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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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섭은 새로운 집의 이 조그만 발코니가 제일 만족스러웠음. 우성과 같이 있으려면 딱 붙어 서 있어야 될 정도로 많이 좁은 크기였지만. 아주 작은 화분 정도는 갖다놔도 괜찮을지도. 태섭이 새로운 창 밖 풍경을 구경하는 동안, 아라가 보내 준 한국가요 테이프가 재생되는 소리와 그걸 따라부르는 우성의 목소리가 등 뒤의 집 안에서 들려왔음. 정말 너무 안 어울리고 너무 좋다. 정우성이랑 나같네. 태섭이 난간에 몸을 숙여 기대면서 킬킬 웃어.
잠시, 달력을 한 장 떼기 전으로 가볼까. 지금보다 좀 더 더웠을 때. 이 일도 저 일도 어영부영 해결됐던 그 때로. 해결이라는 표현이 적당하진 않다 싶지만, 아무튼 고민거리는 아니게 됐으니.
우선 태섭은 그 재수없는 놈이랑 화해를 했음. '조까'라는 표정을 하고 'Sorry'라고 말했지. 원래 친절했던 놈이면 나이스한 척에 목숨 거는 부류일거라며, 쪼잔한 이미지 되기 싫어서라도 같이 사과할 거라는 우성의 얘기가 있었거든. 그리고 우습게도 그 말이 맞더라고. 우성이 지내 온 미국에서의 시간을 설명해주는 듯한 결과에 마음이 불쾌했지만. 뭐 됐다, 네가 지랄한 덕에 내가 연애를 시작한 걸로 치자. 태섭은 머리를 단순하게 돌리기로 해.
그리고 방금 말한 저...마찬가지로 어영부영 시작한 연애는 적응이 좀 필요하긴 했지.
통화량이 늘어난 거 외에 변한 게 뭐 있나? 싶을 만큼 막상 애인이라는 실감이 없다가도,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 중인 걸 어떻게 안 건지 우성이 손을잡아오고 품에 안으려들고 입을 맞대와서. 태섭인 아 나 진짜 얘랑 사귀네. 한 동안 이런 생각을 하는 바보같은 상태였었음. 그러면서도 장소 좀 가리라며 우성을 착실하게 때려댔지만.
그러니까, 태섭인 좋게 말하면 서툴렀고, 나쁘게 말하면 무신경한 상태였지. 그래서 술약속이 있으니 갔다와서 다시 전화주겠다던 사람과 새벽까지 연락이 안 된다는 이유로 불안해하다 결국 차키를 챙길 애인의 입장 같은 건 몰랐을거야. 그래서 태섭이 숙취와 함께 눈을 뜨고 침대에 같이 누워 있는 우성을 봤을 땐 아 꿈이군. 했을 거임. 와 뭐지, 나 꿈 꿀 만큼 얘를 좋아하나? 말도 안 된다.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우성의 얼굴을 꾹꾹 누르다가, 그 덕에 같이 깬 우성이 굿모닝...하면서 태섭을 끌어안고 나서야 술도 잠도 다 깼지. 반대편 침대에서 태평하게 초코바를 뜯어먹고 있는(어제 술자리의 일행이었던)룸메이트에게 뭔 상황이냐고 쏘아붙였더니 그 핸섬 아시안이 술떡 된 너 옮기는 거 도와줬다, 하지 뭐겠어. 옮기는 거 도와줬다고 내 옆에 눕혀놓기까지 했냐며 기가 차서 따지는데 눈치도 없는 우성이 몸을 일으키더니 뒤에서 안으면서 기대왔지. 그 꼴을 보더니 룸메이트가 쏘리, 하면서 말을 고쳤음. 핸섬 아시안 아니고, 핸섬 허즈번드. 결국 베개를 던졌더니 씻으러 가겠다며 튀어버렸음.
그렇게 룸메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는 뭐, 당연하게 말다툼이 났음. 오늘 연습 있다는 놈이 왜 여기있냐, 그건 지금 가면 맞게 갈 수 있다, 넌 왜 자꾸 동네 슈퍼 가듯이 여길 오냐 제정신이냐, 전화한다 해놓고 어긴 건 넌데 왜 네가 화를 내냐, 됐다 그냥 빨리 꺼져라, 말을 왜 그렇게 하냐, 어쩌구저쩌구. 태섭은 입장으로는 애가 왜 자꾸 컨디션 망칠 일을 스스로 벌이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단 말이야.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는 것도, 태섭은 불편해.
"걱정되서 온 사람한테 왜 이래? 미국 놈들 술자리가 얼마나 지저분한데, ...뭐 너희는 귀엽게 논 것 같지만."
