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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0 22:24
#플로이드길들이기
 

메이저의 방 한쪽에는 작은 서랍장이 있었다. 로버트나 댄처럼 무엇 하나에도 열중하지 않던 메이저가 유일하게 집착하다시피 여기던 상자가 그 안에 있었다. 흰 조개껍데기와 낡은 단추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는 책도 있었다. 

그 책은 메이저가 처음으로 훔친 물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영특하던 밥이나 댄과 달리 둔하고 느린 메이저는 스스로 자신의 태생을 의심하곤 했다. 늘 의기소침하던 메이저에게 그 책은 처음으로 제가 찾아낸 구원이었다. 진짜 공주를 찾으려는 왕자에게 다가온 수많은 공주 대신 볼품없는 소녀. 왕자는 소녀를 의심하지만 소녀는 하늘 높이만큼 겹겹이 쌓인 침대 아래의 완두콩을 느끼고, 왕자는 그녀야말로 진짜 공주임에 틀림없음을 인정한다. 어린 메이저는 그 이야기에 매료되어 책을 가지고 달아났고 호되게 혼이 났지만 그 책을 놓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자신을 증명해줄 완두콩 같은 무언가를 기대했으니까.

그러나 키가 껑충 자라고 소령이 되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메이저는 메이저니까. 더 이상 완두콩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결심한 후 메이저는 모형 배에 마음을 빼앗겼다. 언제든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면서도 막상 물에 닿으면 맥없이 가라앉을 모습이 꼭 누군가와 닮았으니까.

서약서는 그 책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어린 메이저는 그 편지를 읽으며 탁월하고 적합한 미래의 메이저를 상상했다. 언젠가는, 누구에게는 나도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곤 메이저답게 보물상자에 편지를 넣어두곤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다 군인을 그만두고 나서 우연히 상자를 열어봤고 그 서약서를 발견했다.

 

"어쩌다 이런 걸 발견한 겁니까?"

"그냥... 책을 읽는데 끼워져 있었어요."

"무슨 책이었는데요?"

"...그건 기억이 안 나요."
 

메이저는 마크의 시선을 피해 찻잔에 거의 코를 박고 들이켰다. 거짓말을 하려니 자꾸 목이 타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당장이라도 마크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아까 마크에게 버럭버럭 화를 내던 게 벌써 아득하게 느껴졌다. 당장 지금도 마크가 서약서 내용을 짚어가며 당신은 정말 스스로가 플로이드 중에서 가장 탁월하고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따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아마 자신은 아무 대답도 못할 테지. 어떻게든 마크의 입에서 그 물음이 나오는 것만은 막아야 해. 메이저는 필사적으로 마크의 흥미를 끌 만한 말을 찾아 헤맸다.
 

"한 대라도 늦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렇죠?"

"무슨 말이죠, 그게?"
 

마크는 여전히 메이저를 뚫어질 듯이 보고 있었다. 꼭 물건의 흠을 잡아내려는 상인처럼. 그렇다면 내 흠결이 드러나기 전에 당장이라도 마크를 내쫓아야 할까? 목이 졸리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만약 마크가 제가 15대가 아니었다면요. 지금 이 서약서가 아예 무효가 되는 거니까요. 어, 그러니까... 그러면 아예 혼인 자체가 필요 없는 일이구, 또..."

"그런 일은 없습니다. 메이저의 말마따나 선대 간의 귀중한 약속이니까요."

"그, 그렇죠...?"

"그렇지만 이 문서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있겠군요."
 

마크의 손으로 넘어간 문서가 고이 접혀 그의 재킷 안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어어? 당황한 메이저가 손을 뻗다 그의 가슴 앞에서 맥없이 멈춰서자 마크가 빙긋 웃었다.
 

"이 서류는 내가 책임지고 안전하게 보관하겠습니다. 나를 믿죠, 메이저?"

"어어? 네에. 믿...죠. 믿기는 한데..."

"그럼 됐습니다. 세러신에서도 이 서류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어요. 이건 세러신의 약속이기도 하니까."
 

틀린 말도 아니니 메이저도 달리 항변할 말이 없었다. 마크는 그 길로 남은 차들에 눈길도 주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메이저는 마크의 잔향이 남은 자리 옆에 앉아 그가 마시지 않은 차를 하나씩 마시며 고민했다. 탁월하지도 적합하지도 않은 내가 이번에도 잘못된 길은 선택한 건 아닐까?

텅 비어버린 찻잔 어디에도 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 종이를 홀랑 넘겼다고?"

"마크가 설마, 그 종이에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

"형은 그 사람을 몰라. 아니, 아주 단단히 잘못 알고 있어. 마크 세러신이 자기네 집에 흠결이 되는 증거물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작자야?"
 

큰 소리로 조목조목 마크의 악행을 나열하던 밥의 목소리가 메이저의 얼굴을 보자마자 뚝 끊겼다. 메이저는 아주 커다란 잘못이라도 한 양 떨구고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이나 지난 어른인데도 아주 어렸을 때 단 한 문제도 맞지 않았던 시험지를 들고 왔던 아이가 겹쳐 보였다.
 

