고여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정말 형이 바라는 거냐고. 나랑 세러신 씨가 결혼하는 게."

"그게 맞는 거야. 바라는 게 아니라."

"그게 뭐가 중요해. 그게 원하는 거냐니까?"

그게 왜 안 중요하지... 메이저가 설명하려 해도 밥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형이 무슨 얘기하려는지 나 다 알거든? 근데 형이 말하는 말들 전부 형 짐작이잖아. 마크 세러신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말에 메이저는 고개를 저었다. 그제서야 밥이 메이저를 다그쳤다.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봤어, 그..."

메이저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다시 눈가를 문질렀다. 네가 맞대. 그 짧은 말을 하는 게 겁이 났다. 가슴에 멍이 든 것처럼 자꾸 욱신거려서. 말을 하고 나면 견딜 수 없이 아플 것 같아서.

"네가, 네가 맞는 사람이래... 그럼 나는 아닌 거잖아. 나는, 나는..."

메이저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울었다. 어디가 아픈 건지, 왜 아픈 건지도 모르고 아픈 게 슬퍼서.

 

밥은 명석하고 훌륭한 동생이었다. 진부한 위로나 토닥임 대신 그가 들고 온 건 얼음이었다. 메이저는 밥과 나란히 누워 눈에 얼음주머니를 댄 채로 얼음을 오물거렸다. 이렇게 둘이 나란히 잔 게 얼마 만인지. 그렇게 운 건 싹 까먹고 메이저는 다시 몽글몽글해진 마음으로 이불 끝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누우니까 좋다."

"그러게. 형은 이런 때 아니면 나 찾지도 않아서 말야."

"그런 게 아니라...! 너 힘들까 봐..."

"그렇게 눈치 살피는 일 적성에 안 맞는다는 거 이제 인정하지 그래? 군대도 그렇고, 지금 이것도 그렇고."

"...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메이저가 시무룩하게 항변했다. 눈치 보는 건 오래된 습관, 사실 고질병에 가까운 버릇이었다. 메이저가 눈치를 살필 때면 모두 메이저를 기특하게 여겼으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눈치 살피는 일조차 제대로 된 결과를 내진 못했지만. 메이저는 늘 그랬다. 선의로 최선을 다해도 기대만큼 돌아오지 않는 일들 투성이었다. 그래서 자꾸 욕심을 잘라내 버려도 실망은 도통 줄어들지 않았다.

"형 나 군대 간다고 했을 때 울었던 거 기억나?"

"응."

"힘들고 위험하다고. 너는 너 하고 싶은 거 하랬잖아.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아는데 하고 싶다고."

"...네 덕분에 내가 전역했잖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그게 아니라, 형은 싫어서 나왔잖아. 나는 좋아서 들어갔고.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랬다. 부모님이 나와서 뭐 하고 살래, 하긴 했어도 나오니 행복했다.

"형이 걱정하던 그 수많은 나쁜 일들, 정말 하나도 안 일어났다고."

메이저의 눈을 가리던 얼음주머니가 떨어졌다. 뿌옇던 시야가 트이자 자신을 닮은 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난 형이 단 거 좋아하는 거 고등학생 때 처음 알았어. 그러니까 말하지 않으면 몰라."

그걸 알아준 사람은 밥이 처음이었다. 사려 깊고 현명한 내 동생. 메이저는 밥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어 왔다. 집안의 기대와 의무, 버팀목까지 전부. 그래서 이번만은 형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싶을 뿐이었는데. 메이저는 망설이다 눈을 꼭 감았다.

밥, 마크를 좋아해?

소리내어 질문하지 않으면 모른다. 하지만 그 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여태껏 메이저에게 중요한 건 모든 것이 순리대로 잘 돌아가는 거였다. 메이저의 욕심 같은 게 대수일까. 메이저는 욕심을 잘 추스를 줄 알았다. 그게 스스로의 가장 큰 장점이자 미덕이라 의심치 않으며 살아왔는데.

정말 그게 맞는 걸까.

흘끔 보니 밥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메이저는 천장을 보다 소리 없이 자신의 욕심을 읊어봤다.

역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내어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정말 그런가 봐. 하지만 메이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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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미안 다들 감기조심하세오
행맨밥​​​​​
2023.10.05 23:00
ㅇㅇ
모바일
센세 오심🎉정독하고 와야지ㅠㅠㅠㅠ
[Code: cb83]
2023.10.05 23:08
ㅇㅇ
모바일
메이저 조금 답답한데 안쓰러ㅠㅠㅠㅠㅠㅠ이해가 가고 자낮이라 말은 잘 못하는데 사랑하는 마음은 커서 행동력은 있어ㅜㅋㅋㅋㅋ아 안쓰럽고 귀엽다ㅠㅠ마크쉑 무게 잡지 말고 말로 메이저 잡아ㅠㅠㅠ
[Code: cb83]
2023.10.05 23:02
ㅇㅇ
모바일
내센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c15d]
2023.10.05 23:52
ㅇㅇ
모바일
내 센세 오셨다 숨도 안 쉬고 읽음 ㅠㅠㅠㅠㅠㅠㅠ 메이저 진짜 왜 이렇게 짠하냐 ㅠㅠㅠㅠㅠㅠㅠ
[Code: 49d7]
2023.10.06 00:16
ㅇㅇ
모바일
메이저 이 바보야 말을 하라고ㅠㅠㅠㅠ
[Code: 4ed6]
2023.10.06 00:31
ㅇㅇ
모바일
미친 미친 내 센세야?? 눈을 의심했어ㅠㅠㅠ숨도 안쉬고 읽음 사랑해 센세ㅠㅠㅠㅠㅠㅠ
[Code: 8705]
2023.10.06 08:49
ㅇㅇ
센세 오셨자나!!!!!(버선발)
[Code: ce33]
2023.10.06 08:54
ㅇㅇ
메이저야 '소리내어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이 말을 기억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메이저는 자기가 부족해서 밥에게 대신 많은걸 기댄다고 생각하지만 밥은 그저 메이저는 군대가 싫으니까 나왔고 자기는 좋으니까 들어갔다고 형을 대신해서 부담을 진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원하는대로 한거니까 형이 원하는것도 물어보는거같아ㅠㅠㅠㅠㅠ 서로 다정한 동구라미들 메이저가 조금 더 용기내고 밥이 그 마음을 알아줘으면ㅠㅠ
[Code: ce33]
2023.10.06 08:55
ㅇㅇ
"우리는 좋은 친구지요... 그렇죠?"
"당신이 원한다면요."

이거 메이저가 원한다면 '아직까지는' 좋은 친구처럼 굴겠다는 마크인거같은데!!!! 마크도 좀 더 마음을 드러내라 메이저는 직접 말 안해주면 모른다고!!!
[Code: ce33]
2023.10.06 15:32
ㅇㅇ
모바일
메이저야 ㅠㅠㅠㅠㅠㅠㅠ 마크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까 귀여워보이지만 메이저 핀트 못잡고 속앓이하니까 맴찢이다....자낮해하지 말라고 ㅠㅠㅠㅠㅠㅠ
[Code: 59c1]
2023.10.06 19:39
ㅇㅇ
메이저야 그건 욕심이 아니라 진심이야ㅠㅠㅠㅠㅠㅠㅠ 제이크의 응원까지 등에 업고 마크에게 향했었던 메이저인데ㅠㅠㅠㅠㅠㅠ
[Code: 5d04]
2023.10.09 09:3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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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의 마음이 너무 순수하고 몽글몽글해서 좋아......
[Code: d196]
2023.11.05 19: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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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ㅜㅜ 행복했으면 ㅜ
[Code: 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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