"그러니까 네가 헛짓한거라잖아..."
"나 온 게 그렇게 싫어?"
"그래 존나 싫다, 이 자식아."
"넌 왜 이렇게 싫은 게 많아. 내가 너 찾아오는 것도 싫어, 밖에서 손 잡는 것도 싫어, 안는 것도 싫어."
"......불만이 많으셨나봐요?"
"나도 싫은 거 진짜 많은데 들어볼래?"
그 말에 태섭은 선뜻 대답이 나가질 않았지. 본인에 대한 우성의 불만. 싫었던 점. 갑자기 듣겠냐고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안 듣고싶었어. 갑자기 확 올라오는 불안감에 이불 위에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데, 우성이 그냥 말을 이었지.
매번 적당히 중간에서 만나는 것도 싫고, 너 찾아올 때마다 먼 데를 왜 오냐고 혼나는 것도 싫고, 이렇게 연락 안 되는 걸로 불안해지는 것도 싫어. 전화 걸었을 때 다른 놈이 받는 건 더 싫고, 너랑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건 진짜 최악이야. 나는 널 데려다주는 게 아니라, 그냥 널 데리고 같이 가고 싶어. 그러니까,
"우리 같이 살자."
..... .....하하. 우성의 말에 잠시 고장난 것처럼 멈춰 있던 태섭의 입에서 웃음 비슷한 뭔가가 툭 터졌어. 이게, 같이 살까? 내지는 어때? 같은 물음표 따윈 하나도 없는 문장 선택이 너무 정우성다워서 기가 차는 웃음인지. 아니면...안도해서 나오는 웃음인지. 얘 왜 이렇게 사람 바보 만들지 자꾸? 그러거나 말거나, 우성은 거의 엎드리듯이 해서 태섭을 끌어안고는 빨리, 나랑 산다고 해. 이러고나 있어. 이번에도, 어김없이, 또! 귀며 얼굴이며 화끈화끈했음.
"너 진짜 존나 짜증난다..."
"나도 너 짜증나."
다시 원래의 달력으로 오면, 가요 테이프를 따라 흥얼거리는 우성의 목소리가 점점 태섭에게 가까워지는 중이야. 어느새 발코니로 나온 우성이 태섭의 허리를 안고 짜잔 여기 봐, 하면서 팔을 쭉 뻗어. 시선을 따라가니 보인 건 언제 또 뜯었는지 모를 카메라였고. 곧바로 볼에 닿는 입술의 촉감과 함께, 찰칵 소리. 목적은 그게 다였는지 우성은 다시 흥얼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마저 짐 정리를 해. 정우성이 웬일로.
태섭이 그런 우성을 흘긋 봤다가. 괜히 발코니 난간을 톡톡 치다가. 따라 들어가서 우성을 안으면, 우성이 드디어 농땡이 끝났냐고 물어서 매를 한 번 벌고. 잘못했어, 라는 말은 뽀뽀로 대신해.
*
거실에서 풍겨오는 남은 피자조각의 느끼한 냄새. 대신 좀 더 가까운 코 끝에선 이불과 티셔츠의 포근한 향. 옆집에서 벽을 넘어 들려오는 음질이 좋지 않은 팝송. 현관 너머의 다양한 발소리들. 그것들 사이에 섞이는 잡지가 팔락팔락 넘어가는 소리. 우성이 혼자 살았을 때도 흔하게 겪은 너무나 조화롭지 않은 엉망진창인 일상의 부분이었지만, 우성은 이제 이것들이 거슬리지 않았음. 겨우 같이 누워있는 사람 하나 늘었다고. 저 많은 게.
진짜 신기하다, 역시 나 널 엄청 좋아하나봐. 우성이 이미 안고 있던 태섭을 더 끌어안으려고 뒤척거렸더니, 잡지를 보던 태섭이 아 방해-. 불평하면서 발로 우성을 꾹꾹 밀어냈음. 당연히 안 밀려났지만. 전혀 흔들림 없이, 잠시 찡그려졌다 풀어지는 태섭의 눈썹 구경이나 했어.
태섭과 사귀게 된 이후에 우성은 간만에 명헌과 통화를 한 적이 있었음.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었거든. 편지로는 써서 보내봤자 이 형은 아마 무시할테니까. 반응이 듣고싶었단 말이야. 형, 형이 틀렸어요. 내가 진짜진짜 좋아하는 애도 날 좋아해요. 날 좋아한다니까요. 정작 명헌은 저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에도 없었기 때문에, 형이 그랬잖아요. 안 좋아할 거라고! 하며 종알대는 우성의 수다를 애써 인내하며 들어주다 결국 뾰오오오옹....하는 풍선 바람 빠지는 듯한 반응을 보이면서, 걔는 널 왜 좋아하는지 의문이다뿅. 하더니 같이 자취 중인 동오에게 통화를 넘겨버렸었지.