"미안해."

"형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이게 다 마크 세러신이..."

"내가 잊어버렸어.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잊어버렸잖아. 그래서 우리 가족한테 나쁜 일이 일어나면 전부 나 때문이니까..."
 

로버트는 이런 순간이 싫었다. 짜증이 머리 끝까지 차오르고 탓할 사람도 눈앞에 있는데 아무 말도 못 하는 바로 지금 같은 순간. 아무리 제가 마크 세러신을 비난해봤자 그 모든 화살은 메이저에게로 향하겠지. 답잖게 좋은 사람인 척 할 때 넘기지 말고 무슨 꿍꿍인지 알아냈어야 했다. 밥은 홀로 끙끙거리는 메이저를 지나치며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액정을 눌렀다.
 

- 이 시간에 러브콜이라니 기쁘긴 한데... 무슨 일이야, 베이비?

끝까지 열받게 하네. 밥이 씩씩거리며 다시 액정을 두들기자 곧이어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저의 단점은 쉽게 자신을 비난하거나 믿어버리는 것이었다. 장점은, 그 어떤 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메이저의 울적함이나 발랄함 따위는 옆에서 누군가 계속 불어넣지만 않는다면 고작해야 사흘을 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메이저가 마크를 기다린 1주일은 메이저에게 몇 배로 길게 다가왔다. 메이저는 멈춘 것처럼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붙잡고 있다 의미 없이 상자를 뒤지고, 진짜로 손에서 빠져나간 게 무엇일까 고민하며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밥은 절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언제는 그러지 않았던가? 저 안에 뭔가 있을지도 몰라. 메이저의 두 손이 조급하게 다시 상자를 헤집었다. 역시 모든 게 엉망이다. 조약돌 사이에 구겨져 모서리만 간신히 튀어나온 저 봉투처럼.

어?

메이저는 봉투를 낚아채 빠르게 훑었다. 흐려진 잉크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익숙한 글자들이 눈에 박혀왔다. 마일스 플로이드가, 첫스키 세러신에게.

그 순간 메이저는 벌떡 일어났다. 고작 봉투가 뭐라고 가슴이 튀어 오를 듯 팔딱거렸다. 이게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마크를 찾으러 가야겠다. 낡은 책을 훔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던 잡동사니를 움켜쥐었던 그때처럼 강렬한 욕망이 메이저를 흔들었다.

그러니 그게 메이저에게 나쁜 행동이 될지라도,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하더라도 놓을 수 없었다. 메이저는 잠시 발을 구르다 조심스럽게 핸드폰 액정을 꾹꾹 눌렀다. 이 정도 모험이야 괜찮을 거다. 또 다행히 메이저에게는 친구가 있으니까.

- 우리 친구 맞죠? 저 좀 도와주실래요?

답장이 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메이저는 비장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내가 어디서든 사랑받는 남자긴 하지만, 두 플로이드가 이렇게나 한꺼번에 좋아하는 건 좀 부담스러운데."
 

그때처럼 차를 끌고 온 제이크 세러신은 근무 중에 몰래 나온 거라며 온갖 생색을 냈다. 메이저는 집 주소만 알려주면 되는데, 라는 말을 꾹 삼키고 말끝마다 로봇처럼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이런 말에도 고맙다고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결국 메이저의 입에서 투덜거림이 삐져나왔다.
 

"... 그렇지만! 우린 친구잖아요."

"난 친구 같은 거 안 키워요. 키운다면 베이비 정도가 좋지."
 

그래도 비아냥거리는 것치곤 제이크 세러신의 기분이 꽤 유쾌해 보였다. 메이저도 그럴싸한 말로 맞받아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그런 말주변은 플로이드 삼 형제에게는 태생적으로 탑재되지 않은 능력치였다. 다행히 제이크 세러신 역시 메이저에게 별다른 기대가 없었는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이거 베이비, 그러니까 밥한테 걸리면 당신이랑 나, 둘 다 엿되는 겁니다. 그러니 입 딱 다물고 있어요."

"밥이 이런 거까지 알까요?"

"모를 리가 있겠어요? 뭐, 신경 쓰지 말아요. 중요한 건 그쪽 일이 아니라 당신이랑 형 일이니까. 그게 해결되면 돼요. 그러면 베이비도 별수가 없겠지."

"이 일이 해결되는 게 세러신 씨에게도 좋은 일인가요?"
 

메이저는 약간의 희망을 담아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말이 많던 제이크 세러신은 그 말에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손해죠. 나는 베이비랑 한 약속을 어기게 되고, 우리 형은 통제되지 않는 변인을 질색하니까. 당신은 이를테면 폭탄이고 나는폭탄 운반자가 되는 겁니다."
 

폭탄이라... 그런 말 많이 들었다. 이런 순간에 또 들을 줄은 몰랐지만.
 

"기죽지 마요. 난 끝내주는 폭탄 운반자니까."

"그러면 왜 제 부탁을 들어주는 건데요?"
 

