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우느라 잠을 설치고, 새벽 네시나 되어서야 겨우 잠든 터라 눈을 뜨니 열한시였다. 그래도 눈 뜨니 한 시가 아닌 게 어딘가 싶어 겨우 찬물에 부은 얼굴을 가라앉히며 나갈 채비를 했다. 책상 위 업무용 핸드폰을 들고 나가려다가, 인수인계까지 마친 회사 전화를 왜 받나 싶어 두고 나왔다. 충전기에만 겨우 꽂아놓고 나오면서 화창한 날씨에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날씨도 별로고 추운 뉴욕에서 버티느라 고생했다, 내 자신. 하며 허니는 스스로 가슴께를 토닥거렸다. 이제 그만 울자. 영국놈 하나에 하루 잠을 설치면 그 밤에 다크서클 지우는 데에는 3일을 푹 자도 모자라다.
"... 눈이 왜 이렇게 빨개요?"
"어제, 휴일이라고 넷플릭스 좀 몰아봤더니... 잠이 좀 모자랐나봐요. 점심 먹고 들어가서 또 자면 돼요."
"넷플릭스를 뭐 얼마나 봤길래... 일단 점심 먹으러 가요."
테일러는 흘낏 허니를 내려다봤다. 못 자서 충혈된 눈이 아닌 거 같은데, 본인이 아니라니까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에서 살았다는 허니가 끌고 온 맛집에 앉아 메뉴를 고르는 허니를 쳐다봤다. 매운 거 잘먹는다는 말에 화색이 돌고, 해산물은 알러지가 있다는 말에 자기도 알러지 있다며 반가워하고... 뭔가 이 여자랑 결혼할 거 같다는, 그런 직감이 들었다.
"대학부터 LA에 있었으면, 한번쯤 마주칠 만도 한데. 미남은 또 놓치지 않는단 말이에요. 학교도 심지어 같은데."
"그래봤자 내가 대학 졸업반일 때 허니는 입학했잖아요."
"그러네. 아, 한 4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허니가 4년 일찍 태어났으면 뭐 어쩌려구요."
"보나마나 테일러 쫓아다녔겠죠. 교양 쓸데없이 따라들으면서 이제 죽어나고, 또 막상 용기가 안 나서 말은 못 시켜서 앞에서 알짱거리고... 그런데 아마 백퍼센트 예쁘게 입은 날은 눈에 안 띄고 거지같이 입은 날 마주쳐서 대화까지 했을 거예요. 나는 그런 데 운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요?"
"그러다가 이제 테일러 졸업하면 또 말이라도 몇번 시켜볼걸 하면서 뒤에서 울고- 아무튼, 진짜 처절한 짝사랑 했을 거예요."
"웬만하면 말 안하려고 했는데... 허니도 내 얼굴은 맘에 드나 보네요?"
"엥... 테일러는 본인 얼굴이 맘에 안 들어요? 누가 별로래요?"
"아뇨. 그것보단 허니가 영 심드렁해서, 내 외관이 취향이 아닌가보다 했죠."
"그럴 리가, 아니... 심드렁한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에요."
"맘에 들면 말 못 건다고 방금 그랬잖아요. 나한테는 너무 말 잘 거니까."
"그건... 실연의 아픔을 아직 극복하지 못해서 그래요. 그리고, 원래 테일러같은 미남은 나한테 말 잘 안 건다고요. 지금 이게 특이케이스여서 그렇지."
테일러는 웅얼거리며 대답하는 허니를 보며 도대체 전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단단한 벽을 뚫고 연애를 했지 싶었다. 전부터 자존감이 낮은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냥 누가 다가오는 걸 경계하는 거 같았다. 그 벽을 뚫어서 자기를 다 내주게 만들고나서 내팽개친 그 작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허니,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진짜 웃기게 들릴 거라는 거 아는데요, 웃지 말고 들어볼래요?"
듣기 전에 입 안에 우물거리고 있는 걸 삼키겠다는 뜻인지 뭐 얼마 넣지도 않았는데 빵빵해진 볼을 허니가 가리켰다. 끄덕거리자 물까지 삼키고선 말해보라는 듯 갸웃거리는 게 꼭 강아지 같기도 해서 테일러는 미소지었다. 진짜 신기한 여자야. 만난지 며칠 안된 사람이 저렇게 야무지게 먹는 걸 보고 잘 먹네, 더 먹여야지 하는 생각밖에 안 들 수가 있나?
"난 우리가 결혼할 거 같거든요."
"... 예?"
"뭐 둘이서 하는 거니까 확률은 반반인데요. 원래 긴 연애 끝나고 나서 만난 사람이랑 보통 결혼한대요. 그냥 그럴 거 같은 예감이 든다고요."
"웃기기보다는 되게 수상하고 약간 가스라이팅 같이 들리는데요."
"요즘은 온평생을 헌신하겠다는 가스라이팅도 있어요?"
"... 테일러 진짜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에요."
"나한테는 허니도 그래요."
저를 수상한 사람 바라보듯이 뜯어보다가 진짜 이상해. 하며 부끄러운지 음식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상대의 정수리만 보다 끝나는 식사가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만 쳐다보고 밥이나 먹어요, 하며 흘겨보는 새초롬한 눈꼬리가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도. 저가 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계산서를 들고 뛰듯 빠르게 걸어가는 발걸음을 쫓다보니 고작 한시간 남짓인 점심시간이 그새 끝나가고 있었다.
간호사들 것도 챙겨가라면서 냅다 커피와 쿠키를 결제해서 제 손에 캐리어를 쥐어주면서 스친 손이 제 것보다 훨씬 작아서 꼭 쥐어보고 싶은 걸 참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제게 손을 흔들며 끝내는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까지 입구에서 밍기적거렸다. 이미 다 봤다는 듯 데스크에서 저를 보고 웃는 간호사들에게 간식들을 쥐어주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테잨너붕붕
#테잨뻔한롬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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