왜 좋아하는지라. 사람들은 정말 곧잘 이유를 찾곤 해. 우성은 이유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냐, 하는 쪽이라 명헌의 말에 근심하진 않았었지만. 갑자기 오늘따라 물어보고 싶어지긴 하네. 아마 낯뜨거운 거에 면역 없는 태섭은 대답해주지 않겠지. 갑자기 뭐냐고 그러면, 마침 옆집에서 들리는 노래가 사랑 노래라서 그런 걸로 해볼까. 태섭아, 나 왜 좋아해. 물어본 우성에게 태섭은 역시나 예상과 너무 똑같게, 갑자기? 이런 대답이나 해.
"나는 너 좋아하는 이유 진짜 많거든."
"오~ 이번엔 좋아하는 게 많아. 오냐, 읊어봐라."
"진짜 한다?"
"......아니다, 다물자."
"네가 맞춰보는 것도 괜찮겠다."
"아, 뭘 맞추래 또... 많다는 거 다 뻥 아냐??"
뭘 말하려나 궁금해서 뭐라도 하나 들어보고 싶었던 우성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 사이좋게 내일로 미룬 거실의 먹고 남은 난장판 청소를 걸었음. 효과는 좋았지. 많이 혹한 태섭이 그제야 잡지를 내려놓고 생각해보는 듯이 흐음...하면서 천장을 노려봤거든. 꽤 고민하는가 싶더니.
"근데...내가 말했는데."
"응?"
"...아니면 어떡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러면....와, 개쪽....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그럼 나는 또 빡치고, 너 때리고....ㅋㅋㅋㅋㅋ"
"나 좀ㅋㅋㅋ그만 때려ㅋㅋㅋㅋㅋ"
그만 좀 때리라는 우성의 말이 뭐가 또 그리 웃겼는지 태섭이 더 크게 웃었음. 분명 우성이 의도한 건 이런 대화가 아니었을텐데, 같이 낄낄대느라 아마 순간 까먹었나봐. 다 웃은 우성이 태섭의 어깨에 머리를 치대면서, 정말 생각도 못 한 대답이다...송태섭 진짜 웃겨...너 웃겨서 좋아... 저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려버렸고. 그걸 들은 태섭은 저를 안고 있는 우성의 팔을 찰싹찰싹 치면서.
"야, 정답정답. 웃겨서."
".... ......?? 와, 잠깐만. 이건 무효지!"
낼름 알차게 주워먹었음. 기회를 놓치지 않는 송태섭... 우성의 항의을 무시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인지라, 그저 청소를 부려먹을 수 있게 됨을 기뻐하기나 했지. 더 듣지도 않겠다는 듯이 이제 자자며 이불도 끌어당겨 덮기까지 했음. 하, 이런 억울한 상황에 정우성이 당근도 없이 그냥 잘 순 없다.
"안 돼...억울해서 못 자...굿나잇키스 해줘야 돼."
"잘 자라."
"빨리이, 빨리빨리."
"아, 귀찮은 새끼 증말."
제 입술을 톡톡 치며 요구하는 우성을 무시하고 태섭은 대충 가까운 이마에 쪽 뽀뽀해주고 말지 뭐겠어. 아니이 입에 해줘어-. 답답해하며 졸라대는 우성을 보고 태섭은 또 키득거리면서 웃고 있음. 태섭은 항상 이런 식이었어. 매번 귀찮다고 투덜대는데, 정말 귀찮으면 바로 원하는 걸 들어주면 끝날 것을 꼭 우성을 한 번 이상은 놀려먹어서 조르게 만들었음. 그러면 즐겁다는 듯이 웃고. 사실 귀찮다는 말 다 거짓말인 거지.
"어우, 알겠어. 와봐."
애초에 해줄 생각이면서, 해주고 싶었으면서. 익숙하게 입술을 꾹 눌렀다 떨어진 다음, 됐냐? 하고 묻는 거에 부족하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 못 이기는 척 또 키스해줄 거면서. 역시 이유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 없지. 우성은 오늘도 태섭의 품에 얼굴을 묻고 안겨들면서 히죽 웃었음.
태섭아. 너도 날 좋아한다는 게 느껴질때마다, 마음이 들떠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내가 이런 말 하면 너는 또 빨개지면서 안 그런 척 얼굴을 가리려고 애를 쓸까. 그런 것마저 날 좋아한다는 티를 내는 건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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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일 짜증난 건 태섭이 룸메였을텐데
슬램덩크 우성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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