결국 참지 못하고 뾰족한 말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그러게. 왜 나를 도와줄까. 나는 친구도 아니고 폭탄일 뿐인데.
 

"나는 더럽게 싸워서라도 원하는 건 전부 내 손에 움켜쥐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당신도 그렇잖아요."
 

굳이 따지자면 우린 동류입니다. 당신도 알고 있으니 나한테 연락을 했겠죠. 제이크 세러신이 유쾌하게 대꾸했다. 메이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서랍 안에 처박아둔 상자를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지럽던 바깥 풍경이 차츰 정돈되며 세러신 저택이 눈앞에 보였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안에 들어가면 마크 세러신의 방을 알려줄 거에요. 뒤지든지 엎던지 해서 원하는 걸 쟁취해요."
 

세러신이 휘파람을 불었다. 어쩐지 그 말에 용기가 나는 것도 같았다. 메이저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동류의 응원이었다. 메이저는 결연한 마음으로 눈인사를 한 후 문을 열었다.

이 곳에 메이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있을 터였다.

2023.08.30 23:08
ㅇㅇ
모바일
내센세 오셨어..!!!
[Code: bc0a]
2023.08.30 23:14
ㅇㅇ
ㅁㅊ 내 센세 오셨다! 센세 기다리고 있었어요!!
[Code: d0d1]
2023.08.30 23:21
ㅇㅇ
모바일
할 내센세가 오셨다!!!!!! 얼마만의 마크메이저냐ㅠㅠㅠㅠ 센세 계속계속 보고싳어요ㅠㅠㅠㅠㅠ
[Code: d810]
2023.08.31 00:21
ㅇㅇ
모바일
행맨이랑 메이저가 점점 은근 잘맞아가는것 같네ㅋㅋ 행맨은 더럽게 싸워서라도 얻고마는 파이트어글리, 메이저는 나쁜 행동이 될지라도,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하더라도 놓을 수 없었던 훔친 책 같은 마음 행맨 말대로 이렇게보면 둘은 동류가 맞다ㅋㅋㅋ 메이저야 쟁취하자..!! 마크는 이미 마음을 내놓고있지만ㅋㅋㅋㅋ 첫스키와 마일스의 편지는 뭘까..
[Code: 7403]
2023.08.31 00:39
ㅇㅇ
모바일
끄아아악 내센세 등장
하 너무 재밌다 메이저 진짜 천방지축인듯 예측불가 너무 흥미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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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01:56
ㅇㅇ
모바일
미미미띤 내센세 오신거 실화냐고ㅠㅠㅠㅠㅠㅠ메이저 은근히 고단수라니까?ㅋㅋ행맨을 택시기사로 써먹는것좀 보라고!진심 어디로 틜지몰라서 더 사랑스럽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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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02:36
ㅇㅇ
책과 완두콩, 모형배 다 메이저가 좋아하는것들인데 그 끝은 메이저의 가라앉아버린 기대감만 남아있어서 맴찢ㅠㅠㅠㅠㅠㅠ 서약서는 어린 메이저가 생각했던 미래를 가져다줬으면ㅠㅠㅠㅠ 시무룩하게 멍하게 마크를 기다리던 메이저가 단서가 될지 모르는, 마크를 만날 수 있는 수단인 편지를 들고 친구 행맨ㅋㅋㅋ의 도움으로 마크 찾아가는거 왜케 커엽냐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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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09:58
ㅇㅇ
와 센세다 센세!!!! 메이저랑 행맨이 이렇게 또 손을 잡는구나 메이저 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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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09:58
ㅇㅇ
"난 친구 같은 거 안 키워요. 키운다면 베이비 정도가 좋지."
"기죽지 마요. 난 끝내주는 폭탄 운반자니까."
"나는 더럽게 싸워서라도 원하는 건 전부 내 손에 움켜쥐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당신도 그렇잖아요."

행맨 대사 하나하나 진짜 주옥같다 캐해미쳤어 내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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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12: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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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가 화낸건 그런 이유가 아니야 메이저야ㅠㅜㅜㅠㅜ 메이저 안쓰러운데 커여워ㅋㅋㅋ
[Code: 8da8]
2023.08.31 12: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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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죽지 마요. 난 끝내주는 폭탄 운반자니까."
"나는 더럽게 싸워서라도 원하는 건 전부 내 손에 움켜쥐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당신도 그렇잖아요."
뒤지든지 엎던지 해서 원하는 걸 쟁취해요."

행맨식 위로와 응원 개좋음ㅋㅋㅋㅋ 근데 그게 메이저에게도 용기가된게 너무 좋아ㅋㅋㅋㅋ 근데 밥한테 과연 안들킬수있을까..?ㅋㅋㅋㅋㅋ
[Code: 8da8]
2023.09.01 20:00
ㅇㅇ
이 곳에 메이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있을 터였다.

그래 메이저야 동류의 말대로 원하는걸 쟁취해보자고
[Code: 4ff7]
2023.09.09 12: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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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를 기다린다......!
[Code: 66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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